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트위터 비밀 일기
열병을 앓고 난 찬별은 한 가지 결심을 한 것이 있었다.
‘절대 우울해지진 말자.’
은희가 찬식을 잃고서 방황했던 6개월을, 찬별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은희는 은희 같지가 않았다. 머리도 엉망이었고 화장도 하지 않았으며 끼니 대신 와인을 마셨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찬별은 하교하면 술냄새를 풀풀 풍기는 엄마와 마주해야 했다.
“엄마는 찬별이만 믿어......”
눈이 퀭한 은희가 찬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할 때면 찬별은 온 세계가 어깨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부담감을 느꼈다.
적어도, 그렇게 우울해져버려서 주변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는 말자.
그것이 찬별의 목표였다.
찬별은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트위터에 일기를 썼다. 기록을 위한 일기가 아닌, 지우기 위한 일기였다. 남몰래 새로운 계정을 파서 텅 빈 그곳에 매일의 감정을 담았다. 그렇게 담긴 감정 쓰레기들을 다음 날이면 미련 없이 삭제했다. 재연과의 일들을 하나씩 적고 지워나가는 일을 하면서 찬별은 조금씩 기운을 얻어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 것이.
기념일을 앞둔 어느 저녁이었다. 홍대에서 라멘을 한 그릇씩 먹고 나오던 길, 재연은 인형뽑기 기계 앞으로 달려갔다. 피규어를 사 모으는 게 취미인 그에게 길거리에 놓인 인형뽑기는 찬별에게 있어서 화장품 가게만큼이나 유혹적이었다.
“저 놈으로 골랐다.”
재연은 한 가운데에 놓인 피규어를 가리켰다. 천 원을 반듯하게 펴서 기계에 넣자 재연의 눈에 반짝반짝 빛이 들어왔다. 찬별은 그 옆에 서서 재연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얼굴. 늘 먼 곳 어딘가를 꿈꾸는 눈. 찬별은 그의 기다란 눈이 좋았다. 눈웃음 뒤에 그렁그렁 맺히는 슬픔까지도.
“오빠.”
“엉?”
재연이 기계를 조종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에 시간 돼?”
“아...... 저녁엔 빠에서 일하잖아. 왜?”
찬별은 인형뽑기 기계에 비스듬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 날 우리 300일인데.”
재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 아까워.”
피규어가 아슬아슬하게 턱에 걸린 채 재연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있었다. 재연은 천 원 한 장을 더 밀어넣으며 대꾸했다.
“그럼 그 날 낮에 볼까.”
찬별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학교 가야한단 말이야.’
“그럼 오빠, 토요일이나 일요일은 어때?”
재연은 피규어에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조금 늦게 대답을 했다.
“석현형...... 클럽에서 페스티벌 있잖아, 도와주러 가기로 했는데...... 아! 망했다.”
재연이 또 한 장의 천 원을 꺼내 허벅지에 문지르는 동안 찬별은 마음이 시무룩해지는 것을 애써 달랬다.
“이번엔 제발 되라...... 얍!”
허벅지의 뜨거운 기운이 효험이 있었는지 간당간당하게 약만 올리던 피규어가 철컹, 하며 밑으로 떨어졌다. 재연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기뻐하고는 힘겹게 뽑은 피규어를 꺼내 찬별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찬별은 생긋 웃어보였다.
“오빠, 오빠, 이것도 뽑아봐봐.”
찬별이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를 꾸며내 재연을 부추겼다. 재연은 새로운 목표를 지긋이 바라보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조그맣게 말했다.
“미안해.”
어쩐 일이지, 찬별은 그 목소리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눈앞의 재연이 뿅하고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기분.
“아니야! 나 완전 괜찮아.”
재연은 피규어에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땐 화내도 돼.”
‘아마 그때 이미 이별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찬별은 그렇게 쓴 후 트윗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새 창을 열어 또 하나의 일기를 적었다.
‘드라마는 슬픈 일이 있으면 꼭 좋은 일로 보상을 받던데, 사는 것도 그랬으면 좋겠다.’
28. 프리다 연애 상담소
과도하게 씩씩해진 친구에게 힘을 얻은 수연은 지욱과의 카톡을 재개했다. 재개했다고 해서 특별히 엄청난 진도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전처럼 밤새 통화를 하는 등 설레는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찬별에게 그 설렘을 털어놓지 못하는 것이 수연은 조금 고통스러웠다. 자신이 느끼는 달콤함을 어디에든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프랑소와였다.
“마음을 알 수가 없어요......”
“매일 카톡 오고 전화도 자주 한다며.”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먼저 사귀자거나...... 뭐 그런 말은 전혀 안 한단 말이에요.”
“그럼 네가 먼저 사귀자고 하든가.”
지욱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프랑소와는 결국 질렸다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수연은 프리다 살롱에서 식사 중인 손님 두 팀이 전부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내가 먼저 사귀자고 해요오!”
프랑소와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쪽팔려.”
자형이 카운터에서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프랑, 솔직히 나 되게 한심해 보이죠?”
프랑소와는 이건 또 무슨 전개냐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뭔 말이야, 그건.”
수연은 제 앞에 놓인 컵에 맺힌 물방울을 손끝으로 만졌다.
“그...... 아직 고딩 주제에, 연애에나 관심 갖고 하는 것 말이에요. 내가 뭐 그렇게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고, 잘 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예쁜 것도 아니면서, 남자 얘기나 하고 있는 게...... 사실 좀 쪽팔리거든요.”
프랑소와는 이마에 주름을 잡은 뒤 대답했다.
“너무 남을 의식하는 발언 아닌가, 그거.”
“그런......가요?”
“그렇잖아. 고등학생이니까, 보통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연애 고민에 빠져있다니, 남들이 날 한심하게 보겠지? 아, 쪽팔려. 이런 생각이잖아. 남들을 다 지우고 네 고민에만 집중했다면, 내 마음이 진실한 걸까...... 뭐 그런 걸 고민하게 되겠지.”
수연은 프랑소와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그동안은 비리비리한 외모에 늘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프랑소와를 조금 무시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눈앞의 프랑소와가 너무나도 멋진 어른으로 보여, 수연은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실은 수연 역시 마음속으로는 10대의 사랑이 휘발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게 싫었다. 10대를 한 장의 얇은 종이로 보는 시선도 싫었다. 10대 역시 충분히 진지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건 아줌마도 같은 생각. 고등학생인 게 뭐 어때서, 고등학생은 사람도 아닌가? 연애 감정도 못 느끼게?”
자형이 딸기잼 쿠키를 내려놓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수연은 금세 신이 났다.
“그렇죠? 그런 거죠? 사장님, 사장님도 10대 때 누구 좋아하고 그러셨던 적 있어요?”
“어휴, 말도 마. 우리 엄마 10대 때부터 연애 도사였어.”
“어우, 도사까진 아니었다.”
수연의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고 있음을 발견한 자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뭐, 나도 10대 때 짝사랑도 하고 짝사랑도 받고, 연애도 한 번 찐하게 하고 그랬지.”
프랑소와가 괜히 의기양양해져서 말했다.
“왜, 그 오빠 얘기 좀 해봐, 엄마.”
“누구.”
“야반도주 있잖아.”
수연이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야반도주우?”
“아, 그 오빠. 한 번은.”
자형이 웃음을 잠시 참아내고서 말을 이었다.
“한 번은 좋아하는 오빠랑 야밤에 가출을 했었어. 같이 기차를 집어다 타구서 부산에 갔었는데......”
“정동진, 정동진.”
“아, 그래, 맞어. 정동진. 자꾸 부산이랑 헷갈려.”
“헷갈릴 만큼 남자가 많았거든.”
프랑소와가 끼어들자 자형이 그에게 가벼운 꿀밤을 먹이고 마저 말을 이었다.
“정동진에 같이 가서 해 뜨는 것도 보고 맛난 밥도 먹고. 그때가 아마 첫 키스였지?”
상상에 몰입하던 수연은 금세 귀가 새빨개졌다. 자형은 그것을 보고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에도 이렇게 순진한 10대가 다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