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마력, 그 중심으로 뛰어든 서정욱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인상을 찌푸린다. 태풍이 눈이 이러할까, 휘몰아치는 마력의 중심은 믿을 수 없으리만큼 고요했다.
그 순간, 기이한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던 힘이 팽창하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순식간에 동굴전체를 휘감으며 그곳에 자리잡았다.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는 세계와 단절된 이공간, 이야기의 마지막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역시 오셨군요”
제 발로 들어온 먹잇감을 향해 푸른 빛이 달려든다.
“제길! 함정이었던 거냐”
서정욱은 뒤늦게 허리춤에 찬 검을 들어 서지훈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푸른 빛으로 이루어진 선은 서정욱의 검을 가르며 목을 노려왔다. 서정욱은 잘려 나간 검을 버린 채 서둘러 서지훈과의 거리를 벌렸다.
서정욱의 마력에 의해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검은 마력의 공급이 끊어짐과 동시에 반 토막이 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동안 힘을 숨기고 있었군”
“드러나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벌써 그 정도까지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된 거냐?”
오 년 전만 하더라도 서지훈은 마법진에 의지하여 마법을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불과 오 년이라는 시간만에 그는 마법을 도구로써 사용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본인의 재능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분명 재능만으로는 불가능한 경지였다.
“흐음…”
서정욱조차 현재 서지훈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제대로 할 생각이 든 겁니까?”
“그래. 더 이상 망설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
서정욱의 손에 맺힌 마법이 투명한 사슬의 형태가 되어 서정욱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이 지긋지긋한 인연도 드디어 끝나겠구나”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듯했다.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의 앞에 마주선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주변을 가득 메운 푸른 화살, 그리고 그것을 묶고 있는 투명한 사슬, 이미 두 사람의 전투는 시작되어 있었다.
서정욱의 주위를 맴돌던 사슬들이 서지훈을 향해 뻗어 나간다. 정지의 마법을 엮어 만든 사슬, 그것은 사슬의 형태를 띠고있는 이동형 결계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큭?!”
공간조차 잘라내는 푸른 선도 날아드는 사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서지훈은 인상을 찌푸리며 허공에 묶여버린 자신의 마법을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너라도 이 사슬을 잘라내는 것은 힘들 거다”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두 사람의 힘은 대등했지만 문제는 능력의 상성에 있었다.
공간의 가문에서도 특별한 서정욱의 능력은 공간 그 자체를 정지시켜버리기에 다른 능력들과의 상성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진다. 그것은 공간을 다루는 마법만이 아닌 대부분의 힘들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 있어도 검을 움직일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이대로는…!”
다가오는 사슬을 피해 거리를 벌려보지만 사슬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서지훈을 추적해왔다.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한정된 공간에서 언제까지 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결국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판단한 서지훈은 있는 힘껏 서정욱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미리 바닥에 준비되어 있던 사슬들이 춤을 춘다. 서로 얽히기 시작한 사슬들은 거대한 방패가 되어 서지훈의 앞을 가로막았다.
“걸려들었구나”
마법으로 이루어진 검이 사슬의 방패를 꿰뚫는다. 사슬속에 얽매여버린 검은 그 자리에 정지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겠지”
“젠장!”
서지훈은 묶여버린 마법을 거두려 했지만 사슬은 어느새 서지훈의 오른팔까지 옭아매고 있었다. 사슬의 방패는 거대한 그물이 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서지훈을 덮친다.
다가오는 사슬의 파도를 바라보며 서지훈은 이를 악물었다.
“크윽”
서지훈의 오른팔에 붉은 선이 그어진다. 잠시나마 허공에 머물러있던 팔은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너란 놈은…!!”
움직일 수 있게 된 서지훈은 서둘러 모든 힘을 다해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격리시켰다. 목표를 잃은 사슬의 파도가 서지훈의 주위로 넘실거린다. 사슬은 뱀이 먹이를 죄어오듯 서지훈의 공간을 휘감고 있었다.
“… 더 이상은 싸울 수도 없겠군”
서정욱은 자신을 노려보는 서지훈을 뒤로한 채 등을 돌렸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모든 것을 끝낼 것이다”
서정욱의 등이 멀어져 간다. 하지만 서지훈은 멀어지는 등을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공간이 자신을 가둬버린 것이다.
“안돼!!!”
서지훈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동굴에 울려 퍼진다.
후회와 고통속에서 서지훈은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악!!”
한정된 좁은 공간으로 거대한 힘이 쏟아져 나온다.
감당할 수 없는 힘에 공간이 비명을 지른다.
“아직.. 아직이다…!”
안으로는 폭주하는 마법이 온몸을 헤집고 밖으로는 포화된 마법이 온몸을 짓누른다. 자신을 잊을 정도의 고통속에서 서지훈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아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결국 힘을 버티지 못하고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단주님 도대체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나도 모르겠다.. 그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동굴밖으로 밀려나야만 했던 조율자들은 갑작스럽게 안에서 느껴져 오는 거대한 힘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저건…”
알 수 없는 힘은 점점 커져간다. 이내 그것은 뚜렷한 형태가 보일 정도로 짙어졌다.
“사람.. 인가?”
동굴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으로는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무리였기에 그들은 그저 긴장한 채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거대한 힘의 파동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크윽?! 뭐야 이건!”
충격을 견디지 못한 조율자들이 바닥에 나뒹군다. 그들은 충격의 근원지가 분명한 동굴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마치 고통스럽다는 듯한 동굴의 울음소리가 산속에 울려 퍼진다.
서정욱이 다가가자 가주의 마력에 반응한 결계석들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시작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끝내야겠지”
결계석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쓰러져 있는 서현의 몸을 둘러싼다.
“미안하구나…”
서정욱은 반쪽밖에 남지않은 검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검을 쥔 손은 허공에 멈춰선 채 움직이지 않는다.
‘어째서 아직까지도 망설이는 거냐’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는 서정욱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모든 것은 균형을 위해서다…!”
서정욱은 눈을 질끈 감은 채 검을 내리꽂는다. 하지만 그 순간 동굴을 울리는 거대한 충격에 몸이 균형을 잃으며 흔들린 검이 땅에 박혀 들었다.
“설마..”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죽어가고 있는 서지훈이 서있었다.
“어째서.. 너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냐”
서지훈은 대답대신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다.
“하.. 그래… 끝을 보자꾸나”
서정욱은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들었다. 허공에서 나타난 수백의 사슬들이 서지훈을 향해 쏘아져 나간다.
“…”
날카롭게 벼려진 사슬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지만 서지훈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이미 살아있다는 것조차도 기적인 상황, 서지훈은 그저 자신의 아들에게로 나아갈 뿐이다.
그럼에도 서정욱의 마법은 서지훈에게 닿을 수가 없었다.
“뭐냐…”
그릇이 깨져버린 육체는 이미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마력은 그 무엇도 다가갈 수 없는 벽이 되어 서지훈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가오는 죽음이 당장의 죽음을 막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수백 수천의 사슬들이 서정욱의 검을 휘감는다. 한곳으로 엮인 사슬들은 거대한 창이 되어 서지훈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그 마저도 서지훈의 죽음을 넘을 수는 없었다.
“왜 닿지 않는 거냐!!”
서정욱의 절규가 동굴에 메아리 친다.
사슬들은 거대한 벽이 되어 서지훈의 앞을 막아 섰다. 서지훈이 다가가자 땅에 고정된 사슬들이 팽팽해지며 벽이 요동친다. 서지훈은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세차게 요동치던 사슬의 벽은 그 한발자국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아…”
다가오는 서지훈의 모습 위로 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서정욱은 차마 그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서지훈은 그런 서정욱을 지나치며 하나 남은 팔로 쓰러져 있던 아들을 안아 들었다.
한줄기 선이 서정욱의 몸을 관통한다.
“…”
서지훈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아들과 함께 바깥으로 향한다. 남겨진 서정욱은 자신의 시간을 멈춰 둔 채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했다…”
나지막한 혼잣말, 서정욱의 상체가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린다.
허공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서서히 빛을 잃는다. 하지만 굳어가는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 기나긴 시간을 달려왔던 소년은 그렇게 만족한 듯이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