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진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나보고 목검으로 같이 싸우라고...?'
진희의 동공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아까는 이쁘게 보이던 목검이 갑자기 초라하다 못해 추해 보인다.
그녀의 칠흑같은 눈자위 위로 강당의 벽면을 무너트린 렉스의 검기가 비춰졌다.
누가봐도 아름다운 빛깔의 푸른색이었으나 지금 당장 저 인간병기랑 싸우라니...
'엿됐네.'
어쩐지 쉽게 끝내준다 했다. 여기서 더 반항하면 그때는 비오는 날 먼지날리듯 맞는 것에 모잘라 또 같은 훈련을 죽을 때까지 반복할지도 모른다.
진희는 부르르 몸서리를 치며 목검을 서슴서슴 꺼내고는 전세파악을 위해 빠르게 렉스의 위아래를 훑었다.
렉스의 검기는 일단 두 팔에 국한되어 있다. 그 바람에 그의 앞에 방패처럼 얇은 검기의 막이 서려 있었다. 그렇다면 정면돌파는 무리라는 소리다.
'빠르게 다리를 걸어 휘청일때...'
파앗!
진희는 섬광같은 속도로 몸을 낮추었다. 진희의 초라한 목검이 렉스의 발목을 스쳤고, 렉스는 그녀의 예상대로 잠시 휘청거렸다.
'빈틈을 공략하는거지!'
렉스의 균형이 무너지자 진희는 마구 휘두르는 팔을 피해서 순식간에 뒤로 갔다. 한줄기의 놀라움이 렉스의 얼굴 위를 스쳤다
'이제 끝...'
진희가 목검으로 렉스의 목을 후드려 치려는 그 순간, 렉스가 무섭게 얼굴을 돌려서 진희와 눈이 마주쳤다.
쨍강!
목검은 깔끔하게 두동강이 났고 진희는 한손으로 검을 든채 얼어붙었다.
'뭐...뭐지?'
분명 렉스는 목검에 팔을 가져다대지 않았다. 그런데 눈빛 만으로도 검을 이등분 시킨다?
렉스는 검기를 거두고는 진희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의 검기 외에 사람 자체에서 나는 위압감은 진희를 압도했다.
선빵이 승부를 죄우한다는 그녀의 철학은 이로서 산산히 깨져버렸다.
진희는 온몸을 뜯어보는 소름돋는 기운에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급기야는 이빨을 딱딱이며 눈동자에 초점도 풀렸다.
청아하고 순수한 기운의 검기와는 달리 지금 렉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은 마치 먹이사슬 꼭대기의 포식자에게 잡힌 먹이의 느낌이었다.
쿠웅!
결국 두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고 말았고 동강난 목검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아차.'
렉스는 얼른 기운을 풀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새파랗게 질린 진희에게로 다가가 볼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진희의 체온이 렉스의 차디찬 손에 전해졌다.
"검기는 손으로만 휘두는게 능사가 아니지. 그렇다면 굳이 검을 사지, 왜 검기를 배우겠는가. 진정한 소드마스터는 눈짓만으로도 뭐든지 벨수 있다."
진희는 여전히 패배감에 찌들어 멀거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아까 기운에 눌린 충격 때문에 약한 진동이 간간히 흘러나왔다.
렉스는 푹 한숨을 쉬고는 볼을 쓰다듬던 손으로 진희의 턱을 위로 잡아당겼다.
허공에서 공포에 질린 시선이 맞닿자 렉스는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하지만 너의 방식은 옳았다."
진희는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지 다시 동공에 생기가 돌았다.
"나조차 예상치 못했으니."
****
렉스의 무식한 처음 훈련과 마찬가지로 대련 중심의 검기훈련도 매일 반복되었다.
렉스는 생각보다 꼼꼼하게 진희의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원래 세계에서 짧은 시간에 승부를 보는데다가 지면에 거의 붙어있고 칼만 이용하는 펜싱을 했기에 장기전에 공중자세와 응용이 약했다.
언젠가는 렉스가 진희를 한손으로 번쩍 들어서 살상용 공중자세을 교정해주었고 또 언젠가는 검기를 거둔채 3시간 동안 긴 싸움을 하기도 했다.
진희의 성정이 무르디 무른 것을 안 렉스는 며칠간 아카데미 밖으로 데리고 나와 직접 가축의 도살을 시키기도 했다.
늘 삼겹살을 줄겨먹었고 마트에서 시뻘건 고깃덩이를 자주 보았지만 진희는 선뜻 생명을 직접 꺼트리는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살생도 반복이 되면 감정이 무뎌진다고, 진희가 어느정도 가축도살에 익숙해지자 렉스는 이번에는 개와 원숭이를 죽이게 시켰다.
가장 인간과 가까운 동물인 개와 인간과 비슷한 동물인 원숭이.
진희는 뽀삐라는 애완견을 기르고 있었고 인간과 닮은 원숭이만큼은 죽이는 것을 주저했다.
하지만 렉스는 똥고집을 부려 진희가 죽이는 것을 강행했고 거의 7시간이 지나서야 진희가 오열하며 개와 원숭이의 목에 칼을 꽂아넣었다.
촉촉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애원하며 바라보는 개를 처음으로 직접 죽인 진희는 그날 밤 하루종일 죄책감에 울었고 룸메이트인 엘레스가 꽤 곤란해했다.
이렇게 살생에 대한 무감각을 키우는 것이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렉스는 다시 목검 대련을 중심의 훈련으로 돌아갔다.
진희가 대련 때 쓰는 목검은 싸우는 족족 두동강나서 산을 이룰 지경이었고 진희가 첫빵을 날리면 3초만에 나가떨어지는 것은 일상이었다.
다만 날이 지날수록 나가떨어질 때까지 버티는 시간이 3초에서 5초로, 5초에서 10초로 늘어났다.
마지막으로 나동그러지졌던 시간이 5분일 때.
"하아압!"
진희는 이제 제법 날카로운 자세로 목검을 휘둘렀다.
카앙!
역시나 목검은 처음 때랑 마찬가지로 쉽게 잘렸다. 하지만 진희는 처음과 다르게 그대로 승기를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뒤로 물러나 잘린 목검 조각을 집어들었다. 렉스가 힘껏 팔을 벌려 검기로 빈틈을 없앨 때 진희는 빠르게 몸을 굴려 그의 가랑이 사이로 삐져나왔다.
언뜻 보면 민망한 공략이지만 싸움에서는 그런거 없다. 오직 승자와 패자만 가릴 뿐.
진희는 렉스의 뒤로 나오자마자 그가 당황해 주춤하는 사이 목검 조각으로 겨드랑이 밑부분을 파고들었다.
"으크큭!"
렉스는 간지러움에 몸서리를 쳤고 그 순간 진희는 다른 한쪽 손날로 렉스의 목을 퍽 쳤다. 그리고는 렉스의 망토자락으로 그의 목을 한바퀴 감아서 콱 조였다.
콰당!
렉스의 몸부림에 바닥으로 떨어진 진희는 다시 자세를 추스려 관조적으로 싸움의 경과를 지켜보았다.
렉스는 망토를 풀면서 앞뒤로 기우뚱하더니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는 사래가 걸려 두손으로 목을 부여잡고 크게 기침을 했다.
"쿠...쿨럭!"
처음 대련과 그림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무릎꿇은 자와 그앞에 서있는자,
승자와 패자.
구도는 똑같으나 인물만 바뀌었다.
진희는 처음 이겨보는 렉스와의 대련에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 했다.
'드디어 이겼어!'
렉스는 한동안 기침만 하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일어났다. 그의 목에는 새빨간 손자국이 남아있었다.
"이거...제대로 한방 먹었군."
렉스는 목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이제 갑옷을 벗거라. 나의 가르침은 이걸로 끝이다."
"네?"
진희는 마냥 좋아하다가 두 주먹을 꼭 쥐며 놀라 반문했다. 지금, 가르칠게 없다고?
"못들었느냐? 스승을 이긴 제자에게 더이상 스승이라 불릴 자격이 없으니 썩 꺼져라."
말은 험하게 했으나 그 안에 애틋함이 서려있었다. 진희는 목울대가 달아올라 금세 눈물이 눈가에 고였다.
"하...하지만 저는 검기조차 터득하지 못했어요."
진희는 렉스를 이기기는 했으나 아직 평범한 몸이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렉스처럼 무형의 기운이 솟아오르지가 않았다.
하지만 렉스는 의미모르는 잔잔한 미소로 화답했다.
"?"
매번 고함지르고 열성적이던 렉스가 아무 말도 없자 영문을 모르겠는 진희는 스스로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게로 짓누르던 갑옷을 투구부터 하나하나 뜯어내자 깃털같은 육신이 반겨주었다.
처음 훈련 시작 때는 그렇게도 꼴 보기 싫은 갑옷이었으나 막상 벗는 날이 오게되자 정이라도 들었는지 자신의 피부같았다.
또한 학교수업다운 수업이 아니고 지옥같은 선수촌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수업에 늘 학교를 다니고 싶었던 진희로서는 처음엔 질색했만 돌이켜보니 아쉬움만 가득했다.
마침내 무릎보호대까지 모조리 갑옷을 걷어내자 렉스는 비틀비틀 걸어가 한손으로 가볍게 갑옷을 들었다.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진희의 땀에 젖은 머리를 흐뭇하게 헝클였다.
진희는 렉스의 행동을 하나하나 받아주며 새삼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 한구절이 떠올랐다.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
"어? 마스터, 벌써 끝났어요?"
엘레스는 비토르랑 한창 노타루두스를 하다가 들어오는 진희를 보고 은근슬쩍 일어났다.
보아하니 지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진희의 귀환을 핑계삼아 슬쩍 벌칙을 피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래도 늘 진희가 개패듯이 맞고 팅팅 불어 새벽에 오던거에 비하면 지금은 아직 초저녁이다.
"먹을거라도 드릴까요?"
엘레스는 탁자에 놓인 크래커 몇조각 집어들며 물었다.
"아니, 그냥 쉴래..."
진희는 겉옷을 소파에 휘리릭 던지고는 침대에 누우려고 준비했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피니 5개월간 삭은 근육이 쭉쭉 늘어나며 청량감을 주었다.
그런데 기분 탓이었을까?
"응?"
진희가 침대방으로 들어가려고 기지개를 피고 있을 때, 방 안의 공기는 적막하다 못해 삭막하게 변했다.
늘 떠벌거리며 진희의 비위를 맞추던 엘레스와 그에 못지 않게 말많은 비토르가 한마디도 없이 굳어있자 이상함을 느낀 진희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
눈 앞에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소파는 깔끔하게 두동강이 났고 진희가 던진 겉옷은 소파를 넘어 바닥에 쳐박혀있었다. 말그대로, 폭탄맞은 듯이 구멍이 뚫린채 빈틈없이 처박혔다.
겉옷이 박힌 바닥은 균열이 나서 부스러진 잔해와 파편들이 여기저기 나돌아다녔다.
다같이 입을 벌리고 한눈으로 겉옷을 바라보던 눈빛들이 진희에게 집중적으로 쏠렸다.
꿀꺽.
비토르가 낸 소리였다. 엘레스는 아연실색한 얼굴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진희의 팔을 가리켰다.
"마...마스터..."
분위기에 같이 휩쓸려 얼어있었던 진희는 천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팔부터 시작해 전신에 푸른색의 은은한 기운이 그녀의 육체를 휘감고 있었다.
웅웅거리며 공기와 마찰을 일어내는 소리는 신비롭고 오묘하게 귓가를 스쳤다.
보는 이들의 시선을 홀리는 이 기운.
"야...너 설마..."
두동강 난 소파에 뻣뻣하게 앉아있던 비토르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진희의 몸에 서린 기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드디어, 진희가 검기(劍氣)를 터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