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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신월이 뜨던 밤
작가 : 달리아
작품등록일 : 2017.11.13

신월이 뜨던 밤, 죽은 중전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시각, 서울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한 소월. 눈을 떠보니 내가 중전? 소월의 좌충우돌 중전 적응기.

 
빌어먹을 몸뚱이
작성일 : 17-12-14 04:58     조회 : 223     추천 : 0     분량 : 9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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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쨍그랑! 쾅!

 

 그 시각, 인빈의 처소에서는 무언가 부서지는 굉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나인들의 부축을 받는 김 상궁의 찢어진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옆에는 박살이 난 장신구 함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짜악!

 

 강한 마찰음과 함께 최 상궁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인빈의 분노 어린 음성이 뒤이어 따라왔다.

 

 "네 이 년! 네년이 안심하라고 하지 않았더냐!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라 하지 않았냔 말이다! 근데 중전이 살아나? 그년이 선녀라고? 내 이따위 말을 듣기 위해 지금까지 참고 기다렸는 줄 아느냐? 저 천한 것들이 얼마나 나를 비웃었는지 똑똑히 보지 않았느냐! 내 오늘 네년의 사지를 찢어놓아야 직성이 풀리겠다!"

 

 광기에 젖은 눈으로 두리번거리던 인빈이 깨진 도자기 조각을 꼬나들고 비틀거렸다. 반쯤 벌어진 입 사이로, 퀴퀴한 술 냄새가 배어 나왔다. 최 상궁은 그런 인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는 한숨짓듯이 말했다.

 

 "마마. 이것이 과연 소인의 탓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어찌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것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분노를 거둬주시옵소서."

 

 인빈은 꼬박꼬박 제 할 말을 내뱉은 최 상궁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뭐라? 그래서 네년은 모르는 일이다?"

 "…."

 "네년이 정녕 돌아버린 게로구나! 감히 내게 그딴 말을 지껄여?"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빈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도 평온한 안색을 한 최 상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마. 비록 중전이 살아났다 한들 어디 달라진 것이 있겠사옵니까? 지금 궁 안에 중전을 지지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사옵니다. 어디 그것뿐이옵니까? 중전은 그 태생부터가 심약한 사람이옵니다. 더군다나 몸까지 허약하지 않사옵니까? 우연찮게 살아났다고 하나, 다시 죽을 날을 받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거늘, 마마께서는 대체 무엇을 걱정하시는 것이옵니까?"

 

 말을 멈춘 최 상궁이 잠시 숨을 고른다. 이내 최 상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마께서 지금 하셔야 할 것은 단 하나이옵니다. 내명부에서의 마마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시고, 그 힘으로 중전이 다시 살아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셔야 하옵니다. 그리하여 중전이 스스로 본인의 무덤에 걸어들어가게끔 해야 하옵니다. 이미 한 번 성공하시지 않았사옵니까? 두 번째는 더욱 쉬울 것이옵니다."

 

 잔혹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최 상궁이 고개를 조아렸다. 인빈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는 손에 쥔 도자기 조각을 휙 던져버렸다. 비뚤어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조각은 최 상궁의 뒤에서 떨고 있던 나인의 손등에 박히고 말았다.

 

 "꺄악!"

 

 가만히 서있다가 봉변을 당한 나인이 놀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인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인빈의 눈치를 살피던 김 상궁이 황급히 다친 나인을 데리고 처소를 나갔다. 언짢은 기색으로 제 앞에 놓인 상을 톡톡 두드리던 인빈이 눈을 들어 올려 최 상궁을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 쳐다보던 그년의 눈초리가 범상치 않았다. 예전에는 눈만 마주쳐도 피하던 년인데, 어찌 그리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이지?"

 "…."

 "최 상궁,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중전의 행동거지가 이상해졌다는 것은 소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죽다 살아났으니, 어디 눈에 뵈는 게 있겠사옵니까? 그러니 더욱 깨닫게 해주셔야지요. 마마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말이옵니다."

 

 그러나 최 상궁의 감언이설에도 인빈의 표정은 풀어질 생각을 않았다.

 

 "하지만 전하의 태도가 영 이상하지 않느냐. 어찌 이 인빈의 앞에서 그런 하찮은 년을 감쌀 수 있단 말이냐?"

 "마마. 전하의 성정을 아시지 않사옵니까? 다분히 백성들을 의식한 행동일 것이옵니다. 백성들의 앞에서 되살아난 중전을 홀대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또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옵니다. 달포 전에도 중전이 죽은 일로 꽤나 고충을 겪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렇지… 그랬어. 결국 그 천한 것들이 문제로구나. 내 전하의 눈치만 아니었어도, 가문의 사병을 풀어 그것들을 모조리 잡아 죽였을 것이야."

 

 분한 듯 이를 박박 갈던 인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박 상궁은 아직이더냐?"

 "…예 마마. 금일 오전에 생과방 나인들에게 들은 바로는,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짐을 싸는 박 상궁을 봤다고 하옵니다. 그 후로는 누구도 보지 못 하였다 하옵니다. 소인도 휘하의 아이들을 풀어 찾고 있사오나,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봐서는 이미 궁을 빠져나간 것이 아닐지…."

 

 시원치 않은 대답에도 인빈은 기꺼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참 재미있게 되었구나. 본래 사냥이란, 도망치는 것이 있기에 재미있는 법이 아니겠느냐? 옳지. 그러면 되겠구나. 내 너에게 달포의 말미를 줄 터이니, 반드시 그년을 내 앞에 대령하거라. 아랫것들을 더 풀어도 좋다. 궁이 아니라, 온 저잣거리를 싹 다 뒤져서라도 내가 원하는 사냥감을 잡아다 놓으란 말이다. 그렇지 못 한다면, 어찌 될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최 상궁은 여전히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빈은 오랜만에 재미난 일이 생겼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귀머거리가 봤다면, 필히 천상의 여인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

 

 

 

 

 스륵. 누군가 굳이 깨우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비록 몸이 바뀌었지만, 습관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원체 새벽잠이 없는 편이었다. 이상하게도 어제와 달리 머리가 약간 무거웠지만, 개의치 않고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그런 건지, 약간 한기가 돌았다. 마치 젖은 강아지가 물기를 털 듯, 몸을 바르르 떤 나는 부스스한 눈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창호지 사이로 비추는 파란빛이 아직 이불 속에 들어 있는 다리를 비췄다. …아직 여기구나.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서 뭐 하냐."

 

 이내 포기한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한 쪽으로 쓸어넘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이왕 일어난 김에 궁궐 구경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는 곳인데, 기왕 온 것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몸 진짜 무겁네. 나는 비척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갔다.

 

 "뭐지? 겁나 추운데?"

 

 황급히 뒷걸음질 친 나는 팔을 문지르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문밖으로부터 엄청난 한기가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방 안은 난방이 되고 있는지라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대로 밖에 나가면 얼어 죽기 딱 좋겠다 싶었다. 아… 어쩌지? 진짜 바깥 구경 하고 싶은데. 하루 종일 실내에만 있어서 그런 건지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팔짱을 끼고 어떻게 할까 고민을 거듭하던 중, 나의 생각이 돌연 이불에 닿았다.

 

 "으음… 그래도 명색이 중전인데 이불 두르고 밖에 나가도 되나?"

 

 잠시 망설이던 나는 이내 이불을 사정없이 몸에 둘렀다. 나는 이불이 빈틈없이 꽉꽉 둘러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질질 끌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방 문을 연 것 까지는 좋았는데…. 너네 왜 여기 있니? 갑작스레 열린 문에 놀란 듯 밖에 서 있던 해정이와 단향이, 그리고 연심이가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마마? 어찌 이 시간에…?"

 "…."

 

 당황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 추운 날에 밖에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탓이었다.

 

 "너네, 여기서 뭐 해…?"

 "마마. 바람이 차옵니다. 일단 문부터 닫으시옵소서."

 "민 상궁 님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그러다가 고뿔에 걸리시옵니다. 그리고 저희는 마마의 침소를 지키고 있는 것이옵니다.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니, 심려치 마시고 어서 들어가시옵소서."

 "아니 그게 왜 당연해?"

 

 내가 멀뚱히 서 있으려니, 연심이가 문을 닫기 위해 다가왔다. 솔직히 처음엔 감시 당하는 느낌에 불쾌한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입술이 퍼렇게 질리다 못해 이곳저곳 갈라진 연심이의 몰골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의문이 들었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이 작은 아이들을 이토록 가혹한 환경에 몰아넣은 것인지. 나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연심이의 팔을 확 잡고서는 단향이와 해정이에게 말했다.

 

 "들어와."

 

 내 말에 셋은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마마. 소녀들은 이곳을 지켜야 하옵니다. 그러기 위해 소녀들이 있는 것이옵니다."

 

 …뭐 저리 단호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겠네. 어쨌든, 너희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나도 다 방법이 있지. 나는 씨익 웃으며 양쪽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마마!"

 "얼른 안 들어와? 셋 다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 문 안 닫힌다. 니들이 알아서 골라. 계속 버티면 그냥 콱 얼어 죽을라니까."

 

 나는 해맑게 웃으며 선택을 강요했다. 힐끗 보니, 해정이와 단향이는 찬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방 안을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망설이던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협박 아닌 협박에 굴복하고 말았다.

 

 문이 닫히자, 방 안은 금세 온기로 가득 찼다. 나는 자리에 앉아 이불을 들고는 아이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아. 같이 덮자."

 

 내 말에 아이들은 잔뜩 울상이 돼서는,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며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쳐 댔다. 연심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내가 너넬 왜 죽이니."

 

 나는 참다못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짜식들, 귀엽네. 나는 한사코 덮고 있던 이불을 건네주었다. 끝끝내 거절하는 모습에 오기가 생긴 나는 직접 셋의 몸에 이불을 휙휙 둘러주기까지 했다.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격렬히 반항하지 않는 걸로 보아하니, 내심 춥기는 진짜 추웠나 보다. 새삼 아이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진짜 괜찮으니까 조금이라도 그러고 있어. 피곤하면 여기서 자도 되고. 너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다크서클이 무엇이옵니까?"

 

 단향이의 호기심 어린 질문은 뒤늦게 터져 나온 연심이의 말에 묻혀버렸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어찌 소녀들이 감히 이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제발 명을…"

 "아아아아. 조용히 해. 뭔 말들이 이렇게 많아? 우리 피곤하게 살지 좀 말자. 응?"

 "…하오나 마마."

 "자는 게 그렇게 불편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 줄래? 아, 그리고 다크서클은 눈 밑에 까맣게 생긴 그림자 같은 거야. 피곤하면 생기는 거."

 

 신기한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단향이.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자꾸 웃음이 나왔다. 진짜 동생들 같다. 아영이가 딱 이만했는데. 근데 연심이의 표정이 이상하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이… 에? 어어 하는 사이에 연심이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가득 들어찼다. 아, 또 왜 이래…. 이윽고 빼앵 울음이 터졌다.

 

 "왜 자꾸 그러시는 것이옵니까! 소녀에게 어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이옵니까… 부탁하지 마시옵소서! 절대로, 절대 아니 되옵니다… 흐흑…. 또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훌쩍 떠나버리시려고 그러시는 것이지요!"

 

 나는 벙찐 표정으로 연심이를 바라보았다. 아니 들어주기 싫으면 그냥 싫다 하지 왜 울고 그래… 당황스럽게. 내가 가긴 어딜 간다고… 아. 나는 연심이의 말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전이 자살을 했다고 했지? 어디 절벽에서 떨어졌다던가. 어제 부부인이 가고 나서 해정이에게 들었던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중전이 죽기 전, 연심에게 무슨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애가 부탁이란 말에 저렇게 경기를 하지. 어휴.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됐다. 부탁 안 할게. 내가 찾지 뭐. 펜이 어디 있으려나…."

 "펜은 또 무엇이옵니까?"

 

 넌 진짜 호기심도 많다.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오는 단향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나는 대충 대답해주었다.

 

 "왜 그거 있잖아. 필기구. 종이에 대고 쓰는 거… 아, 내 정신 좀 봐. 여긴 펜이 없겠구나. 붓 말하는 거야, 붓."

 "아, 붓 말씀이시옵니까? 소녀가 가져오겠사옵니다."

 "종이도 가져와 줄래?"

 "예 마마!"

 

 냉큼 대답한 단향이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총총거리며 나가는 단향이의 뒷모습을 보다가는 작게 한숨 지었다. 으휴. 앞으로는 말을 좀 가려서 해야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향이가 한지 여러 장과 붓, 그리고 먹과 벼루를 가져왔다. 뭘 저렇게 많이 가져와? 아주 팔이 터질라 그러네. 나는 단향이가 한 아름 들고 와,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물건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무엇을 쓰실 것이옵니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단향이. 그 옆에서 연심이가 급하게 눈을 비볐다. 그래. 너도 착각한 게 창피하긴 했구나? 피식 웃은 나는 단향이를 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내 하루 일과를 여기에 적을 거야."

 "일기를 쓰시려는 것이옵니까?"

 "응. 근데 이거 나보고 어쩌라고 갖다 줬니?"

 

 나는 종이 위에 마른 붓을 비비며 물었다. 내가 서예 같은 고상한 취미랑은 영 거리가 멀어서 말이지. 그건 배곯을 걱정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니까. 아무튼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단향이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벼루를 가져가 먹을 갈기 시작했다. 오… 그렇게 하는 거구나. 조금씩 물을 따르며 먹을 가는 모습에서 일종의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한 십 분이나 지났을까, 단향이가 검은 먹물이 고여 있는 벼루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이거 묻혀서 쓰면 되는 거지? 아 그리고, 이런 거까지 시켜서 미안. 내가 언외탐 준비하기에도 바빠서 예능은 신경을 못 썼어."

 "언외탐이 무엇이옵니까?"

 "…그냥 조용히 있을게."

 

 하여튼 틈만 나면 내뱉는 요 입이 문제라니까? 인상을 찡그린 나는 붓을 먹물에 적셨다.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한 글자씩 종이 위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었는데, 아이들의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았다. 왜 그래?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아이들의 시선은 종이 위를 향해 있었다. 뭐야, 지금 내 글씨 보고 그러는 거? 음. 내가 좀 악필이긴 하지. 하하, 그렇다고 저렇게 노골적으로… 이 녀석들이!

 

 "뭐야! 보지 마!"

 

 나는 급히 왼 팔로 종이를 가렸다. 아이들은 내 호통에 놀랐는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 연심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서체가…."

 "보지 말라니까!"

 

 눈을 부라리자 슬금슬금 훔쳐보던 연심이가 후다닥 몸을 틀었다. 확실히 안 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붓을 들었다. 한창 일기를 써 내려가던 나는 지나치게 고요한 분위기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껏 긴장한 채 숨소리조차 조심하는 아이들. 쓰읍. 미간을 찌푸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훔쳐보지 말랬지, 그렇게 바짝 긴장하고 있으라 했어? 됐으니까 편하게 있어. 내가 쓰는 것만 보지 마."

 "예 마마!"

 

 대답은 잘도 하지. 입맛을 다신 나는 다시 일기에 집중했다. 아직 붓이 익숙하지 않은지라 그냥 짧게 쓰기로 했다. 혹시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까, 내가 중전이랑 다른 사람이란 건 최대한 드러나지 않게 쓰도록 하자.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더라?"

 

 연심이가 작은 목소리로 오늘은 을유년 2월 17일이라고 말해주었다.

 

 "2월… 17일. 다 썼다!"

 

 나는 끄트머리에 조그맣게 날짜를 적고는 종이를 반으로 접었다. 우물쭈물 다가온 단향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서랍에 넣어 둘까요?"

 "그렇게 해 줄래? 아, 도중에 펴 보지 마라?"

 "예 마마."

 

 나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중에 저거 다 모아서 서울로 돌아가면 책으로 내야지. 제목은 뭐가 좋을까, 소월이의 조선 탐방? …아니야, 이건 너무 구려. 한참을 제목을 두고 고심하던 나는 이내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이들이 급히 이불을 들고 와서 내 몸에 덮어 주었다.

 

 "괜찮으니까 너네 덮어. 몸이 아주 얼음장같더라."

 "소녀들은 괜찮사옵니다."

 "그럼 말고. 그것보다 너네, 추우면 안에 좀 들어와 있어라. 미련하게 밖에 서서 뭐 하는 거야. 굳이 하루 종일 그러고 있어야 돼?"

 

 내 물음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말을 잘못 했나?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재차 물었다.

 

 "왜 그래, 갑자기?"

 "저…."

 

 한동안 우물거리던 연심이가 힘겹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원래는 상궁들이 번갈아가며 처소를 지켜야 하옵니다. 하오나 지금 교태전에, 궁녀들이라고는 저희 셋 뿐이옵니다. 그러니 교대를 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닌지라, 굳이 말씀드리고 싶지 않았사온데…. 하지만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소녀들도 정말 춥고 힘들면 방에 들어가 쉬고 있사옵니다."

 "…."

 

 코 끝이 찡했다.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해야만 하다니. 안타까움 뒤에 찾아온 것은 분노였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인빈과, 그걸 방관한 중전에 대한 분노. 어제도 생각했던 거지만, 아주 개판이 따로 없다. 내가 말이 없으니 걱정이 된 모양인지, 해정이가 작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마마. 소녀들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이래 봬도 감기 한 번 걸린 적 없사옵니다."

 "그래도…."

 "괜찮사옵니다 마마. 그것보다 마마의 몸이 더 걱정이옵니다."

 

 되려 나를 챙기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누가 나를 이렇게 챙겨준다는 것이 간지럽기도 해서 괜히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야 뭐… 맛있는 거 많이 먹었잖아. 이제 괜찮을 거야."

 

 내 말에 아이들은 또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내가 또 잘못 말했어? 혼란스러워하고 있자니, 연심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온다.

 

 "마마.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몸이 무겁진 않으시옵니까?"

 "어? 음, 머리랑 몸이 살짝 무겁긴 한데… 별로? 왜?"

 

 내 말에 연심이가 다가와 이불을 단속해 주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멍한 눈으로 연심이를 쳐다봤다.

 

 "어제부터 줄곧 바깥바람을 쐬셨으니, 몸이 좋지 않으신 것도 당연하옵니다."

 "응? 내가 언제?"

 "어제 부부인 마님을 배웅하지 않으셨사옵니까. 그리고 방금도 이불만 두르고 밖에 나오셨사옵니다. 이쯤이면 몸에서 열이 날 것이옵니다."

 "하하. 얘 좀 보소. 누굴 환자로 아나. 무슨 방 문 하나 연 것 가지고 몸에 열이… 어라? 어…? 왜 이러지, 머리가 뜨거운데?"

 "예. 아프실 때가 되었사옵니다. 의녀를 부르겠사옵니다."

 

 익숙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이들. 연심이와 해정이가 물이 담긴 대야와 수건을 가지고 왔다. 단향이는 의녀를 부르러 간 모양이었다.

 

 "…."

 

 나는 이마에 손을 대었다. 거짓말처럼 뜨거웠다. 아까까지만 해도 단순히 머리가 멍한 정도였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열이 아주 펄펄 끓었다.

 

 "하하하."

 

 기가 찬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어느새 의녀가 들어와 누워있는 나를 진맥할 때도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져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이 빌어먹을 몸뚱이…!

 

 

 
작가의 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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