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저녁 초대
완준과의 우연(을 가장한 필연)한 만남에 대해 전해들은 이로가 프랑소와에게 직접 연락을 해왔다. 고향에서 해산물이 택배로 왔는데 양이 너무 많아 처리가 곤란하니, 괜찮다면 그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프랑소와는 꼬박 하루를 망설인 후 그 청을 받아들였다.
처음 그 집에 들어섰을 때, 프랑소와는 친척의 집에 방문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조금은 낯설지만 동시에 푸근하고, 불편하지만 저도 모르게 들뜨는. 프랑소와에게 친척 집 같은 건 없지만 말이다.
“잘 왔어요. 나도 프랑소와군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으니까.”
벌꿀과 딸기가 들어간 롤케이크를 내밀며 폐를 끼쳐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프랑에게 이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프랑소와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완준이 준비한 저녁 식탁 앞에 앉았을 때, 프랑소와는 자형을 떠올렸다.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어린 프랑소와가 물을 때마다 자형은 담담히 대답해주었다.
“시도 잘 쓰고, 말도 재미나게 잘하고. 멋있는 사람이었어. 너무 빨리 떠나버린 것 빼고는, 모든 게 좋은 사람이었어.”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는 그 말을, 어째서인지 프랑소와는 단 한 번도 믿어본 적 없었다. 그래서 자형의 오래 된 짐 꾸러미 속에서 그 사진을 발견했을 때, 프랑은 그가 아버지일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
완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올 때에야 프랑소와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아니에요! 어우, 국물이 진짜 시원한데요?”
프랑소와가 최대한 넉살스럽게 말하자 완준도 이로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식탁 한 가운데에서 보글거리고 있는 해물탕은 물론, 갓김치와 묵무침 등 모든 반찬이 맛깔스러웠다.
“요리 솜씨가 굉장하신 것 같아요.”
완준은 공연이 없는 기간에는 거의 백수나 마찬가지라서 그런 공백기엔 요리 학원을 다니거나 악기를 연습하는 등 취미 생활을 누린다고 했다.
“이로가 이런 나 때문에 고생이 많지.”
“무슨 소리야, 내가 네 덕에 잘 얻어먹고 사는 건데.”
다정하게 서로의 덕으로 돌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프랑소와는 마음이 살살 아려왔다.
‘두 사람이 가꿔나가는 가정.’
자형과 이로가 다정하게 식탁에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던 프랑소와는 그 장면이 생각보다 어색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자형은 혼자 씩씩하게 청소를 하거나 테이블에 걸터앉아 멍하니 음악을 듣는 모습이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후엔 완준이 담근 레몬청으로 만든 차를 마셨다. 이로가 고른 음악을 들으며 문학 이야기를 나눈 뒤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프랑소와는 일어났다.
“오늘 즐거웠어요. 언제든, 우리가 필요하면 연락해요.”
이로의 따뜻한 말을 품에 꼭 안고 프랑소와는 그 집을 나왔다. 가방 속에 넣어갔던 사진은 끝끝내 내밀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막 프리다 살롱의 마감을 마친 자형은 우쿨렐레를 연주 중이었다.
“왔니?”
아직은 연습생 수준이라 뚱땅뚱땅하는 소리가 수시로 끊겼지만 그래도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프랑소와는 자형의 가까이에 다가가 앉았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악기 하나 정도 다룰 줄 알면 좋잖어.”
“기타도 배우다 그만 뒀었잖아.”
“이게 나한테 더 잘 어울리지 않아?”
자형이 긴 치마를 살랑대며 우쿨렐레를 뚱땅거렸다. 확실히 작고 귀여운 그 악기는 자형에게 잘 어울렸다.
프랑소와는 긴 외출 후 돌아온 자신에게 어디에 다녀왔느냐고 묻지 않는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 마지막 손님들 오셨네.”
자형이 우쿨렐레를 벗어 놓고 얼른 문으로 갔다. 문에 내어놓은 창으로 늘 찾아오는 길고양이 두 마리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은 좀 일찍 왔구나, 너희들?”
자형이 머리를 만져도 떠나지 않는 고양이 두 마리. 작고 마른 삼색이 한 마리와 체격 좋은 턱시도 한 마리였다.
“내 연주 소리 듣고 왔나 봐.”
자형이 그릇에 사료를 부어주고는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30. 성적표 위조단
5월의 푸릇푸릇한 기분에 취해가는가 싶던 수연과 찬별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성적표가 나온 것이다.
프랑소와는 처음으로 과외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선생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사이라지만, 명색이 과외 선생님 집에서 성적표를 위조하는 여고생들이라니!
“하지만 프랑 집에 최고 성능 좋은 컬러 프린트가 있잖아요.”
그것이 찬별이 프랑의 집을 범행 현장으로 고른 이유였다.
“얘들아. pc방이란 데가 있잖니.”
프랑소와의 말에 수연이 한숨을 폭 쉬었다.
“지금 이 동네 피시방, 위조 성적표 뽑으려는 애들이 가게마다 다섯 명씩은 있을 걸요. 얜 얼굴 팔리면 안 되는 신세라.”
찬별은 수연이 그러건 말건 포토샵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전교 3, 4등을 놓치지 않던 찬별은 전교 34등이 된 기념으로 그간 혹시나 해서 연구해두었던 성적표 위조를 해나갔다. 스캔을 뜬 성적표 위에 위조한 숫자를 정교하게 끌어다 붙이는 찬별을 보며 수연은 중얼거렸다.
“넌 언제 포토샵까지 배웠냐.”
“원래 내가 기술 쪽으로 좀 강해.”
프랑소와는 과자를 집어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찬별이야 그렇다 치고, 차수연 너는 왜 위조야?”
수연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찬별이가 이왕 하는 김에 내 것까지 해준다 해서요. 이번 시험 특히 폭망이라.”
“잘한다.”
프랑은 수연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게, 열 번도 넘게 더 설명했던 걸 왜 틀려와?”
수연이 머리를 문지르며 웅얼거렸다.
“그래도 맞춤법 문제는 맞았잖아요! 설 ‘거지새끼’, 된장찌 ‘개새끼’ 하면서 외운 것 있잖아요.”
“얼씨구. 음절의 끝소리 규칙 같이 쉬운 것도 틀린 주제에.”
“아 그건 프랑이랑 찬별이 땜에 헷갈렸어요. 두 사람이 다르게 말해가지고 막 머릿속에서 섞여서. 가느다란 다리? 막 이러다가.”
“‘가느다란 물방울’로 외우랬잖아.”
프랑의 말에 찬별이 반박했다.
“‘그녀 다리만 보여’로 외우라니까.”
수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헷갈린다고!”
수연이 프랑으로부터 딱밤을 세 대 정도 더 맞는 사이, 찬별이 완성된 성적표 두 장을 팔랑팔랑 흔들며 웃었다. 그렇게 찬별의 성적은 전교 34등에서 3등으로, 수연의 성적은 전교 177등에서 77등으로 위조되었다.
그렇게 지나가는가 싶었다. 은희는 여전한 딸의 성적에 이렇다 할 코멘트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수연의 부모님은......
“도저히 가짜를 내밀 수가 없더라.”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본래의 성적표를 내밀었다는 수연의 말에 찬별은 박수를 쳤다.
“잘했어. 너라도 순수를 잃지 말으렴, 친구.”
“애써서 만들어줬는데 미안.”
“괜춘. 위조 성적표는 버렸어?”
“아니, 넘 맘에 들어서 다이어리에 붙여놨어.”
낄낄거리는 두 소녀의 머리 위로 기분 나쁜 바람이 스윽 불어 지났다. 두 소녀는 동시에 머리 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었는데, 정확히 5일 후 벌어지는 일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