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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의 집 2층에는 미친 무언가 숨어있다.
작가 : 접견
작품등록일 : 2016.8.26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댁에서 지내게 된 류설하와 류진, 그 집, 2층에서 승강기를 발견한다.
(지구라면, 시계탑의 숫자가 13까지 있을 리 없고, 건물이 허공에 떠 있지 않으며, 바다가 하늘에 뒤집혀 있을 리 없다. 구름이 그 바다 밑으로 붕붕 떠다니고 있을리가 없다. 태양이 두 개일 리도 없다. 잔디 잎이 먼지처럼 붕붕 떠다니고 있을 리도 없다. )

 
7. 그저, 그녀는 아이맥스 영화를 좋아하는 것뿐이다.
작성일 : 16-09-05 00:18     조회 : 293     추천 : 0     분량 : 14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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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그저, 그녀는 아이맥스 영화를 좋아하는 것뿐이다.

 

 “아이린...?”

 

 “설하의 머리가 아파해?”

 그녀가 물었다. 그 끝말을 제외한 어떤 어조변화도, 표정변화도 없었다. 이전과 바뀐 거라고는 옷차림. 짧은 반바지에 하얀색 오프숄더 블라우스로 바뀐 것뿐이었다.

 

 류진의 귓가에서 다시금 국회위원장의 연설이 맴돌았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인간 같지만, 인정없고, 고통에 무감각하고,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이 게으르고, 오만하고, 사이코패스같은 ’무감정 괴물‘들은, 사람을 죽일 때도 자기 동료들이 죽을 때도 눈물하나 흘리지 않는 짐승만도 못한 것들입니다.’

 

 방금 전의 기습 폭격의 광경도 떠올랐다.

 눈도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 불바다가 된 도시, 희생되는 병사들. 불타버린 나무들.

 

 ‘버쳐’ / 도살자들 / 테러범

 

 “...너 때문이야”

 류진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 거니?”

 

 “너네 버쳐 때문이라고!”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노와, 죄책감, 원망, 좌절감으로 인한 슬픔이 억눌린 듯한 표정이었다. 억지로 꾹꾹 누르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고, 감정 도화선의 불길은 거의 끝가지 다다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 끊는 냄비 뚜껑 틈으로 새어나오는 거품처럼, 평정심을 잃고 감정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무감각의 세계 속에 분노와 슬픔의 기생충 한 마리가 침투했다.

 

 “꺼져! 꺼지라고! 난 너네들이 혐오스러워! 대체 왜... 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네 손바닥도 다쳤어.”

 

 “닥쳐! 이 쓰레기 같은 괴물년아. 너넨 감정도 없지? 사람을 칼로 찔려도, 총으로 쏴대도 아무런 변화도 없을 거야. 뭐야 그거. 완전 싸이코패스잖아. 너넨 싸이코패스 집단이라고. 알아들어?”

 류진은 이성을 잃어 거의 미친 듯이 소리쳤다.

 

 아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말도, 대꾸도, 나비 날갯짓만한 움직임도 없었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넌 아무런 느낌도 없지? 아픈 게 뭔지, 알기는 해? 화나는 게 뭔지, 알기나 해? 슬프다는 게 뭔지, 남을 사랑한다는 게 뭔지, 알기나 하냐고!”

 

 갑자기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리듯 춤을 췄고, 방 안에는 냉기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함이 휩싸였다. 창문에는 성에가 끼고, 천장에는 서리가 돌았다.

 

 “그래, 그렇게 네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 봐, 지난 번, 날 죽여야 한다고 했지? 넌 순진함 뒤로 그 잔인한 면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곁으로는 온갖 아양과 가증을 떨면서 속으로는 별 욕을 다하지. 이젠 별 놀랍지도 않아. 인간이든 뭐든, 다 속 새까만 역겨운 새끼들이란 건 이미 오래전부터 깨달았거든”

 

 그녀는 손을 뻗은 후 휘저어 염력으로 류진을 벽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얼음이 순식간에 몰려와 그의 발과 손을 묶었다.

 얼음의 차가운 느낌이 느끼지 못했다. 너무도 큰 감정에 휩싸여, 육체적 고통은 의식 저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소파에 누운 설하에게로 다가갔다.

 류진은 악을 질렀지만, 얼음 다가와서 그의 턱과 입을 묶었다.

 

 그녀는 설하의 머리를 살포시 들어올렸다. 무표정으로, 우아하게. 설하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에 댔다.

 한 순간에, 섬광이 일더니, 이내 꺼졌다.

 빛이 꺼짐과 함께, 냉기가 사라지고, 온기가 다시 덮었다. 얼음은 녹아서 미지근한 물로 변했다.

 설하의 몸에 난 상처는 말끔하게 지워졌다. 아이린은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다시, 설하를 아이를 다루듯이 편안하게 눕혔다.

 류진은 입이 자유로워졌지만,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이린은 성큼성큼 류진에게 다가왔다. 한 대칠 것 같은 기세였다. 류진은 뒷걸음질 치지만, 이미 뒤는 벾이다.

 

 “저기... 난...”

 

 류진이 난처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덮쳐왔다.

 키스,

 혀가 맞닿는다. 그녀의 한 손은 류진의 다친 손을 꼬옥 잡았고, 다른 한 손은 류진의 머리를 살짝 잡았다.

 류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갖 감정의 기생충은 사라지고, 무언가, 아주, 아주 작은 새싹이 응어리의 모래 속에 심어졌다. 심장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안정되고 있었다.

 몇 초쯤 지났을 지, 알 수 없다. 그것 자체로 시간은 정지장 속에 갇힌 듯 멈췄으니까.

 느낌이 어땠는지, 자세히 형용할 수가 없다. 순간, 머릿속의 모든 단어를 잃어버렸으니까.

 태초의 백지 상태로 돌아간 듯, 새하얗지만 동시에, 봄의 온기처럼 따스한 입술의 온기가 장밋빛으로 번져 있다. 양면이다. 겪어보지 못했던 인간의 양면이다.

 

 그녀가 입을 뗐다.

 

 “...사랑을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

 무표정도, 무(無)어조도 아니었다. 그것은 눈 덮인 들판 한복판에 드러난 꽃 한 송이 같은 무언가.

 뚜렷하게 얼굴에 나타낸 세 번째 변화였다.

 

 그녀는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다가 나비처럼 자연스럽게 창가에 앉아,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왔을 때와 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새벽이 지나도록 한바탕 도시를 쓸어버린 버쳐들은 저 멀리,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군대는 병영으로 돌아가 다시 재정비하고, 수습꾼들이 건물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있었다.

 도승지는 공습이 끝나고, 카페에 돌아와 찻잔을 돌려주고는, 맨홀을 타고 제 32주택지구로 돌아왔다.

 선글라스 한쪽 알은 산산조각 나고, 가운의 한쪽 팔 부분은 찢어졌다 그 찢힌 자국 안에는 칼에 베인 듯 심하게 긁힌 자국이 남아있었다. 왼쪽발의 복숭아뼈는 금이 간 나머지 부어올라 절뚝거렸다. 그러면서도 아픈 기색은 물론, 작은 신음 조차 내지 않았다.

 

 드디어 안락한 집으로 돌아오자 익숙하고 포근한 향기가 그를 맞아주었다.

 설하는 소파에, 류진은 그 아래 바닥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하루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제일 길었던 밤이리라. 혼란의 평행 우주부터, 전쟁의 참극까지. 하루에 겪는 사람은 지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승지는, 방으로 가서 침대에 있던 이불을 가져다가 쌍둥이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왔던 때, 더러운 얼굴을 하며, 제 2 지구를 보면서, 얼마나 정신이 아뜩해왔던 때, 심신이 얼마나 지쳤던가. 믿었던 사람도 사라져 버린 와중에, 책 한 페이지로 홀로 나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고독했었던가. 정신력은 얼마나 소모됐던가.

 이 아이들은, 꽤 잘 버텨주었다. 고난의 성문을 두드리고, 숲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은 자들이다.

 

 선글라스는 벗어두고, 새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 가운 속에 있는 흰색 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다.

 가루가 목을 넘어가고, 위에 퍼지자, 온 몸에 활기가 돌았다. 금갔던 복숭아뼈는 다시 맞쳐지고, 베인 자국들은 다시 순식간에 재생되었다.

 기분 좋은 느낌을 가득 안고 거실로 나왔다.

 

 설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일어났니?”

 승지가 말했다.

 

 “여긴 어디에요?”

 

 “내 집이야.”

 

 “어떻게 된 거죠...?”

 

 “넌 머리를 다치고 쓰러졌었어. 하지만, 상처가 말짱한 거 보면 류진이가 재생가루를 쓴 모양이구나. 집 안이 엉망진창이 되도록 뒤져봤으니까, 그 정도는 찾아냈겠지.”

 

 “재생가루?”

 

 “물에 약간 타서 마시면 네 몸의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는 가루야. 꽤 비싸지.”

 

 “...류진은?”

 

 “밑에서 자고 있어. 지친 모양이야.”

 승지가 말했다. “너도, 다시 자.”

 

 설하는 대답안하다가 류진을 보며 말했다. 그는 베개도 없이 악몽을 꾸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잠들고 있었다.

 “아뇨, 일어날래요. 잘 만큼 잔 것 같아요.”

 

 그녀는 류진의 머리를 살짝 들고 자기가 베고 있던 베개를 베게 해주었다.

 그리고 귀에 속삭였다.

 “고마워”

 

 “그럼, 마당에 물 좀 주고 올래? 난 아침을 준비할게.”

 

 승지가 분무기를 건네줬다. 그녀는 받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여긴 물이 하늘로 날아가지 않나요?”

 

 “안쪽이면 얘기가 다르지. 여기서 하늘이란, 곧 땅이니까 말이야.”

 

 “뭔 소리에요?”

 

 “밖을 나가봐”

 

 그녀는 신발을 신고 문을 열어 밖을 나갔다. 승지도 따라나섰다.

 

 “여긴 대체...”

 

 “우린 지각 밑을 밝고 서 있는 거야. 사실, 저기 있는 태양이 지구 내핵이지.”

 

 “물은 어떻게 뿌려요?”

 

 “제 1 지구랑 똑같아.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여기서 분무기는 너무징징대서 말이야.”

 

 “징징대요?”

 

 “저번에 써봤는데, 물 뿌릴 때마다 서럽다면서 소리 내면서 울더라고.”

 

 “그럼, 마당에 그냥 물만 뿌려요?”

 설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아니, 사실 이것도 해야 돼.”

 승지가 그녀에게 권총을 건네주며 말했다. “땅에 쏘고, 그다음에 물을 뿌려. 잘 할 수 있겠지? 그럼, 난, 부엌으로 가볼게.”

 

 “잠깐만요. 지금 저보고 총을 쏘라고요? 전 못해요. 한 번도 총을 쏴 본적이...”

 설하가 그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설하는 마당에 홀로 남겨졌다.

 “아, 진짜....”

 

 그녀는 가에부터 할까, 중앙부터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냥 자신이 서있는 곳부터 하기로 결정했다. 대충하자는 심상이다.

 먼저 권총을 땅에 댄다. 두 손으로 권총을 잡아, 눈은 질끈 감은 채, 뒤로 돌렸다. 마치 터질락 말락하는 풍선을 무서워하는 아이처럼.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공포감에, 손이 살짝 떨려왔다. 그러다 걸리는 느낌이 나고, 총구에서 불꽃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탕”

 소리는 별로 크게 나지 않았다. 박수 치는 소리 정도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 충격으로, 다리에 흙이 튄다는 것. 그래서 싫증은 더 고조된 다는 것이다.

 

 분무기에서 물이 나와, 황무지 땅을 젖혔다.

 평행 우주이니 만큼 뭔가 나올까, 기대를 해보지만, 아무런 변화도 않았다. 그저, 약간 파인 흙에 물만 뿌리는 바보가 된 느낌을 격렬하게 느낄 뿐이었다.

 헛수고 같은 일은 왜 하는지, 그녀는 몰랐다.

 

 “탕”

 두 번째.

 

 반복 노동을 할 때, ‘힘이 든다’ 이외에 많은 생각들이 불쑥 튀어 나오는 법이다. 갑자기 10년 전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지며, 때로는 그 날 잊고 있었던 일정을 갑자기 번뜩이기도 한다.

 그녀가 떠오른 건 데이터였다.

 여기로 오기 전, 그녀는 남자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필요한 건 뭐든 사주며, 뭐든 해주겠다고 했었다. 실제로도, 그녀에게 옷이며, 신발이며 사주었다. 부담은 없었다. 그의 부모는 외교관으로, 집사까지 거닐고 있는 꽤 잘나가는 부자였으니까.

 이번 외할아버지댁에 머물러야 했을 때는, 자기를 데리고 가 달라고 했었다. 어디든 좋으니, 주말만 끝나면 사촌 언니는 직장으로 돌아갈 거고, 류진한테는 조용히 해달라고만 하면 세상만사 걱정은 없었다.

 데이터가 끊긴 건, 바로 그때였다.

 외할아버지댁 좌표를 찍어주려 했을 때. 절묘하게도 하필, 그 타이밍이다.

 

 “탕.”

 세 번째.

 

 “아 진짜!”

 흙물이 다리에 튀면서, 끈적거리고, 기분 나쁘게 차가운 느낌이 계속되었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분무기와 총을 내동댕이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다 했니?”

 부엌에서 승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죄송해요. 역시 어제 일 때문에 전 쉬어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한편, 속으로는 정반대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이딴 쓰레기 짓은 왜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기 싫어서 안 할래요. 정 해야 하는 거라면 당신이 하면 되잖아요.’

 

 “그래, 하지만, 네가 한 일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아 줬으면 한다.”

 

 “네?”

 

 “네가 한 게 멋진 일이라고.”

 부엌에서 고개만 내밀고 설하를 쳐다본 채 말했다.

 

 “저어, 꼬투리 잡고 싶진 않지만, 맨바닥에, 총 쏘고 물 뿌리는 걸 대체 왜 하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아직 못 본거니? 다시 밖에 나가보렴. 그럼 알 수 있을 거야.”

 

 그녀는 반신반의 한 상태로 밖에 다시 나갔다.

 놀랍게도, 총을 쏴댔던 황무지에 잔디가 자라 있었다. 지금 막 태어난 새 생명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그녀를 맞고 있었다.

 

 .

 .

 .

 

 식탁에는 각자의 접시 위에 담긴 토스트가 있었다. 식빵 안에 든 계란은 생선 알처럼 작아서, 수백 개를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상태에서 기름에 볶은 형태였다.

 

 “맨틀에서는 아침을 세 번 먹으라는 말이 있어. (영국 속담 패러디)”

 승지가 나이프로 빵을 자르며 말했다. 반으로 잘린 토스트는 또 반으로 잘려지고, 반으로 잘려졌다. 팔 분의 일 크기가 됐을 때, 그제서야 입으로 집어 들었다.

 

 “왜냐면, 맨틀에서는 해가 지지 않아서 아침 밖에 없기 때문이지. 근데, 너..류진”

 

 “네?”

 

 “재생가루, 어디 있던 걸 쓴 거냐? 옷장 위에 있는 약통에는 그대로던데.”

 

 “...재생가루요?”

 

 “타서 마시면 상처가 치료된데. 왜, 나한테 쓴 거 있잖아.”

 설하가 말했다.

 

 “...아”

 류진의 속이 타올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포크를 접시에 꾹 눌렀다.

 면접관에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을 때 찾아오는 심장의 출렁거림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몰랐다. 다만, 사실대로는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뭐. 찾아보니까 있던데요. 워낙에 다 돌아다녀 봤으니까요.”

 

 “...그으래?”

 승지가 말했다.

 

 “뭐, 그건 이제 지난 일이니까요.”

 포크는 여전히 접시를 꾹 누르고 있었다.

 

 “하긴 그래. 다 지난 일이지.”

 

 “위에는 상황이 어떤가요?”

 류진이 말했다.

 

 “좋아. 빠르게 호전되고 있어. 아마, 오후쯤이면 다 복구하고도 남을 거야. 다만,”

 승지가 끝말을 내려 음침하게 말했다.

 

 “다만 뭔가요?”

 설하가 물었다.

 

 “급식실 승강기가 안 먹혀”

 

 “뭐라고요?”

 

 “학교에는 원래 방어막을 걸어 놨었는데 이번 기습에는 꽤 타격이 커서 그 방어막이 뚫렸더라고. 그래서 학교가 한 번 무너졌었는데, 그게 문제였나 봐. 평행 세계 이동 기능이 완전히 상실됐어”

 

 “...그럼, 우린 못 돌아가나요?”

 설하가 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다른 건 다 좋아도, 어제 같은 일은 더 이상 겪기 싫단 말이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돌아갈 방법을 알아볼게. 당분간은 너희들, 여기서 지내야 할 거야. 내가 다 미안하구나.”

 

 갑작스런 비보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승지의 재미없는 농담도, 설하 특유의 ‘맛있다’의 연발도, 풀벌레의 속삭거림도 없었다. 그 동안에 제일 시끄러웠던 건, 각자 입에서 계란이 날치 알처럼 터지는 소리였다. 모두가 동시에 접시를 바라봤고, 그 중 승지는 다 먹었음에도, 더 먹을거리가 없나, 조사했다.

 아무래도 전날의 후유증이 도진 듯 했다. 승지와 설하가 그 순간에 간절하게 원하는 한 가지는, ‘제발, 분위기 전환겸, 누가 재밌는 말 좀 해봐’ 였다.

 류진은 자꾸만 새벽 일이 생각나, 침묵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설하가 고요를 깨고 나왔다. 승지가 기다렸다는 듯, 설하를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주겠다는 눈빛이었다.

 

 “초능력은 어떻게 쓰는 거예요?”

 

 “호오, 배워보고 싶니?”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초능력을 가지고 싶어 하잖아요. 그리고 어제 같은 상황에서 저 자신을 지킬 무기하나 쯤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헤헤...”

 

 “좋아, 마침 나도 베타 학교로 가는 거니까, 발현실에 한 번 들러볼까.”

 

 “들었지? 류진?”

 설하가 미소를 띄운 채 류진에게 물었다. 멍하니 생각에 잠기던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뭐? 나도? 난 왜.....컥“

 

 설하가 류진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가는 거지?”

 설하는 제발 분위기 좀 맞춰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쳇....”

 

 그들은 아침식사를 끝내고, 마당으로 나왔다.

 승지는 이전과 모델이 똑같은 새 선글라스를 끼고, 이번에는 얼음물이 담긴 물병을 들고 나왔다.

 

 마당은 황무지 같았던 푸석한 자갈밭이, 온통 잔디로 물들어 있었다.

 

 “밤새 누가 잔디 심었나요?”

 류진이 물었다.

 

 “밤새는 아니고”

 설하가 말했다. “아침 먹기 전에, 내가 다- 했지. 누구누구는 자고 있었지만.”

 

 “야, 내가 누구 때문에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그만.”

 승지가 앞장서다가 쌍둥이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누구 빠루 가지고 있는 사람 있어?”

 

 아무도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말했다.

 “물론, 없으시겠지. ”

 

 “그게 그렇게 필요한 물건인가요?”

 류진이 물었다.

 

 “아니”

 그가 다시 대답했다. “그냥 좀 싸우지 말고 가줬으면 해서.”

 

 그들은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 한복판의 맨홀 앞에서 멈췄다.

 

 “주택지구에 가는데 맨홀뚜껑을 매번 부셔야 되는 건가요?”

 류진이 물었다.

 

 “사실, 이 맨홀은 지름길이야. 원래는 제 30 주택지구 까지 가서 승강기를 얻어 타야 헤.”

 

 “또 몸을 떨어뜨리는 건가요?”

 

 “아니야, 사다리를 타야 돼. 떨어질 때야 뭐 중력에 맡겨도 되지만, 올라갈 땐 아니잖아.”

 

 승지는 그렇게 말하고 물통을 비틀었다. 몸에 얼음이 박힌 용이 튀어나왔다. 방울뱀 크기였다.

 

 “뚜껑 좀 열어 볼래?”

 승지가 용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용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맨홀 뚜껑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게 승지‘오빠’의 초능력이에요?”

 설하가 말했다. 그녀는 어젯밤에 쓰러진 터라 그의 능력을 보지 못했다.

 

 “맞아. 뭐든 액체가 담긴 걸 비틀면 인격체를 가진 용이 나와.”

 

 “저번의, 에테르는 뭔가요?”

 

 “증폭제지. 뭐. 먹고나면 살짝 맛이 가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소환된 용이 커 강력해지지.”

 

 그가 말하는 사이에 맨홀 뚜껑이 꽁꽁 얼어, 부피가 늘어나더니,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쩍 소리를 내며 박살나 버렸다.

 조각조각 나눠진 맨홀 뚜껑은 구멍 저 너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큼 작아진 용이 고개를 내밀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귀...귀여워...심쿵..”

 설하가 말했다.

 

 “자, 여기서부터는 날 따라해.”

 승지가 말했다.

 

 그는 물통을 가운 주머니에 넣고, 구멍에 머리를 내밀었다. 그 다음 손, 그리고 발을 집어넎었다. 보통 사다리를 타는 순서와는 정반대였다. 제 1 지구에서 이렇게 했다면, 사다리로 물구나무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중력은 다리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먼저 들어갈래?”

 설하가 말했다.

 

 “왜?”

 류진이 별 시답잖은 것 가지고 따진다는 듯이 물었다.

 

 “나 치마잖아 멍청아”

 

 “흥, 누가 너 팬티 볼까봐?”

 

 “잔말 말고 빨리 와라 얘들아.”

 구멍에서 승직 말했다. 동굴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울리는 목소리였다.

 

 “내가 먼저 간다. 그럼”

 류진이 말했다.

 

 사다리를 타고 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스무 번쯤 다리를 올라가니, 어제의 그 골목길이었다.

 

 류진과 설하가 차례대로 올라오자, 승지는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골목길에서 나와 시거리로 들어서자 어제 낮의 도시 풍경과 재회했다. 건물들은 완벽하게 복원되었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사람들이 어제 일은 잊은 건가요?”

 

 “아니, 그냥 워낙에 많이 벌어지는 일이라, 익숙해진 거지.”

 

 시내에는, 여기저기 꽃다발과 함께 종이 팻말이 놓여있었다. 가게 앞에도, 신호등 옆에도, 도로 한 복판에도, 심지어는 공중에도 있었다.

 ‘알렉산드르 한을 추모하며.’ ‘이의춘을 추모하머’ ‘...를 추모하며’

 

 전광판에는 국회위원장 이선문이 희생자들의 애도를 전하고 있었다.

 

 “불쌍한 영혼들이야. 그 놈의 버쳐들 때문에...”

 승지가 말했다.

 

 ‘버쳐’라는 말에, 류진의 심장이 철렁하면서 죄여왔다. 순간적으로 걸음걸이가 이상해지고 얼굴은 희미하게 붉어졌다.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국회위원장의 연설이 맴돌았다. 그 둘이 섞여 들어가면서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

 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버쳐도.... 그... 뭐냐....그...사랑을 느끼나요?”

 

 그가 ‘사랑’이라는 말이 어찌나 꺼내기 힘든지, 입에 쇠사슬 열 개는 달린 것 같았다. 내뱉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신기해했다. 자기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생각으로만 스쳐갈 말을 괜히 꺼냈다 싶엇다.

 

 당연하게도, 그의 말에, 승지와 설하는 경악했다. 그 방향은 서로 반대였지만.

 

 “너 어디 다친거 아니지? 네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세상에! 해가 서쪽에서 뜨겠어.”

 

 설하는 호들갑이다. 반면, 승지는 좀 더 분석적이고, 차분했다. 문과와 이과의 차이랄까.

 

 “...알다시피, 그 놈들은 무감정의 괴물들이야.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없어. 하물며, ‘사랑’이라는 고차원적인 휴머니즘 감정을 가지고 있을 리는 절대 없지. 백번 양보해서 있다치더라도, 그래, 버쳐들은 모기라고 보면 되. 그놈들에게 남녀관계의 사랑이란, 자손 번식의 짝짓기 행위이지, 결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의 근본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 거야.”

 

 “갑자기 그게 왜 나온 거야? ‘사랑’ 이라니?”

 설하가 물어왔다.

 

 “...그냥 궁금했던 것뿐이야.”

 류진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녀 특유의 눈빛은 그를 작아지게 했다.

 

 “에이~ 빨리 말해 봐. 너 누구 좋아하냐? 제 1 지구에 누구 좋아하는 애 있었지? 그래서 막 되게 급하게 돌아가려고 그런 거고. 맞지?”

 

 집요하다

 

 “아니야”

 류진은 계속해서 시선을 피한 채 걸으며 냉정하게 답했다.

 

 “야, 여자 눈에는 목 속인다. 이 연애고수 님한테 다 털어나 봐”

 설하는 자기 좀 보라는 듯 그를 계속 쳐다보며 말하지만 류진은 거기에 넘어갈 리가 없다.

 

 “아, 진짜 아니라고”

 결국, 그는 냉정을 잃고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그러자 설하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흥. 하긴, 너 같은 게 누굴 좋아할 리가 없지.”

 

 “네, 맞습니다. 내가 누굴 좋아할 리가 없지”

 류진이 말했다.

 

 “아니, 그래도, 그 여자 애... 아, 아니다.”

 설하는 말하다가 자기 입을 막아버리며 얼버무렸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승지가 물었다.

 

 “아니에요,”

 설하가 말했다.

 

 “그러고보니,”

 류진이 말했다. “초능력은, 아무나 되는 건가요?”

 

 “아니”

 승지의 대답은 단호했다. “사람마다 달라. 어제도, 카페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있었잖아. 그런 사람들f의 대부분은 비(非)초능력자들이야”

 

 “왜 다른 거죠?”

 류진이 물었다.

 

 “초능력은, 정신, 그 중에서도 무의식과 같은 내면세계에서 나와. 만약 무의식이 약한 사람은 초능력을 발휘할 힘이 없지, 반면 무의식이 강한 사람은 초능력이 현실로 발현되는 거고”

 

 “그걸 어떻게 판단해요?”

 설하가 물었다.

 

 “테스트를 할 거야. 방법은 두 가지인데, 베타학교에는 자연계열 학교라, 초능력관련 시설이 많이 없어서, 서로 다른 걸 골라야 해.

 그 중에 하나는 육체적 한계를 이용하는 거야. 거의 죽겠다시피 한계를 주면 정신이 아뜩해지면서 간접적으로 무의식이 의식적으로 드러나, 만약 거기서 버틸 수 있다면, 통과, 발현이지.”

 

 “최악인데...?”

 설하가 말했다.

 류진도 속으로 동의했다.

 

 “초능력은 쉬운게 아니란다. 자, 그럼 두 번째 방법은 꿈과, 과거의 기억들 그러니까, 자신의 진짜 내면을 파고들어서 거울처럼 맞닿게 해보는 거지. 여기서 내가 모니터링 해야돼. 아무튼, 거기서 통과하면 발현.”

 

 누가 봐도 두 번째 방법이 더 쉽고 간편해 보였다.

 설하는 류진과 치열한 접전이 있을 것이고, 가위바위보 단판승제로 가는 수밖에 없겠다고 예상했다.

 

 “전 첫 번째 걸로.”

 류진이 외쳤다.

 

 “엥? 진짜? 나야 좋긴 하지만. 왜 굳이 어려운 걸 하는 거지?”

 설하가 말했다.

 

 “난 비주류거든”

 류진은 그렇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어제의 기억을 모니터링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승지가 최종 결론을 내렸다. “너희들 초능력이 뭐가 될지 기대가 되는데?”

 베타학교에 다시 왔다. 단 하루만이지만, 왜인지 한 달은 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문을 지나고, 본 건물로 들어갔다.

 널은 복도에는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고, 천장에는 주황색 샹들리에가 줄을 이으며 달려있다. 벽에는 인상파주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앞에는 난간대가 넓은 계단이 있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이 층, 삼 층 계속 오르다가 칠 층에서야 계딴을 벗어나고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염력 연구실, 비파괴 연구소, 초능력 연구 총괄 본부 등 많은 방들을 지나쳤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복도 맨 끝, 호실판에 초능력 발현실 1, 이라고 쓰여 있는 방이었다.

 

 들어가보니, 침대 두 개가 겨우 들어갈 만큼 작은 공간이었다.

 구석에 작은 서랍 하나가 있고, 방 한가운데에는 치과에서나 볼 법한 의자에 누워 자고 있는 누군가 있었다.

 그는 옆머리가 목까지 장발에 끝이 살짝 펌이 들어있었고, 턱과 입가에는 엷게 수염이 나 있었다. 그렇다고 지저분하다, 라는 느낌은 없었다.

 

 “여기가 설하가 있어야 할 곳이고, 류진, 너는 다른 데로 가야 돼”

 승지가 말했다.

 

 “누구에요?”

 설하가 속삭이며 물었다.

 

 “저 사람이 널 도와줄 거야.”

 마찬가지로 승지가 속삭였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미츠오카!”

 

 “음?”

 

 “일 들어왔어”

 

 “...사람?”

 

 “저 여자애 보이지?”

 

 “엉”

 미츠오카가 실눈을 뜨며 말했다.

 

 “네 초능력 발휘 좀 해봐”

 

 “엉.”

 그러더니, 기지개를 켜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름이 뭐라고?”

 

 “류설하요”

 설하가 말했다.

 

 “여기에 누워라”

 

 설하는 그 말대로 했다. 그녀는 눕고 나서 재킷 깃을 고치고, 치마를 살짝 밑으로 당겼다.

 

 “승지, 넌 나가줘. 저 애도 데리고”

 

 “잘 할 수 있어?”

 

 “몇 년 짼데, 이거 하나 못 하겠냐”

 

 “하긴”

 

 승지와 류진은 문을 닫고 방에서 나갔다.

 

 “자아”

 미츠오카가 커튼을 켜고, 불을 끄며 말했다. “편안히 있어”

 

 그는 서랍에서 니크릴 장갑을 꺼내 양손에 끼고, 의자에 달린 스탠드를 켜서 설하의 얼굴에 비췄다.

 설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왠지 모를 긴장감이 돌아, 심장박동이 살짝 빨라졌고, 양 손은 주먹을 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절대, 절대 소리 지르지 마라”

 미츠오카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설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렇게 힘든 건가요?”

 

 “아니, 그냥 밑에 도서관 있으니까, 시끄럽게 하면 안 돼. 안 그러면 나 쫓겨나”

 

 “아픈 건 아니죠?”

 설하가 말했다.

 미츠오카는 보안경을 끼고, 그녀 눈앞에 나타났다.

 

 “그건 장담 못 해”

 

 미츠오카는 왼손을 그녀 얼굴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순식간에 손에서 불꽃이 나타나 뱅글뱅글 돌았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다가, 거의 원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갑작스럽게 폭발하면서 설하는 기절하고 말았다.

 

 .

 .

 .

 

 “전 어디로 가죠?”

 류진이 물었다.

 

 “한 층 더 올라가서 발현실 2로.”

 승지가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정확히 어떻게 육체적 한계를 끌어 올린다는 거죠?”

 

 “극저온으로. 거의 의식을 잃을 때까지 널 얼음물에 담글거야.”

 

 “...얼어 죽으라는 말을 돌려서 하시는 건가요?”

 류진이 불안한 눈초리를 보내며 말했다. 그러자 승지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냐, 이건 이래봬도 아주 안전해. 죽는 사람은 없었다고. 부상은 있어도.”

 

 “...안 하면 안 될까요? 하고 싶은 건 설하지. 전 아니잖아요.”

 류진이 그렇게 말하자, 승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네가 여기에 얼마나 머물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사이에 버쳐들이 널 공격한다면, 누가 널 지켜주니? 아침에 설하가 배우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어차피 내가 강요할 생각이었어. 그러니, 넌 이걸 원해서 하는 게 아니야. 내가 하라고 해서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혹독하겠지만, 어쩔 수 없어.”

 

 그들은 8층에 다다르고, 마찬가지로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호실판은 초능력 발현실 2 (남) 이라고 쓰여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발현실 1보다는 공간이 조금 넓었다. 왼쪽에는 옷장이 있고, 오른쪽에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큼 넓직한 실험대가 있었다. 실험대는 바닥에 닿지 않고, 다리처럼 양쪽 벽에 붙어 있었다.

 

 “자, 옷을 벗어라”

 “네?”

 

 “벗어서, 저기 옷장에 넣어놔. 그리고 거기 있는 옷으로 갈아입어”

 승지를 실험대를 가리켰다. “다 갈아입으면 불러라”

 

 그는 문을 닫고 나갔다. 발현실 안에는 이제 류진 홀로 남아있었다.

 류진은 먼저, 옷장을 열었다. 안에는 하얀 반팔, 반바지 발현복이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윗옷 오른쪽 가슴에는 고대 알파벳, 베타가 흘림체로 새겨 있었다.

 

 그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운 듯 이곳저곳 눈치보며 천천히 벗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걸 확신하고는 평소처럼 벗었다.

 

 발현복 사이즈는 류진에게 컸다. 어깨 부분이 축 늘어졌고, 허리 끝자락은 허벅지까지 내려왔으며, 바지는 팔뚝 하나가 들어갈 만큼 헐렁했다.

 

 “승지형?”

 류진이 문 너머로 살짝 들리게 외쳤다.

 

 “다 입었어?”

 

 “그게 아니고, 옷이 너무 큰데요?”

 

 “아, 그거. 일단 가만히 있으면 돼”

 승지가 들어왔다.

 

 “그냥 입으란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고, 옷이 저절로 맞춰 질거야. 옷이 착용자를 인식해서 사이즈를 조정하거든”

 

 정말로 그랬다. 발현복은 안으로 오므라들며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전체적으로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살짝, 두꺼워졌다.

 

 류진은 실험대에 올라가 누었다. 금속이 등에 맞닿아 차가웠다. 그의 시선은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향했다. 승지는 그에게 다가가 손목, 발목을 실험대에 붙어있는 금속 족쇄에 걸었다. 그의 차렷 자세로 몸이 단단히 고정되어,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럼, 시작한다. 꽤 오래 걸리니까, 난 볼일 보려 나갈게.”

 

 승지는 실험대 밑의 ( ) 버튼을 누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실험대는 외곽은 남겨두고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삼십 센티미터쯤 내려갔을 때, 각진 틈 사이에로 물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이곳의 물은 위로 떨어지지만, 다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온도는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게다가 안에는 냉방장치가 부착되어 있는지, 찬바람까지 불어왔다.

 

 그의 머릿속에 괜히 했다, 싶은 후회가 가득 찼다.

 안 하려해도 강제로 하게 할 거라니, 어쩔 수 없겠지만, 최대한 반항해보지 않았던 것이, 미련이 남았다.

 물이 계속해서 점점 불어나 갈비뼈 부근까지 차올랐다. 심장을 옥죄는 추위에 벌써부터 몸이 슬슬 떨려왔다. 손은 주먹을 쥐고, 발가락을 최대한 오므렸다. 눈을 꿈뻑 감았다 뜨고, 입을 뻐끔거리며 불규칙한 숨을 내쉬었다.

 

 수위는 코로 겨우 숨쉴 수 있을 정도로 올라가서야 고정되었다. 온 몸을 뤼감는 추위에, 저절로 이가 딱딱거리기 시작했다. 어금니를 앙 물어도, 미세한 떨림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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