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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홍콩러브트립
작가 : 제이J
작품등록일 : 2017.12.1

은퇴후 낯선 도시를 찾아온 톱스타 이한경
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이드 송호연
홍콩에서 시작되었던 그들만의 러브 트립

 
6. 우아한 그녀들 - 페닌슐라 애프터눈티 #1
작성일 : 17-12-13 11:08     조회 : 350     추천 : 0     분량 : 7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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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부. 우아한 그녀들 - 페닌슐라 애프터눈티

 

 100년 된 레시피의 스콘

 아삭한 오이 샌드위치와

 금가루가 올려진 연어 샌드위치

 시금치 타르트와

 으깬 고기가 들어있는 초코뱅

 그리고 따뜻한 홍차

 어느 날 오후,

 우리의 우아했던 애프터눈티.

 

 

 “대박.”

 

 거실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두 여자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감은 머리를 채 말리지도 못한 채 호연의 비명같은 외침을 듣고 욕실에서 뛰쳐나온 위니는 노트북 화면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나무 테이블위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호연, 저게 뭐니?”

 “내 말이. 이게 대체 뭐야?”

 

 하루 밤 사이 세상이 뒤바뀌어 있었다. 포털에서 시작해 온갖 커뮤니티로 퍼져나간 한경과 호연의 사진들은 그대로였다. 어제 저녁 침사추이 거리에서 사람들이 찍은 직찍 컷들이 보태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 주인공이 엉뚱한 사람으로 둔갑했다는 거였다.

 

 “황은지가 누구야?”

 

 위니가 낯선 이름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황은지. 그녀는 스타그룹의 막내딸이었다. 뉴욕에 거주하며 헐리우드 배우들과의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 최고의 셀럽이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금수저 였으나 스타그룹 내에서는 문제아 취급을 받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황유라의 동생.”

 “황유라는 또 누군데?”

 “스타버스트 대표.”

 “이한경이랑 대판 붙을 거라는 그 여자?”

 

 위니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왔다. 황대표가 자신의 신분을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거였다. 조만간 정체가 폭로될 수 있다는 각오도 했었다. 이한경씨의 가이드입니다, 이한경씨의 홍콩 여행기를 에세이로 집필할 예정입니다. 준비해 둔 멘트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랑 이 여자가 닮았니?”

 

 호연은 자신의 사진 옆에 나란히 올라와있는 황은지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뉴욕의 어느 클럽 앞에서 찍힌 파파라치 컷이었다. 커다란 선글라스와 야구 모자를 쓴 그녀는 이목구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둘 다 꽁꽁 가리고 있어서 닮았는지 아닌지 알아볼 수도 없네. 얼핏 비슷해 보이는 사진으로 잘도 골랐다.”

 

 사진 속 호연을 황은지로 둔갑시킨 기사는 기사가 아닌 소설을 담고 있었다. 이한경은 홍콩에서 그녀와 밀월여행 중이다. 두 사람은 다음 달, 결혼을 앞두고 있다. 신접살림은 황은지의 거주지인 뉴욕에 차릴 계획이다. 이한경의 결혼이라니. 밀월 여행이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폴폴 났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너 이한경이랑 결혼해?”

 “미쳤니?”

 “그럼 이 여자랑 결혼 한대?”

 “그것도 아니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기자들의 실수가 아니다. 수상한 냄새가 났다. 자신을 황은지로 둔갑시킨 누군가가 있다. 황유라일 거였다. 뭔가가 터질 거라는 이한경의 예측은 정확했다. 그것이 이런 것이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뿐.

 

 “호연. 너 어제 그 방에서 이한경이랑 진짜로 얘기만 했어?”

 

 위니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두 남자가 코즈웨이 베이의 호텔로 떠난 후 그녀가 다그치듯 물어댔던 질문이었다. 세상 모든 남녀상열지사가 밀폐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그녀에게 결백을 주장할 방법은 더 이상 없었다. 호연은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세기의 스캔들 주인공이자 하루아침에 예비신랑이 된 인물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럼 황은지 얘기도 이한경이 했어?”

 “이거 가짜 뉴스야. 이한경 여자 없어.”

 

 확신에 찬 호연의 대꾸에 위니의 고개가 한쪽으로 갸우뚱해졌다.

 

 “그 좁은 방에서 두 남녀가 몇 시간 동안 이야기만 나눴고, 그 남자는 여자가 없고, 소속사에선 이런 결혼 기사를 띄웠다는 거네.”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문장들을 위니는 천천히 나열했다. 뭔가 또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 알았다. 감이 딱 왔다.”

 

 시도 때도 없이 오는 그 감이 무엇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비슷한 드라마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호연은 초조한 눈으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먼저 연락을 해야 하나. 연락 해서 뭐라고 할 건데. 굿 모닝? 아니면 오늘 우리 뭐할까요? 이딴 기사가 인터넷을 도배해서 난린데?

 

 “이한경, 남자 좋아하나보다.”

 

 호연은 뜨악한 눈으로 위니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미간을 한껏 오므린 채 비약한 상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이한경이랑 개변, 애인 사이 아니니? 호텔도 계속 같은 방에 묵는다며. 그러고 보니까 개변 외모가 그쪽 분위기야. 패션 감각 좋은 남자들이 그 바닥에 많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소속 배우의 동성애 문제를 덮으려는 계획 결혼같은 거 그런 거 아니겠어?”

 

 난데없는 브로맨스 드립이 이어졌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테이블위의 핸드폰이 울렸다. 호연은 황급히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송호연?]

 

 기대했던 목소리 대신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모르는 음성이 아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였다. 호연의 얼굴 근육이 틱처럼 움찔거렸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위니가 핸드폰을 뺏어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나야, 현수.]

 

 현수. 현수? 이현수? 위니는 입술만 움직여 그 이름을 연거푸 반복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란 얼굴로 핸드폰과 호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호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클리셰에 대처하는 방법. 그것은 드라마 아카데미에서 호연이 들었던 수업의 한 주제였다. 모든 드라마에는 클리셰가 있다. 판에 박힌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 그리고 흔해빠진 소재와 흐름. 완벽히 피할 수 없으나, 극복해야만 좋은 드라마가 된다고 강사는 말했다. 누군가의 인생도 한편의 드라마라면, 이건 완벽한 클리셰였다. 처절하게 자신을 버렸던 남자가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것. 몹시도 구질구질하고 진부한 전개.

 

 [오랜만이다.]

 

 5년. 계절이 스무 번 쯤 바뀌었고, 핸드폰을 세 번 바꿨다. 그때 입었던 옷들은 모두 유행이 지났고, 그녀의 헤어스타일도 커트와 단발을 거쳐 어깨 길이의 C컬까지 여러 번 달라졌다. 모든 게 잊혀지고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다고 믿었다. 이제 그녀는 매스컴에서 현수의 이름을 보아도 못 본 듯 넘길 수 있었다. 그의 드라마를 가끔은 무덤덤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만이라는 빤한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었다. 5년이 아니라 50년이 지난다 해도 그럴 거였다.

 

 “오랜만, 이라고 했어요. 지금?”

 

 호연은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현수는 엉뚱한 말로 답을 대신했다.

 

 [너 홍콩에 있다며? 이한경이 홍콩에서 너랑 같이 다니고 있다는데. 맞아?]

 

 몰라서 묻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당사자에게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 사진 속 인물이 호연이라는 걸 누군가 알려줬단 얘기였다. 세상이 모두 황은지라고 이야기하는 그 인물의 정체를 그에게 알려준 사람, 황유라일 거였다. 아귀가 착착 맞아 떨어졌다.

 

 “그거 확인하려고 5년 만에 연락을 했어요?”

 [나 지금 홍콩 가. 홍콩 합작 드라마 기자 간담회가 있거든. 얼굴 좀 보자.]

 “우리가 반갑게 얼굴 볼 사이는 아니지 않나?”

 [호연아. 돌아와라.]

 

 옛 애인이 그리워서 하는 말은 아닐 거 였다. 그는 최고 여배우들과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스타 감독이었다. 그가 호연을 못 잊고 그리워할 가능성은 단 0.1%도 없다는 데 전 재산도 걸 수 있었다.

 

 [드라마 다시 쓰자. 내 드라마 보조 작가로 시작해. 내가 이제 그 정도 힘은 되잖아.]

 

 인심 쓰는 듯한 말이 뒤를 이었다.

 

 “황대표가 그렇게 하래요?”

 […….]

 “이한경이랑 뭔 짓 꾸미지 말고, 일단 한국으로 불러 들이라는 게 그 여자가 선배한테 준 미션이냐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정곡이 찔린 듯 현수는 한참 후에야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송호연. 네가 끼어들 판이 아니야.]

 “어디서 들었던 소리네.”

 [이한경은 황대표 못 이겨. 그 사람 옆에 있다가 잘못하면 너도 다친다고.]

 

 그는 오래전 그녀의 등에 칼을 꽂았던 당사자였다. 그녀의 상처에서 철철 피가 흐르게 한 가해자였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이라니. 5년이란 세월동안 이 남자는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내 밑에서 시작해.]

 

 옆도 아니고 밑이었다. 현수의 뻔뻔한 어휘 선택은 호연을 실소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나더러 드라마를 쓰라고요?”

 […….]

 “선배를 주인공으로 해볼까? 사극 어때요, 주인공은 망나니. 옛날부터 하는 짓이 딱 그쪽 과인데. 판타지로 갈까요? 반인반수. 아니면 과대망상증 정신병 환자를 주인공으로 한 메디컬 드라마?”

 

 말을 하다 보니 열불이 났다. 한 번 터진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드라마? 이제 와서 무슨 드라마. 개나 소나 타임 슬립에 만화에서 주인공이 튀어나오고 도깨비랑 저승사자까지 나왔어요. 엄청 귀엽게 생긴 땅콩 같은 여자애는 킹콩같은 히어로야. 이제 뭐가 더 남았는데요? 도깨비였다가 저승사자였다가, 만화에 들락날락거리는 한국 드라마 최초 역대급 패러디물이라도 써볼까요?”

 

 한바탕 퍼부었더니 속이 시원했다. 듣고 있던 현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없는 듯 침묵하고 있었다.

 

 “더 할 말 있어요?”

 [만나서 하자. 간담회는 침사추이 페닌슐라 호텔에서 오후 5시야. 그쪽으로 와.]

 

 상대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위니가 쌍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 뭐니? 뭐 이딴 개 같은 새끼가 다 있니?”

 “이 사람들 진짜 나한테 왜 이러니.”

 

 호연은 어이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5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상황이 기가 막혔다. 드라마 대본의 송호연 이란 이름은 왜 이현수로 바뀌었는가. 저 사진 속 주인공의 이름은 왜 송호연이 아닌 황은지인가. 내가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야? 송호연 이란 이름 석자가 그 바닥 금기어야? 왜? 도대체 왜?

 

 “왜긴. 네가 만만해서 그렇지.”

 

 위니가 정곡을 찔렀다. 만만하다 이거지. 그때처럼 뒤통수를 처맞아도 찍소리 못하고 찌그러져 있을 사람이라 그거지.

 

 “가야겠다. 페닌슐라 호텔.”

 

 머릿속이 명징해 지고 있었다. 오래전 강의의 마지막 내용이 떠올랐다. 클리세를 돌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

 

 “위니, 오늘 촬영 없댔지. 같이 가자.”

 “왜, 나한테 그 개새끼 소개라도 시켜 주려고?”

 

 호연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클리세를 돌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 그게 뭔 줄 알아?”

 “…….”

 “반전.”

 

 +

 

 한경은 두툼한 커튼을 열어젖혔다. 바다 건너 침사추이가 보였다. 어제 밤 미친 듯이 뛰었던 거리들이 저곳에 있을 터였다. 방안에서 통화를 마친 은혁이 거실로 나오며 중얼거렸다.

 

 “황유라 진짜 대단하구나. 어떻게 이런 짓을 하지?”

 “스캔들은 스캔들로 덮는다. 이 바닥 기본이야.”

 “이건 스캔들 수준이 아니라 핵폭탄이잖아. 이한경이랑 스타그룹 막내딸이 결혼을 해? 게다가 사진 속 여자가 그 여자라고?”

 

 은혁은 황당한 얼굴로 길게 주절거렸다. 답지 않게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목격한 탓인 모양이었다.

 

 “너 진짜 황은지랑 아무 사이 아니야?”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연예인들이 두고 쓰는 멘트가 있다. 친한 동료일 뿐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경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보다 더 어이없는 것일 터였다.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야.”

 “가지가지 한다.”

 

 은혁은 소파에 주저앉아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들은 다른 것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세금 탈루 혹은 마약 혐의. 한경을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게 할 카드들은 많을 거였다. 톱스타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서라면 더 적당할 것들도 차고 넘쳤다. 은혁이 준비해온 건 그런 것들에 대한 대응책들이었다. 비상시에 결백을 주장할 수 있도록 약물중독 검사도 꼬박꼬박 받도록 했다. 그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이런 쪽의 묘안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황은지는 왜 가만히 있는 거야? 이거 나 아니다, 얘기해야 될 거 아니야. 설마 진짜로 너랑 결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

 “손해 볼 건 없지.”

 

 그것은 자매지간의 거래였을 거였다. 황은지의 다른 무언가를 덮기 위해 한경이 동원된 것 뿐 이었다. 또 하나의 목적이 있을 거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은퇴라는 단어가 결혼이란 단어로 대체되는 것, 프레임자체를 전환하는 것. 그것은 유라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이걸 믿지? 황은지가 송호연씨를 닮았어?”

 “아니. 전혀 다르지. 황은지는 완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한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 은혁이 말끝을 잡아챘다.

 

 “완전 예쁘겠지. 그러니까 헐리우드 배우들이랑 스캔들이 나겠지.”

 “아니. 완전 우울한 스타일이라고. 송가이드는 사람이 파릇파릇 하잖아.”

 

 한경은 은지를 딱 한번 만났다. 한 달 전쯤 이었다. 그가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둔 이후였다. 몹시 불안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였다. 담배를 꺼내드는 손가락이 떨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 지내오며 알콜 중독을 거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찌라시의 소문이 헛것은 아니지 싶었다.

 

 [언니가 이한경씨랑 결혼을 생각해 보라네요.]

 

 한경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 드라마를 해라, 저 영화를 해라, 그 CF를 찍자 뭐든지 제 맘대로 하던 유라가 결국은 인생자체를 쥐고 흔들 작정인가 보았다. 여자는 담배의 불을 붙였다. 실내 금연 안내판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여자는 애당초 어떤 이의 눈치도 보지 않는 듯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뿌연 담배연기를 따라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는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래서 황대표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는 겁니까?]

 [그쪽이야 말로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 바닥 사람들 다 그렇다던데?]

 

 한 줌의 호기심도 친밀함도 담겨있지 않는 눈이 한경에게로 돌아왔다. 섭섭하거나 언짢지는 않았다. 그녀를 보는 자신의 눈빛 역시 별 다를 바 없을 거였다.

 

 [황은지씨는 이 바닥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도 스타그룹 사람이니까.]

 

 짙은 화장을 한 은지의 얼굴은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가라오케 룸의 어두운 조명 탓만은 아니었다. 한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전혀 없었다. 여자는 앞에 놓인 작은 술잔을 집어 한 모금에 들이켰다.

 

 [덮어야할 게 뭡니까?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거여서 나 정도의 상대가 필요한 거에요? 마약? 아니면 다른 범죄? 사람이라도 죽였어요?]

 

 은지는 가만히 한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친 사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찌라시에 오르내렸다. 물론 그것들의 대부분은 유라의 선에서 커트되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문처럼 이 바닥에 떠돌 뿐이었다. 유라가 더 이상은 막기 버거운 것, 정말 큰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가설은 때문에 타당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한경은 의아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대답이었다. 엉뚱하다 못해 뜬금없었다. 사랑이라니. 그 지고지순한 단어가 저 여자와 어울린단 말인가.

 

 [그 사랑을 지켜야 해요. 나는.]

 

 그녀의 얼굴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황유라였다. 유라의 결혼 발표를 한경은 집집에서 진우와 TV로 보았다. 대단한 재벌 그룹끼리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이라 칭해지며 매스컴에 대서특필되었다. 진우형의 흔들리던 눈을, 표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경직된 얼굴 근육들을 한경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날, 술에 취해 유라를 찾아간 건 진우가 아닌 한경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진우형을 사랑했던 거 아니더냐고. 따지듯 묻던 그에게 유라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게 내가 진우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야.

 

 [그건 지키는 게 아니에요. 버리는 거지.]

 

 한경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동자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당신 혼자 도망치는 거라고. 안전한 세상으로.]

 

 은지는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스카라가 촘촘히 칠해진 속눈썹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면 어쩌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는데요?]

 [당신 언니의 방식이 뭔지 알아요? 스캔들에는 스캔들. 음모에는 음모.]

 

 그날 한경은 그녀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만남의 기념선물이었다. 정글 같은 이 바닥에서 늪 같은 이 세상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지름길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 한경은 알 수 없었다.

 

 “황은지는 그렇다 치고, 너는 이제 어쩔 건데.”

 

 초인종이 울렸다. 대화를 멈춘 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건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블랙 원피스를 차려입은 두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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