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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황녀는 날지 않는다
작가 : 여름별밤
작품등록일 : 2017.11.22

오래 전, 대악마 튀란누스에게 대륙이 짓밟히는 것을 막기 위해 네 명의 영웅들을 필두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맞섰다. 이름도 종족도 달랐던 그들이 끝내 대악마를 쓰러트린 후 대륙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렇게 꼭 30년이 흘렀다. 대전쟁의 네 영웅 중 하나인 제국의 황제 아르도르의 딸 레아는 자신을 암살하려는 2황후 루마에게 벗어나 제국을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황궁 밖에서도 자신을 향한 암살위협이 점점 거세지던 그 때, 레아는 뜻밖의 만남을 가지게 되고, 30년 전 일어났던 대전쟁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파멸이 다가옴을 알게 되는데......

 
폭풍을 대하는 자세 (完)
작성일 : 17-12-11 22:37     조회 : 318     추천 : 0     분량 : 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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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베르의 하늘은 여전히 회색으로 꿈틀거렸지만 곳곳에서 새어나오는 따스한 빛과 어느새 그친 비 덕분에 그늘에 가려져있던 마을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을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의문인 장소 곳곳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고 있거나, 아니면 그저 한숨만을 내쉬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무너진 가옥 잔해가 흩날리면서 불쑥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원래는 ‘손’이라고 지칭되어야 할 그것은 피와 먼지에 덮여 엉망이 된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내 주변을 더듬던 손을 따라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이내 모습을 드러낸 건, 먼저 튀어나온 두 손보다 더 기괴한 모습을 한 남성이었다.

 “컥......컥......쿨럭!”

 잔해를 옆으로 간신히 민 후 연신 피가 섞인 기침을 내뱉던 남자가 이내 황급히 몸을 돌려 잔해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촌장님......촌장님!”

 마침내 무너진 가옥 잔해 아래에서 드러난 것은 정신을 잃은 한 사람이었다. 먼지와 피와 땀으로 엉망이 된 그 모습은 먼저 모습을 드러낸 남자보다 더 심각한 상태였다. 성별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그 사람을 붙든 채 남자가 외쳤다.

 “킬리! 킬리! 없는가! 아무라도 좋으니 누가 좀 도와주십시오!”

 이내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남자를 부축하거나 정신을 잃은 사람을 들어 올렸고, 이내 바짝 마른 한 남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킬리! 빨리 촌장님의 상태 좀 봐주게나.”

 그러지 킬리라 불린 마른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봐, 제리. 지금 자네 상태가 더 심각해보여. 말을 아끼지 그래. 우선 둘 다 광장으로 옮겨주시게나.”

 그의 말에 제리와 촌장이라 불린 두 사람을 부축하거나 안고 있던 사람들이 발을 맞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맑은 목소리가 또르르 굴러왔다.

 “보조 필요 없어?”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 백발을 흩날리며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그들을 마주보는 한 엘프가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하늘색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인간 여자가 서 있었다.

 “......누구십니까.”

 킬리는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미소 짓고 있는 그 가녀린 엘프에게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엘프는 자신의 곁에 서 있던 인간 여자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흠, 지나가던 행인정도라고 해 둘까?”

 킥킥 웃는 엘프의 말에 인간 여자는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마음대로 하시죠.”

 “뭐, 도와주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그렇게 대답한 후 걸음을 옮기던 킬리를 어느새 앞서 간 엘프는 이내 두 환자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킬리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그녀가 무어라 중얼거리자 두 손에서 그녀의 눈동자 색을 닮은 녹색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경악과 감탄의 시선이 뒤섞인 아래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한 사람이 천천히 눈을 떴다.

 “촌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곁에 있던 제리가 소리치자, 촌장이라 불린 사람이 눈을 찡그렸다.

 “제......리?”

 힘은 없었지만 또렷한 그 목소리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제리를 비롯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제리와 촌장의 맥을 짚어본 킬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마...마...”

 “마법사?”

 엘프가 말을 이어주자 킬리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불러야 하는군요. 이곳에는 원체 그런 직업을 보기가 힘드니 이름마저 잊어버리는 군요.”

 엘프는 후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마법사가 아니야.”

 “예? 그럼 방금 제리와 촌장님을 치료해 주신 건 어떻게......”

 “그건 정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킬리의 옆에서 제리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아, 둘 다 당분간 무리하게 몸을 쓰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특히......촌장님. 당신은.”

 어느새 일어난 촌장은 엘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음. 촌장님. 당신.”

 엘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 단 둘이서.”

 촌장이라 불린 사람, 이제는 먼지와 엉겨 붙은 피가 어느 정도 떨어져 드러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그러나 여전히 아름다운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주름투성이 얼굴의 여성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짓했다. 그들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각자 마을을 복구하는 작업에 뛰어들었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제리와 킬리 역시 여성이 손짓하자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여성이 입을 열었다.

 “분명 ‘단 둘’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왕님께서는 언제부터 셋이 둘로 보이기 시작하셨습니까.”

 “......이 아이 역시 들어야 할 이야기니까.”

 “이 마을에 다짜고짜 비공정과 비룡들을 끌고 와 쑥대밭으로 만들고 금지된 마법까지 쓰며 저를 죽이려고 했던 아가씨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데려오신 겁니까?”

 “이 마을이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알고 있어. 이 아이와 싸우다가 쓰러진 당신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살아있었네, 카렌?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어.”

 “......카렌 살리아라는 인간은 죽었습니다. 여왕님이 보고 계시는 인간은 연방 소속국 임베르의 남부 마을 중 하나인 실렌티움의 늙은 촌장입니다.”

 “그리고 그 촌장들 중에 나를 여왕님이라 부르는 인간도 없고.”

 엘프 여왕, 테사나의 대꾸에 카렌이라 불린 여성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가씨를 데리러 온 거면 함께 사라져주시고, 아니라면 그 아가씨를 떠나보내고 전쟁이 끝난 후에 들러주시지요.”

 “흠. 전쟁이라니. 정말 제국과 한판 붙을 셈이야?”

 “......아무리 연합군이라는 깃발 아래서 함께 검을 휘둘렀던 자들이지만, 이제는 아니지요. 그때의 동료들은 더 이상 검을 들지 않고, 그때의 카렌 살리아라는 인간 역시 죽었습니다. 평화를 깨트린 건 제국입니다. 무엇보다,”

 카렌의 손가락이 테사나의 곁에 서 있던 여자를 가리켰다.

 “저 아가씨와 함께 온 제국군이 우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촌장이란 자가 가만히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테사나가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우리’마을이라. 고국은 이제 완전히 잊어버린 거야?”

 “......제게 고국은 이곳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여왕님이 알고 계시는 카렌 살리아라는 인간은 이제 없습니다.”

 “염치없지만, 제가 좀 말해도 되겠습니까.”

 테사나의 곁에 서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우선 제 이름은 리페입니다. 제국 남부군의 사령관을 맡고 있습니다. 카렌님이 오늘 일에 대해서 저를 원망하시고 있는 건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하지만 저와 총사령관님은 이 전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건 진실입니다. 그리고 저와 총사령관님은 한낱 제국군의 일원입니다. 그 제국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쥐고 계시는 분은 현재 황후마마입니다. 그리고 제국군은 지휘관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한 때 시데랄리스의 사령관을 맡고 계셨던 분이라면, 잘 알고 계시겠지요.”

 잠시 숨을 고르는 리페에게, 카렌이 천천히 대꾸했다.

 “......잘 알고 있지요. 그 망할 놈의 사령관이라는 직책 때문에, 왕을 거스르지 못해 제 병사들을 전부 사지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렇기에 카렌님이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와 카렌님은 결국, 아까처럼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 역시 황후마마를 거스를 자신이 없으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지금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겁니까?”

 카렌의 목소리는 날이 섰지만, 두 눈만은 차분함을 잃지 않은 채 리페를 바라보았다.

 “테사나님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셨다면, 아마 카렌님이 말씀하신 대로 흘러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리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제국과 연방이 싸울 때가 아닙니다.”

 “......이유는?”

 카렌의 물음에 대답한 건 리페가 아니었다.

 “삼십 년 전의 대재앙이 반복되는 것을 막는 것이 급선무니까.”

 테사나의 말에, 카렌이 나지막이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말 그대로야.”

 깊은 한숨과 함께, 테사나가 여전히 구름이 덩어리 진 하늘 저 편을 바라보았다.

 “악마들이 돌아 올 거야, 카렌.”

 햇빛이 구름 곳곳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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