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일어났던 이야기를 J씨에게 털어놓고는 덧붙였다.
“뭐에 홀린 것 같아요. 누가 일부러 그런 상황들을
일상 속에 연속적으로 펼치는 것 같아서 혼란스러워요.
왜 나의 옛 모습은 변화되지 않고 불쑥불쑥 나올까요?”
“윤주씨 주변에 늘 있었던 상황일수 있어요.
그 동안은 관심 밖이어서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죠.
나와는 상관없으니까 하는 맘으로 피했거나
남들의 대화는 그야말로 소음으로 생각하고 들으려 하지 않았겠죠.
그리고 옛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은
치료 개선의 의지가 강하다는 뜻이기도 해요.
약 잘 먹고 저와도 자주 보면서 노력해보자구요.”
J씨가 이쯤 말한 후 나에게 두려운 것이 있냐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 멀건 눈으로 J씨를 봤다. 턱을 만지는 건 불안감이 심할 때의 행동양상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턱을 만질 정도로 극도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사실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은 후에 어떤 것도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없었는데 J씨를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쉽사리 감정의 스타일이 무너지는 것인지 낯설고 두렵다는 말을 했다. 빠른 반응은 좋은 현상인데 치료되는 것이 싫으냐고 묻는 J씨에게 난 그저 대화할 상대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두 손으로 세수하듯이 얼굴을 한번 쓸었다 내리면서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그러자 J씨가 내 옆자리로 와서 내 등에 가볍게 손을 얹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주씨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가슴속에 비밀을 품고 살아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얼마나 묻어두고 있느냐에 따라 심각하게는
정신 분열 증상을 보일 수 있어요.
그 아픈 비밀을 누군가를 붙잡고,
아니면 벽 보고라도 다 토해내듯 말하고 나면
치료가 시작되는 거예요.
물론 두렵겠지만 좋은 현상이에요.
익숙해지는 연습을 해 보죠. 제 눈을 똑바로 봐요.
이렇게 사람 눈을 봐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윤주씨를 헤치려는 것 아니에요.”
J씨는 내가 알아듣길 바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 사춘기 시절을 빼앗겼다고 표현했었죠?
도난당한 그 시절 때문에 윤주씨에게 필요한
어떤 정신적 발달 과정들이 형성되지 않은 거예요.
발달은 연속적 과정인데 성장발달 과정중에는
결정적시기(critical period, 임계기)가 있어요.
‘임계기’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발달하기 좋은
최적의 시기에요. 이시기는 발달률이 급속히 신장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지요.
그 중요시기에 발달의 계속성과 연속성을 상실하거나
결정적 시기에 발달 장애가 수반되는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결함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지요.
윤주씨도 그런 경우이구요.”
“ 그래서 억울해요. 되돌릴 수도 없고……”
“ 임계기는 놓쳤지만 지금이라도 노력하면서
보상받는 것은 어때요? 지나간 것들에 묶여 앞으로
많이 남은 인생도 우울하게 보내고 싶지는 않겠죠?
자식들 손주들과 함께 행복한 할머니의 모습으로
윤주씨와 제가 친구로 마주앉는 것은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이런 상담하며 만나는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데……”
심각하게 말하는 J씨의 의중은 알 듯 했지만 갑자기 주책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쩔 수 없었다. J씨와 흰머리 되어서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겼기 때문이었다. 마주 앉은 곳이 병원이 아니라 공원이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행복한 상상으로 기분 좋아질 무렵 늘 그랬듯 J씨는 숙제를 줬다. 극장이나 시장 같이 사람들 많은 곳을 다녀 보고 버스나 지하철도 타 보라고 했다. 뭐 그것쯤이야 하고 생각하던 찰라 숙제가 하나 더 있다고 했다. 명언을 찾아보고 그 명언과 첫 번째 숙제를 접목시켜서 편지를 써 오라했고 J씨도 써 온다고 했다. 숙제가 많은 것이 부담은 됐지만 J씨의 편지를 받는다는 말에 애교 섞인 비명을 질러봤다.
두꺼운 외투까지는 필요 없는 날씨의 일요일이었다. J씨가 내준 숙제를 할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노선표를 들여다보다가 대구 시내인 ‘동성로’라고 써져 있는 버스를 탔다. 버스비가 얼마인지 몰라 천 원짜리 두 장을 내고 탔다. 몇 걸음 옮겼을 때 거스름돈 가져가라는 말에 동전 몇 개를 받아들고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두 정거장 갔을 때 남자 한 명이 타더니 내 앞에 섰다. 반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낯선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불편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왜 하필 내 앞에 섰나 싶어 그 사람이 느끼도록 싫은 눈치를 보냈는데도 그 사람은 꿋꿋하게 내 앞자리를 고수하고 서있었다. ‘동성로’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마자 못 내릴까 하는 노파심에 미리 하차 문으로 가 있으려고 일어섰다. 그 때 마침 멈춰서는 버스 움직임에 뒷자리에 승객 다리 위에 앉아 버렸다. 엉덩이를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버스 안에 폭소 바이러스를 뿌려놓고 도망치듯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에서의 충격 때문이었는지 북적이는 인파 사이를 헤치고 걸었던 까닭이었는지 극장 앞에 늘어서 긴 줄을 보고는 영화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길을 돌렸다. K서점이 보였다. 명언집 한 권을 샀다. 그다음 숙제인 지하철을 타보기로 마음먹고 동성로에서 가장 가까운 ‘중앙로역’으로 갔다. 설 자리는 많았지만 버스에서처럼 민망할 일이 있을까 싶어서 ‘노약자석’쪽 벽에 기대어 섰다. 네 정거장 지났을 때 할아버지 두 분이 탔다.
“앉읍시데이.”
“노인 소리 듣기 싫어 안앉는교?”
“내사 노인인건 인정 하지만 기분 나빠서 안 앉을라카는기라.”
“기분 나쁘다 카는게 뭐인교?”
“‘노약자 보호석’ 이 글자가 못마땅한기라. 보호는 뭔 보호고?
젊은이들 보다 연륜 생각하믄 특별한 인생 선배아이겠나?
그카니까 존경하고 받들어야제. 애완견도 아니고 뭔 보호고?
’어르신 특별석‘이라고 써놓으면 앉아 준다꼬!”
지하철 안의 여기저기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난 웃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