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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펑더화이의 6.25
작가 : 주암
작품등록일 : 2017.12.15

펑더화이는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온 총사령관이다. 펑더화이의 입장에서 보는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중국은 5차전역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마지막으로 금성전투에서 엄청난 공격을 가하여 정전협정장으로 끌어낸다. 전선은 지루하고 소모적인 마지막 고지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벌어진 삼감령전투는 중국군에 있어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흘러나온 첫 곡이 상감령전투의 주제곡이었다. 중국은 미제와 국경을 접하고 싶니 않아 이북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고, 미국은 중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한이란 완충지대가 필요했다.

 
절치부심 2
작성일 : 17-12-15 17:03     조회 : 316     추천 : 0     분량 : 9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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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북한에서는 하루사이에 지옥과 천국을 오가고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으로부터 절망적인 내용의 전문을 받아들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전문을 받기 직전에 두 사람은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김일성은 소리소리 질렀다.

  “도대체 당신이 그렇게 호언장담하던 남로당원은 왜 아직도 봉기를 안 하고 있는 거요. 당신 말로는 우리 인민군이 내려가기만 하면 100만 남로당원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그런 책임전가식의 말만하지 말아요. 누가 이렇게 상황이 바꾸어질지 알았겠어요. 내 말이 거짓보고가 아니란 것은 당신도 알지 않소?”

  남로당 총수였던 박헌영은 월북 하자마자 김일성에게 남로당원의 거병조직표를 보여주며 남침만 하면 그들이 일제히 일어나 호응할 것이라고 장담했고 김일성의 남침계획은 박헌영의 보고로 큰 고무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김일성은 김일성대로 자기가 밀파한 간첩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고 거의 박헌영의 계획과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미군은 대부분 철수하여 없었고 남한 정부요소며 각계각층에 남로당원들이 진지를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로당원이 호응할 것이라는 말은 모택동이나 스탈린의 호응을 받는데도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은 한미공조의 예비검속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북한의 기미가 이상하자 미국의 발 빠른 대처가 있었다. 미 중앙정보부, 미군 G2 군사정보부, 국군 방첩대, 경찰의 대공부서 등에서 신속하게 용공주의자들의 파일을 공유하면서 남로당원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운이 짙어지자 한미 정부관계자들은 갑자기 남로당원들을 일제히 예비검속하여 국민보도연맹의 이름으로 묶어 놓았다. 국민보도연맹은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들이 운영·관리하였던 사상보국연맹, 대화숙(大和塾), 교외교호보도연맹(校外敎護保導聯盟) 등의 조직과 운영방침 등을 이용하여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법률의 근거 없이 오제도 검사의 제안에 따라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와 사회지도자들이 협의 후 이승만 정부의 협조와 주도로 이루어졌다. 보도연맹 창설 당시에는 좌익사상 전향자를 계몽 지도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조직 목적이라고 밝혔다. 밖으로는 보도연맹이 전향자들로 구성된 ‘좌익전향자단체’라고 규정했지만 조직을 주도한 것은 검찰과 경찰 그리고 좌익조사 수사기관이었다.

  보도연맹원에게는 ‘공민권’이었던 도민증이 지급되지 않았고, 대신 ‘보도연맹원증’이 지급되었다. 이는 보도연맹원을 법적인 공민의 지위에서 제외시킨 것이었다. 보도연맹원은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었고 정기적으로 동태를 감시당하는 ‘좌익혐의자’ 또는 ‘요시찰인’으로 취급되었다. 일단 묶은 국민보도연맹원은 약 30만 명에 달하였다. 6·25사변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즉시 소집 구금하였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퇴하면서 이들을 집단 사살하고 만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검속은 6월 25일 사변 당일부터 한강이남 전체에서 실시되었다. 한강이남 전국에서 소집·연행된 사람들은 각 경찰서 유치장이나 인근 창고, 공회당, 연무장, 그리고 형무소 등에서 짧게는 며칠, 길게는 3개월 이상 구금 분리되었다. 구금자들은 과거 남로당이나 좌익 활동 등에 대해 집중취조를 받았고, 정도에 따라 ‘A·B·C·D’나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심사과정에서는 폭력과 고문이 뒤따랐다. 군경이 인민군에 밀려 급히 후퇴한 충청과 전남·북 일부, 경북 북부지역에서는 구금자들이 연행된 후 심사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집단처형 되기도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검거 및 살해는 이승만 정부 최상층부의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체적으로 보도연맹원의 희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희생자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이후 1990년대까지 역대 정부는 보도연맹원으로 사망한 사람의 가족과 친척들을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해 감시했고, 요시찰인 명부 등을 작성해 취업 등에 각종 불이익을 주면서 연좌제를 적용했다. 보도연맹원을 구금 처단한 세력은 과거 일제강점기 때 친일극우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은 반일사상과 반미사상을 가진 좌익세력을 반공이라는 더없이 좋은 무기를 휘두름으로서 국가의 이름으로 마음껏 보복하고 자기들의 신분을 확실히 보장받고 있었다. 하지만 인민군의 점령과 국군의 후퇴로 인해 이 조직은 와해되었고 이후 다시 재조직되거나 활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보도연맹은 단체의 해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소멸되었고 남로당원은 일망타진되고 말았던 것이다.

 

  박철우가 배바우에서 보도연맹원으로 연행된 것은 한천면 경찰서에서 나온 경찰과 화순의 방첩대원에 의해서였다. 낌새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안 것은, 가욱제를 거쳐 마을을 벗어나자 화순으로 넘어가는 산비탈에서 자기 손을 묶은 것이 아닌가. 화순의 방첩대라고 끌려간 곳은 화순 변두리의 어느 창고였다. 가까이 가자 창고 안에서 콩 튀듯 총소리가 났고 비명소리가 귀를 찢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서니 널빤지들로 한쪽이 가려져 있고 포박당한 두 명의 보도연맹원이 앉아 있는데, 아뿔싸! 그 앞에서 취조를 하고 있는 방첩대장은 만주에서 독립군 아버지를 끈질기게 쫒던 그 악질형사 조종술이었다. 보도연맹원 둘이는 얼굴을 알 수 있는 한천면 청년들이었다. 그 때 급한 일이 있는지 창고 밖에서 누가 손짓을 하였고 조종술과 졸개들이 모두 잠깐 밖으로 나갔다. 순간, 묶여있던 한 명이 언제 포박을 풀었는지 벌떡 일어나 비수로 번개처럼 두 사람의 포박을 잘라줬고 함께 창문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방첩대의 추격이 시작됐다. 한 명은 몇 십 미터도 못 뛰고 총에 맞아 쓰러졌고 둘이는 만연산 물통이 있는 쪽으로 뛰다가 기어코 무등산 줄기를 타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둘이는 함께 뛰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갈라서 뛰었고, 뛰면서 보니 포박을 풀어준 그 청년도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박철우는 무등산 6부 능선쯤을 타고 한없이 뛰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또 하나의 한국전쟁사에서 어처구니없는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것이 있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이북 깊숙이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은 50년 11월 중국지원군이 참전하게 됨으로 패퇴하게 되는데, 조급해진 정부가 12월 15일 국민방위군 설치 법안을 상정하여 다음날 국회에서 통과하기에 이른다. 국민방위군이란 만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성 중 군인이나 경찰, 공무원이 아닌 사람을 제2 국민병에 편입하여 예비전투력을 창설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50만 명이 넘는 인원을 모으게 된다. 간부는 대체로 서북청년단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민족청년단을 해산하고 다시 조직한 통합단체) 간부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중국지원군의 대공세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되자 정부는 국민방위군 장병들을 대구, 부산 등 경상도 지방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때 정부는 후방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그곳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국민방위군의 병력을 50만 명으로 계산하면 1개 교육대 당 1만 명 정도가 할당되게 된다. 그러나 교육대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그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병력이 서울에서 천신만고 끝에 집결지에 도착하면 수용능력이 없다고 김해로 가라하고, 김해에서는 진주로 가라하고, 진주에서는 마산으로 가라하고 뺑뺑이를 돌렸다. 그러면서 각 교육대 간부들은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예산과 식량을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당국의 발표로는 24억 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60억 원에 달했다. 당시 감찰위원회(감사원의 전신)의 1년 예산이 3천만 원 정도였으니 그 부정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 결과 불과 100여일 사이에 총도 못 쏴 보고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는 자가 9만 명 가량 이나 발생하게 된다. 국회는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고, 부정에 관련된 간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다.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국방장관 신성모의 사위)과 부사령관 윤익헌 등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 12일에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10월 13일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기가 막혔다.

  “김일성 동지! 당신들의 군대로 미군에 저항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오. 지금 중국동지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데 중국에서도 조선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소. 이런 상황에서 귀하는 소련과 중국으로 일단 철수하여 상황을 관망할 필요가 있소. 군대를 동북으로 철수하고 망명정부는 퉁화에 두는 것이 좋겠소. 모든 주요서류와 병력과 군사 장비를 가지고 나오는 것을 잊지 마시요. 소련에는 부상병과 노약자들을 받아들이겠소.”

  김일성과 박헌영은 하도 허망하여 허공만 바라보며 사형직전의 죄수의 심정으로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미군의 북진소식은 계속 부단으로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아! 이를 어찌하면 좋으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이렇게 끝이 난단 말인가? 이렇게 허망한 일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얼마가 지났을까 다시 한 장의 전문을 들고 급히 뛰어 들어오는 부관이 있었다. 역시 스탈린의 전문이었다.

  “김일성 동지, 축하하오. 방금 상황이 바뀌어서 급히 알리오. 중국군이 조선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하였소. 이제부터 중국동지들을 만나 중국군 참전에 관한 구체적인 문제를 상의하기 바라오. 중국군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무기는 우리 소련이 맡겠소. 아울러 소련은 공군력의 지원도 하기로 하였소.”

  김일성은 박헌영의 손을 굳게 잡았고 둘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세!”를 소리높이 외쳤다.

 

  펑더화이는 중국의 조선출병이 결정나고 자신이 총사령관으로 결정난 이후 일단 북경반점으로 돌아왔다. 경호원 샤오꼬(小郭)는 상관의 신변에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물어볼 수는 없었다. 경호 겸 상황을 파악하려 새벽에 309호실의 문을 열어보았다. 문을 잠그지도 않았는지 그대로 열렸다. 펑더화이는 침대에도 올라가지 않고 입은 채로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문소리에 잠이 깼는지 펑더화이는 벌떡 일어난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단잠을 깨신 것 같군요.”

  “아니다. 샤오꼬, 잘 왔다. 내가 몇 자 적어줄 테니 급히 후난(湖南)에 내려가서 내 조카들을 데리고 와라.”

  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장 비서에게는 지갑에서 얼마의 지폐를 꺼내 주며 따로 부탁한다.

  “장 비서! 너는 조카들이 오면 줄 선물을 준비하라. 먼저 제일 필요한 것이 학용품일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아직 어리니 과자나 사탕도 준비하고.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하라.”

  샤오꼬는 당일 저녁에 6명의 조카들을 데리고 호텔로 들어섰다. 이들 조카들이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것은 십년 전의 일이다. 1940년 10월 어느 날, 국민당 군들은 공산당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반공사건을 날조하였다. 공산당파가 국민당파를 죽이기 위하여 회의를 하고 음모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펑더화이는 남자 형제만 셋이다. 펑더화이가 맏형이고 그의 둘째가 진화(金華)이고 셋째가 롱화(榮華)였다. 동생 둘이 다 항전시기에 공산당에 가입한 열성당원이었다. 샹탄 현(湘潭縣) 주재의 국민당 군경이 빨갱이 소탕작전이라며 갑자기 집을 포위하고 별 경고도 없이 집중 난사를 하였다. 총을 들고 나와 응사하던 둘째 동생 펑진화(彭金華)는 즉사하였고, 다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셋째 동생 펑롱화(彭榮華)는 사로잡혀 이쟈 만(易家灣) 산골짜기로 끌려가 살해당하였다.

  여섯 명의 조카들은 펑더화이에게 모두 아버지를 대하듯이 우르르 달려들어 껴안았다. 펑더화이는 일일이 모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감개무량해 하였다. 큰 질녀 펑강(彭鋼)이 말하였다.

  “아이(阿姨. 이모)가 이 편지를 큰 아버지한테 전하라 하셨습니다.”

  “응? 시우롱이 어떻게 알고.”

  펑더화이는 먼저 급히 편지를 뜯어 열어보았다.

 

  오빠,

  오랜만이네요. 마침 집에 들렀다가 샤오꼬가 들어서서 그 내력을 물어보니 오늘 중으로 조카들을 모두 데리고 북경으로 오라는 전갈이네요. 저는 오빠의 일이라면 아주 예민한 후각을 지니고 있다는 쯤 잘 알고 계시지요? 보나마나 중대한 신변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샹탄에서 취재를 하고 있지만 다시 오빠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있었습니다. 오빠가 가는 곳이라면 아무리 먼 곳 아무리 험난한 곳이라도 같이 가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제 요구를 거절하시지 않는 것이지요? 건승을 빕니다.

  천시우롱(陳秀蓉) 드림

 

  “큰 아버지는 이제부터 시안이 아니고 북경에서 근무하시는 것입니까?”

  펑리쿤(彭力昆)이 사랑스러운 얼굴로 큰 아버지를 보면서 말했다.

  “아니다. 시안도 아니고 북경도 아니다. 큰 아버지가 이제부터 너희들을 볼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 급히 부른 것이다. 너희들이 크면 다 알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공부를 잘 해야 한다. 큰 아버지는 어려서 가정이 너무나 가난하여 공부라고는 2년 밖에 하지 못하고 노동으로 돈벌이를 하며 살았다. 지금은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니 너희들은 좋은 환경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지 않느냐. 열심히 공부해서 국가에 큰 도움이 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머님께 효도하여야 한다. 알았느냐?”

  펑더화이의 말을 듣고 있던 조카들은 모두 숙연해 졌다. 그 중에서도 펑메이꾸이(彭梅魁)가 여자 아희답지 않게 가장 씩씩하게 가슴을 펴고 말하였다.

  “네, 공부를 열심히 해서 큰 아버지처럼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겠습니다. 다시는 가난한 사람이 차별대우 받는 세상이 오지 않게 만들겠습니다.”

  “좋다. 그래야지.”

  펑더화이는 다시 한 번 조카들을 껴안는다. 펑메이꾸이는 그 때 말한 것처럼 뒤에 신정부에서 인민해방군 소장까지 승진하여 훌륭한 중국인민의 지팡이가 된다.

  펑더화이의 조상은 원말에 장시(江西)에서 후난 샹샹(湘鄕)으로 이사 왔었다. 명말청초에 다시 우스(烏石)로 이사 왔고, 펑더화이는 청 광서 24년(1898년) 10월 24일 후난 성 샹탄 현(湘潭縣) 우스 촌(烏石村)의 초가삼간에서 태어났다.

  후난 성 샹탄 현의 서부에는 큼지막한 산줄기가 위엄 있게 안전에 전개된다. 산봉우리는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데 북쪽에 험준하게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가 소봉(韶峰)이고, 남쪽에 독립된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오석봉(烏石峰)이었다. 이 두 개의 산봉우리 밑에 두 개의 산골 마을이 있었다. 하나는 사오산충(韶山衝)이요 또 하나는 우스자이(五石寨)였다. 이 두 개의 산골마을에는 두 명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인물이 자라고 있었다. 마오쩌둥이 태어난 사오산충의 충(衝) 자는 산간지대의 비교적 평지에 붙이는 자이고, 펑더화이가 태어난 우스자이의 채(寨) 자는 대게 울타리로 둘러친 더 벽촌부락에 붙이는 자이다. 마오쩌둥은 그래도 가정이 펑더화이보다는 부유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구학(求學)의 길을 걸었다. 그가 즐겨 읽었던 책은 《수호전》 《정충전(精忠傳)》 《삼국연의》 《서유기》 《수당연의》 등 주로 소설이었으나 그가 가장 좋아하고 평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소설은 《수호전》이었다. 탐관오리들을 주륙하는 수호전 영웅들은 바로 마오쩌둥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인물상이었다.

  평더화이는 마오쩌둥이 5세 때(1898)에 태어났는데 그의 가정은 아주 가난하였다. 그의 소년시절은 구학의 길이 아니고 생존의 길이었다. 그가 6세 때에 어머니는 그를 이모부가 개설한 사숙(私塾. 서당)에 보내 공부하게 했으나 이모부에게 보수를 지불하기 위하여 땔나무를 하여 바치곤 하였다. 8살에 모친이 돌아가시고 부친은 병환이셔서 가정형편은 극도로 열악하였다. 다니던 서당도 그만두고 나무를 해서 곡식과 바꾸어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심지어는 할머니가 동생 펑진화와 함께 부잣집에 가서 밥을 얻어오게도 시켰다. 일부에서는 이들을 걸식아동(招財童子)이라고도 부르고 거지(乞丐)라고도 불렀다. 펑더화이가 즐겨 읽었던 책은 역시 《20년목도지 괴현상(二十年目睹之怪現象)》 《노잔유기(老殘遊記)》 《포공안(包公案)》 등 주로 소설이었으며, 기타 《삼자경(三字經)》 《백가성(百家姓)》 《장농잡자(莊農雜字)》 《유학고사경림(幼學故事瓊林)》 등도 읽었다. 그 중에서 펑더화이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20년목도지 괴현상》이란 소설이었다. 청말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이 소설은 중국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굴한 나라인가를 활동사진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사회고발 소설이었다. 마오쩌둥과 펑더화이는 가정환경은 달랐으나 공통점이 매우 많았다. 첫째 동향인이란 것과, 둘째 반항적인 역사소설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셋째 부정부패와 유산계급에 대하여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펑더화이의 원명은 펑더화(彭得華)였고 고향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은 별명으로 ‘전야즈(眞伢子)’라고 불렀다. 그는 어려서부터 진(眞)자를 좋아하고, 행동이 진실되고 거짓말을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며 일을 진실 되게만 했기 때문이다. ‘야즈’는 아이라는 후난(湖南) 방언이기 때문에 전야즈는 ‘진짜 아이’란 뜻이다. 그의 아버지는 펑더화이에 대하여 항상 말하곤 하였다.

  “편두무허화, 진아자모가화(扁豆無虛花, 眞伢子冒〔沒〕假話) : 제비콩은 거짓 꽃이 없고 전야즈는 거짓말이 없다.”

  그런데도 펑더화이 자신은 스스로에게 ‘스촨(石穿)’이란 별호를 달았다. 그가 15세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나 둥팅 호(洞庭湖) 변의 샹인 현(湘陰縣)에서 제방공사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십장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복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제방공사의 국장이 현장을 방문하자 제방노동자들은 국장을 에워싸고 임금지불을 요구하였다. 이를 거절당하자 반항정신이 강한 펑더화이와 제방노동자들은 국장을 연못 속으로 집어던져버렸다. 관아에서 알고 주모자인 펑더화이를 잡으려 하자 그는 뒷문을 박차고 밖으로 도망쳤다. 도중에 폭우를 만나 어느 동굴로 피신하였는데 동굴 안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울러 퍼져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동굴 천정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곳으로 가까이 가서 보니 물방울 떨어지는 바위가 움푹 패어 있었다. 그는 옛 사람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것이야 말로 ‘성거목단(繩鋸木斷)이요, 수적석천(水滴石穿) (줄 톱이 나무를 자르고,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이로구나.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 큰 고통을 받더라도 이 물방울처럼 연속 부단으로 투쟁한다면 부패한 낡은 사회도 결국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겠구나.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이 정신을 나의 인생목표로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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