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이. 벌 선지 얼마나 됐다고! 똑바로 안 해?”
복도까지 담임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박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교무실 문을 노크하고 열었다.
“아이고, 영도 아버님. 바쁘신데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박회장을 알아본 담임이 후다닥 달려가 박회장을 맞이했다.
“아닙니다. 아들 교육 잘못 시킨 제가 사과드려야죠. 죄송합니다.”
박회장은 담임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차린 뒤, 일렬로 엎드려뻗쳐 있는 학생들을 훑어봤다.
영도를 찾던 박회장의 시선이 교무실 한쪽에 있는 소파로 향했다.
영도는 그곳에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하게 앉아있는 모습이 사고치고 교무실에 끌려온 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영도를 본 박회장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영도의 담임이 박회장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영도야 뭐, 이번 일은 실수라고 할 수 있죠. 다 애들이 선동해서 한 거지 영도가 잘못이 있겠습니까?”
“경찰 말로는 폭주족 맨 앞에 영도가 있었다고 하던데. 학교에서는 그렇게 결론이 났습니까?”
“하하하. 달리다 보면 앞으로도 갔다가 뒤로도 갔다가 하는 거니까요.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담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렸다.
박회장은 생각이 복잡해졌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학교 측에서는 영도가 사고를 쳐도 감싸주기에만 급급해 했다.
영도가 태산그룹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 그 누구도 영도를 쉽게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영도는 아들이기 이전에 한 기업의 수장이 되어야 할 아이였다.
영도 같은 아이들에게는 사춘기 반항 같은 건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다른 그룹의 아이들은 입시를 위한 공부는 물론이고, 벌써 경영수업까지 열을 올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영도를 바로잡아야 한다.
박회장은 태연하게 자신과 눈을 맞추며 이어폰을 귀에 꽂는 영도를 무겁게 바라봤다.
**
“부르셨어요?”
저택 응접실로 들어온 영도가 박회장과 고여사의 앞에 앉았다.
박회장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앉을 거 없다. 짐 싸. 그 얘기하려고 불렀다.”
멈칫하던 영도가 쓴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저 쫓겨나는 건가요?”
“....”
“기왕이면 엄마 쫓아낸 곳으로 보내주세요. 이참에 모자 상봉 좀 하게요.”
영도의 말에, 고여사가 불편한 기색을 비치며 일어났다.
“오늘은 언제 그 여자 얘기가 나오나 했네. 저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
고여사가 응접실을 나가자, 박회장이 영도를 노려봤다.
“언제까지 이럴 셈이냐? 너 벌써 열여덟이야. 엄마 보고 싶다고 응석부릴 나이는 지났잖아!”
아버지에게 쫓겨나는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던 영도의 눈빛이 이번에는 흔들렸다.
“....그게 고작 열여덟에 될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
“제 앞에서 엄마가 끌려 나갔어요. 최소한 사람이라면. 열여덟이 아니라 죽을 때가 되도 그건 못 잊어요. 최소한 사람이라면! 아들한테 그거 잊으라고 말 못해요!”
두 사람은 지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엄마와 헤어졌을 때 영도의 나이는 10살이었다.
그때, 영도는 아버지 없이 엄마와 단 둘이 살았다.
하지만 행복했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자신과 엄마를 무척이나 사랑했지만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죽을 때까지 남은 가족들 생각에 편히 눈을 감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영도는 아버지를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며 성장했다.
하지만, 10살이 되던 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자신과 엄마를 찾아왔다.
알고 보니, 모든 것은 엄마의 거짓말이었다.
사고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는 사랑밖에 없는 엄마를 버리고, 더 많은 돈과 힘을 줄 수 있는 정략결혼을 택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10년 후. 엄마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그렇게 엄마를 찾아와 영도를 뺏어갔다.
핏줄이 끌려서기도 했지만 아내인 고여사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가 더 컸다.
그렇게 영도는 큰 저택에서 낯선 아버지와 새어머니와 함께 외롭게 남겨졌다.
그런 영도에게 인사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던 엄마.
그리고 엄마를 쫓아내던 무서운 아저씨들.
차가운 시선으로 그 모습을 보던 새어머니.
남의 일처럼 고개를 돌리던 아버지.
이 모든 것이 영도의 가슴에 사무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때, 영도는 결심했다.
절대로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이 되지 않겠다고.
그 결심은 18살이 된 지금도 지켜지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이번 일은 뜻대로 해드리고 싶었다. 매일 독기 품고 아버지와 싸우면서 사는 일상에 영도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눈에 힘을 푼 영도가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짐이랑 여권 챙겨서 지금 바로 나가드릴게요.”
방으로 올라가려는 영도에게 박회장이 말했다.
“여권은 왜?”
“..한국을 나가려면 여권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외국으로 보낸다고 한 적 없다.”
“?”
“사고치는 자식 밖으로 내돌렸다가 약쟁이 되서 돌아오는 꼴 많이 봤어. 넌 그보다 더 할 놈이고.”
H그룹 셋째아들처럼 미국으로 쫓겨나거나, 정원물산의 첫째 딸처럼 영국으로 쫓겨날 거라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라고?
“그럼 저 어디로 가는데요?”
**
“뭐? 어디라고?”
영도가 소리를 치자 차 트렁크에 짐을 실던 민후가 놀라 움찔했다.
“아, 깜짝이야! 데시벨 좀 낮춰라.”
“방금 어디라고 했어?”
“정온군 정온읍. 앞으로 거기서 살 거라고.”
“군? 읍? 깡촌이란 소리야?”
“깡촌은 무슨. 서울이랑 가까워 임마.”
“아 어쨌든! 지금 서울 밖을 벗어난단 얘기잖아.”
“그럼, 뭐. 회장님이 청담동, 여의도 이런 데로 쫓아내실 줄 알았어?”
시골이라니. 미국 시골도 아니고 영국 시골도 아니고! 그냥 시골이라니!
세상을 잃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영도에게 가방 하나가 휙, 던져졌다.
“짐이나 실어.”
이씨. 입이 댓 발 나온 영도가 가방을 넣기 위해 차 뒷좌석을 열었다.
그때,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어디냐? 네 오토바이 내가 갖고 있다.]
같이 폭주를 뛰는 친구의 문자였다.
영도는 짐을 실고 있는 민후의 눈치를 봤다.
그래, 시골에서 내 인생을 종칠 순 없지.
영도는 초스피드로 휴대폰을 두드려 답장을 보냈다.
[야. 부탁 좀 하자.]
**
“조금 전 출발했습니다. 정온마을엔 4시쯤 도착할 예정입니다.”
김비서가 보고를 하자, 국을 한 술 뜨던 박회장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비서가 나가고 박회장과 고여사는 말없이 아침 식사를 이어갔다.
영도 없이 부부끼리만 함께 하는 아침 식사.
쉴 새 없이 반항하고 빈정대고 상처 주는 아들마저 집안에서 사라지자 저택은 침묵으로 뒤덮였다.
먼저 입을 연 건 고여사였다.
“왜 민후랑 같이 내려보내셨어요?”
“그래도 아들놈인데 믿을만한 놈한테 맡겨야지.”
“민후가 어른스럽긴 하지만 그래봤자 아직 대학생인데. 차라리 김비서가 낫지 않을까요?”
“김비서는 유능하지만 민후랑은 달라. 민후는 우리 집안을 위해서는 뭐든 할 애야.”
“?”
“내 돈으로 먹고 자고 공부했으니까. 철없는 어릴 때야 그저 그게 은혜 정도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그 아이도 알고 있겠지. 사실은 그게 다 빚이라는 걸.”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는 고여사의 시선에 대답하듯 박회장이 말했다.
“똑똑한 애니까. 그래서 내가 그 애를 좋아하는 거고.”
고여사는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더 이상 밥이 넘어가지가 않았다.
난임으로 힘들어 하는 자신의 앞에 영도를 데려다 놓았을 때부터, 내 남편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아인 민후를 아들보다 더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이 사람에게도 조금은 인간적인 면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민후 역시 박회장에게는 그저 두드려야 될 수많은 계산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
앞서 가던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다.
뒤따라서 차를 멈춘 민후가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영도 역시 창밖에 보이는 시골풍경에 눈을.. 부라렸다.
“깡촌 아니라며! 개깡촌이네 이거!”
“있을 거 다 있네. 저기 문방구도 있고. 저기 슈퍼도 있고.”
민후가 언덕길 입구 쪽에 있는 슈퍼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영도는 어쩌라고, 하는 눈빛으로 민후를 째려봤다.
“학생이 준비물 사고 군것질 하고. 그럼 됐지. 또 뭐가 있어야 돼?”
“많지. 그거 말고도 있어야 될 거 많지!”
“야. 그래도 너 서울에선 남고 다녔잖아. 여긴 공학이래.”
그때, 앞에 서있던 버스에서 영도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 두 명이 내렸다.
영도는 그 중에서 촌스러운 츄리닝 바람에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는 여학생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 여학생은 옆에 있던 친구를 보더니 꺅 소리를 내며 껴안고는 갑자기 처음 보는 곳인 듯 동네를 두리번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모자라 보였다.
“공학이 뭐? 이 동네 물 딱 봐도 답 나오는구만.”
버스가 출발하고, 민후의 차도 출발했다. 그렇게 영도와 설이는 서로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
언덕길 꼭대기에 있는 2층 주택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차 트렁크를 연 민후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려 영도를 깨웠다.
“자는 척 하지 말고 나와.”
“자는 척이 아니라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영도는 주택을 쓱 훑어보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나 이런데서 못 살아.”
“장난치지 말고. 빨리 나와!”
아, 짜증나. 영도는 괴로움에 온몸을 들썩였다.
때마침 구세주처럼 출발하기 전 문자를 주고받았던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정온마을 근처로 오토바이를 갖고 와 달라 부탁했는데 도착을 했나 보다.
오토바이를 타고 일단 이 마을부터 벗어나자. 며칠 버티다 보면 박회장이 유배지를 옮겨주겠지.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 가출 청소년 만드는 건 또 대외적으로 쪽팔릴 테니까.
그러려면 두 눈 부릅뜨고 있는 민후 형 앞에서 가방부터 챙겨야 되는데.
영도는 전화를 받으며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여보세요.”
[어, 나.]
영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네, 아버지.”
아버지, 라는 말에 민후가 영도를 힐끗 봤다.
영도는 통화를 이어가며, 짐을 내리는 민후 옆에 다가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내렸다.
[아버지? 옆에 김비서 있냐?]
“그런 것 까진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아버지.”
[알았어, 새끼야. 오토바이 갖고 왔어. 어디야?]
“아, 저희 도착했어요.”
[나도 왔는데. 여기 무슨 마을회관 옆인 것 같아. 오는데 얼마나 걸려?]
“에이, 얼마 안 걸려요.”
집 나오니 아버지랑 애틋해졌나.
민후는 박회장에게 사근사근 대답하는 영도가 매우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민후의 휴대폰도 울렸다. 박회장이었다.
본능적으로 후다닥 전화를 받으려던 민후가 멈칫하고 영도를 돌아봤다.
회장님?
그러면, 지금 영도랑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지?
민후의 시선이 영도가 든 휴대폰으로, 그리고 영도의 손에 들린 캐리어로 천천히 옮겨갔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민후가 화를 꾹 참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걸렸구나.
“너 튀지 마. 야!”
민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도는 언덕길 아래로 후다닥,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야! 박영도! 야 임마!”
“아 나 여기 살기 싫다고!”
영도는 허겁지겁 내려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뭔 소리야?]
휴대폰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계속 직진하면 슈퍼 있는 언덕길 하나 보일 거야. 그쪽으로 좀 와봐! 튀어와!”
전화를 끊으려던 영도의 손에서 핸드폰이 튕겨져 날아갔다.
영도는 재빠르게 다른 쪽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았다.
근데.. 아뿔싸! 이쪽 손에는 캐리어가 있었지..
영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캐리어는 썰매를 타듯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아까 정류장에서 보았던 모자란 여학생이 보였다.
“저기! 저것 좀 잡아주세요!”
아, 왜 쳐다만 보고 있어.
“저거! 저거!”
영도가 다시 소리치자 그제야 그 여학생은 캐리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움직이던 작은 두 손에 방황하던 캐리어가 잡혔다.
오케이. 씩, 미소를 지으며 달려가던 영도는 가까이에서 본 여자애의 표정을 보고 멈칫했다.
뭐야.. 얘 왜이래.
바로 캐리어를 낚아챌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영도는 움직일 수가 없어졌다.
저 표정은... 두려움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는 분명, 날 무서워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