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돼, 내 잘못이 아니라고! 다들 이러지마! ‘
아! 라고 외치면서 잠에서 깬 가이온은 푹신한 침대에서 엘프들이 마련해준 방의 천장을 마주보고 있었다. 여전히 헉헉거리고 있었다. 이불을 덮고 있었지만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 다행이다. 꿈이었구나. ‘
엘프들의 땅인 울지 않는 산맥은 역시 무리였던 건가. 이제는 좀 꾸지 않나 했던 악몽을 여기서 꾸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동안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 탓도 있을 거라 피곤한 탓으로 이유를 돌리기로 했다. 오늘은 투르크 족의 지도자를 만나 결판을 지으러 갈 날이 아니던가.
옆에서 마드린느가 걱정스런 눈으로 가이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겉으로 괜찮냐고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계속 주위를 맴돌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드린느, 벨체 라 돌리아에서 가이온이 구해낸 유일한 여자. 나머지 여자들은 그녀를 원망하고 있던 걸까. 겨우 목숨을 구했다는 이유만으로? 겨우 목숨이 아닌 걸까. 살만큼 살았다며 인생은 허무하다고 외치는 늙은이들도 막상 죽을병에 걸리면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가는 게 세상 이치 아니던가. 아니, 그들은 마드린느를 원망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가이온을 탓하고 있었다. 왜 타인의 탐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희생되어야 하냐는 물음에 뭐라 답을 할 순 없었다. 가이온을 10살짜리 꼬마아이로 만들어 버리고 압박할 정도로 가이온을 원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이온 그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이 버거워 어린 아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여자들의 얼굴을 떨쳐버리기 위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이온, 정신차려. 그리고 준비해. 지도자 아도니스를 만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한 단장을 도와주기 위해 엘프들이 들어왔고, 그들에게 몸을 맡겼다.
***
마드린느는 이전과는 다르게 미인에 가까운 용모를 하게 되었다. 본인도 거울에 비춰진 자신을 보고서는 놀라 두 번보고 세 번 보고선 또 놀랐다. 꼬집어 확실하게 변한 건 없었지만 예전보다는 고와졌다. 그 모습을 보고선 리브도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사심없이 형식에 가까운 칭찬이라면 도가 튼 가이온도 몇 마디 할 법도 했것만, 묵뚝뚝하게 바라보고서는 가자며 앞장만 섰다. 그런 가이온이 좀 속상했지만, 마드린느는 오랜만에 꾸민 가이온에게 검붉은 옷이 잘 어울린다, 오늘 멋있다는 말을 해주지 않는 걸로 소심한 복수를 마무리했다. 오늘의 그는 머리색과 대비되는 검붉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날렵한 선이 검으로 다져진 몸을 잘 드러내주면서 정말로 근사했다.
홀을 걷자 리브가 좀 버거워했다. 그는 여자도 옷의 길이 때문에 움직일 때 주의를 할 수 밖에 없는 긴 의상이었다. 어깨부터 끊임없이 우아하게 언덕처럼 내려오는 선을 살린 옷은 긴 치맛자락까지 단아한 실루엣이 리브를 후계자처럼 보이게 해주었지만, 이런 옷은 처음인지라 리브는 넘어지지 않기만을 기도하며 걸을 뿐이었다.
저벅저벅. 그저 안내를 받으며 걸을 뿐이었다. 마드린느와 가이온은 잠자리에 들기 전 리브의 표정이 밝았다는 사실만을 기억하며 부디 일이 잘 끝나길 바랬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오늘의 면담을 기다리는 것, 그 이상은 없을 걸로 보였다. 지도자인 아도니스가 앉아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둘은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저희를 보호하소서.
백금으로 만든 빛나는 의자에 홀로 앉아 오만함을 내뿜는 지도자가 셋을 맞이했다.
“ 어서오게, 나의 후계자와 티그리스 강가의 계약자들이여. ”
셋은 짧은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리라. 그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리브의 표정은 꽃놀이를 나가는 아이처럼 밝기만 했다.
“ 투르크 족의 지도자이신 아도니스 투르크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
“ 그래 생각은 해 봤는가? ”
“ 해봤습니다. ”
“ 그럼 받아들일 텐가? ”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로 물어보는 지도자 앞에서 리브가 할 말은 거절일지, 수락일지 알 수 없었던 가이온과 마드린느는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 아니오. 그러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
“ 그렇다면 어쩌겠단 말인가? ”
“ 유일한 후계자라… 제가 유일한 후계자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아도니스. ”
아도니스가 오른쪽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무슨 소리를 하는 지 그대는 지금 알고 있기나 하는가? ”
“ 알고 있습니다. 제가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
“ 누구를 말인가? ”
빠드드득 이를 갈며 말하는 장신의 엘프 앞에서 리브는 침착했다.
“ 대륙에 저와 같은 투르크 족을 다스릴 운명을 가진 엘프가 있지 않습니까? 그 엘프가 멀쩡히 살아있어도 찾으러 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다른 종족에 동화라도 되어 재주나 건강에 해를 입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태어날 적부터 인간들과 생활한 저는 다릅니다. 제가 적임자입니다. 그 엘프를 데려온 뒤에 누구를 후계자로 택할지 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
“ 설사 그대가 도망갈 생각은 아니겠지. 이 영지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그대는 우리가 추적이 가능한 자야. 목숨을 끊는 것은 일도 아닐 걸세. ”
“ 찾아오겠습니다. 그 엘프를. ”
아도니스가 큰 걸음으로 걸어와 리브의 앞에 섰다. 리브의 오른쪽 손을 잡아 들더니, 이로 검지를 물어뜯어 피를 낸 뒤 그 피를 마셔버렸다. 쓰라린 지 리브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도니스를 노려봤고, 바닥에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 이로서 자네는 돌아올 수 밖에 없네. 그렇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을 걸세. 피로서 맺어진 맹약을 배신한 대가는 끊임없는 갈증일세. ”
혀로 입가에 묻은 피를 햝으며 아도니스가 나지막히 읊조렸다.
“ 알,,알겠습니다. 아도니스, 저희를 보내주십시오. ”
“ 가라! 가서 한 번 찾아보거라! 네 어미처럼, 너도 이 곳을 나가지 못해 갖은 꾀를 부리는구나! ”
성을 내며 아도니스가 자리를 떴다. 마드린느와 가이온은 여기서 일이 끝나지 않았음을 감사히 여겨야 할지 아니면 억울해야 할지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이제는 또 다른 엘프를 찾으러 가야 한다! 그것도 또 다른 후계자의 운명을 타고난 엘프 말이다.
나중에 리브에게 들은 바로는, 대륙의 하빈 학원에서 잠시 수학했던 가이온에게서 묻어난 투르크 엘프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다. 엘프들의 영지에 들어오자 리브도 엘프로서 타고난 감각들이 민감해지며 같은 운명을 타고난 엘프, 엘렌시아의 존재를 크게 느꼈던 것이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둘은 역시 운명으로 묶인 게 아닐까 싶었다. 역시나 우리는 엘렌시아를 찾으러 갈 수 밖에 없었구나. 그리고 엘렌시아와 리브는 만날 수 밖에 없었구나. 엘렌시아, 우리는 당신을 만나러 갈 수 밖에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