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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절치부심 3
작성일 : 17-12-15 17:04     조회 : 307     추천 : 0     분량 : 6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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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펑더화이가 처음 배필로 정했던 사람은 저우루이렌(周瑞蓮)이라는 소녀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펑더화이의 외삼촌이 부양하던 부모 없는 착한 여자아이였다.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그들은 한 쌍의 천생연분의 부부가 될 사이였다. 펑더화이가 가난한 사람의 출로인 종군의 길을 택했을 때 그녀는 한 켤레의 비단구두를 만들어 펑더화이의 짐 속에 넣어주었다. 짐을 풀어보니 비단구두 한 켤레가 들어가 있고 비단구두에는 ‘동심결(同心結)’이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상군(湘軍. 증국번이 조직하여 태평천국을 진압했던 후난의 향군)에 투신한지 삼년 만에 중대장이 되어 근검절약하여 모은 돈으로 고향에 가서 외종 누이인 저우루이렌과 성혼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꿈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지주가 외삼촌에게 빗 독촉을 하였으나 갚을 능력이 없자 채무상환 대가로 그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거절하였으나 상황이 만부득이 함을 알고 결국 조석봉(鳥石峰)에 올라가 천애절벽에서 몸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이 흉보를 들은 이후, 펑더화이는 갑자기 말수가 적어졌고 태산이 무너진 것 같은 고통 속에 유산계급에 대한 바다와 같은 깊은 원한이 쌓이게 되었다.

  펑더화이가 24세 때(1922)에 인근마을의 리우(劉) 씨의 황아장수 딸 ‘시메이즈(細妹子. 꼬마 여동생이란 뜻)’라는 소녀와 첫 결혼을 하였다. 그 때 그녀는 12살도 채 못 되었는데 남에게는 14살이라고 속여서 말하였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저녁, 펑더화이는 처에게 진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시메이즈가 내 이름인데요?”

  “시메이즈는 별명이고 다른 본명이 있을 거 아닌가? 예를 든다면 나를 남들이 ‘전야즈(眞伢子)’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별명이고 내 본명은 펑더화(彭得華)이듯이 말이네.”

  “나는 시메이즈 하나뿐이예요. 무슨 또 본명이 다 있데요?”

  “됐네. 그럼 내가 이름을 하나 지어 주지. 옛말에 남자는 건(乾. 하늘)이요 여자는 곤(坤. 땅)이라 했으니 자네는 마땅히 여자 중의 모범이 되게나. 그런 의미로 이름을 쿤모(坤模)라고 부르면 어떤가? 리우쿤모(劉坤模).”

  “좋아요. 아주 좋네요. 그럼 지금부터 내 이름이 쿤모인거예요?”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

  펑더화이는 결혼 후에 처의 전족(纏足)을 풀어주고, 글을 가르치고 글쓰기 연습을 가르치고, 다시 샹탄(湘潭) 여자직업학교에 보내서 문화를 습득하게 하였다.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펑더화이는 친구 황궁뢔(黃公略)의 권고로 고향과 가까운 창사(長沙)에 가서 창사 육군군관강무당(長沙陸軍軍官講武堂)에 응시하였다. 합격한 후에 고향에 돌아와 자기의 이름을 펑더화이(彭德懷)로 고쳤다고 공포하고 저녁에 처에게 말하였다.

  “자네는 내가 왜 이름을 펑더화이로 바꾸었는지 아는가? ‘군자는 덕을 품고 소인은 흙을 품는다(君子懷德, 小人懷土)’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출세하여 돈을 번다거나 논밭을 사들이는데 급급한 생활은 하고 싶지 않네.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 인민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이. 그래서 이름을 덕을 품는다고 더화이(德懷)라 했으니 자네도 이제부터는 나를 더화이라 불러주게.”

  창사 육군군관강무당은 1922년 봄에 입학하여 다음해 23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여름에는 광둥의 북벌군이 후난에 진군하자 후난군도 중국국민당 북벌군에 가입하여 국민혁명군 제8군으로 개편되었다. 펑더화이는 8군 제1사(師. 사단) 1단(團. 연대) 1영(營. 대대)의 영장으로서 북벌전쟁에 참여하였다.

  펑더화이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1928년 4월이었다. 그때 공산당원 펑더화이와 텅다이위안(縢代遠), 황궁뢔 등이 후난 평강에서 혁명적 병사와 농민 2,500명을 이끌고 봉기하여 평강 현성(縣城)을 점령하고 평강현농민정부를 세우고 공농홍군(工農紅軍) 제5군을 창설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평강기의(平江起義. 1928)였다. 군단장은 펑더화이가 맡고 당대표는 텅다이위안이 맡았다. 펑더화이는 리우쿤모와 함께 평강에 머물다가 그녀를 일단 친정인 샹탄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하면 다시 데려가겠다던 약속도 무색하게 이 때 이후로 다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쿤모는 샹탄에 내려오자마자 비적에게 잡혀 이곳저곳을 끌려 다니게 되었고 수많은 고초를 겪다가 한커우(漢口)에서 다른 사람의 처가 되어 딸까지 가지게 되었다.

  1937년(펑더화이 39세)에 신문지상에 펑더화이가 이미 팔로군 부총사령관이 되었다는 기사가 나자 그녀는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펑더화이는 편지를 받고 반갑게 그녀를 옌안으로 불러 일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하였으나 다시 부부가 될 수는 없었다. 리우쿤모는 후에 산깐닝 은행(陝甘寧銀行)의 한 처장에게 시집을 갔고 산시(山西) 홍군에서는 그녀를 중용하였다. 산깐닝 은행이란 산깐닝(섬서성·감숙성·영하성 3성의 별칭) 변구정부(邊區政府)에서 설립한 것으로 원래는 소비에트 국가은행 서북판사처였다. 옌안 시 바오타 구(寶塔區)에 있는 중국 최초의 은행이다. 리우쿤모는 중화 인민공화국이 성립한 이후에는 하얼빈에서 일을 하였으며, 80년대에는 하얼빈 정협위원이 되었다. 그녀는 『펑더화이와 함께했던 나날들』이란 한 권의 저서를 남겨 그 때까지도 펑더화이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1937년 77사변(7월 7일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명 로구교 사건) 이후 주력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하고 펑더화이는 부총지휘관을 맡았다(총사령관은 주더〔朱德〕). 1941년 1월 24일 중국군이 일본군을 완전 소탕함으로서 소위 말하는 백단대전(百團大戰)은 정식으로 끝이 났다. 팔로군은 105개 단(團. 연대) 약40만 명이 1,824차례의 작전을 벌려 900여개소를 점령하고, 철로 474km, 도로 1,500개소를 폭파하고, 교량과 터널 약 260개소를 폭파하고, 각종 포 53문, 각종 총기류 5,800여 자루를 노획하는 전과를 이룩한다.

  리우쿤모의 편지를 받던 그 전 해(1936년. 38세)에 산베이(陝北)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펑더화이가 어떤 묘령의 여인과 밀애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묘령의 여인이란 바로 예의 천시우롱(陳秀蓉)이라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19세의 아름답고 꿈 많은 여성으로서 외국인 조계지가 밀집된 상해에서 중국 최초의 음악원인 국립음악전과학교를 졸업하고 첫 기자생활을 시작했던 여성이다. 지혜와 미모를 겸비한 그녀가 졸업과 동시에 취직한 곳은 《대공보(大公報)》였다. 대공보는 1902년에 창간된 중국에서 역사상 수명이 가장 긴 신문이다. 천진판(天津版), 상해판(上海版), 무한판(武漢版), 중경판(重慶版), 계림판(桂林版), 홍콩판(香港版)의 6개 지역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편한 상해근무를 마다하고 자진해서 혁명의 기운이 생동치는 전선의 시안 북쪽 윈양 진(雲陽鎭)까지 가서 펑더화이를 취재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전국적인 공공 매스컴이 홍군 장정의 산베이(陝北)까지 기자를 파견한 것은 대공보가 최초였고 그 첫 특파원이 바로 천시우롱이었다.

  당시 메스컴은 차이허선(蔡和森)과 마오쩌둥이 함께 발기한 《상강평론(湘江評論)》이 있었고, 차이허선이 역시 상해에서 주편한 공산당의 《향도(嚮導)》주보가 있었으며, 《신청년》잡지, 《홍기보(紅旗報)》, 《중주평론(中州評論)》, 《불효보(拂曉報)》 등이 있었으나 대공보의 위력에는 어느 간행물도 미치지 못했다. 천시우롱이 그처럼 좋아하던 자기 전공 바이올린을 접고 종군기자의 길을 택한 것은 타고난 천성이었다. 그녀는 중국이 다른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고 이 위대한 정국을 이끄는 공산당원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중국은 바뀌어야 한다. 청말의 무능한 정권과 국민당 치하의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정권하에서는 무엇을 설사 이룬다 하여도 소용이 없다. 중국은 어차피 모두 쓸어내고 영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 길이 험난하고 시일이 걸린다 할지라도 근본적인 치료는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시우롱은 공산당원 중에서도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이 있나 고르던 중 펑더화이라는 지도자를 찾아낸 것이었다.

  “보고합니다. 저는 대공보 기자 천시우롱이라고 합니다. 이번 펑 부사령관과 산베이 홍군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펑더화이는 갑자기 나타난 천시우롱을 보고 한참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자로서는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 그리고 모처럼 깨끗한 종군기자복을 입은 한 여인이 앞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온 천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활달하면서도 어딘지 아직은 수줍음 기를 머금은 그녀의 입술은 갓 익은 앵두 같았으며 코는 날렵했고 눈썹은 검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잘 생긴 여자이면서도 역시 기자답게 눈동자는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서 와요. 반갑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상하이에서 근무하다가 제가 자원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상하이 근무처를 놔두고 여기를 자원해서 오다니요?”

  “전선을 직접 취재하는 기자가 없는 것을 알고 제가 자원했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잘 이해는 가지 않지만 하여튼 반가워요. 여기는 살벌한 전쟁터예요. 후회한다면 언제라도 다시 상해로 돌아가도 좋아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저도 일조를 하고 싶습니다. 특히 펑 사령관의 사상과 행동은 저의 중요한 기사거리입니다.”

  “내 행동이 무슨 기사거리가 되겠소만 사회주의 건설에 일조하겠다니 든든합니다.”

  이렇게 해서 천시우롱은 홍군과 같이 생활하게 되었고 펑더화이와 무슨 일이 있다는 소문까지 나오게 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윈양(雲陽)에 왔을 때 그 소식을 듣고 펑더화이에게 농을 건 적이 있다.

  “듣자하니 펑 총에게 좋은 소식이 있는 모양이던데 이실직고 하세요.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리야 대찬성이지요. 실은 모 주석께서도 펑 총이 홀아비로 있는 것이 무척 마음에 걸린 모양 이예요.”

  “괜한 뜬소문입니다. 제가 지금 그런데 신경 쓰게 됐습니까? 저는 군무에 바쁜 몸입니다.”

 하고 넘어갔지만 실은 펑더화이도 천시우롱에게 싫지 않은 감정이 역력했으며 하루만 눈에 띄지 않아도 부하들에게 그 행방을 묻곤 하였다. 그래서 아마 소문이 더 퍼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초창기 일이고 이 일은 그 뒤로도 계속된다. 천시우롱은 홍군의 2만 5천리 장정(1934년 10월에서 1936년 10월까지 각 소비에트 지역에서 홍군이 국민당 군에게 쫓겨 장시 성〔江西省〕 루이진〔瑞金〕에서 출발하여 산시 성〔陝西省〕 옌안〔延安〕에 집합한 사건. 380여 차례의 전역(戰役)을 치루며 11개성을 경과하고 18개의 큰 산과 24개의 큰 강을 건너는 고초를 치름)에도 참여하고 펑더화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고 따라다녔다.

  1947년 3월, ‘서북왕’이라고 일컫던 시안의 서북초비사령관 후중난(胡宗南)이 국민정부군 25개 사단 20여만 명의 병력으로 중공의 심장부인 옌안을 점령했다. 전차와 항공기 등 최신 미군장비의 지원을 받으며 압도적 군사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국민정부군의 위력 앞에 마오쩌둥 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제스(蔣介石) 세력의 국공내전이 시작된 이래로 최절정에 이르는 순간이었다. 그런 국민당 군을 1년 뒤, 펑더화이의 서북야전군(제1야전군)이 공산당의 전통적 유격전만으로 반격을 퍼부어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켜 버린다.

  후중난은 장제스의 최측근 중의 하나였다. 장제스가 황푸(黃埔) 군관학교(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 교장일 때 제1기생으로 졸업하여 중일전쟁에서부터 북벌전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성격도 강직하고 생활도 청렴결백하여 저우언라이조차도 “장제스 휘하의 수많은 장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장제스가 가장 신뢰하는 천청(陳誠), 탕언보(湯恩伯) 장군과 더불어 세 개의 큰 별 중의 하나였다. 중일전쟁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도 후중난으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고 있었고, 우리 광복군도 모두 후중난 군의 지원 하에 존속이 가능하였다.

  공산군이 후퇴에서 공격으로 상황이 바뀌고 국민당군이 공세에서 수세에 몰리자 결국에는 시안과 스촨(四川)에 주둔한 후중난의 30만 명과 화중과 화남에 주둔한 바이충시(白崇禧) 군의 60만 명 등 약 100만 명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나마도 상하이에서 신장(新疆)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공산군은 집단적으로 소수를 집중 공격하는 전법을 썼으며 다수의 포로를 고스란히 자기편으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여 인원은 물경 400만 명으로 늘어나 수적으로도 완전히 국민당 군을 압도하였다. 한번 대세가 기울자 투항한 국민당 군이 속출하여 노획한 소총만도 1,709,000정, 각종 화포 37,000문, 각종 차량 12,000대였고, 그것은 거의 전부가 미국에서 국민당 군에게 지원했던 미제 무기들이었다. 그러던 중 시안에서 마지막 국민당 정예부대인 후중난 군을 펑더화이가 괴멸시킴으로써 누구도 전세를 다시 뒤바꿀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고 만다. 이로써 펑더화이는 중국인민해방군 부총사령, 서북야전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이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신정부 성립 이후는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겸하였다.

  국민당군은 드디어 1949년 12월에 본토에서 대만으로 퇴각한다. 끝까지 버티던 후중난도 1950년 3월에 인민해방군이 서창공항(西昌空港. 四川) 가까이 공격해 오자 마지막 남은 6만군 부대의 지휘권을 참모장에게 맡기고 자신도 황망히 대만행 비행기를 탄다.

  천시우롱은 신정부가 성립될 때까지 전선에서 펑더화이와 같이 기자 생활을 하였다. 신정부가 성립하자 처음으로 펑더화이와 헤어져 지방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펑더화이의 고향 샹탄을 자원했던 것이다.

  펑더화이는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홀몸으로 생활하다가 그때(1938년) 여러 사람의 성화에 못 이겨 북경사대를 졸업한 푸안시우(浦安修)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였으나 성격이 맞지 않아, 바로 다음해의 루산 회의(廬山會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이후에 금방 헤어지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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