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조선의용군의 입북 1
작성일 : 17-12-15 17:07     조회 : 321     추천 : 0     분량 : 11453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3. 조선의용군의 입북

 

 

  1

 

  선양(瀋陽)을 출발하여 단둥(丹東)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철로는 다시 경의선과 경부선으로 이어진다. 선양을 막 출발하고 얼마 안 되어 기차 안에서는 팔로군 군복을 입은 조선인 부대가 모두 북한 인민군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1949년 7월 20일 1천여 명의 조선의용군은 모두 밝은 표정이다. 총사령 무정(武亭) 장군은 감개무량한 듯 소리 질렀다.

  “동지들! 어서들 갈아 입으시라요. 우리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어서들 갈아 입으시라우요.”

  “우리는 이제부터 조선인민군이 되는 것입네까?”

  “그렇습니다. 해방된 조국의 자랑스러운 인민해방군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꿈입네까, 생시입네까? 믿기지가 않습네다.”

  “분명 생시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중국군대가 아니고 조선군대란 말입니다.”

  무정은 함경북도 경성군이 고향이고 본명은 김무정이다. 소년 시절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가난 때문에 허덕이고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던 때에 혁명가 여운형(몽양)을 만나 일제의 압박과 착취에 반항하여 싸우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무정은 그의 강력한 투쟁으로 말미암아 감옥살이를 밥 먹듯이 하였으며 사형이 언도되기도 하였으나 요행이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중국혁명지하조직의 알선으로 허난 성(河南省) 보정(保定)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때의 나이가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 뒤로 중국노농홍군에 참가하여 홍군 제3군단 전위서기 펑더화이 수하의 홍군 배장(排長.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홍군에는 포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펑더화이와 무정 밖에 없었다. 무정은 중국의 ‘포병지부(砲兵之父)로 불리우며 박격포의 달인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1930년 7월에 무정은 후난 성 위에저우(岳州)에 주둔한 장제스 군을 격파하여 야포 4문과 다량의 산포(山砲)를 노획한 적이 있다. 마침 둥팅 호(洞庭湖)에 정박해 있던 영국, 미국, 일본의 제국주의 연합함대가 반대편 강기슭에 운집해 있던 홍군을 향하여 무차별 포사격을 퍼부었다. 무정은 즉석에서 노획한 포에 탄환을 장착하여 20여발을 쏘아 10여발을 명중시켰다. 적함이 불길에 싸여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며 침몰하는 모습을 보면서 모든 홍군이 환호를 질렀다. 그 후로도 장제스 군에 4차례에 걸쳐 포위 소탕작전을 벌릴 때도 그의 포술로 대승을 거둠으로 무정의 명성은 홍군에 널리 퍼져 나갔다.

  중국에 망명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은 중국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이나 조선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는 것은 같은 일이라고 여기고 공산당에 입당하여 연합작전을 펴고 있었다. 장제스 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지자 마오쩌둥 군의 수도인 장시성 루이진(瑞金)에 주둔해 있던 30만 홍군은 1934년 10월에 대대적인 후퇴를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른바 ‘2만 5천리 대장정’이었다. 1년 후인 1935년 10월에 산시 성 옌안(延安)에 도착하면서 장정이 끝나는데, 대장정의 마지막 종착역이었던 옌안을 그 때부터 사람들은 혁명의 도시로 불렀다. 루이진에서 예안까지의 2만 5천리 대장정에는 무정과 양림, 윤세주, 진광화를 비롯한 조선의용대의 많은 젊은이가 함께 하고 있었다. 양림은 3.1독립운동 직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이 세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지린 성 리우허 현〔柳河縣〕)를 졸업하고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중국의 황포군관학교와 모스크바 보병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서기로 일했다. 양림은 대장정 시 시종일관 마오쩌둥의 참모장이란 중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홍군이 진사 강(金砂江)을 건널 때는 전위부대를 이끌고 하룻밤에 180리 행군을 달성하여 홍군 최대 위험지구인 진사 강을 무사히 통과하여 마오쩌둥이 대장정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양림은 산베이(陝北)에 도착하여 옌안을 목전에 두고 장제스의 국민당 군과의 가장 치열했던 황허 전투에서 38세의 나이로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마오쩌둥은 가장 아끼고 신뢰했던 양림의 사망을 목격하고 너무나 슬퍼 오열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조선의혈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조선의혈단장인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는 같은 밀양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죽마고우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최선봉에 선 사람이다. 윤세주는 화북지방의 조선의용대를 이끌면서 장렬한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하고, 김원봉은 상해임시정부 쪽에서 민주진영의 광복군 선봉이 된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 공산당 핵심지도자들은 조선의용대의 중요성을 너무나 절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중국인들은 왜 일본인과 싸워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공산혁명을 교육시키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에 비하여 조선의용대는 오히려 공산당원보다도 이해가 빨랐다. 팔로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첩보활동을 해야 하는데도 중국인 중에는 일본말을 할 줄 아는 자가 거의 없었다. 조선 젊은이는 거의가 중국어와 일본어가 능통했으며 혁명의지가 뚜렷했다. 조선의용대는 또한 여성대원도 많았다. 조선의용대가 훈련을 하면 많은 중국인은 여성이 총을 들고 남성과 같이 훈련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구경하였다. 조선 여성대원들은 특히 연극, 영화, 선전유인물, 군중집회 등에 효과적으로 활동하여 적의 사기를 꺾고 중국 민중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뒤에 팔로군참모장 이에젠잉(葉劍英)은 “조선의용대는 ‘항일투쟁의 꽃’이었으며 중국인에게 항일투쟁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눈뜨게 해주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팔로군은 마오쩌둥의 홍군이 국공합작 후에 장제스의 국민당 군에 편입하여 여덟 번째 로군(路軍)이 된데서 유래한다. 그 때 장정에 가담하지 않고 새로 편성된 군대는 신사군(新四軍)이 된다. 그래서 화북에는 팔로군 화남에는 신사군이 있게 된다. 화북 팔로군 총사령부가 태항 산맥(太行山脈) 마텐(麻田)이란 곳에 있었다. 산시 성(山西省), 허베이 성, 허난 성의 세 성이 만나는 지점에 태항 산(太行山)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주둔했던 옌안은 전투가 미치지 않았는데 마텐은 화북전선의 실제 작전참모본부였고 그곳에 조선의용대의 화북본부가 같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팔로군 부총사령 펑더화이, 부참모장 주오촨(左權), 제1, 2군단 정위(精衛. 정무위원) 덩샤오핑이 있었다. 1942년 5월 25일 일본군 화북방면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는 마텐을 향하여 총공세를 퍼부었다. 최신무기로 무장한 3만 5천명의 일본 정규군이 전투기 6대의 폭격 엄호를 받으며 팔로군을 몰살시키려는 참빗작전을 감행했다. 팔로군은 첫 번째 공격은 버텼지만 두 번째의 공격은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퇴로가 봉쇄되었고 탈주를 성공시킬 확률은 거의 없었다.

  이 때 퇴로를 확보하는 자살해위를 자처하는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평양의 진광화와 밀양의 윤세주가 지휘하는 조선의용대 30여명이었다. 마텐에서 150리 떨어진 십자령을 넘으면 허베이 성 서북쪽으로 무사히 퇴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령은 분지였고 그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의 엄청난 사격과 공습이 이어졌다. 조선의용대는 오직 소총과 수류탄만 가지고 결사의 공격을 퍼부으며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하여 팔로군이 무사히 산 정상을 넘어 퇴각할 수 있게 길을 텄다. 펑더화이와 덩샤오핑은 아마 조선의용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곳 십자령에서 불귀의 혼이 되었을 것이다. 그 대신 진광화와 윤세주는 이 번 싸움에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팔로군은 두 영웅의 시체나마 일본군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여 구출하여 담가에 메고 와서 십자령에서 멀지 않은 흑룡동이란 곳으로 옮겼으나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런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천안문 누상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찬란한 오성홍기 위에는 조선혁명열사의 붉은 피가 물들어 있다(中華人民共和國燦爛的五星紅旗上, 染有朝鮮革命烈士的鮮血).”고 감격에 찬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무정이 최초로 해방군을 이끌고 들어온 이후, 뒤를 이어서 김창덕 휘하의 제164사단 병력과 방호산 휘하의 166사단의 조선부대가 신의주 회령 등을 거쳐 입국하여 인민군의 새로운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인민군 정치부 주임 김일은 선양에서 가오강(高岡)을 만나고 다시 북경에서 저우언라이, 주더와 4차례나 만나고, 마오쩌둥과도 1차례 만나서 조선족 해방군의 귀환협조를 요청한다. 인민군 작전부장 김광협도 중국에 가서 린뱌오 휘하의 1만 6천명의 조선인 해방군을 보내 주기로 약속을 받는다.

  지금 조선의용군이 입북하는 선양, 단동, 의주를 잇는 이 길은 수나라, 당나라, 몽골, 금나라, 청나라가 쳐들어 올 때도 이 길을 탔으며 우리의 긴 조공사절이 또한 이 길을 따라 중국으로 갔었다. 알고 보면 조선은 중국에 대하여 변함없는 짝사랑을 해 온 민족이다. 중국이 천조(天朝)의 나라라는 것도 오직 중국과 조선에서만 통하는 말이었다. 중국이 정해 놓은 1년 4공(貢)이라는 조공을 지키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오직 조선밖에 없었다. 중국이 스스로 자기의 속국이라고 일컬었던 유구(오키나와), 안남(베트남), 남장(南掌. 라오스), 섬라(暹羅. 샴), 면전(緬甸. 미얀마), 오이라트, 하미, 수루(蘇祿), 우리안하트, 구르카(Gurkha. 네팔), 카자크 같은 나라도 1년 4공을 지키는 나라는 없었다. 유구, 안남이 겨우 2년 1공이며, 샴은 3년 1공, 카자크는 4년 1공, 수루, 구루카는 5년 1공을 하였으며, 남장, 면전 같은 나라는 겨우 10년 1공을 하였다. 그리고 그 나라들은 조공이란 용어 자체가 없는 것이고 오직 중국이 스스로 정해놓은 자기의 명단에 기재된 명칭일 뿐이었다. 그러나 조선만은 명실상부한 번속이요 1년 4공을 틀림없이 지킬 뿐만 아니라 중간에도 사은사(謝恩使), 주청사(奏請使), 진하사(進賀使), 진위사(陳慰使), 진향사(進香使) 등의 이름을 만들어서 다다익선으로 솔선수범하여 중국을 왕복하였다. 황태자의 탄신일이다, 공주의 생일이다, 황후의 환갑이다, 또는 옹주마마의 쾌차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간에도 번질나게 드나들고, 왕이 등극하면 허가를 받으러오고 왕후를 책봉해도 허락을 받으러 왔다. 오죽했으면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영광 아닌 영광의 칭호까지 붙여 주었을까?

  일본만 해도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하고 자기의 왕을 ‘천황’이라 하여 중국의 황제보다 한 등급 위로 놓았다.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스이코〔推古〕 천황의 섭정) 때 수양제에게 보낸 국서를 보면 “해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이르노라. 그대는 무고한가?(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羔)”하고 동생으로 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역대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동생취급하고 있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다 자기가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백제 때만해도 우리도 지구의 중심국가로 자처하며 중국을 쥐락펴락하고 왕위 계승권까지 간섭하며 하대하였다. 삼국시기 이후부터 우리는 중국을 중심의 나라(중국)라고 하고 조선은 변두리의 나라(동국)라고 스스로 자기비하를 시작한다.

  조선조는 국시를 아예 노골적으로 ‘사대’로 정하고 말았으니 그런 나라는 지구상에 조선이 유일했다. 이성계가 부도덕하게 정권을 가로채 왕이 된 이후로 당신네 대국을 치라는 왕을 내쫓고 제가 왕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감히 대국을 거스른 자는 제가 책임지고 다 해치우겠습니다. 세세무궁토록 대국으로 받들고 조공을 바치겠나이다를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중국보다 더 긴 역사, 더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대국이 알면 크게 노할 것을 두려워하여 삼국 이전의 역사는 모조리 스스로 잘라내 버렸다. 삼국 이전의 환국, 배달, 고조선, 북부여의 7천년 역사를 모조리 잘라 버리고, 그런 역사사료는 ‘수거령’을 내려 모조리 불온서적으로 거둬들여 왕궁에서 직접 소각하고 민간에서 감추고 있는 자는 기어코 찾아내어 참형(斬刑)에 처했다. 국사사료가 인멸된 것은 중국과 일본이 한 것뿐만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한 짓이 더욱 분한 것이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먼. 얼마나 기대하고 기대했던 날인가 말이디. 지금까지 우리는 남의 나라 군대로서 북벌전쟁, 항일전쟁, 국공내전을 거치며 숫한 고비를 넘었지만 바로 이날을 위하여 살아온 것이지비. 우리 조국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먼.”

  “김준한 동지! 우리 조국에 돌아가서도 친하게 지내자우. 중국을 위해서도 목숨을 걸었는데 조국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못하겠어.”

  “최재걸 동지! 우리 나이도 비슷하니 형제처럼 지내자우.”

  “그러자우요.”

  한국전쟁을 1년 앞두고 김일성의 요청에 의하여 마오쩌둥은 팔로군 중 한인들을 조선의용군으로 조직하여 입북시키고 있었다. 김준한과 최재걸이 입국하는 이 부대는 무정 다음의 팔로군 제4야전군 휘하의 제55군단 164사단이다. 이들은 만주지역에 주둔해 있는 한인들로만 구성된 10,821명의 단일부대였는데 조선인민군 제5사단으로 개편된다. 같은 날 같이 출발하는 다른 부대는 역시 제4야전군 휘하 제55군단 166사단으로서 대만으로 도망간 장제스 국민당 군을 쫓아 대만해협까지 진출한 역전의 한중 혼성부대였다. 원래는 제166사단 중 1개 연대만 한인이었으나 조선군의용군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중국인을 한인으로 교체하였고 뒤에 조선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되는 10,320명의 사단이다.

  다시 50년에 입북한 1개 사단과 1개 연대 병력까지 합치면 이 때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인 해방군은 4만 2천여 명이었다. 김일성은 다시 작전부장 김광협을 중국에 보내 조선국적 해방군을 추가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최용건이 소련 고문관과 하얼빈에서 비밀리에 협상하여 동북군구 부사령관 저우바오중(周保中)과 리리산(李立三)이 중국에 흩어져 있던 1만여 명을 모아 전우(全宇)의 인솔 하에 원산 쪽으로 들여보냈다. 이 밖에 전쟁발발 직전에도 계속하여 화물차에 은폐하여 많은 조선군출신이 입북하여 총 8만여 명의 조선족 해방군이 이북군대의 주력을 이루게 된다. 50년 3월에 김일성은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김일성은 49년 6월에도 스탈린을 만난 적 있음. 합계 2차례)했을 때 평북 운산 금은광에서 산출된 황금 9톤, 은 40톤, 기타 광석 1만 5천 톤으로 3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중장비를 구입한다.

  1950년 4월에는 팔로군 제 156사단을 중심으로 제139, 140, 141사단의 한인들을 모아 1만 4천명 병력을 입국시켜 조선인민군 제7사단으로 만든다(후에 제12사단으로 명칭변경). 그 외 중국인민해방군의 부대단위가 아닌 개인적으로 각 군에 소속되어 있던 한인을 모아 1개 연대를 만들어 입북시키는데 이들은 후에 오토바이 연대가 된다.

  전쟁준비를 끝낸 이북군대는 보병 8개 사단과 아직 다 충원되지 않은 2개 사단을 합해 13만 5천명이 되었고, 뒤에 독립전투단 2개와 장갑부대 2개, 탱크 150량, 화포 600문, 전투기 196대와 5개 경비여단, 국내치안부대 등을 합하여 모두 18만 3천명으로 집계되었다. 거기에 각 사단에 15명 정도 배속된 소련 군사고문단 등 기타 약 3천명이 더해졌다.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1912년 4월 15일생이다.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1950)에 38세의 나이였다. 평양부 고순화면(古順和面) 남동 칠곡에서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의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강반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칠곡교회 장로였다. 김일성의 가계는 전주 김 씨로서 12대조 김계상이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이평택의 집안의 묘지기였고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일제에 항거하여 무장투쟁도 벌린 적이 있다. 김형직은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하여 만주의 지린 성(吉林省) 푸쑹 현(撫松縣)으로 이사했다.

  김일성은 8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 현(長白縣) 바다오거우(八道溝)에서 바다오거우 소학교를 다녔다. 김형직은 그 뒤로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여 김일성 혼자 평양으로 돌아가서 생활하게 하였다. 김일성이 14살 때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하고 위원(毓文) 중학교를 다녔다. 1929년 가을에 항일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군벌에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수감 중에 위원 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그는 다시 지린 제5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지린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초에 출옥하였다. 출옥하여 국민부 산하의 청년조직에 가입하여 일할 무렵에 이름을 김일성으로 개명한다. 이어서 조선공산청년회에 가담하여 주요인물로 활동하며 화성의숙을 졸업하고 만주에서 활동하는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다.

  1937년 6월 4일의 국내 진입작전인 보천보 습격에서는 일본인 7명을 사살하고 7명에 중상을 입히는 성과를 올린다. 다음 날 벌어진 일본군 30명의 경찰추격대와의 전투에서는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을 당하며 일본추격대는 7명이 사망 14명이 부상을 당한다. 이 때부터 김일성의 이름은 자주 신문에 오르고 가장 위험인물로 지목받게 된다. 그 때 동북항일연군 정치위원장이었던 웨이정민(魏拯民)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는데 반하여 김일성의 현상금은 1만 엔으로 올랐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김일성은 일제의 가혹한 토벌이 계속되는 1938년 12월에는 부대편제의 개편에 의하여 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939년 말부터 시작되는 일본군의 본격적인 항일 빨치산 대토벌전이 이어지면서 항일연군은 패퇴일로에 이르고 조직마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더구나 일본 토벌대는 항일연군 중에서도 김일성부대에 대하여 집요한 추격을 하게 되자, 김일성은 하는 수 없이 부대를 이끌고 북만주를 거쳐 국경을 넘어 1940년 초에 소비에트 연방으로 피신하게 된다.

  1940년에 하바롭스크의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특무공작요원으로 훈련을 받고 소련군 장교로 임관된다. 그 뒤로 소련군 대위로 소비에트 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 배속되어 5년 동안 근무하며 소련식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는다. 1945년 8월 초순, 독일이 패망하고 일본도패색이 짙어오자 동북항일연군의 후신으로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矯導旅)가 결성되는데 김일성은 이 부대의 제1영 영장(營長. 대대장)이 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33년에 양징위(楊靖宇)에 의해 창립되었고 이들이 일제의 토벌작전에 쫓겨 소련영내에서 조직한 것이 동북항일연군교도려(전체 약 590명. 이 중 조선인 190여명, 여성대원 60여명)이고 여단장은 저우바오중(周保中)이 맡고, 참모장은 소련군 사마르첸코가 맡고 부참모장을 최용건이 맡았다.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은 최용건을 단장으로 조선공작단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준비하였다. 거기서 김일성은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을 맡았다. 조선공작단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9일에 소련군의 대일참전이 시작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소속으로 소련군과 함께 소위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했고, 김일성, 최용건, 김책 등 지도급 항일유격대원들은 9월 19일에 원산항을 통하여 조국에 돌아왔고, 22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김일성이 귀국할 때 계급은 소련군 육군대위 그대로였다. 평양에서는 김영환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렸으며 이어서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한다. 소련 군정이 시작되면서 45년 10월 14일에 7만여 명이 모여 평양에서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여기서 김일성은 처음으로 스티코프(혹은 슈띠꼬브)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다.

  45년 10월 8-9일에 38도선 개성에서 김일성은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김일성이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하자는 주장에 대하여 박헌영은 당중앙은 한 곳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박헌영이 끝내 그의 주장에 동의해 주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된다. 김일성은 46년 3월에 이를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이어서 당수에 취임하였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서울의 조선공산당에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하면서는 남조선로동당과 당대당의 관계가 된 것이다.

  스탈린은 원래 조만식을 북조선의 실권자로 만들려 하였다. 그런데 조만식은 조선의 주요 인물로서 지명도는 높았으나 너무나 적극적인 민족주의자였다. 조선의 간디라는 조만식은 스탈린과 소련군정장관 치스티아코프가 소련에 협조만 해준다면 주석 자리를 주겠다고 했으나 끝까지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우리는 왜 조선인이 자신의 나라를 지배할 수 없단 말인가. 외국인은 조선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외치며 소련의 조선정책을 계속 반대하였다. 스탈린의 심기는 심히 불편하였고 그 뒤로 조만식은 행방불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스탈린은 또 박헌영을 심중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최고의 지식인이고 사상가이지만 역시 스탈린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박헌영은 3.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 전신)를 졸업했다. 1921년에 상하이로 건너가 이루크츠크 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22년에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국내침투를 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하고 24년에 출옥하여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기자생활을 하였다. 25년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공산당을 조직했고 동시에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여 책임비서를 맡아 활동하다가 구속되었다. 27년의 재판에서는 당의 조직과 당원의 명단을 대라는 혹독한 고문과 행포를 당하면서도 광인노릇을 하고 인분을 먹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행동으로 정신이상자 행동을 하였다. 병보석으로 출감한 이후 28년에 소련으로 탈출한다. 29년에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했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 국제레닌대학교를 졸업한 박헌영은 다시 모스크바 공산대학이라 불렸던 동방근로자대학 2년 과정을 졸업한다. 1945년 해방 정국에서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건국준비위원,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48년에 월북하였으며 동 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으로 내려오지는 않았다.

  스탈린은 조만식 박헌영 이외에 또 최용건 같은 유능한 젊은 군인도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김일성을 택했을까. 그 때 사실 마오쩌둥 같은 중국의 지도자들도 김일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최용건이나 무정과 같은 소위 옌안 파들이 북조선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 북한의 지도자로 김일성이 선택된 것은 무엇보다도 소련의 말을 가장 잘 들을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또 김일성이 어리고(당시 33세) 지식인이 아니란 점이 역설적으로 김일성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더 환영할 만한 조건은 김일성이 소련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마오의 색깔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조건은 실은 남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남한의 그 많은 지도자 김구, 이시영, 김규식, 여운형 등을 모두 체키고 이승만을 택하게 된 원인은 그가 철저히 미국교육을 받은 자이고 미국의 말을 가장 잘 들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승만을 제외한 다른 누구도 미국의 말을 다소곳이 들을 호락호락한 인물은 없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0 압록강을 건너는 펑더화이 3 2017 / 12 / 15 329 0 6725   
19 압록강을 건너는 펑더화이 2 2017 / 12 / 15 320 0 10192   
18 압록강을 건너는 펑더화이 1 2017 / 12 / 15 340 0 9574   
17 6.25 술래잡기 4 2017 / 12 / 15 294 0 6576   
16 6.25 술래잡기 3 2017 / 12 / 15 302 0 7644   
15 6.25 술래잡기 2 2017 / 12 / 15 306 0 6509   
14 6.25 술래잡기 1 2017 / 12 / 15 315 0 9418   
13 몸부림치는 백범 4 2017 / 12 / 15 298 0 10070   
12 몸부림치는 백범 3 2017 / 12 / 15 301 0 7732   
11 몸부림치는 백범 2 2017 / 12 / 15 305 0 11143   
10 몸부림치는 백범 1 2017 / 12 / 15 309 0 10304   
9 조선의용군의 입북 3 2017 / 12 / 15 305 0 8035   
8 조선의용군의 입북 2 2017 / 12 / 15 315 0 9334   
7 조선의용군의 입북 1 2017 / 12 / 15 322 0 11453   
6 절치부심 3 2017 / 12 / 15 308 0 6930   
5 절치부심 2 2017 / 12 / 15 317 0 9057   
4 절치부심 1 2017 / 12 / 15 318 0 6909   
3 이년당 희의 3 2017 / 12 / 15 316 0 10371   
2 이년당 회의 2 2017 / 12 / 15 324 0 4669   
1 이년당 회의 1 2017 / 12 / 15 517 0 912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