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부케의 의미
“아, 맞다.”
하린이 일어서자 도현이 차키를 슬쩍 들어보였다.
“차에서 기다릴게.”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식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아까 무대의 일은 존재하지 않았던 듯, 그녀의 어깨가 활짝 펴졌다. 작은 미소도 얼굴에 달았다.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은 멘탈을 다시 장착했다.
포토라인에 익숙하면서도 세월의 흔적이 묻은 여러 친구들이 보였다. 앳되기만 했던 고등학생 시절을 벗어버린 성숙한 친구들의 모습에 새삼 하린은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하린아, 대박! 너 강도현 어떻게 알아? 무슨 사이야?”
예식에 늦은 덕분에 이제야 인사를 나누는 친구들이 보자마자 강도현 이야기를 꺼냈다. 하린은 작은 한숨을 삼켰다.
“아끼는 후배라며! 어떻게 아는 사이야? 너 혹시 이제 가수 데뷔하는 거야?”
“역시! 난 너 될 줄 알았어. 문린고 스타였잖아. 하린이.”
하린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친구들은 하린의 대답을 가로채며 오히려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행이었다.
“오랜만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자마자 들리는, 듣기 거북한 하이톤의 째지는 목소리에 하린이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나정민. 설마, 세영이랑 친하지도 않은데 결혼식에 올까 싶었지만 워낙 뻔뻔한 스타일이니 결혼식에 참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차였다. 그렇기에 아침부터 공을 들여 준비를 했던 것이다. 깔보지 못하게, 이왕이면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려고.
보자마자 강훈이부터 물어보겠지…….
“부케도 받는다며? 강훈이랑 결혼이라도 하시나 봐?”
빙고! 아직까지도 제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민을 보며 하린은 남몰래 혀를 찼다.
“궁금해? 궁금하면 오백 원.”
하린이 손바닥을 나정민에게 내밀었다. 비웃음조차도 지워버린 얼굴에는 궁서체로 ‘오백 원’이라고 씌어져 있었다. 하린은 진심 진지했다. ‘묻지 마! 기집애야!’ 라는 뜻을 알아 들었으려나.
“하! 그게 도대체 몇 년 전 유머니. 완전 유치해서.”
나정민은 큰 소리로 하린을 비난했지만 하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민은 둘러대는 하린의 대답에 속이 탔다. 정말, 결혼을 하는 건 아니겠지?
“싫으면 말고. 난 두 번은 안 권해.”
하린이 손바닥을 접었다.
강훈의 소식이 궁금해 세영이 결혼식까지 온 정민이니, 속이 탈 것이다. ‘강훈이 결혼을 하던 말건, 네가 무슨 상관이니 기집애야’ 라는 이번 말은 제발 알아 들었기를 바라며 하린은 슬쩍 미소 지었다.
나정민이 뭐라고 더 따져 말하기도 전에 사진기사가 하린을 불렀다.
“자, 부케 받으실 분 앞으로 나오세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완벽하게 부케를 받은 하린은 신랑과 신부 사이에 수줍게 부케를 들고 섰다.
“하린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하린에게만 들릴 듯 조용하게 속삭이는 세영의 손을 하린이 꼭 잡았다. 세영의 의도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린이 그 아픔을 잊어버렸기를 바랐을 것이다. 자신이 극복하지 못해 축가를 선물하지 못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강도현 씨의 축가가 고맙다는 말로 들린다.”
“어머, 들켰니? 나는 신랑 대신에 강도현 씨랑 같이 사진 찍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니?”
“결혼식 날부터 바람의 향기가 난다.”
장난스러운 하린의 대답에 하린과 세영은 같이 웃었다.
“자, 이번엔 친구 분들 다 같이 다시 찍습니다.”
하린이 세영의 옆으로 비켜서자 이를 갈고 있던 나정민이 하린 옆으로 바싹 붙었다.
“결혼도 안 하는데 부케는 왜 받아?”
“누가 결혼 안 한대?”
결혼을 한다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안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누구랑 할지는.
“강훈이랑 결혼한다고?”
목소리가 음산했다. 나정민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까는 웃는 기색이라도 있더니 이제는 굳은 표정이 무척이나 딱딱했다.
사진작가는 열심히 신랑신부를 중심으로 늘어선 친구들의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사진이 찍히든 말든 나정민의 머리는 온통 하린 뿐이었다.
‘이것들이 결국 결혼까지 한다고?’
최강훈을 열렬히 짝사랑하던 시절이 있었다.
17살의 봄, 통하지 않은 마음에 몇 날 며칠을 호되게 앓았다. 상처는 아물었지만 흉터는 지워지지 않고 낙인처럼 남았다.
그 흉터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박하린이 싫었다. 박하린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박하린이 미웠다. 박하린을 부셔버리고 싶었다.
자신은 닿을 수 없는 고결한 강훈의 옆에서 알짱거리는 재수 없는 계집애.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남을 헤아리지 않는 이기적인 계집애.
어느 순간부터 최강훈에 대한 사랑보다 박하린에 대한 미움이 마음속에 크게 자라났다. 그 미움은 여전히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강훈이 누구와 결혼을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상대가 박하린이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지.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박하린도 안 되지.’
나정민의 눈동자가 분노로 빨갛게 타올랐다.
“궁금했으면 아까 오백 원을 줬어야지.”
힐끗 정민의 표정을 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숨기지 못하는 분노로 얼굴에 자잘한 실금이 가 있었다. 생각만큼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듯 했다.
‘강훈이랑 결혼 해버려?’
나정민에게 복수하는 데 그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테지만, 하린이 청혼을 한다 해도 강훈이 단칼에 거절할 것이다. 도현보다 더 싸늘한 표정으로 미쳤냐고 하겠지.
그래도 강훈과의 결혼식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나정민이 절망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텐데. 안타깝다.
* * *
예식이 끝난 후 차에 올라탄 하린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깁스만 풀면 더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몸은 많이 지친 상태였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에 혹사당한 발가락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긴장으로 벌벌 떨던 것은 그대로 다리로 내려왔는지 여전히 저렸다. 점심은 제대로 챙기지 못해 허기진 상태로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부케가 마음에 들었나?”
도현이 부루퉁하게 물었다. 차에 타면서부터 놓지 않는 저 부케를, 꼭 껴안고 미소를 짓고 있는 하린이 못마땅했다.
‘정말 결혼까지 생각했던 건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떠난 남자였다. 그것도 하린을 버려두고. 그런데도 뭐가 좋다고 부케를 받지를 않나, 좋다고 웃지를 않나 도현은 속이 끓었다.
“예쁘잖아요.”
“예뻐서 좋아한다니 신선하군. 먹는 걸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보통은 먹는 걸 좋아하지만, 예쁜 것도 좋아한다고요. 무릇 사람이라면.”
“사람이었나?”
“그거 무슨 뜻이죠?”
하린은 부케를 무기처럼 들어 올렸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만큼은 도현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정말 결혼이라도 할 예정이야?”
최강훈과 결혼을 하는 것일까? 어제 한 번 떠오른 의문은 내내 도현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하린과 턱시도를 갖춰 입은 최강훈은 꽤나 잘 어울릴 것이다. 그의 집에서 보았던 사진 속 완벽한 커플이었던 것처럼.
도현은 입안이 까끌까끌했다.
“왜요? 축가라도 불러 주시려고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현을 쳐다보는 얼굴이 귀여웠다. 볼은 통통하고 동그란 눈이 반짝이니 도토리를 숨기고 있는 다람쥐 같았다. 복슬복슬한 털을 쓰다듬고 얼굴을 부비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은 귀여운 다람쥐.
“내 행사 비용을 알고 하는 소리야?”
“얼만데요? 얼마면 되는데요?”
“얼마나 줄 수 있는데?”
“하늘땅, 땅만큼? 제가 줄 수 있는 만큼 다 드릴게요. 도현씨의 축가만큼 영광일 결혼식도 없겠네요.”
죽어도 결혼 안 한다는 소리는 안한다. 도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세영이는 완전 대박인거죠. 이런 영광스런 도현씨 축가도 받고. 축가 정말 고마웠어요. 세영이도 너무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정말 잊지 못할 결혼식이 됐다고.”
“별말씀을.”
“그리고 나도 너무 고마웠어요. 덕분에요.”
왜 노래를 못 부르고 그렇게 떨어대기만 했는지 물어보지 않아서 너무 고마웠어요. 내 손을 잡아주고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며 위로를 건네는 당신이 너무 고마웠어요.
하린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삼켰다. 속이 깊은 사람이었다. 하린이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하나를 더 생각하고 더 많이 배려를 해준다. 그것이 참으로 고마웠다.
“앨범이 나오면, 혹시, 저도, 그러니까 제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일이 있을까요?”
도현의 앨범은 더블 타이틀곡으로 갈 예정이었다. 하린과 같이 부른 <끌림>과, . 하린은 아직까지는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은 게 없었다.
“글쎄.”
도현은 힐끗 그녀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아까처럼의 긴장감은 없었지만 길고 흰 손가락이 의미 없이 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불안한 걸까?
“아직, 활동 계획은 없어.”
이번 솔로 앨범을 준비하면서도 특별히 방송활동을 할 계획은 없었다. 아일랜드 음반이 미뤄지면서 팬서비스 차원의 앨범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 그렇구나…….”
다행이다.
하린은 남몰래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도 기다린 가수의 데뷔지만, 노래를 부를 일이 없을 거라는 사실에 안도하다니. 하린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변동 될 수도 있고.”
더블 타이틀 곡 중 대중에게 어떤 곡이 선택될 지는 알 수 없다. 어떤 곡이 선택이 되든 하린의 입장을 생각하면 활동을 하는 것이 더 이득일 것이다.
“활동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렇기에 활동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오늘 결혼식장에서의 하린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그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그래서 어떤 결정이 모두에게 좋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 물론 그렇죠. 활동을 하는 게 앨범 홍보 면에서도 좋을 거고. 팬들도 많이 기다리잖아요. 당신 보고 싶어서.”
“당신은……, 무대에 서고 싶나?”
“네?”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지 않아?”
“물론 하고 싶어요. 하고 싶지만……, 혹시 폐가 될지도 모르고…….”
“본인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해가 될지 득이 될지는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지.”
도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하린은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그녀는 무대 위에서 떨고 있는 17살의 하린이었다.
차는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도현이 병원 앞에 차를 세웠다.
“어머! 벌써 병원이네요. 사무실에 가셔야 저 때문에 괜히 돌아왔네요. 사무실 근처에서 내려주시면 되는데.”
도현이랑 말하다보니 이 차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연히 사무실로 갈 줄 알았는데, 병원에 까지 데려다 주고.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고마워요. 덕분에 여기까지 정말 감사히 잘 타고 왔네요.”
차는 주차까지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시동을 끈 자동차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물론 워낙 고급차라 달리는 와중에도 내부는 항상 조용했다.
“그동안 수고했어. 깁스 잘 풀고.”
“고마워요.”
“이후엔 집에 갈 건가?”
일산 시골집까지 하린 혼자서 어떻게 갈지 걱정이 된다. 같이 가면 좋겠지만 그에게는 아직 못 끝낸 믹싱 작업이 있었다. 앨범 발매 기한을 맞추려면 오늘 밤샘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데려다주지 못하지만,
“네. 가서 뮤직 비디오 콘티 보고 연습 해야죠.”
“흠. 흠.”
무슨 연습을 어떻게 한다는 뜻인지. 도현의 머릿속에 뮤직 비디오에 추가된 내용이 떠올랐다. 잔잔하게 심장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박하린은 뭔가 담담해 보인다.
“흐음. 혹시 콘티 추가된 내용은 받았어?”
“어, 추가 됐어요? 언제요? 전 못 받았는데. 언제 준 거지?”
역시. 그걸 못 봤군.
도현이야 스탭들이 알아서 잘 챙기지만, 승훈이 없다보니 하린을 챙기는 이가 없었던 탓이다.
“무슨 내용인데요?”
“너랑 나랑 키스하는 내용.”
“컥,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