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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조선의용군의 입북 2
작성일 : 17-12-15 17:09     조회 : 315     추천 : 0     분량 : 9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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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으로 접어들어 남북 양쪽에서는 단독정부가 들어설 준비가 진행되면서 분단은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아예 한국에 대하여 무식했다. 38선 이남의 일본군의 항복을 받으러 온 미군정사령관 존 R. 하지 중장은 북쪽의 소련군보다 늦은 45년 9월 8일에야 인천에 도착하여 다음날(9. 9) 오후 4시 정각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로부터 항복선언서를 받는다.

  아베는 일본 이시카와 현(石川縣)에서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조선인학살의 계엄사령부 참모장이었다는 악연이 있다. 33년에 육군대장으로 승진하였고 대만군 사령관이 되었다. 36년에 예편하고, 44년에 내각수상이 되었다가 사임한 직후 일본육군이 세운 중국의 왕징웨이(汪精衛) 괴뢰정권의 특명전권대사로 파견되었다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의 후임으로 9대 조선 총독이 된다. 조선총독은 일본내각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고 위로 천황만이 있는 천황직할이었다. 44년은 일본이 단말마적 발악을 하고 있을 때이기 때문에 그는 취임 하자마자 전쟁물자를 조달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으로 인력과 물자를 착취하여 일본으로 운송하였다. 그는 징병이며 징용 또는 근로보국대의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수색하였으며 여자 정신대(挺身隊) 근무령을 공포하여 만 12세에서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대근무령을 발급하고 불응하는 자는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체포 구금하였다. 말은 12세에서 40세 까지의 여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15세에서 20세까지의 꽃다운 소녀들 20여만 명을 잡아다 일본군 성노예의 위안부로 삼았다. 심지어는 노상에 걸어가는 소녀를 강제로 잡아다가 추업중인(醜業中人)에게 매도하기도 하였다. 한국소녀들은 저 멀리 사이판,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대만 등 일본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끌려가 성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고 조선에서는 발 빠른 소련군에 의해 일본군과 청진시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줄 대상을 찾다가 여운형을 지목하고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한다. 8월 16일에 소련군은 청진을 점령하고 21일에는 평양에 진주하고, 25일에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다. 9월 6일에 여운형 등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지만, 다음 날 미군 극동군사령부는 조선의 군정을 선언하고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

  45년 9월 8일,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경무대에서 무거운 아침식사를 마치자 조쮸(女中. 하녀) 아카네가 오쨔(お茶)를 바쳐들고 들어온다. 오늘은 찻잔을 놓는 아카네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아베가 아카네를 보니 어깨를 들썩이고 울고 있다.

  “아카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나리! 저희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염려하지 마라. 너는 내가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

  “저는 나리만 평생 따라다니겠어요.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아카네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용기를 내서 입을 연 것이다. 아카네는 일본에서부터 데리고 온 18세의 깜직하게 귀여운 시골아이다. 자기 마누라가 일본에 다니러 갔을 때도 그렇지만 여러 번 경무대에서 몰래 성노리개로 삼았던 아이이다. 원래 일본에서 아카네의 어미 사쓰키가 아베의 정부였다. 관동대지진 때 관동계엄참모장 동경 사택에서 조쮸로 있던 사쓰키를 정부로 삼아 재미를 보아 왔었다. 그 후 사쓰키는 일본의 어느 성실한 노동자와 결혼하였는데 불륜관계는 그 때에도 가끔 지속되고 있었다. 아베가 44년 7월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다는 말을 듣고 그 때는 과부가 된 사쓰키가 찾아와 자기 딸 아카네를 조선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아카네가 웅크리고 서있는데 웅성웅성한 문 쪽을 보니 집사 핫토리를 위시하여 관저요리사, 청소부, 세탁부, 정원사 등 관저의 인원들이 거의 다 모여 있다. 그 안에는 자기의 아내까지 키모노를 입고 섞여있고 모두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중에 여러 명이 어깨가 들썩이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이곳 경무대(이승만 때는 그대로 명칭 사용, 윤보선 때 청와대로 개칭)는 악명 높은 총독관저이다. 총독관저는 용산의 일본군기지 안에 황궁처럼 지어놓은 호화관저가 따로 있으나 그곳은 총독부와 거리가 있기 때문에 주로 연회나 주요 모임 때만 사용하고 총독부와 지척에 있는 경무대를 관저로 쓰고 있었다.

  처음에는 남산의 일본공사관이 통감부청사로 사용되다가 한일합방 이후는 조선총독관저로 사용했었다. 경무대를 지어 총독관저로 사용되면서는 남산의 왜성대 총독관저는 40년부터 역대 통감과 총독의 초상화을 걸고 그와 관련한 유물을 전시하는 소위 시정기념관(施政記念館)으로 개편되며 한일합방조약을 조인했던 합방조인실을 특별히 설치 기념하였다. 39년에 완성된 경무대 총독관저는 경복궁 후원에 있던 많은 건물을 헐어내고 지은 것으로 관저의 명칭은 헐린 건물 중 하나인 경무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원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복궁 뒤편 언덕 위의 평지를 ‘무예를 관람하는 돈대’라는 의미로 경무대라 불렀다. 경무대 위에는 용무당과 용문당 등의 건물을 짓고 친경전(親耕田. 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전답)도 마련했다. 문무가 융성하고 생업이 발달하기를 축원하는 의미였다. 때문에 이곳에서 과거시험도 자주 치러졌다. 39년 기존의 남산 총독관저를 시정기념관으로 바꾼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때부터 경무대를 본격적으로 총독관저로 사용했다. 나중에 미군주둔 이후는 미군정장관 하지의 관저로 사용한다.

 

  9월 8일, 아베가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하루 전, 아침 일찍 총독 아베는 경무대에 웅성이고 있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집사 핫토리가 대표하여 입을 연다.

  “저희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조선인들의 보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벌써 보복을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아마 헛소문일 것이다. 조선인은 그럴 용기가 없다. 조선인은 황국의 위엄에 잔뜩 겁을 먹고 있기 때문에 일본군을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게 되어 있다.”

  “각하! 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미군은 우리의 적입니까 아군입니까?” 관저요리사 다케다가 용기를 내서 돌직구로 물어본다.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적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아군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전쟁에 패하였지만 조선에 패한 것이 아니고 미국에 패하였다. 일본이 하던 모든 행정을 미국이 그대로 인계 맡아서 할 것이다. 미국이 내일부터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일본인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일이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이 때 관저호위무관이 들어옴으로 출근을 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아베가 걸어 나가자 비켜선 무리 속에서는 이제 울음소리마저 들린다.

  아베의 차가 총독부에 도착하자 비서실장 야마나 미키오(山名酒喜男)가 긴장된 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이고 차문을 연다. 아베가 나오자 입구에 총독부 간부들이 도열하여 있다. 아베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총독부 건물을 다시 한 번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담장이며 바닥의 풀포기까지 눈을 주고 먼 하늘을 보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풍수지리 음양논리에 의하여 조선의 혈을 눌러 정기를 끊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조선인의 정신적 중심이 되는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흥례문(광화문과 근정전 사이의 문)을 제거하고 그 위에 건립한 것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동쪽으로 이전시키고 높고 거대한 총독부가 가려서 경북궁의 정전인 근정전은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몰락하고 시들어진 대한제국의 황실을 다시 한 번 모욕주고 있었다. 총독부 건물은 동양최대 규모로서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는 일본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미신을 좋아하는 일본인답게 총독부는 위에서 볼 때 한일 자(日)가 뚜렷이 그려지게 함으로써 이는 일본이 지배하는 지역이라는 것을 만방에 선포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갓 쓰고 짚신 신고 다니는 조선인은 총독부의 거대한 돔을 보기만 하여도 질리도록 착안한 것이었다.

  높은 계단을 올라 집무실로 들어가려 하자 집무실 앞에는 총독부 관원 거의 전원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다. 엊그제까지 무서운 호랑이 같던 일제가 오늘은 숨을 구멍을 찾는 작은 짐승이 되어 있는 꼴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정무총감을 위시하여 총독부 무관, 부속무관, 장관(각 부의 장), 국장, 참사관, 비서관, 사무관, 기사(技師), 통역관, 기수(技手) 등 4백여 명이 아베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지위가 높은 자는 따라 들어오고 지위가 낮은 자들은 집무실 밖에서 안을 향해 서있다.

  “각하! 모두 각하의 한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마나 비서실장이 가까이에서 말을 꺼낸다. 모두들 찬물을 끼얹은 듯 바스락 소리도 내지 않는다. 아베는 실내에서 실외까지 들리게 훈시처럼 말을 한다.

  “제군들! 수고 많이 했다. 우리는 텐노헤이카(여기서 전원이 ‘삐거덕’ 두 발 모으는 소리가 전 홀에 울러 퍼진다)의 명에 따라 내일 조선에서의 모든 우리의 권리를 미군에게 인계하고 떠나야 한다. 그러나 슬퍼만 하고 있지 말라. 우리는 또 돌아올 것이다. 조선은 고래로 우리의 먹잇감이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이렇게 괜찮은 먹잇감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홍복이다.”

  이 때 전령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종이를 한 장 비서실장에게 전한다. 야마나가 약간 보더니 아베에게 전하며 “미군정청에서 온 전문입니다.”라고 한다. 아베가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내일의 항복조인식 시간과 양측 필수 참석인원의 명단이 자세히 적혀있다. 아베는 말을 계속한다.

  “내일 오후 4시에 일미조인식이 있다는 전문이다(이 때 전체가 한바탕 웅성웅성하기 시작한다). 제군들! 내일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 될 것이고 용산의 조선주둔 일본군기지는 조선주둔 미군기지로 될 것이다. 조선은 절대 자주 독립국가가 되지 못한다. 미국은 절대 조선을 통일되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조선이 통일되면 미국이 감당할 수 없는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조선을 동양견제의 교두보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조선에 원자폭탄보다 더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놓았다. 수천 년의 상고사를 완전히 잘라내 버리고 삼국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게 만들어 놓았다. 자기민족을 팔아먹은 신라를 조선역사의 주류로 하는 신라예찬론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북은 중국 한사군의 식민지, 이남은 일본 임나일본부의 식민지였다고 열등의식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조선의 동학군을 진압하고 청국세력을 반도에서 몰아내고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1895)에서부터 오늘(1945)까지 50년을 다스려 왔다. 때문에 이 식민사관을 뿌리 뽑으려면 100년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도 잘 해야 100년이고 불연이면 영원히 갈 수도 있다. 일본도(日本刀) 밑에서 겁에 잔득 질려있는 조선인은 이간질하기에 습관이 되어 있고 대국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철학을 갖게 만들었다. 황국군대가 조선의 고대사 사료 전부를 수색하여 20만권을 불살라버렸는데, 그 이전에도 이들은 조선조 때부터 자기 스스로 ‘사대(事大)’를 국시로 삼고 살아왔던 민족이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직감인데 미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 것이다. 그들이 아시아에 발판을 마련하려면 가장 똑똑한 나라를 친구로 둘 것 아닌가. 아시아에서 가장 똑똑한 나라가 누구인가? 그것은 삼척동자에게 물어보아도 다 아는 사실이다. 미국이 멍청한 조선 같은 나라를 친구로 둘 리가 없다. 그리고 또 내 개인적인 직감인데, 우리가 조선을 50년간 통치했기 때문에 미국은 최소한 100년은 통치할 것이다. 그 뒤는 또다시 일본이 차지하면 된다.”

  이 날은 모두 뒤숭숭한 분위기에서 모처럼 출퇴근도 자유롭고 가족 면회, 지인 방문, 토론, 전화, 일찍 귀가 등 모든 것이 예외였다. 이런 가운데 내일의 항복조인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9월 9일 오후 4시, 항복조인식은 총독부 제1회의실의 양쪽 문이 열리면서 하지 중장 일행과 아베 총독 일행이 동시에 들어왔다. 이 때 하지 중자 일행은 씩씩하게 들어서는데 아베 총독은 미수에 그친 할복자살의 상처 때문에 몸을 부축 받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이 바싹 부축하고, 조선고등법원장 기토 효이치(喜頭兵一), 조선군 사령관 고즈키 요시오(上月良夫) 중장, 조선군 참모장 이하라 준지로(井原潤次郞) 소장 등이 근접호위하며 들어섰다.

  조금 전, 이 날 4시의 항복시간이 다가오자 아베는 자기 집무실 바닥에 하얀 천을 깔고 앞에 단도를 차려놓고 꿇어앉아 할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무라이들의 할복은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큰일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오야붕(두목)이나 의리나 체면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고통 없이 빨리 죽으라고 최측근이나 친한 친구가 장검으로 목을 쳐 주는 것이었다. 할복을 한다고 하면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말린다는 것은 사무라이의 굴욕이기 때문이다. 이날도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런 경우는 당연히 할복을 생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베는 제법 심각하게 윗옷을 까고 허연 뱃살을 드러냈다. 목을 치는 역은 고츠키 사령관이 맡았다. 이를 지켜보는 열댓 명 참모들은 아베의 동작 하나하나에 시선이 딸려가고 있었다. 아베는 잠깐 앞으로 몸을 숙여 단도를 들었다. 드디어 칼집에서 시퍼런 칼을 뽑았다. 칼끝을 왼쪽 배에 가져다댔다. 이제 깊이 찔러서 쭉 갈라 오른쪽으로 더 길게 더 깊게 갈라나가야 한다. 그때 영광된 죽음이 될 만한 일순에 카이샤쿠(介錯. 목 치는 사람)가 단칼에 목을 댕강 날려 주는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아베는 칼을 배에 찌르자 2cm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팩! 쓰러져버리고 만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 가운데서 누군가가 “사무라이노 구즈다나!(무사의 쓰레기로군)” 한 마디 내뱉는다. 아무도 방금 그 말을 누가 했느냐고 따지지 않았고 의무병이 들어와 흰 천으로 몸을 감고 담가에 들고 나간다. 아무리 사무라이의 혈통이라지만 70노구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항복식 취재는 자유중국의 기자, UP, AP 로이터 통신 등 20여 명과 연합국 측 영화사 카메라맨들도 열띤 경쟁을 벌렸다. 그런데 조인서의 내용을 보면 미군이 접수한 지역은 조선 전역이 아니고 38선 이남으로 국한되어 있었다. 조인식은 금방 끝나고 4시 45분에 총독부 앞뜰의 국기게양대에서 미군군악대의 취주와 총독부 울타리를 둘러싼 조선인들의 박수소리가 울러 퍼지는 가운데 일본국기가 내려지고 미국의 성조기가 올라갔다. 이 때 어떤 청년 하나가 불쑥 앞으로 나왔다.

  “왜 조선의 국기가 올라가지 않고 미국국기가 올라가느냐. 이건 말도 안 된다. 미국국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올려라. 조선의 국기를 올려라. 태극기를 올려라.”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군중의 박수소리와 미군군악대의 취주로 불과 몇 사람의 귀에 들리는가 하더니 금방 다른 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8월 15일 일본본토의 항복에서부터 9월 9일 조선의 일본군 항복까지의 25일 동안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실은, 8월 15일 일본왕의 항복선언에도 불구하고 조선내의 일본인은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소련군이 남하한다는 소문에 잔득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8월 10-15일 사이에 소련군 선발대가 벌써 이북을 점령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강하다는 만주의 관동군과 이북의 일본군, 어용일본인들은 모조리 포로로 잡혀서 시베리아로 유배 보내지고 있었다.

  함흥소학교 교장 가가타니(加賀谷)와 일본인 교사 3명도 소련군에 잡혀 시베리아 유배지로 보내졌는데 그들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은 ‘벽돌쌓기’였다. 사람에게 아무런 보람도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수용소의 동쪽 담 밑에 쌓인 벽돌을 서쪽 담 밑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것이 다 쌓이면 다시 동쪽 담 밑으로 옮기는 것이다. 또 다시 서쪽 담 밑으로 옮긴다. 이 일을 하루 종일 반복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빠른 동작이어야 한다. 먹는 것은 멀건 수프 한 그릇과 검은 보리빵 한 개를 하루에 두 번 먹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는 중간 면담시간이 있었다. 수용소 소장이 가가타니에게 조선에서 무엇을 가르쳤느냐고 물었다. “코쿠고(國語. 일본어), 황국사상…등을 가르쳤다.”고 하자, “뭐? 황국사상이 뭐야?” 하자, 일본정신을 가르치는 황국사상이라고 했고 사무실에 있던 수용소 소장 이하 군인들이 모두 배꼽을 쥐고 웃었다. 그 뒤부터는 벽돌을 나르면서 매 걸음마다 ‘황국사상! 황국사상!’하면서 나르라 하였다. 그들은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조선군사령부 예하 영흥만 요새사령부의 이즈노(伊津野) 중좌 이하 5명이 잡혀서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영흥만 요새사령부는 원산, 성진, 청진 등을 연결하는 군사시설을 갖춤으로써 동해안 군사기지를 확보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5명을 데려간 군인들은 그들을 수용소에 가두지도 않았다. 그들을 실은 추력은 끝도 갓도 없는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더니 어느 얼음바닥 위에 그들을 내려놓고 가버렸다. 가즈노 중좌 이하 졸개들은 끝없이 걷고 다음날 걷고 그다음 날 또 걸어도 인가 비슷한 것도 없고 먹을 것 한 톨도 구경할 수 없었다. 열흘 정도를 헤매다가 모두 눈밭에서 얼어 죽었다.

  그와 같은 정보를 서울의 조선총독부에서는 무전을 통하여 어느 정도 다 알고 있었다. 그 때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총독부로 불러들였다. 여운형은 승자다운 당당한 태도로 정무총감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웬일이십니까. 높으신 분이 이렇게 높은 총독부까지 불러주시다니요. 어찌나 천정이 높고 으리으리하던지 어지러워서 혼났습니다.”

  “여 선생님, 우리 모든 것을 타협적으로 합시다. 이제 우리는 물러갈 것이니 저희와 모든 것을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높으신 일본분이 한낱 조선인의 협조가 다 필요하단 말입니까?”

  “여 선생님, 왜 이러십니까? 우리도 조선의 치안협력위원회를 적극 협조하겠으니 여 선생님께서도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패망한 일본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치안협력위원회가 아니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고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급선무예요.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조선건국위원회도 좋습니다. 하여튼 소련군이 총독부를 점령하더라도 잘 말씀드려서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하여튼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럼 내가 한 가지만 부탁을 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되어 있는 조선의 정치범들을 당장 전원 석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석방하겠습니다.”

  일본은 신속하게도 다음 날 오전에 서대문형무소의 정치범은 가부를 불문코 무조건 전원 석방하였다. 그들이 서울시내로 행진하여 들어오면서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서울의 봄은 너무나 화창한 날씨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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