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등록된 작품이 없습니다
 
자유연재 > 로맨스
홍콩러브트립
작가 : 제이J
작품등록일 : 2017.12.1

은퇴후 낯선 도시를 찾아온 톱스타 이한경
그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이드 송호연
홍콩에서 시작되었던 그들만의 러브 트립

 
2. 당신이 핑크돌고래를 만난다면 - 타이오 마을 #2
작성일 : 17-12-05 10:51     조회 : 381     추천 : 0     분량 : 7631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 몇 개에 의지한 채 아슬아슬하게 물 위에 떠있는 수상가옥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허름했다. 은색 양철판으로 지어진 집들엔 색색의 빨래가 널려있고, 작은 화분들이 놓여있었다. 이렇게 남루한 곳에서도 삶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에 매달려 말라가는 이름 모를 건어물들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한경은 낯선 풍경들은 신기한 눈으로 훑는 중이었다. 평상에 모여앉아 마작을 즐기던 노인들이 세 명의 젊은이들에게 무심한 시선을 주었다 걷었다.

 

 “마을에 아는 어부가 있어요. 비용만 넉넉히 주면 몇 시간이고 배를 운전해주죠. 관광객들이랑 30분 짜리 보트 투어를 할 수는 없으니까.”

 “여기서 배를 타자고?”

 

 한경이 의아하게 물었다. 눈앞에 있는 선착장의 배들은 고급 크루즈나 요트가 아니었다. 어부가 물고기 잡으러 나갈 때 탈만한 통통배.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짠 소금물에 나무판자가 삭아있는 말 그대로의 배였다.

 

 “이한경씨.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거밖에 없어요. 갈 수 있는 곳도 저 바다밖에 없고요.”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세하고 자세한 설명이 간절했다. 의아한 얼굴의 한경을 올려다 본 호연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옷은 동물보호단체의 티셔츠에요. 이 핑크 돌고래가 바로 저 바다에 살죠. 그쪽 얼굴만 마스크로 가리면 누가 봐도 시민단체에서 나온 사람들로 보일 거란 말이에요. 말하자면 완벽한 위장.”

 

 기승전결이 완벽한 계획이었다. 어디 하나 딴지 걸 구석이 없었다. 그럴 타이밍도 없었다. 여자는 이미 총총걸음으로 선착장 구석을 향하는 중이었다. 밧줄을 정리하고 있던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그녀를 보곤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몇 마디를 나누던 그들은 동시에 한경과 은혁쪽을 돌아보았다. 호연의 손이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어서 오라는 듯 그녀는 팔랑팔랑 손짓을 해댔다.

 

 “넌 꼭 이 일을 저 여자랑 해야 겠냐?”

 

 블랙 수트 차림의 은혁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어왔다.

 

 “왜, 난 딱 좋은데.”

 “그렇게 좋으면 배는 둘이서 타.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왜?”

 

 은혁의 긴 손가락이 한경이 걸쳐 입은 티셔츠의 핑크 돌고래를 가리켰다.

 

 “네가 입은 그 옷하곤 다르게.”

 

 그 손가락이 제 쪽으로 돌아왔다.

 

 “이 옷은 명품이거든.”

 

 아시아 최대 로펌 소속 엘리트 변호사의 멀쩡한 허우대를 한경은 같잖게 훑었다. 수입카를 몰고 나타났을 땐 제법 멋져 보이던 옷이었으나, 적어도 지금 여기에선 가장 쌩뚱 맞은 복장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때와 장소에 맞게 옷을 챙겨 입어야지.”

 

 때와 장소에 맞는 옷을 잘도 차려입으신 인물은 낡은 보트를 향해 스웩넘치는 걸음을 옮겼다.

 

 +

 

 파도가 몰려 올 때마다 선착장 나무기둥에 밧줄로 매어진 보트는 좌우로 심하게 요동쳤다. 긴 다리를 이용해 배 갑판위로 뛰어내린 한경이 뒤로 돌아섰다. 호연이 우물쭈물 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상식장에서 수많은 여배우를 에스코트 했던 그 손을 보며 호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배 타자 그랬지, 썸 타자고는 안했거든요.”

 

 스스로 배안으로 폴짝 뛰어내린 그녀가 가운데에 놓인 나무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손 잡자 그랬지, 날 잡자고는 안했거든. 오버하지 말지.”

 

 한경은 면박을 보태며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다. 어부는 매여 있던 밧줄을 풀고 대나무 작대기로 배를 밀었다. 작은 배가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슬며시 밀려났다. 작대기를 내려놓고 조타실로 들어가 배에 시동을 거는 늙은 어부의 몸짓은 습관이 되어버린 듯 느릿하고 자연스러웠다.

 

 “운이 좋으면 핑크 돌고래를 볼 수도 있어요. 행운의 상징이거든요. 기대해 봐요.”

 

 돌고래라니. 이게 무슨 속편한 상황인가 싶어 괜히 웃음이 났다. 그가 떠나온 곳은 모든 게 엉망이 되어있을 터였다. 소속사 앞에는 기자들이 진을 쳤을 거고, 인터넷에는 이한경 은퇴선언이 실검 1위를 하루 종일 차지하고 있을 거였다. 유라는 아마 지금쯤 텅 비어있는 한경의 펜트 하우스에 도착해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 자주 와?”

 “란타우섬 일주가 있는 날마다 오니까, 일주일에 한두 번? 톱스타가 납시기엔 좀 구질구질한가요?”

 “아니, 마음에 드는데.”

 

 호연은 의아한 눈으로 한경을 바라보았다. 까칠하게 불평을 늘어놓으리라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당황해하는 꼴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당신이 아무리 대단한 스타라도 여기에서는 가이드인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기선제압의 목적일지도 몰랐다.

 

 “진짜 좋다. 여기.”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당황하게 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착한 손님 코스프레도 물론 아니었다. 정말로 한경은 이 곳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누구인지 관심조차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바다를 향해 배를 모는 늙은 어부도, 그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무심한 얼굴로 타박을 늘어놓는 가이드도, 아주 오랫동안 버텨온 낡은 집들도.

 

 “생각보다 소탈하시네.”

 “생각보다 멋있기도 해.”

 

 여자가 어이없는 듯 웃었다. 하얀 얼굴에 번지는 미소위로 쨍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생각보다 확실히 독특하긴 하네요.”

 

 날선 시선은 어느새 누그러져 있었다. 인간적인 호감인지 통장에 찍힐 거액의 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반가운 일이었다.

 

 “누가 홍콩여행을 어디서 시작해야 되냐고 물으면 난 항상 타이오 마을이라고 말해줘요. 여기는 홍콩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거든요.”

 

 한경은 행사 차 홍콩을 두어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호연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기 전의 일이었다. 이 여행을 계획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가 본 홍콩은 마천루의 도시였다. 낮보다 밤이 화려하고, 현란한 조명과 커다란 네온사인들이 거리를 수놓는 복잡한 곳이었다.

 이런 바다가 있는 줄은 몰랐다. 쓰러질 듯한 집들이 있는 줄 몰랐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핑크 돌고래의 존재도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곳에 이런 옷을 입고 찾아와 핑크 돌고래를 보겠다고 배를 타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핑크 돌고래도 많이 봤겠네.”

 “수없이 봤죠.”

 “행운이 있었어?”

 

 이마를 덮은 여자의 앞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호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쳐왔던 모든 순간들을 더듬는 듯한 눈이 먼 바다로 옮겨갔다.

 

 “아니요. 행운의 여신은 언제나 내 편이 아니라서.”

 

 여자의 그 말이 가슴에 얹혔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먼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낡은 배는 어느새 바다의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어부는 조타실의 핸들을 고정한 채 멈춰 섰다. 주위가 삽시에 고요해졌다. 관광객들을 태운 투어 보트들은 저만치에 작은 점들처럼 바다를 떠돌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한경은 주위의 바다를 휘둘러보았다. 이보다 좋을 장소는 없을 것이다. 이야기를 듣던 상대가 벌컥 화를 내고 일어나 떠나버리거나, 그를 알아본 누군가 때문에 황급히 자리를 옮겨야 하는 일 따위는 절대 없을 장소. 서로의 목소리에만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장소. 그녀는 유능한 가이드임에 틀림없었다.

 

 “한 배우가 갑자기 은퇴선언을 해. 그리고 어느 낯선 도시를 찾아오지. 그는 그 곳에서 많은 곳들을 가고 많은 것을 보게 될 거야. 한 사람이 그를 돕지. 때론 가이드로 때론 작가로.”

 

 호연의 눈썹이 휘어 올라갔다. 부정확한 명사들이 해석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경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곳이 홍콩이고, 그 사람은 당신이야.”

 “그 배우가 이한경씨고요?”

 

 여자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어수선한 생각들이 정리가 되지 않은 듯 호연은 더듬거렸다.

 

 “그러니까 아니, 지금 나더러.”

 “당신이 쓸 여행 에세이. 나와의 한 달, 그 시간을 담아.”

 “…….”

 “당신 글의 주인공이 되어 주겠다는 거야.”

 

 그것은 은퇴한 배우의 마지막 여행기가 될 거였다. 이 곳에서의 시간을 한경은 호연의 몫으로 남겨줄 생각이었다.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보상이었다. 돌려줘야 할 자리였다. 뒤늦은 사과라 해도 좋을 거였다.

 

 “내가 글을 어떻게 쓸 줄 알고, 이런 기회를 줘요? 유명 여행 작가들이 깔려있는데, 유명 출판사에서 줄을 설 텐데?”

 

 합리적 질문이었다. 품어볼만한 의심이었다. 달콤한 것들은 언제나 쓰디쓴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온 몸으로 체득하며 살아왔을 터였다.

 

 “송호연씨는 세상 누구보다 날 돋보이게 할 작가니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날 어떻게 믿느냐고.”

 “지금의 이한경을 만든 게, 바로 당신이잖아.”

 

 호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아마도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있을 거였다. 한 남자를 사랑했던 그녀. 글쓰기를 사랑했던 그녀. 드라마를 사랑했던 그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려야 했던 그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호연은 물었다.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극도로 차분해 보였다. 냉정한 정신으로 현실을 파악하려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크고 작은 물살들이 배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졌다. 저렇게 부셔져버린 꿈을 가졌던 한 여자를 한경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놉시스에 쓰여있던 당신의 이름을 봤으니까.”

 

 호연의 글은 그녀의 애인이었던 현수가 집필한 대본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 남자의 부도덕과 욕심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결정한 다른 손이 있었다. 그 세계를 제 뜻대로 움직이는 그 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의 작은 욕망을 건드렸을 뿐이었다. 피해와 상처는 오직 호연만의 몫이었다.

 

 [신인감독에 신인작가 게다가 신인배우. 뭔가 임팩트가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이런 평범한 그림으론 사람들 관심을 못 끌어요. 투자 받기도 힘들고.]

 

 현수와 한경을 소개하던 자리에서 유라가 한 말이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시놉시스에는 송호연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네일아트가 화려한 손톱이 그 이름을 톡톡 건드렸다.

 

 [이 사람은 누구죠?]

 [제 대학 후배입니다.]

 

 긴장한 표정으로 현수가 말했다. 그날 그 남자의 얼굴엔 힘들게 잡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가 두 눈에 가득했다.

 

 [집안은?]

 [어머니만 계시는데, 위독하셔서 중환자실에 계십니다. 곧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한경은 그때 알지 못했다. 유라의 입가에 얼핏 떠오른 미소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녀가 말한 임팩트가 무엇인지.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로부터 한 달 뒤, 첫 대본 리딩자리에서 대본에 박힌 작가의 이름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이게 말이 돼요? 그 작가가 가만히 있어요?]

 [초짜가 쓴 어설픈 대본이었어. 그걸 돈 들여서 뜯어고치고 제대로 만든 건 나야. 더 이상 그 작가 글이 아니란 얘기지. 네가 신경 쓸 일은 더더욱 아니고.]

 [그래도 이건.]

 

 유라는 평온한 얼굴로 한경을 올려다보았다. 진우와 함께 한경을 처음 찾아왔을 때도 그녀는 저런 얼굴이었다. 너무나 우아하고 너무나 멋진 여자였다. 여신인줄 알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얼굴로 누군가의 인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던 때였다.

 

 [충무로에 돌고 도는 시나리오들이 처음 쓴 사람 이름으로 영화가 되는 줄 알아? 아니야. 온갖 작가들, 감독들 손을 거쳐서 결국엔 엉뚱한 사람의 것으로 둔갑되기 일쑤지. 이런 일 이 바닥에선 흔해.]

 [하지만 이런 방법은 옳지 않아요.]

 [진우가 할 드라마였어.]

 

 유라의 그 한마디는 한경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날은 형이 죽은 지 49일째였다. 이른 새벽 외곽도시의 작은 암자에서 그들은 그의 49제를 치렀었다. 한경은 떨리는 눈으로 검은 투피스를 입은 유라를 바라보았다.

 

 [죽은 진우 자리, 네가 채워. 그게 진우가 원하는 걸 거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진우의 이름이 들먹여진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한경은 그 캐릭터가 좋았다. 뒷골목 양아치에서 강남 호스트바 마담까지 넘나드는 그 인물에게 빠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연극판에서 다져온 연기력은 물 만난 고기처럼 제대로 빛을 발했다. 자고 나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흔한 이야기는 한경의 스토리가 되었다. 이현수는 스타 감독이 되었다. 한 사람만이 완벽한 패배자로 남았다.

 

 “내 인생 캐릭터였어. 당신이 만든 그 인물.”

 “…….”

 “왜 그때 사람들한테 얘기하지 않았어? 내가 쓴 글이라고. 이한경이 연기하는 저 주인공, 내가 만든 캐릭터라고.”

 

 여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쳐졌다. 웃음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조에 가까워 보였다. 당신도 공범이 아니더냐, 비웃는 걸지도 몰랐다.

 

 “뭐라고 얘기할까요. 스타감독 이현수가 동거녀 대본을 훔친 거라고? 밤마다 침대에서 애인이랑 뒹굴면서 그 스토리를 병신처럼 주절거렸다고? 재밌다는 그 새끼의 추임새에 좋다고 신나 했다고?”

 

 자조 섞인 질문들이 연거푸 날아왔다. 어떤 답도 건넬 수 없었다.

 

 “그 사람 집에서 같이 살면서, 그 사람 노트북으로 글을 썼어요. 그래서 난 그 초고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않았죠. 엄마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보니 애인이란 작자가 사기꾼이 되어있더라고 울면서 기자회견이라도 해야 했을까요? 그럼 세상이 믿어줬을까?”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였다. 이 힘없는 여자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유라는 손가락 한 마디를 까닥하는 정도의 아주 작은 노력만 하면 됐을 거였다. 애시 당초 해볼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제 와서 날 찾은 이유가 뭐에요? 양심의 가책, 뭐 그런 거에요? 그때는 그렇게 침묵하고 있었으면서?”

 

 날이 선 눈이 한경을 바라보았다. 그때의 한경 역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갑작스런 드라마 주연, 온갖 CF, 영화 시나리오. 그것이 모두 진우의 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진우의 죽음에 석연찮은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역시 한참후의 일이었다.

 

 “저기 저기!”

 

 어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연 핑크의 지느러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둥근 몸체가 물 위로 아스름하게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핑크 돌고래였다. 커다랗고 반짝이는 몸체가 보트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한경은 저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여유롭게 유영하던 돌고래는 방향을 틀었다. 이쪽으로 가면 된다는 듯, 따라 오라는 듯 뾰족한 지느러미를 물 위로 내놓은 채 멀어져갔다.

 

 “이한경씨, 홍콩에 진짜 왜 온 거에요?”

 “…….”

 “내 에세이의 주인공이 되려고 은퇴를 하고 여기에 온 건 아닐 거잖아요.”

 

 호연은 돌고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한경에게로 붙박아져 있었다. 당신 뭘 하려는 거야. 왜 날 끌어 들이려는 거야. 많은 것들을 함축한 그 질문은 한경을 잠시 침묵하게 했다. 한경은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돌고래는 어느새 멀어져 있었다. 더 깊은 바다를 향해 가는 걸지도 몰랐다.

 

 “수족관이 답답해서 바다로 도망쳐 온 거야.”

 “…….”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 난 이 바다를 잘 모르거든.”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바다의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바다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시작했다는 것. 배는 바다의 한 가운데 도착했고, 그들은 지금 한 배에 타고 있다는 것.

 

 “내가 당신의 핑크 돌고래가 되어 줄게. 당신은 바닷길을 알려줘. 내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망, 이라고 했어요?”

 

 여자는 그 단어를 되물었다. 그녀는 그가 도망쳐온 세상에 대해 모를 거였다. 그곳은 한 여자를 밀어낸 세상이자, 한 남자를 죽인 세상이었고, 또 한 사람을 무릎 꿇리려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벌어졌던 많은 일들을, 벌어지려하는 더 많은 일들을 한경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홍콩에 왜 왔냐고 물었지?”

 “…….”

 “사라지러 왔어.”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3 8. 마음에 점을 찍다 - 해피밸리에서 딤섬을 #1 2017 / 12 / 21 371 0 6065   
22 7. 번외 - 또 하나의 야경 2017 / 12 / 19 351 0 2862   
21 7. 야경을 보는 두가지 방법 - 더 피크 #2 2017 / 12 / 18 374 0 7019   
20 7. 야경을 보는 두 가지 방법 - 더 피크 #1 2017 / 12 / 17 375 0 5354   
19 6. 번외 - 클리셰에 대처하는 방법 2017 / 12 / 15 354 0 3284   
18 6. 우아한 그녀들 - 페닌슐라 애프터눈티 #2 2017 / 12 / 14 365 0 5837   
17 6. 우아한 그녀들 - 페닌슐라 애프터눈티 #1 2017 / 12 / 13 353 0 7872   
16 5. 번외 - 그 곳에선 세상 모든 일이 일어난다. 2017 / 12 / 12 355 0 2969   
15 5. 슬픈 우리 젊은 날 - 청킹맨션 #2 2017 / 12 / 12 353 0 6847   
14 5. 슬픈 우리 젊은 날 - 청킹맨션 #1 2017 / 12 / 10 349 0 6512   
13 4. 번외 - 사라져야만 하는 것들 2017 / 12 / 10 348 0 1689   
12 4. 사라지는 것들 - 심포니 오브 라이트 #2 2017 / 12 / 9 349 0 7800   
11 4. 사라지는 것들 - 심포니 오브 라이트 #1 2017 / 12 / 8 387 0 7539   
10 3. 번외 - 사랑과 사진의 공통점 2017 / 12 / 7 358 0 2216   
9 3. 너에게 가는 길 -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2 2017 / 12 / 7 358 0 7035   
8 3. 너에게 가는 길 -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1 2017 / 12 / 6 350 0 8542   
7 2. 번외 - Dolphins, I care. 2017 / 12 / 5 349 0 2443   
6 2. 당신이 핑크돌고래를 만난다면 - 타이오 마… 2017 / 12 / 5 382 0 7631   
5 2. 당신이 핑크돌고래를 만난다면 - 타이오 마… 2017 / 12 / 4 384 0 7201   
4 1. 번외 - 99년 4월 1일 그때, 그곳 2017 / 12 / 3 376 0 2200   
3 1. 뮤즈가 나타나는 곳 - 첵랍콕 국제공항 #2 2017 / 12 / 2 358 0 6425   
2 1. 뮤즈가 나타나는 곳 - 첵랍콕 국제공항 #1 2017 / 12 / 1 424 0 6833   
1 프롤로그 2017 / 12 / 1 663 1 6090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그것은 흩날리는
제이J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