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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홍콩러브트립
작가 : 제이J
작품등록일 : 2017.12.1

은퇴후 낯선 도시를 찾아온 톱스타 이한경
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이드 송호연
홍콩에서 시작되었던 그들만의 러브 트립

 
3. 너에게 가는 길 -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1
작성일 : 17-12-06 11:35     조회 : 348     추천 : 0     분량 : 8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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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너에게 가는 길 -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800m가 넘는 오르막길을 너는 걸어서 올라왔다고 했다.

 이른 아침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아래쪽으로만 향하더라고,

 그 길의 끝에 살고 있는 나에게 올 수 있는 방법이

 이것 밖에 없었다고,

 가쁜 숨을 고르며 너는 말했다.

 그날 너는 그렇게 내게로 왔다.

 내 가슴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남쪽으로 난 통 창 너머에는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보였다. 부촌에 속하는 미드레벨에 위치한 작은 아파트는 위니의 아버지가 영국으로 떠나며 딸의 몫으로 남겨준 주택이 재개발되고 들어선 것이었다. 호연이 관리비를 담당하는 조건으로 시작된 두 여자의 동거는 올해로 5년째였다. 그녀들은 거실바닥에 마주앉은 채 건조기에서 막 꺼낸 빨래더미들에서 자신들의 속옷과 옷가지를 골라 개키는 중이었다.

 

 “그래서 이한경이랑 같이 한 달 동안 홍콩을 구경하고 다니겠다?”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돈을 그렇게 많이 주겠다는데,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쓰라는데. 넝쿨째 굴러들어온 호박을 걷어차니?”

 “호박이 아니라 폭탄이면 어쩔건데. 이한경 그 대표랑 붙으려고 작정하고 온 거라며. 그 쪽에서는 일방적인 은퇴선언이라고 보도자료 냈더라. 일 커지겠던데.”

 

 스타버스트는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였다. 스타그룹 차녀인 황유라는 서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회사를 차리며 독립한 후 십 년만에 연예계 전반을 쥐고 흔드는 큰손이 되었다. 케이블 방송국은 물론이요, 외주 제작사와 영화 배급사까지 두루 갖춘 스타그룹의 존재는 유라가 독보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한경이 상대해야할 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현수와 함께 호연을 엿 먹인 또 다른 인물이라는 점에서 볼 때 공공의 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하려고.”

 

 티셔츠를 개던 위니가 눈만 들어 호연을 바라보았다.

 

 “나 이제 옛날 송호연 아니거든.”

 

 수많은 송호연이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존경하던 선배를 잃었던 송호연. 글쓰기를 버리고, 꿈을 버렸던 송호연. 화보다 겁이 났고, 분노보다 두려움이 앞섰던 송호연.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송호연.

 

 [난 여기에서 누군가와의 싸움을 시작해야 해.]

 [편 들어줄 사람이라도 찾는 거에요? 그럼 가이드가 아니라 치어리더를 구했어야죠.]

 [우린 어차피 같은 편이야. 당신 뒤통수를 때린 사람들이 내가 싸워야 할 사람들이니까.]

 

 한경은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해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나쁜 놈이 이현수 하나만은 아닐 거라는 건 짐작했던 일이었다. 5년 전, 마지막으로 만난 자리에서 현수는 호연에게 말했다. 그냥 포기해. 넌 그 사람들 못 이겨. 그는 덧붙였다. 이 세계엔 어마어마한 힘들이 존재해. 그 힘들이 너를 버렸고 날 택한 거야. 그러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받아내고 가만히 있어. 그게 내가 후배이자 연인이었던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야.

 

 [당신은 날 돕고, 나는 당신을 돕는 거지. 기브 앤 테이크, 상부상조. 인간관계의 기본이잖아?]

 [그 다음은요?]

 [송호연씨는 유명한 여행 작가가 될 거고, 난 떠나야지.]

 [진짜 은퇴를 하겠다는 거에요?]

 [어차피 돌아갈 수 없어. 돌아갈 다리를 내 손으로 끊고 왔거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그래서였다. 어마어마한 그 세계에서 톱의 자리에 오른 저 근성이라면, 그 자리를 스스로 내던진 이정도 배짱이라면 해볼 만한 싸움이 아닐까 싶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자신을 버린 그 세상을 향해 짱돌 하나 쯤은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뒤통수에 명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였다. 무엇보다 오늘의 그녀를 내일의 그녀가 한탄하며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한경 안티생활은 접는 거야?”

 “야. 내가 악플을 달았니, 욕을 하고 다녔니. 그냥 혼자 살짝 싫어했던 거지. 안티는 무슨.”

 “살짝은 무슨. 난 너 때문에 이한경 나오는 드라마는 숨어서 몰래 봤는데.”

 

 위니가 눈을 치켜뜬 채 반박을 했다.

 

 “뭐, 빠순이 보단 안티가 낫지. 안 그러면 가슴 떨려서 그 일을 어떻게 하니? 내가 딱 적임자야.”

 

 호연은 뻔뻔하게 되받아쳤다. 타국 땅의 이방인으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지 어언 5년차, 늘어난 건 쓸데없는 말발 밖에 없었다.

 

 “호연, 네 인생은 어쩜 그렇게 모 아니면 도니? 대본을 도둑맞았는데 그 주인공이 찾아오고, 안티였다가 가이드가 되고.”

 “지금까지 빽도로 살았으니까 평균 내면 개나 걸 정도는 되겠네.”

 “그래. 인생 대박한번 쳐라. 이한경의 홍콩 여행기. 이거는 발로 써도 베스트셀러 각이다.”

 

 기회일지 위기일지 몰라도 부딪쳐볼 작정이었다. 밑져야 본전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이한경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북 저자라는 타이틀이 남을 것이다. 두둑한 통장의 현찰도 남는다. 이 선택이 가져올 위험요소들에 대해서는 차차 생각해도 늦지 않을 터.

 

 “오늘부터 나도 이한덕이야.”

 “이한덕?”

 “이제 한경 오빠 덕 좀 보자.”

 

 어제 그들은 오랫동안 그 바다에 있었다. 선착장의 낡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흰 구름위에 붉은 잉크가 엎질러진 듯 번져가는 노을을 보며 드문드문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어떤 여행객들과도 나누어 본 적 없는 한가로운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이 도시를 제대로 봐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녀가 써야할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줄 수 있을 거라고.

 

 “이한경은 어제 어디로 갔어?”

 “변호사가 센트럴 쪽에 호텔 잡아놨다던데.”

 “변호사?”

 

 은혁의 멀쑥한 얼굴이 떠올랐다.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한 얼굴, 한경과 호연을 번갈아 바라보던 심난한 눈. 세상 근심걱정을 혼자 다 짊어진 듯 간간히 내쉬던 짙은 한숨.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중2병 걸린 십대소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건지.

 

 “근데, 너 포기할 자신은 있는 거야?”

 

 뜬금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티셔츠를 개던 호연의 손길이 멈추었다.

 

 “뭘 포기해?”

 

 호연은 두 눈을 끔벅이며 물었다. 위니는 제방으로 들어가 양손에 뭔가를 챙겨들고 나왔다. 그녀가 빨래더미 옆에 내려놓은 것은 검은 마스크와 검은 야구모자였다.

 

 “네가 이 상황에 포기해야 할게 뭐겠니. 미모지.”

 “…….”

 “신상 털리기 싫으면 완벽하게 가리고 다녀.”

 

 미처 하지 못했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이한경과 함께 다니는 묘령의 여인에 대해 펼쳐질 온갖 추측들, 네 이년 누구냐 쏟아질 의문의 시선들, 행여라도 신분이 노출된다면 이름 석 자는 물론이요, 오래된 졸업앨범 사진까지 모든 신상이 탈탈 털릴 게 불 보듯 빤한 일이었다. 대한민국 네티즌 수사대의 위력은 그 어떤 정보기관보다 대단하다는 걸 그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신세 망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등골이 서늘했다.

 

 “가이드라고 처음부터 커밍아웃 할까? 그럼 사람들이 관심을 좀 덜 갖지 않을까?”

 “그래도 신상 털리는 건 마찬가지지. 전생에 나라를 구한 저 가이드가 누구냐, 우리 오빠에게 흑심만 품어봐라.”

 

 초인종이 울린 건 그때였다. 두 여자의 대화가 멈추었다. 거실벽면에 걸린 홈 네트워크 시스템 화면에는 문제의 그 오빠 얼굴이 떠있었다.

 

 “저거, 이한경 아니니?”

 “저 사람이 여길 어떻게 온 거야?”

 

 호연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소를 어찌 알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호연이 홍콩에 있다는 것은 물론, 에세이 북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까지 빠삭하게 파악했던 문제의 변호사에게 집 주소 정도는 껌일 거였다.

 그녀가 궁금한 건 이 아침에 여기까지 대체 왜, 어떻게 왔느냐는 거였다. 호연은 현관으로 뛰쳐나가 문을 벌컥 열었다. 두 남자는 아파트 복도에 널브러진 듯 기대서 있었다. 눈들이 퀭 했다. 깔끔히 챙겨 입은 옷 매무새들도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정신이 한 오백년은 나가버린 얼굴들이었다.

 

 “왜들 이래요? 무슨 일 있어요?”

 

 있을만한 무슨 일들이 머리를 스쳤다. 호텔 앞에서 죽치고 있던 기자들을 피해 도망을 온 걸까. 복잡한 홍콩 거리를 배경으로 한바탕 추격전이라도 벌인 걸까. 멋모르고 길을 나섰다가 소녀 팬들에게 둘러싸여 곤혹을 당했을 수도 있겠다.

 

 “대체, 무슨 놈의, 에스컬레이터가, 한도 끝도 없이, 계속.”

 

 한경은 가쁜 숨을 고르느라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뒤따라 나온 위니가 두 남자의 몰골을 보고는 헉 소리를 집어삼켰다.

 

 “은혁이 저 새끼가 분명히 그거 타고 올라갈 수 있다고 그랬는데.”

 

 한경의 손가락이 은혁을 향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새끼라 불린 사나이가 눈을 들어 친구를 째렸다. 뭔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지난 번에 왔을 땐 분명히 상행이었다니까. 그 사이에 바뀌어 있을 줄은 몰랐지.”

 “기네스북에 오른 제일 긴 에스컬레이터라고 아는 척은 죽어라 하더니.”

 

 호연은 멍한 눈으로 두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저 말은.

 

 “그러니까 저 밑 동네 센트럴에서 여기 산 중턱까지 걸어서 올라왔다는 거에요?”

 

 한경은 고개를 맥없이 끄덕였다. 은혁은 민망한 듯 고개를 왜로 꼬았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800m 길이의 오르막길에 놓인 세계 최장 옥외 에스컬레이터였다. 저들의 말대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홍콩의 명물이었다. 스무 개의 에스컬레이터는 수 만명의 이동수단이었다. 등 뒤에 서 있던 위니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저 두 사람. 바보니? 에세이 콘셉트 바꿔. 저건 개그각이다.”

 

 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꽁꽁 가리고 다녀야겠는 이유에 한 가지를 보태야 했다. 같이 다니기 창피해서.

 

 “잠깐 기다려요. 준비하고 나올 테니까, 같이 아침이나 먹으러 가요.”

 

 속옷이 널브러져 있는 거실로 두 남자를 안내할 순 없었다. 이 상황에선 야구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길을 나서는 게 최선일거였다.

 

 “위니 너는 오늘 스케줄 있어?”

 “어.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어. 한국사람 이던데. 이름이 뭐더라.”

 “계은혁입니다.”

 

 어느새 몸을 바로 세운 은혁이 끼어들었다. 오늘도 멀쑥한 명품 수트를 차려입은 남자를 호연은 떨떠름한 눈으로 돌아봤다.

 

 “그쪽 이름 물어본 거 아니거든요. 가쁜 숨이나 마저 몰아쉬세요.”

 “오늘 예약 한 그 사람, 저라고요.”

 

 의아한 두 여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혔다.

 

 +

 

 아파트를 나선 두 남자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둘의 시선은 30분 전 자신들이 걸어왔던 오르막길 쪽을 향해있었다.

 

 “저게 대체.”

 “이게 무슨.”

 

 이어지지 못한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두 여자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불과 몇 십분 전까지 아래를 향하던 에스컬레이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아침 출근시간 동안에만 하행으로 움직여요. 나머지는 하루 종일 상행.”

 

 친절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경은 말없이 은혁을 돌아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아침 댓바람부터 두 분이 쓸데없이 뻘짓을 하신 거죠.”

 

 단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 호연은 친구의 팔짱을 낀 채 건너편의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경은 이를 악다물었다.

 

 “너 홍콩 자주 온다며.”

 “자주 오는데, 그건 몰랐지.”

 “내가 진짜 쪽팔려서.”

 “네 쪽만 팔려? 나도 팔렸어.”

 

 두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식당으로 들어섰다. 심플한 인테리어의 가게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과 전광판의 음식 사진들이 흔한 패스트푸드점을 연상시켰다. 동네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앉아 아침을 해결하고 있었다. 한경은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구석의 창가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두 여자는 카운터에서 익숙한 모습으로 메뉴를 골라 주문을 하는 중이었다.

 

 “네가 얘기한 사진작가가 저 여자야?”

 

 한경은 호연의 곁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자를 보며 은혁에게 물었다.

 

 “어. 또 한 명의 파트너.”

 

 아파트 복도에서 자신을 보던 여자의 시선이 떠올랐다. 비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천하의 이한경을 맞닥트렸으면 호들갑 정도는 떨어줘야 마땅하건만, 여자는 별 희한한 꼴 본다는 얼굴로 한경과 은혁을 번갈아 봤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저 여자도 정상은 아니야.”

 “뭐가?”

 “날 보고 안 놀라. 누구랑 똑같이.”

 “하긴 날 보고도 안 놀라더라.”

 “사람들이 널 보고 왜 놀라?”

 “잘생겼잖아.”

 

 은혁은 태연한 얼굴로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이없어 하는 친구의 표정따위는 아랑곳없이 그는 한경쪽으로 액정을 돌려 건넸다.

 

 “스타버스트에서 보도자료 냈어.”

 

 언제나처럼 우아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입꼬리에 걸친 유라가 거기에 있었다. 기사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한경의 은퇴선언은 소속사와 상의 없는 배우의 돌발행동이다. 상호간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뒤 회사 차원의 입장발표를 하겠노라. 그녀가 말하는 심도 있는 대화가 어떤 종류의 것일지 한경은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된 거야, 이 싸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혁이 말했다. 녀석 답지 않게 긴장한 얼굴이었다.

 

 “황유라가 뭐부터 꺼내들 것 같아? 그 여자는 한경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한경은 잠시 침묵했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재능을 발견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여자. 대중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여자. 그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 망설임이 없는 여자. 한경이 모르는 건 그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 였다. 어느 것까지 버릴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우리 카드를 던지면 반응이 오겠지. 싱가포르 쪽은?”

 “스탠바이야. 뭐부터 던질 건데?”

 “황유라를 자극할 만한 것. 아주 별것 아닌데 가장 기분 나빠할 그런 것.”

 

 두 여자가 커다란 트레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직사각형 테이블에 갖가지 음식들이 놓여졌다.

 

 “콘 소메로 맛을 낸 마카로니 스프와 토스트, 이건 청판과 콘지. 콘지는 홍콩식 죽이에요. 먹을 만한 것들로 골라왔으니까 드세요.”

 

 아침부터 진을 뺀 탓에 몹시 허기가 졌다. 한경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은혁은 목이 탔는지 생수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여긴 패스트푸드점이야? 햄버거도 아니고 이런 걸 파네?”

 “차찬탱이라고 부르죠. 홍콩사람들이 차와 식사를 가볍게 해결하는 일종의 분식점이에요. 홍콩은 집에서 식사를 하지 않는 가정도 많아요. 주방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고.”

 “집에 주방이 없어?”

 “주방 시설이 되어있는 집은 훨씬 비싸거든요.”

 

 홍콩 전문가의 막힘없는 설명이 이어졌다. 에스컬레이터 운행 시간도 제대로 파악 못한 누구와는 사뭇 달랐다. 청판이라 불린 만두 비슷한 음식도 쫄깃거리는 식감이 마음에 들었다. 여러모로 유능한 가이드임에 틀림없었다. 문제는 그 가이드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호연은 시커먼 마스크와 야구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는 돌고래 티셔츠를 커플로 입었고, 오늘은 마스크랑 모자가 커플 아이템인거야?”

 “가이드의 신분보호 차원이에요.”

 “둘 다 이러고 있는 게 사람들 시선을 더 끌 거 같은데.”

 “상관없어요. 내 얼굴만 아무도 몰라보면 돼.”

 

 그런다고 가려질 수 있는 건 아닐 터였다. 조만간 그들을 지켜보는 수많은 눈들이 따라붙을 거였다. 언론사와 잡지 기자들, 유라가 보낼 또 다른 사람들. 전문가인 그들이 호연의 정체를 파악해내는 건 일도 아닐 거였다. 부질없는 짓이라 조언하려는 한경보다 은혁이 한발 앞섰다.

 

 “그냥 오픈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가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오해할텐데.”

 “무슨 오해요? 애인이라고?”

 “아니요. 엄청난 미인일거라고.”

 

 분위기가 싸해졌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같은 말을 해도 싸가지 없고 기분 나쁘게 하는 것. 아니나 다를까 도끼눈이 은혁에게로 날아갔다. 한경은 포크를 쥔 호연의 손등에 힘줄이 돋는 것을 보았다. 또 한 번의 말싸움이 벌어질 모양이었다. 그는 태평하게 콘지를 한 수저 떠올렸다. 예상과 달리 호연은 심호흡을 하며 좌중을 훑었다.

 

 “일단 인사부터 나누시죠. 여기는 같이 사는 제 친구 위니. 여행 스냅사진 작가고요. 저 쪽이 누군지는 위니 너도 잘 알거고.”

 

 호연의 손가락이 한경을 스쳐갔다. 위니는 한경에게 무심한 시선을 한번 주었다 거뒀다. 기막힘은 오로지 한경만의 몫이었다. 천하의 이한경에게 저쪽이라니, 길가다 만난 똥개 보듯 한번 쓱 보고 마는 저 여자의 시선은 또 뭔가. 이 동네 여자들은 모두 다 제 정신이 아니지 싶었다. 한경이 어이없어 하는 사이 호연의 손가락은 은혁에게로 향했다.

 

 “이쪽은 개변.”

 

 뜨악한 은혁의 눈이 호연에게 박혔다. 콘지를 넘기던 한경은 사래에 걸려 쿨럭거렸다. 호연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왜요? 계은혁 변호사, 개변 맞잖아요. 변호사 하길 잘 하셨어요. 검사였으면 개검, 판사였으면 개판. 어쩜 좋아.”

 

 한경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헛기침을 했다. 저들의 투닥거림은 지켜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그 사이로 새로운 인물이 끼어들었다.

 

 “오늘 제 스케줄은 왜 잡으셨어요? 개변?”

 

 은혁의 고개가 위니 쪽으로 돌아갔다. 기가 막혀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긴 싱가포르 유명 로펌 최고 엘리트 변호사를 개똥 취급하는 여자들이 저들 말고 누가 있을까.

 

 “개가 아니라 계입니다.”

 “제가 한국말을 되게 잘하는데 조음까지는 완벽하지가 못해서.”

 

 위니는 완벽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은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여기서 더 해봤자 스스로만 우스워진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애써 평온한 얼굴을 되찾고 오늘의 본론을 꺼내들었다.

 

 “위니씨에게 사진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가이드를 구하시더니 이제 사진사까지 대동해서 여행을 다니시게요?”

 

 어이없다는 듯 호연이 되물었다. 어이없게도 그것이 두 남자가 아침부터 에스컬레이터를 거슬러 오르막길을 올라와야 했던 이유였다. 한시가 급했다. 공격은 빠를수록 좋을 거였다. 그것은 수많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유라에게 보낼 메시지였다. 나 여기 있다고, 잡아 볼테면 잡아보라고, 어디 한번 해보자고. 한경은 그제야 콘지를 떠먹던 수저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니, 파파라치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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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흩날리는
제이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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