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역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거야
5일 후의 일을 꺼내놓기 전에 수연과 지욱의 이야기를 좀 해야 하겠다.
좋아하는 마음은 꺼내놓을 수록 더욱 빨리 깊어간다. 찬별과 프랑에게 지욱의 존재를 털어놓은 수연은 너무 커다래진 마음 때문에 일상생활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왜 먼저 사귀자고 하지 않는 걸까?’
수연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하긴, 좋아한다고 해준 적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감이 한없이 깎여나가곤 했다. 매일 카톡을 주고받고 장시간의 통화를 주고받는 사이이며 가끔 만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이 정도는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냥 한국에 또래 친구가 없으니까, 날 친구 정도로 생각하는 것 아닐까.’
수연은 한없이 우울해졌다. 왜 먼저 사귀자고 해주지 않는 거냐고, 지욱에게 화를 내고도 싶었다. 프랑의 말처럼 먼저 고백을 할 수도 있겠지만, 수연은 그것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남자가 먼저 고백을 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 탓은 아니었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수연 자신이 과연 누군가가 좋아할 수 있는 여자인지도, 그리고 거절당했을 때 괜찮을 수 있을 자신도.
‘하지만 이렇게 답답하게 있는 것보단, 뭐라도 해보는 게 낫겠어.’
중간고사를 마치고 처음 맞은 일요일. 프리다 살롱에서 같이 숙제 하자는 찬별에게 제사가 있다고 거짓말을 한 수연은 홀로 신사동으로 향했다.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에 마음이 설렜다. 수민이 생리로 인해 기분이 바닥인 상태였기 때문에 옷을 못 빌려 하는 수 없이 청재킷에 면바지 차림으로 나섰지만 말이다.
역 화장실에서 급하게 비비 크림을 바르고 틴트를 발랐다.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하나로 묶었지만 잔머리가 아래로 삐죽삐죽 튀어나왔다. 머리에 물을 묻혀 보아도 그저 그랬다.
휴. 한숨을 길게 쉰 뒤 수연은 화장실을 나왔다.
‘어차피 예쁜 적도 없었는데, 뭐.’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면서.
“헐.”
수연을 발견한 지욱의 첫 마디였다. 수연은 부끄러워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고 싶을 때 오라며.”
그리고는 곧장 후회했다.
‘오자마자 활짝 웃으려고 했는데......’
준비했던 멘트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지욱이 먼저 평정심을 찾고는 쑥스럽게 웃으며 수연을 자리로 인도했다.
“메뉴판 보고, 고르면 말해.”
메뉴판을 주곤 휘적휘적 카운터로 돌아가는 지욱을 보며 수연은 물을 한 모금 꿀꺽 삼켰다. 지욱의 일터는 가로수길에 위치한 모던한 분위기의 까페였다. 천장이 높고 쾌적했다. 전체적으로 블랙 앤 화이트톤으로 꾸며두어, 나무 질감의 프리다 살롱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카운터를 유심히 살펴보니 임아영의 모습은 없었다. 스페인 여행 준비로 그만뒀다더니. 수연은 재연의 소식이 궁금했다. 스페인에 역시 가려나?
수연이 주문한 자몽 에이드를 가져다주며 지욱은 수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새 것처럼 빳빳한 흰 셔츠에 허리엔 검정 앞치마를 두른 지욱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어른처럼 느껴져서 수연은 주눅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연의 주변에는 전부 블링블링 빛이 나는 어른들뿐이었다. 여자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등이나 가슴이 훅훅 파인 원피스 차림인 데다 막 TV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화려한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남자들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죄다 쇼핑몰 모델 같은 완벽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눈빛 빔을 쏘아대고 있었다.
‘아. 가로수길이 이런 데구나.’
수연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에이드를 마시는 동안 지욱은 좀처럼 말이 없었다. 그 때문에 수연은 마음이 불안했다.
‘내가 너무 찌질하게 하고 와서 창피한가?’
그런 생각에 얼굴이 붉어지고 있는데 누군가 지욱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요, 지욱이 친구 왔어?”
“형 오셨어요.”
일어서려는 지욱을 도로 앉히며 ‘형’이라는 사람이 싱글벙글 웃었다.
“얘기 좀 하다 와.”
눈치로 그가 사장이란 것을 알아챈 수연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받아주었다.
“귀여운 친구네. 혹시 여자친구?”
사장의 말에 지욱도 수연도 입을 다물었다.
3초 정도의 정적이 있은 후 지욱이 대답했다.
“아우...... 아니에요.”
이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수연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몇 분 더 자리를 지키던 지욱은 손님이 많아지자 카운터로 돌아갔고 수연은 혼자 남아 자몽 에이드의 빨대만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거야.’
수연은 아무 것도 오지 않은 카톡을 들여다보면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하긴 저렇게 예쁜 여자들을 매일 보는데 나 같은 게 여자로 보일 리가 없지.’
정말이지 까페 안은 연예인 포스의 여자들 천지였다. 그 예쁜 찬별을 갖다 놓는다 해도 크게 튈 것 같지 않을 정도였다.
수연은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지욱의 만류에도 불구 꿋꿋이 음료 값을 지불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까페를 나왔다.
그리고 수연은 지욱의 카톡과 전화를 차단해버렸다. 옹졸한 대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프긴 싫으니까.’
32. 빼앗긴 자유
한동안의 평화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불길한 예감은 정통으로 날아와 박혔다. 찬별에게 의혹을 느낀 담임이 참다 참다 은희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성적표가 나온 뒤 꼭 일주일 후, 찬별은 모든 자유를 빼앗겼다.
“대통령 얼굴 보기보다 찬별이 보기가 더 힘들어요.”
삽시에 단짝을 잃은 소녀와 삽시에 학생 하나를 잃은 과외 선생은 바나나 우유를 하나씩 물고 그네를 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더니, 찬별이 빠진 둘은 꽤나 허전함을 느꼈다. 농담 따먹기를 하며 깔깔 웃던 것도, 프리다 살롱에서 음식을 잔뜩 늘어놓고 수다를 떠는 것도 영 흥이 나질 않았다.
프랑소와는 며칠 전 있었던 은희와의 통화를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되게 교양 있는데, 되게 차고 무섭더라.”
“뭐라셨는데요?”
프랑소와는 은희의 목소리를 흉내내보았다.
“선생님, 찬별이 당분간 과외 그만하려고 해요, 갑자기 이런 연락 드려 죄송합니다. 많이 애써주셨는데 변변히 인사도 못 드렸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수연이 웃자 프랑소와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비난하는 말은 하나도 없었는데도 얼마나 심장이 죄어들던지. 혼나는 기분이었다니까. 안 그래도 어른 공포증 있는데......”
“찬별이네 아줌마가 좀 카리스마가 있으시죠.”
“찬별이랑 닮았어?”
“어...... 되게 예쁘신데, 찬별이랑은 달라요.”
“달라?”
“네, 달라요. 아주.”
“그렇구나.”
등하굣길은 물론 쉬는 시간, 점심시간에도 수연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은희가 찬별을 직접 차에 태워 등하교를 시켰기 때문이었다. 은희가 손을 써둬서 찬별은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로 가 성적표 위조에 대한 반성문을 쓰거나 잔심부름을 했다. 점심시간 역시 교무실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하루 분량의 반성문을 빼곡 채웠다. 아주 잠깐씩의 눈인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교류가 막혀버린 것이었다.
“폰은 아예 없앴나 봐요.”
프랑소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웃긴 건요.”
수연이 말을 이었다.
“찬별이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인다는 거예요. 나였으면 며칠도 못 버티고 미쳐버릴 것 같은데. 찬별이는......”
수연이 설명한 장면은 프랑소와를 두고두고 웃게 했다.
찬별의 성적표 위조 사건은 아무리 쉬쉬하려 해도 삽시에 전교로 퍼져버렸다.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로 향하는 찬별을 보기 위해 아이들이 복도로 몰려들었을 때, 찬별은 그들을 보고 우뚝 멈춰 섰다. 청소년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한 방울 흘린 뒤 팩 돌아설 줄 알았던 찬별은 갑자기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가운데 손가락을 힘차게 뻗어 올렸다. 아이들은 히익! 하는 소리를 냈다. 크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찬별의 목덜미를 잡아 교무실로 끌고 간 건 얼굴이 새빨개진 담임이었다.
그 날 이후 찬별은 ‘빡똘’이라는 별명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6월이 되어서도 찬별에게 자유란 없었지만 감시의 틈이 조금 느슨해졌기 때문에 수연과 약간의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었다. 교실에서 교무실로 가기 전이나 종례 시간 담임이 오기 전 등의 아주 짧은 틈이었지만 말이다.
“프랑은 잘 있어?”
“여전하지, 뭐.”
“넌 지욱씨랑 잘 되고 있냐.”
“......”
“왜, 뭔 일 있어?”
보통 여기쯤에서 담임이 눈을 이글이글 빛내며 걸어오는 통에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7월. 모두가 하복으로 갈아입고도 더위에 지치는 계절이 왔다. 빡친별보다 빡똘이라는 별명이 아이들 사이에서 더 익숙해질 때쯤 기말고사 역시 다가왔다.
“이번에 다시 성적 돌려놓으면 엄마가 폰 살려준대. 만약 전교 1등하면 프랑 과외도 다시 시켜준대.”
“와! 잘 됐다.”
“미안. 영원히 폰 없이 살고 프랑 근처에도 못 갈듯.”
2학년 1학기 기말고사에서 찬별은 전교 30등으로 중간고사 때의 성적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