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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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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2-08 16:45     조회 : 255     추천 : 0     분량 : 16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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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세 돌아온다던 예군이 감감무소식이자 절벽바위에 모여 있던 군사들이 술렁였다. 수장이 없는 예군의 군대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웅진성은 군대의 권력을 오직 예군에게로만 집중시켜 놓았기 때문에 부장이 있다한들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하기야 그런 권력구조는 국담쪽도 마찬가지였지만 국담은 의자와의 탈출 이후의 권력을 백고에게 이임해 두었다. 허나 백고의 배신으로 국담의 군대역시 예군의 군대와 다를 바 없었으니 당시 웅진성내 두 세력은 정상이 아니었다.

  “앗! 저, 저건!”

  절벽바위를 지키고 있던 예군의 병사 한 명이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병사는 엄청난 규모의 검은 무리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손가락을 바들바들 떨었다. 호각을 불어 상황에 대처할 틈도 없었다. 비록 급조된 것이었지만 국담의 작전이 제대로 먹히는 순간이었다.

  “단숨에 놈들을 쓸어버려라!”

  국담의 명령에 군사들이 혼 빠진 악마들처럼 달려갔다. 예군의 군사들은 국담군의 기세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지휘할 장수가 없었다. 부관들이 있었지만 마땅히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럴 때 예군이나 예식이 있었다면 전면전으로 강력히 대응했을 것이다. 전면전을 치르는 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군사들이 몰려올 것이고 결국 군사들이 적은 국담 쪽이 불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국담쪽으로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주공산, 국담의 군사들은 주인 없는 산을 아주 손쉽게 차지하듯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예군의 군사들 속으로 들어갔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예군의 군사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이곳저곳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이에 국담의 군사들도 무지막지한 살상행위는 하지 않았다. 비록 편은 가르고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웅진성 내 같은 백제의 군사로서 절대적인 악의는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담의 군사들은 도망치는 예군의 군사들을 밀어 넘어뜨리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가볍게 상처만 냈다. 하지만 반드시 이겨야 하는 전쟁에서 어설픈 동정은 오히려 화를 부르는 법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공의 원한을 알았더라면 이렇듯 쓸데없는 인정은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국담의 군사들은 도망치는 예군의 군사들을 지독하게 쫒지 않았고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예식이 요소에 배치된 군사들을 빠르게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담은 자신의 군사들이 그토록 어설프게 전쟁에 임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이 어설픈 인정을 베풀지 않고 파상공제로 제압했다면 국담의 작전은 무난히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사공을 죽인 예군이 절벽바위로 올라와 자신의 군사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다. 예군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예군은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호각을 불면서 국담의 군사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내기 시작했다. 예군의 칼을 맞은 군사들의 목이 떨어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급기야 군사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 예식이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전군 절벽바위 쪽으로 이동한다. 너희들은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너희들이 먼저 죽는다. 가서 사정없이 죽여라. 알겠는가!”

  “예, 장군.”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어느 쪽의 기세가 더 끓어올랐느냐에 따라 판세가 돌변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기는 국담 쪽이 더 높았으나 이제는 예식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작은 승리에 도취된 국담의 군사들은 인정을 베풀었고 그로인해 마음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이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저기 예군이 있다. 쳐라!”

  국담이 예군을 발견했다. 예군은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배후에 두고 달려드는 군사들을 가차 없이 베었다. 하지만 사공이 이미 죽었는데 예군이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예군이 길목을 지키며 싸우고 있는 이유는 일종의 기만술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강가에서 의자를 기다리는 사공은 아직까지 살아있는 것이 된다. 국담의 당초 목적이 의자를 배에 태워 탈출시키는 것이었다면 군사들이 접전을 벌이는 동안 사공을 만나러 강가로 내려가 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사공은 죽었고 의자와 국담은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된다. 장수가 없는 군대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가 없는 법. 게다가 국담이 없는, 일반백성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군대를 쳐부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예군이 건재한 것을 확인하자 미처 도망치지 못한 군사들이 힘을 얻었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병장기를 휘둘러 국담의 군사들을 쳐 죽였다.

  “아까만 해도 열흘 굶은 개처럼 비실대던 놈들이 이젠 악귀로 변했구나.”

  국담의 군사들 중 백발의 노인이 고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옆에 있던 군사들도 이성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살살 봐주며 퇴로를 만들어주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덕분에 사기는 저절로 올라 전쟁 같은 전쟁이 되었지만 사람의 마음을 한 순간에 악마로 만드는 것도 전쟁이었다.

  “어라하, 소신이 저 예군을 없애겠습니다. 혹시 사공이 살아 있을지 모르니 절벽바위 아래로 내려가 보십시오. 사공이 있다면 그 길로 배를 타고 없다면 다시 올라 오시면 됩니다. 군관들은 어라하를 모셔라!”

  하지만 의자는 국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의자는 갑자기 오기가 발동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졌다.

  “내 갑옷을 가져오너라. 내가 직접 저 놈들을 쳐부술 것이다.”

  “어라하, 안 됩니다. 어라하의 안전은 소신들이 책임질 테니 어라하까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국담의 만류에도 의자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죽더라도 백제의 대왕으로서 죽을 것이다.’ 국담은 의자의 비장한 각오를 알지 못했다. 의자는 별똥별에 의미를 두는 순간부터 자신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담은 반드시 의자를 피신시킬 수 있으며 의자로 인해 백제가 회생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같은 공간, 같은 처지에서 함께 호흡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의자는 어느새 휘황찬란한 황금색 갑옷으로 갈아입고 긴 칼을 빼들었다.

  “자, 이제부터 나를 따르라. 저 간악한 배신자들을 내가 직접 처단할 것이다.”

  한 때 전쟁의 영웅으로 불렸던 의자의 기상이 되살아났다. 의자는 국담이 인도한 강가로 내려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적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며 칼을 휘둘렀다. 의자가 휘두른 칼에 적들의 목이 고드름 잘리듯 떨어져 나갔다.

  “어라하, 적진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국담이 아무리 뜯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저기 어라하가 있다. 쳐라!”

  군사를 하나로 모은 예식이 의자를 발견하고 공격명령을 내렸다. 예식의 군사들이 몰려들자 아군적군 할 것 없이 모든 군사들이 얽히고설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캄캄한 밤에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도 잘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전멸이다. 국담은 의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군사들의 목을 쳤다. 국담의 칼에서는 푸른빛이 발광되지 않았다. 적과 아군이 뒤엉켜 아군마저도 빛에 희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식의 군관들은 황금빛 갑옷을 입어 눈에 잘 띄는 의자를 잡아 공을 세우고 싶었지만 감히 국담에게 대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덕분에 의자의 칼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군사들의 목을 댕강댕강 쳐냈다. 의자는 백제의 왕으로서 그동안 당한 한풀이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처참한 전쟁은 그렇게 두 시간 이상 지속됐다.

  “전군 후퇴하라!”

  상황을 눈치 챈 예식의 진영에서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어느새 남쪽으로 이동한 예군이 내린 명령이었다. 그럼으로 국담과 예군의 군대는 남북으로 갈라져 대치상황이 되었다. 북쪽은 강가로 내려가는 방향이었다. 예씨형제는 국담이 의자를 데리고 절벽바위 아래로 내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와 국담이 절벽바위 아래로 내려가면 전쟁은 아주 가볍게 종료될 것이다.

  “의자가 절벽바위 아래로 가본들 이미 사공은 죽고 배는 없네. 헤엄을 쳐 강을 건널 수는 없을 테고 다시 올라올 수밖에 없을 테지.”

  “놈들이 우리의 마지막 작전을 눈치 챈 모양입니다. 하지만 사공을 죽인 일은 참 잘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의자를 놓칠 뻔 했어요.”

  “아무리 그래도 자정 즉시 펼친 작전을 어찌 그리 빨리 알았을까? 하기야 이미 지난 일일세. 어쨌든 의자와 국담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다시 올라온들 이미 저들의 군사들은 초토화되었을 테고, 그 때는 아무리 국담이라 해도 어쩌지 못할 걸세.”

  예씨형제는 국담과 의자를 주시하며 군사들에게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사공은 충신이며 지혜로운 사람이다. 사공이 미리 알고 숨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놈들이 절벽바위로 가는 길목을 막고 죽기로 싸웠다. 그렇다면 사공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 국담은 의자에게 절벽바위 아래로 내려갈 것을 다시 말하려다가 조금 꺼림직 한 생각이 들었다.

  “어라하, 놈들이 절벽바위 아래로 내려가는 북쪽 방향을 막지 않고 이젠 남쪽에 진영을 쳤습니다.”

  “나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지금 당장 강가로 내려가 사공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라!”

 

  오백보정도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양 진영에 솜털 돋는 긴장감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진영 사이에 드리워진 장막이 너무나 두터웠다. ‘저 장막을 뚫고 또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 이번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이미 치러본 전투를 통해 처참한 죽음을 실감한 군사들에게 또 한 번의 전투란 죽기보다 싫은 그 무엇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예식형제의 심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도망갈 구멍을 열어주었는데도 복지부동하고 있는 의자와 국담의 속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령, 놈들이 퇴로를 열어주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네. 혹시 눈치를 챈 걸까?”

  “글쎄요, 눈치야 챌 수도 있지요. 화살공격을 하면 어떨까요. 우리 측 궁병들이 더 많으니.”

  “놈들이라고 가만히 있겠나?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 상태에서 화살을 날려봐야 큰 효과는 못 볼 걸세. 시간만 낭비될 뿐이지.”

  “그렇다고 무작정 공격을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랬다가는 지들이나 우리나 다 죽을 테니까요. 지금이라도 우리군사들에게 표식을 달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거늘. 어쨌든 전면전으로는 안 되겠네.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겠어.”

  예식형제가 특별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의자의 진영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벌한 전쟁터에서 의심나는 부분을 확인하지 않고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변에 변고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놈들이 순순히 퇴로를 열어줄리 만무하지 않은가. 반드시 사실을 확인하고 어라하를 모셔야 한다.’ 국담이 강변의 변고를 의심하자 불현 듯 머릿속에 사공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다. ‘아! 충성스런 사공이 저 예군에게 당했다면······.’ 하지만 언제까지 사공의 불행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국담은 도리질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어라하, 강변상황이 확인될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상관없네. 전쟁에서 잔뼈가 굵은 내가 놈들을 두려워하겠나. 차라리 놈들과 싸우다가 죽는 것이 명예롭지.”

  “어라하!”

  애타는 국담과 달리 의자는 오히려 태연했다.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러오면서 갖가지 위기를 넘겨온 의자였다. 싸우다 보면 아군의 수가 많은 경우도 있었고 적은 경우도 있었다. 아군의 수가 많으면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치렀고 수가 적으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원정을 하는데 있어 병력은 매우 중요했다. 적국의 국경을 넘어 치르는 전쟁은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적들은 익숙한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과 기습으로 아군을 괴롭혔다. 따라서 원정을 할 때는 적들보다 몇 배가 많은 군사들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즉각 후퇴를 해야 했다. 동등하거나 적은 수의 병력으로 적국에서 전쟁을 치를 때는 전패를 하다시피 했다. ‘이 웅진성이 비록 나의 영토이기는 하나 오랫동안 예식이 성을 지배해 왔다. 그렇다면 웅진성은 적국의 영토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예식의 군사들이 몇 배로 많다. 따라서 나는 후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도성을 잃고 쫓겨 다니는 마당에 어디로 후퇴를 한단 말인가.’ 의자는 지금 예식과의 전쟁을 포기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국담이 의자를 말리는 동안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또 흘렀다. 그 사이 강변을 시찰했던 군사들이 돌아왔다.

  “어라하, 사공이 살해당했습니다. 지금 물거품 이는 강변 검은 바위아래에 사공의 목이 떠올라 물빛이 시꺼멓게 변했습니다. 배는 온데간데없습니다.”

  국담의 예감이 적중했다. 소식을 들은 의자의 눈빛은 더욱 견고하게 빛났다.

  “그래서 놈들이 퇴로를 열어준 게로군. 우리가 내려가면 남은 군사들을 쓸어버리려고 한 계산이었어. 간악한 놈들 같으니.”

  “어라하, 놈들의 술책에 당했습니다. 배를 이용한 탈출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를······.”

  “방도가 뭐 따로 있겠나. 죽든 살든 그냥 붙어서 끝장을 보는 거지.”

  전쟁에 내공이 깊었던 의자는 직감적으로 상황이 어렵다고 느꼈고, 포기를 하되 대 백제의 왕으로서 명예롭게 죽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의자의 생각을 간파한 국담은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어라하의 명령대로 전면전을 치르겠습니다. 병사들로 하여금 총공격을 하게한 뒤 저와 군관들은 성문을 뚫겠습니다. 성문이 뚫리는 대로 탈출을 하십시오.”

  국담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로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겹겹이 에워싼 수많은 적을 뚫고 성문으로 가는 동안 의자가 무사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써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지금부터 총공격을 한다. 적들을 밀어붙이며 남쪽 성문방향으로 간다. 군관들은 어라하를 목숨으로 지켜라!”

  국담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군사들은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죽기보다 싫은 살벌함이 주는 공포 때문이었다. 군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국담이 재빠르게 절벽바위 위로 올라갔다.

  “너희들은 어라하의 친위대다. 어라하는 대 백제이며, 백제는 곧 어라하다. 너희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맹세를 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인가, 전쟁이 두려운 것인가. 대 백제의 영광스러운 친위대인 너희들에게 죽음과 전쟁은 필연적 관계이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죽음은 영광스러운 도구이다. 그럼으로 죽음을 두려워 말라.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전쟁도, 전투가 주는 살벌함도 극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죽음으로 나라를 살리려 한다. 죽음으로 어라하를 구하라!”

  국담의 연설에 군사들이 하나 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의자는 군사들의 눈빛을 하나하나 자신의 눈동자에 새긴 뒤 절벽바위 위로 올라갔다.

  “나는 무능한 이 나라의 왕이다. 나로 인해 백제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으로 나는 이 전쟁터에서 명예롭게 죽고자 한다. 나는 대 백제를 팔아먹은 배신자, 저 예식형제를 두고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은 저들을 그대로 둘 것인가! 저들을 단죄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씻지 못할 한을 품게 될 것이다. 너희들의 한은 곧 나의 한이요 대 백제의 한이다. 나와 함께 싸우다가 대 백제의 영광을 위해 명예롭게 죽자!”

  동요하는 군사들의 마음을 완벽하게 끌어올린 마무리 연설이었다. 조금 전까지 흐리멍덩하던 군사들의 눈빛은 이제 이글이글 타올라 태양이라도 태울 듯 했다.

  “으아아~”

  누가 선동하지 않았음에도 군사들은 한 목소리로 악다구니를 썼다.

  오백보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국담의 군사들이 목이 터져라 괴성을 지르자 예군의 군사들은 깜짝 놀라 서로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예군의 마음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방령, 저 놈들의 수작이 예사롭지 않네. 저놈들이 저럴수록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질 거고. 이런 상태로 전면전을 벌이다가는 패배를 면치 못할 걸세. 일단 후퇴를 하여 방도를 생각해 보자고.”

  “이 좁은 성내에서 어디로 후퇴를 한단 말입니까. 지금 당장 쳐들어올 기세지 않습니까. 후퇴를 하더라도 전면전을 치르면서 서서히 해야 합니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예식은 섣불리 도망치다가 후미를 잡히기라도 하면 아군의 피해가 막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군사들의 사기를 그대로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다급한 상황이지만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 상황에서 특단의 대책이 별 수 있겠는가. 역시 연설밖에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효과가 있을 것 같은 말들을 쏟아 내야하는 것이다. 예식은 긴 칼을 높이 쳐들고 군사들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자랑스러운 웅진성 군사들이여! 너희들은 북방을 대표하는 정예병들이다. 우리는 저들보다 몇 배나 숫자가 많다. 너희들이 저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백제의 무능한 왕을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저 방탕하고 타락한 왕 때문에 백제가 망할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왕을 잡아 백제를 위기에서 건져내야 한다. 하지만 왕을 잡지 못하고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우리는 백제를 팔아먹은 배신자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왕을 잡아 이 전쟁에서 이기면 우리는 백제를 구한 영웅이 될 것이고, 패한다면 역적이 될 것이다. 백제의 역적으로 낙인찍혀 죽을 것인가. 아니면 명예롭게 싸우다 죽을 것인가. 나와 너희들은 어차피 한 배를 탄 몸이다. 너희들과 함께 나도 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다. 어찌하겠는가!”

  의자와의 전쟁에서 패한다면 역적으로 낙인찍혀 죽을 것이니 의자를 잡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백제를 구한 영웅이 되자는 것이었다. 이 연설로 군사들의 사기가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예식은 타오르는 장작에 기름을 붓기로 했다.

  “자랑스러운 웅진성 군사들이여, 여기 백고라는 자가 있다. 이 자는 한 때 국담의 오른팔이었다. 한데 이 자가 자기 전우들을 내팽개치고 배신을 했다. 이 자는 소정방이 우리의 거사를 인정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헌신짝처럼 버린 놈이다. 나는 이런 놈을 믿을 수가 없다. 이제 이놈을 저 국담에게 보내고자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예식의 말에 백고는 다리를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바, 방령. 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백고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예식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사실이 아닌가.”

  “아무리 그렇더라도 저로 인해 저들의 음모를 알지 않았습니까. 어찌 이런 대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동안 2인자로서 누릴 만큼 누린 놈이 어찌 제가 모시는 주군을 배신한단 말이냐. 우리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예식은 ‘배신’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면서 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고 도망을 치면 백고처럼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 죽일 것이라는 경고였다. 백고와 예식, 예식과 백고. 사실은 그들 둘 다 배신자였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입장에 따라 배신의 의미와 해석은 달라지는 법. 힘과 권력이 있는 예식이 아무런 힘이 없는 백고를 배신자로 몰아 사지로 쫒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기,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 하기야 무작정 가서 죽으라고 할 수는 없지. 좋다. 백제의 싸울아비로서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주겠다. 너를 따르는 저 배신자들과 함께 나가 싸워라. 네 놈이 충분한 전과를 올리면 배신자의 낙인을 떼어주고 온전한 우리사람으로 받아들이겠다.”

  예식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백고에게 기회를 주었다.

  “네 놈이 충분한 전과를 올렸다고 판단되면 북을 치겠다. 북소리와 함께 후퇴하라. 북소리를 듣고 싶으면 죽기로 싸워야 한다. 웅진성의 자랑스러운 군사들이여, 이 배신자들에게 기회를 주겠는가?”

  예군이 다음 말을 잇자 군사들의 창과 칼, 방패가 하늘을 찔렀다.

  “싸워라! 싸워라! 싸워라!”

  드디어 군사들의 사기가 완벽하게 끓어올랐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백고가 칼과 방패를 들고 자닝스럽게 걸어갔다. 그 뒤를 백고의 측근 무사 몇 명이 따랐다.

  “빨리 가지 않고 뭘 그리 꿈지럭거리고 있는가!”

  예군이 백고 일행에게 발길질을 했다. 일행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어쩌다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선택은 하나밖에 없다.’ 백고는 재빨리 자신을 돕기 시작했다. ‘예식의 말처럼 나는 패역한 군주를 도발한 것이다. 나라를 망조로 이끈 왕을 배신한 것이다. 의자는 백제가 아니다. 그가 없어도 백제는 백제다. 의자만 잡아가면 백제는 회생할 수 있다.’ 백고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을 하며 배신행위를 스스로 두둔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불현 듯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살길은 놈들을 쳐 죽이고 전과를 올리는 것뿐이다. 적이 아군이 되고, 아군이 적이 되는 일이 어디 한 두 번 이었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매 한가지다.’ 백고는 뒤따르는 무사들을 비장하게 돌아보았다.

  “우리는 어라하를 배신했지 백제를 배신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했다. 우리의 선택에 후회는 말자. 우리가 살 길은 죽어라고 싸우는 것뿐이다. 싸우다가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자. 백씨가문의 명예를 위하여 모두 공격하라!”

  백고를 따르는 무사들은 오랫동안 백씨가문의 그늘에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백제나 의자보다 백고의 명령이 더 중요했다. 그들이 백고의 배신에 스스럼없이 동조하고 행동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백고가 측근과 함께 들소처럼 달려 나가자 예식의 군사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국담의 심사는 복잡하기만 했다.

  ‘저 친구를 어쩐다.’ 배신을 했지만 친구였다. 귀족들의 가문행사가 있을 때는 늘 곁에서 추어주던 국담의 후원자였다. 그런 백고가 갑자기 돌변해 배신자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국담이었다. ‘분명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 국담은 가능한 백고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조국을 배신하고 왕을 잡는데 앞장선 점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군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백고를 그냥 둘 순 없다. 그런데 왜 예식은 백고를 사지로 보낸단 말인가. 자기를 위해 긴요한 정보를 가져다 준 백고를 왜 죽이려 하는가.’

  “어라하, 저 놈은 백고입니다. 예식이 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무장을 한 채 달려오고 있을까요.”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 죽이려는 것이겠지. 어쨌든 놈은 배신자 아닌가.”

  백고를 발견한 국담의 군사들은 독수리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악의로 가득 찬 송곳들이 목구멍을 뚫고 치솟는 소리 같았다.

  “무참히 죽여 버려야 한다!”

  군사들 중 누군가가 목정맥을 불끈 세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다른 군사들도 한목소리로 백고를 죽이라고 외쳤다. 이제 백고는 이십 보 앞까지 달려왔다. 의자와 국담이 백고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어느새 한 무더기의 병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백고를 향해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춰라!”

  국담이 급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전투는 시작되었다. ‘백고가 항복의 의사표시를 하지 않고 우리 군사들과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악의가 분명하다. 예식이 백고를 희생양삼아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려 하는구나. 어라하의 말씀이 맞았다.’ 예식의 의도를 분명히 알아챈 국담은 병사들을 물리고 군관들로 하여금 백고를 상대하게 하려했다. ‘백고가 비록 뛰어난 고수는 아니지만 명색이 백제최고가문 출신이다. 백제 대성팔족 자제들이 그렇듯이 백고도 어려서부터 훌륭한 무예스승의 검법을 배워온 무사 중 한명이다. 게다가 백고를 보필하는 무사들도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 그들을 일반병사들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국담의 염려는 틀림없었다.

  백고의 빠른 칼을 막아내기에 병사들의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대로 둘 경우 백고의 칼은 수많은 병사들을 도륙할 것이다. 백고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자 예식은 그윽한 눈빛으로 자신의 군사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자신만만한 얼굴표정이었다. 그대로 명령을 내리면 거침없이 쳐들어갈 태세였다. 백고를 이용한 작전은 대 성공이었다.

  자신감이 팽배해진 백고와 측근 무사들은 달려드는 병사들을 아주 손쉽게 물리치며 진영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병사들이 빙 둘러 포위를 했지만 쉽사리 제압할 수 없었다. 뒤늦게 군관들이 달려가 백고를 막으려 했지만 사생결단의 각오로 싸우는 백고를 상대하기가 벅찼다. 구름사이로 간간이 비치던 달이 한 뼘도 이동하지 않은 시간에 군관 서너 명이 쓰러졌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들 뒤로 물러서라!”

  국담이 물러서라는 말을 수도 없이 외쳤지만 혼이 빠진 군사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국담이 직접 포위망 안으로 들어갔다.

  “너희들은 모두 뒤로 물러서라.”

  국담이 차분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군사들은 눈을 찔끔 감으며 물러섰다. 군사들이 안전거리 밖으로 이동한 것을 확인한 국담이 백고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나라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애꿎은 전우들을 죽이다니. 너는 의리가 뭔지도 모르는 파렴치한에 불과하다.”

  “국담, 여러 소리 할 것 없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 길이 달랐을 뿐이다.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여기서 결판을 내자.”

  사실, 백고는 국담과 겨뤄 이길 자신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백제최고의 귀족가문출신으로서 자존심만은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백고의 귀는 초조하게 예식의 북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조상대대로 은혜를 입은 나라를 무참히 배신했다. 너의 죄는 죽어서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이제 너로 인해 너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백제는 너 같은 놈들로 인해 망하지 않는다. 너는 내 칼에 죽을 것이다. 너는 죽어서도 네가 한 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국담은 다소 긴 말을 백고에게 해주었다. 죽기 전 옛 친구에 대한 마지막 우정이었다. 국담이 칼을 빼들자 백고의 측근 무사들이 백고를 감쌌다. 무사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 역시 예식의 북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저자를 막을 테니 공자께서는 돌아가십시오. 이 정도 전과라면 예식도 공자만은 살려주실 겁니다.”

  측근무사들이 희생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 말에 백고의 마음이 흔들렸다. ‘하긴 나도 할 만큼은 하지 않았는가. 이 정도 전과라면 돌아가서 할 말이 있다.’ 백고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측근들이 한꺼번에 국담에게 달려들었다. 무사들은 온 몸의 기를 끌어 모아 모조리 소진할 각오로 검의 날을 세웠다. 국담의 눈에도 그들의 비장함이 보였다. ‘저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저들이야말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충신이다.’

  “슈슉”

  백고의 무사들이 죽을 각오로 칼을 휘두른다 해도 국담에게는 아이들이 아기족거리며 가지고 노는 장난감 무기에 불과했다. 무사들은 국담이 허공을 향해 가른 단 한 번의 검에 목을 잡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무사들의 목이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국담의 칼에는 그들의 피가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았다. 무사들은 목이 떨어졌는데도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국담의 칼이 섬광처럼 무사들의 목을 쳐 목이 떨어졌는지 붙어있는지 무사들조차 모를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무사들의 몸이 실처럼 주저앉았다.

  실로 엄청난 광경을 지켜본 군사들은 입을 헤 벌리고 다물지를 못했다. 백고 역시 자신을 따르던 무사들의 목을 보고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예식과 그의 군사들도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매처럼 눈이 좋은 몇 명만 현장의 생생함을 보았을 뿐 나머지는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현장을 목격한 예식의 군사들은 엄청난 사실을 주변의 군사들에게 숨넘어가는 소리로 알렸다. 하지만 군사들은 뻥을 친다며 비웃었다.

  “네 부하들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너만 살겠다고 도망치려 하는구나.”

  국담이 애처롭게 백고를 쳐다보았다. 국담의 질타를 받은 백고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예식의 진영과 국담을 번갈아 보았다. ‘이대로 도망을 치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부하들은 나를 살리고자 목숨을 버렸다. 그들의 희생을 저버릴 수 없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한다. 아니다, 어차피 구차한 목숨 아니던가. 내가 도망을 치면 국담은 성격상 나를 쫒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살고보자.’ 생각이 정리된 백고는 예식의 진영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저자를 살려서는 안 된다. 어서 가서 잡아오라!”

  의자가 빈 칼을 휘두르며 억패듯 닦달했다. 의자의 명령에 군관들이 말 위에 올랐다.

  “군관들은 그대로 있으라.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도망을 치면 쫒지 않을 것이라는 백고의 기대는 틀렸다. 물론 다른 일 같았으면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배신한 자를 친구라는 이유로 살려줄 국담이 아니었다. 국담은 직접 말을 몰고 백고를 쫒았다. 도망쳐오는 백고를 예식이 못마땅한 듯 째려보았다. ‘저 놈은 정말 지지리도 못난 놈이로구나. 백제 최고가문의 귀족이 명예롭게 죽을 줄도 모르는구나. 불쌍한 놈.’

  “말을 타고 달려가서 저 백고 놈을 구해오라. 돌아와도 좋다는 북을 쳐라. 백고를 구하자마자 총공격을 한다.”

  예식은 백고의 행동이 한심스러웠으나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구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방령, 저깟 놈을 살려 뭣 하려고. 그냥 놔두게. 죽든 말든.”

  “형님, 저 놈을 살리는 척이라도 해야 군사들이 우리를 믿지요.”

  예식의 명령에 군관 세 명이 말을 타고 백고를 마중 나갔다. 백고는 이제 예식의 진영 오십 보 앞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멀리서 국담을 지켜보던 의자가 다급하게 후퇴를 명하는 북을 쳤다. 적진으로 너무 많이 간 것이다. 하지만 국담은 그대로 말을 달렸다.

  “저, 저놈은 국담이 아닌가.”

  어슴푸레 했지만 예군이 백고를 쫒는 국담을 발견했다. 예식은 백고정도를 잡고자 총사령관인 국담이 직접 움직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예군이 혼란스러워 하는 사이 예식의 군관들은 백고를 지나쳐 국담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긴 창을 휘둘러 말에서 떨어뜨린 뒤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군관 중 한 명이 짧은 탄식을 했다.

  “앗!”

  국담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은 순식간에 떨어져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나머지 군관들도 국담을 알아보았으나 창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황천길로 갔다. 군관들을 단칼에 해치운 국담은 그대로 말을 몰아 예식의 진영 삼십 보 앞까지 도망친 백고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억!”

  백고가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너 이놈 백고야, 내가 너를 살려둘 줄 알았더냐.”

  국담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백고의 명치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백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백고의 눈에서 원인모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모든 일이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백고의 죽음을 확인한 예식은 허둥지둥 전열을 정비하려 했다. 어렵사리 사기를 끓어 올린 군대가 국담으로 인해 흐트러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초조한 것은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국담이라 해도 코앞이 적진이다. 혼자서 수천을 상대한 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의자가 긴 탄식을 하고 있을 때 국담이 가볍게 날아 말 위로 올라갔다. 예식은 국담이 자기 진영으로 잽싸게 도망칠 줄 알았다. 하지만 국담은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화, 활을 쏴라!”

  예식의 명령이 있었지만 군사들은 활을 쏠 수 없었다. 말에 탄 국담이 화살을 장전할 틈도 없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진영을 향해 도망친다면 활을 쏘아 보기라도 하겠지만 사정거리가 아닌 코앞에 있는 자를 어찌하겠는가. 이럴 땐 보병이 칼과 창으로 막아야 한다. 국담은 말을 타고 예식의 진영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은 무자비했으며 한 번씩 휘두른 칼에 십여 명의 군사들이 나가 떨어졌다. 문제의 그 푸른빛이 섬광처럼 번득인 것이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의자가 발을 땅에 구르며 초조해 했다.

  “공격, 당장 공격하라!”

  의자의 명령에 사기가 충천된 군사들이 내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예식의 군사들이 전투를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후퇴, 후퇴한다!”

  예식의 선택은 후퇴밖에 없었다.

  “에이, 이런 썅! 저놈 하나 잡지 못해서 또 도망을 치다니. 이런 썅!”

  예군은 온갖 욕설을 늘어놓으며 꾸역꾸역 후퇴를 했다. 국담은 후퇴를 하는 예식을 더 이상 쫒지 않았다. 여세를 몰아 성문 밖으로 탈출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은 겐가. 놈들을 쫒지 않고 뭐하나.”

  의자가 국담의 안부를 물으며 추격을 요구했다.

  “어라하, 놈들을 추격해 전투를 벌여본들 우리에게 아무런 득이 없습니다.”

  “그럼 어쩌자는 겐가.”

  “놈들이 도망치는 동안 전군을 몰아 성문 밖으로 탈출을 해야지요.”

  “아, 그렇군! 저 괘씸한 놈들을 두고 도망을 쳐야 하다니. 참으로 원통하도다.”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국담은 예식이 동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고 군사들을 남쪽 성문으로 이동시켰다. 전군이 수월하게 성문을 빠져 나가려면 가장 넓은 남쪽 문이 적당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후퇴를 하긴 했지만 예식이 의자를 포기할리 만무했다. 의자를 잡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니 죽기로 의자를 잡아야 했다.

  “오늘밤 의자를 잡지 못하고 놓치면 우리는 자결을 해야 합니다.”

  “잘 알고 있네.”

  “놈들이 우리를 추격하지 않고 남쪽 문으로 향했습니다.”

  “아! 그리로 탈출을 하려는 의도로군.”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남문을 사수하고 그곳에서 사생결단을 내야 합니다.”

  “저 국담이라는 놈이 문제야. 병사들은 물론 군관들까지 국담만 보면 주눅이 드니.”

  “화살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라고 하십시오. 칼로는 놈을 잡을 수 없습니다. 오직 활뿐입니다. 활로 놈을 잡겠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날이 밝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벽 위를 먼저 점유해야 하겠군.”

  “그렇습니다. 빨리 움직이십시오.”

  예식의 명에 따라 예군은 궁병을 천 명 이상으로 늘렸다. 예군은 전군을 모아놓고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국담이라는 놈을 두려워 하지마라. 이제부터 놈은 화살로 잡는다. 높은 성벽위에서 일제히 쏘는 화살을 놈 혼자서 어찌 다 막을 수 있겠는가. 화살 말이다 화살. 그래도 모르겠는가!”

  예군의 명령은 국담을 잡을 수 있는 정답이나 마찬가지였다. 군사들은 예군의 말귀를 재빨리 알아듣고 궁병들을 쳐다보았다. 궁병들이 성벽위로 뛰어 올라가 바람처럼 남쪽으로 달려갔다.

  “기병은 놈들의 이동을 지연시켜라!”

  예식의 명에 따라 기병들이 말머리를 남쪽 성문으로 돌렸다.

  “보병은 성벽을 따라 빠르게 이동한다.”

  예식의 군사들이 남문으로 향하는 동안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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