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초목을 다스리며 조화를 이루는 종족.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는 균형을 사랑하고 중도를 지키려는 종족.
변화보다는 안정을 꾀하는 종족.
엘프는 순결함을 상징하지만 남녀가 만나 세대를 이루는 것은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 갓 태어난 아이는 정반대 속성인 남녀의 기운이 섞인 순수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비토르는 바로 그런 엘프 종족이었기에 본인 눈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이 난감할 수밖에 없다.
한국으로 치자면 보수정당 차기대표나 다름없는 보수의 끝판왕인데 남자가 추파를 던지는 장면을 그가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리가 만무하다.
'아니...어떻게 저런....'
비토르는 난잡한 수작을 부리는 엘레스에게 살인충동을 느낄 정도로 크나 큰 컬쳐쇼크를 받았다.
하지만 꽤나 유순한 성정의 비토르여서 망정이지 만일 이 장면을 다른 엘프가 보았다면 저들을 신의 섭리를 어그러트리는 자로 규정하고 즉결처분을 내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엘레스의 눈빛을 우정이라고 왜곡했던 비토르는 결국 확신이 서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엘레스의 눈치를 보았다.
"......."
원래대로라면 이런 말에 발끈해야할 엘레스는 비토르의 산통 깨는 말에 황당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취향을 함부로 매도하다니? 엘레스는 그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진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엘레스와 렉스 단 둘뿐.
엘레스는 경솔하게 보는 눈이 많은 아카데미에서도 은연 중에 진희를 여자로서 대했던 것이다.
이도 저도 못 하고 아무 말 없는 엘레스를 본 비토르는 그의 무언이 긍정이라고 여기고는 재빨리 덧붙혔다. 한쪽 눈까지 찡긋이며 애써 쾌활한 투였다.
"괜찮아. 취향은 존중해줄게."
명색이 엘프라서 균형과 조화를 사랑하지만 유희가 끝나기 전까진 서로 친구인만큼 비토르는 그의 결함(?)까지 눈감아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진정한 친구라면 이 정도는 참아줘야지.'
그런 눈물겨운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엘레스는 자신의 취향을 온몸으로 부정하려다가 진희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오해를 뒤집어쓰기로 했다.
'그래...마스터를 위험에 빠트릴 순 없어!'
진희를 사이에 두고 두사람은 서로 다른 의미로 얼굴이 빨개진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덕분에 진희의 쌔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나 갈게."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운 비토르는 제풀에 못 이겨 일어나버렸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황급히 방 밖으로 나갔다. 엘레스는 복잡한 심정 때문에 한손으로 지끈지끈한 이마를 짚었다.
'아, 머리야.....'
****
다시 모래가 잔뜩 깔린 콜로세움.
렉스는 떼싸움을 시킨 어제랑은 다르게 경기장 상층부에 아이들을 앉히고서는 두 명의 학생들을 뽑았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토너먼트를 시작해서 대진표를 짜온 렉스는 자기 맘대로 아무나 둘끼리 붙혔다.
다 거기서 그 실력인 아이들이 대다수라 반드시 맞붙어야할 학생들이 적기 대문이다.
"하압, 합!"
싸우는 저들끼리 기합소리는 당당하게 냈으나 실력은 역시 형편없었다.
자세도 어정쩡한게 영 보는 맛도 없었고 터무니 없을 정도로 김이 빠지는 수준.
뽑힌 학생 둘 다 밑바닥을 맴돌다 못해 땅밑으로 꺼지는 수준이라서 이게 칼싸움인지 눈치게임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누가누가 칼빵놓나 내기내기 해보자.
이 상황을 딱 맞게 수식해주는 문장이다. 그 주제에 서로 겁은 많아서 이리저리 피하느라 시간은 계속 지체되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정말 뛰어난 몇 명을 제하고는 싸우는 학생 족족 이러한 한쌍이 다수였다.
총 30명의 학생증 절반도 못 끝내고 결국 해가 져버리자 수업을 파하고 말았다.
하루종일 경기다운 경기를 못 본 렉스의 똥 씹은 표정도 덤이었다.
하루종일 앉아서 싸움구경하느라 다리가 망부석이 되버린 진희는 숙소로 가려고 하다가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렉스는 마치 최종보스처럼 팔짱을 끼고서는 한손으로는 진희의 정수리에 솥뚜껑만한 손을 턱 얹었다.
"가긴 어딜가?"
".....예?"
어제 렉스에게 아낌없이 탈탈 털렸던 진희는 그 트라우마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렉스는 무어라 말도 없이 강제로 진희의 팔을 잡고는 그대로 질질 끌고갔다.
"앗! 마스터!"
엘레스의 외침과 동시에 어깨가 탈구될 것같은 통증과 함께 진희는 속절없이 렉스에게 끌려갔다.
진희는 마치 목줄에 매인 개처럼 끌려갔고 엘레스와 비토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렉스의 납치를 지켜보았다.
"뭐지....?"
"나도 몰라....."
렉스랑 진희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자 그들은 하릴없이 저벅저벅 제 갈길 가버렸다.
한편, 진희는 렉스의 발걸음에 맞추어 열심히 발바닥을 놀리고 있었다. 렉스의 손아귀는 어찌나 빈틈이 없는지 아무리 힘을 줘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진희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렉스는 더욱 꽈악, 꽉 팔을 조였고 마침내 팔에 피가 통하지 않아 피부가 퍼렇게 변할 때 즈음, 렉스는 진희를 풀어주고는 손을 탁탁 털었다.
렉스가 진희를 데려온 이 곳은 검술학부 건물 안.
진희는 감각이 없는 팔을 매만지며 물었다.
"여긴 왜 온거죠?"
렉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강당 구석에 박혀있는 두꺼운 갑옷을 꺼냈다. 진희는 그 난생 처음 입는 무쇠갑옷을 주춤주춤 받으면서 렉스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갑옷이 손에 올려지자 마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무거웠다. 진희는 이 악물고 간신히 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입거라."
렉스는 더는 기다리기 싫다는 듯 짧고 굵게 명령을 내렸다.
진희는 어떻게 이걸 입냐고 반항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닥치고 입는 수밖에.
갑옷은 입는데만 10분이 걸렸다. 투구와 흉갑, 국부와 무릎보호대로 이루어진 전신갑옷은 지독하게 무거웠다.
렉스가 하품하다 지칠즈음 진희는 전신에 착용하는 것을 완료하고 정자세로 섰다.
렉스는 마치 오늘 먹을 아이스크림 개수를 고르듯 무심하게 뇌까렸다.
"강당전체 토끼뜀 1000바퀴, 오리걸음 1000바퀴, 달리기 3000바퀴, 팔굽혀펴기 5000번 지금 바로 시작."
"예......?!"
렉스가 너무나도 평온하게 말해 딴세상 이야기인줄 착각했던 진희는 금세 현실로 돌아왔다. 렉스는 빨리하라고 재촉하는 눈치였고 진희는 시작할 생각조차 없이 벙쪄있었다.
진희는 운동선수이다.
렉스가 나열한 운동쯤이야 매일같이 선수촌에서 하던거라 눈감고도 할 수 있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게다가 딱 봐도 0.1톤 이상은 되어보이는 갑옷을 입고 한다면 더더욱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진희는 소심한 반항을 했다.
"이거 하면 날 새는데 어떻게 해요?!"
"내일 수업은 빠져도 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투구 속 진희의 이마에는 힘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렉스는 자비라고는 한줌도 없는 싸늘한 시선으로 진희에게 말했다.
"나는 시간이 걸리는 걸 매우 싫어해."
안물안궁. 진희는 한마디 더 대들려다가 갑작스레 강당의 한쪽 벽면에서 나는 찢어지는 소음을 듣고선 고개를 돌렸다.
강당 한쪽 벽 전체가 처참하게 파였다. 마치 공룡이 한쪽 발로 가격한 것처럼 길죽한 흔적이 남았다. 파손된 자국 아래로 돌부스러기가 후두둑, 떨어졌다.
다시 렉스를 바라보니 그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그가 소드마스터만이 쓸수 있는 경지인 검기를 쓴 것이다.
그는 다정한 표정에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로 할때 어서 해라."
****
"헥헥..."
진희가 말도 안되는 미션을 수행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중간에 한번 엘레스와 비토르가 놀러오긴 했지만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았다.
구경꾼들이 모이는 족족 렉스가 다 쫒아내서.
애초에 자신에게 배우는걸 비밀로 하고말고가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냥 진희를 떠보려고 으레 한 말일 뿐이지.
렉스는 정말인지 지랄맞게 끈질긴 인간이었다. 진희가 조금이라도 지친 기색이 보이면 바로 불호령을 내려서 쉬지도 못하게 막았다.
이정도면 훈련이 아니라 착취라 해도 무방할 수준,
그녀는 마지막 팔굽혀펴기를 끝내자마자 덜덜 떨리는 팔로 짓눌리는 투구를 벗어던지고 맨바닥에 드러누었다.
천국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이리라.
"수고했다."
렉스는 무표정하게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무표정 속에는 감탄의 빛도 어려있었다.
보통 인간이라면 저 갑옷을 입고 달리기는 커녕 몸도 가누기가 힘들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입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진희가 입은 갑옷은 중량마법을 적용한 특수제작된 갑옷. 일반인은 입자마자 오징어가 될 것이다.
무술인 중에서도 아직까지는 저걸 입고 미션을 성공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간 렉스가 제자를 찾아 나서면서 아무나 입어보라 시켰지만 모두 갑옷을 건네는 족족 손뼈가 으스러졌다.
이와 같이 진희에게도 천근만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움직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몸은 마치 물먹은 솜처럼 주인 말을 듣지를 않았고 흐르는 땀 때문에 갑옷 안에 습기가 차올랐으나 환기를 하지 못해 계속 찝찝했다.
하지만 렉스의 말도 안되는 미션을 성공함으로서 진희는 그녀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했다. 인간을 초월했다고.
렉스도 충분히 그녀의 능력이 놀라웠지만 그는 계속 일관된 표정으로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거라. 내일 또 보자."
'그냥.....죽고 싶다...'
진희는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어제는 정신적으로, 오늘은 육체적인 충격을 선사해준 렉스는 정수리를 긁적이며 본인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완전히 떡이 된 진희를 빤히 바라보면서.
"쩝, 너무 심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