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판타지/SF
황혼에서 여명까지
작가 : 암달구
작품등록일 : 2016.8.15

(제목 변경합니다)
저주받은 꼬마 스케빈져 성장물.판타지.로맨스

 
낙원으로
작성일 : 16-09-02 16:57     조회 : 325     추천 : 0     분량 : 8892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위그드라실 나스트론드(시체의 해안) 최하층 하수도.

 

 “푸하-”

 

 흐린 물에서 물거품이 올라오며 무언가 튀어나왔다. 엘가는 긴 숨을 토해내며 물 밖으로 기어 올라왔다.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고른 후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내 흔들었다. 반딧불이가 발광한다.

 

 먼지 냄새와 물비린내 등이 버무려져 비위를 긁는다. 엘가는 나뭇잎에 싸둔 육포를 씹으며 유리병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무저갱 같은 둥근 돔은 전신에 검푸른 이끼가 덮여 있었다. 돌벽을 따라 어둠의 아가리로 들어가자 올리버가 말했던 배수 파이프가 보인다.

 

 엘가는 가방의 소지품을 꺼냈다. 우선 연잎으로 묶어두었던 옷으로 갈아입고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힙색에는 물병, 잭나이프, 지도, 약간의 육포와 말랭이가 들었다.

 

 엘가는 파이프 입구 밑으로 걸어갔다.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며 힘껏 땅을 박차 파이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턱없이 거리가 모자라다. 곤두박질치기 전에 벽을 발로 차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착지했다. 거리를 더 벌려서 두 차례 시도했으나 실패. 숨이 가빠진다.

 

 어둠에 익은 눈이 지형물을 자세히 관찰했다. 머릿속에서 도약과 실패, 도약과 성공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파이프에서 10야드 떨어진 곳에 돌출된 뾰족한 암석 덩어리. 엘가는 허리띠를 풀어 5번째 구멍에 버클을 걸고 다시 한 번 전속력으로 뛰었다. 하강하는 순간 허리띠의 고리를 암석에 걸었다. 지지대가 생긴 허리띠를 재빠르게 손목으로 휘어 감아쥐고 탄력을 이용해 몸을 반 바퀴 회전했다. 동시에 암석에 다리를 걸었다. 일련의 동작이 매끄럽게 진행됐다. 튀어나온 암석을 밟고 일어서며 암석과 파이프 입구의 거리를 측정했다. 암석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기회는 한 번이다.’

 

 엘가는 허리띠를 입에 물고 사선으로 단숨에 뛰어올랐다. 딛고 있던 암석이 부서져 내린다. 오른손이 선반처럼 생긴 선단을 잡았다. 손에서 찌릿찌릿 전류가 흐른다. 오른발 뒤꿈치를 선단에 걸쳐 체중을 지탱했다. 곧바로 선단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르면서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엘가는 입구의 이끼를 걷어내고 컴컴한 파이프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햇살 한 줌 닿은 적 없는 내피에 살이 닿는 순간 한기가 스며든다. 미로처럼 굽이지고 교차한 내부는 귀신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파이프의 폭은 좁았다. 어깨를 비틀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

 

 쓸려서 아플 만큼 배밀이 하자 파이프는 여러 갈래로 갈라졌고 엘가는 위쪽을 향해 뚫린 벌레 먹은 것 같은 구멍을 올려다봤다. 저곳이 다른 세계로 이어진 통로다. 엘가는 주저 없이 벌레 굴로 향했다.

 

 오목하거나 볼록하게 튀어나온 지점을 잡거나 발디딤 하여 올라갔다. 한 치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발이라도 헛디뎠을 때 아찔한 광경이 그려진다.

 

 정상 없는 암벽을 등반하는 기분.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은 바닥이 났고 숨을 쉬기 어렵다. 엘가는 요철의 갈라진 틈새에 주먹과 발을 끼워 넣고 비틀어 몸을 지탱했다. 땀에 절어 옷이 물에 담근 것마냥 축축했다. 반면에 입안은 바싹 말랐다. 가만히 있으면 몸 위로 벌레들이 기어 올라왔다. 천근만근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달콤한 휴식 후 다시 칠흑을 가르고 올라갔다. 꿀맛을 맛본 뇌가 질 나쁜 유혹을 하며 속삭인다.

 

 포기해. 다 놓아버려. 할 만큼 했어.

 

 엘가는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주먹으로 때렸다. 찌르르 울리는 통증이 수마를 쫓아냈다. 그저 의무적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자신이 어둠에 먹힌 건지 아니면 어둠 자체인지.

 

 스스-

 

 까마득한 아래에서 작은 괴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엘가의 무너져내리던 몸이 정신을 차렸다.

 

 ‘바깥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틀? 삼일? 아버지 걱정하고 있겠지? 분명 화내고 있을 거야.’

 

 “읔.”

 

 정수리에 딱딱한 게 부딪혔다. 손으로 더듬어보자 타원형 무늬가 만져진다.

 

 엘가는 균열에 발목을 비집어 넣어 몸을 고정 후 어깨로 맨홀을 밀었다. 맨홀은 감질나게 들썩이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엘가는 고함을 지르며 맨홀을 들어 올렸다. 눈에서 실핏줄이 터질 것 같다. 한 모금 남은 기력을 쥐어짜네 쏟아 붙었더니 정신이 타들어 간다. 서서히 빛무리가 파이프 안으로 들어왔다. 엘가는 맨홀을 등으로 밀면서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이젠 정말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기쁨도 잠시 장시간 어둠에 익은 눈에 태양 빛이 닿자 눈알이 뽑힐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피부는 화기에 스친 듯 화끈거렸다. 엘가는 작살에 맞는 고래처럼 몸을 뒤틀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 !0&&&.”

 

 엘가는 난생처음 욕을 했다. 그리드가 이상한 걸 가르친다고 올리버가 혼을 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참이 지나자 불연기를 마신것처럼 괴롭지만, 눈을 뜰 순 있었다. 엘가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하늘을 바라봤다. 청명한 하늘 아래 눈부시게 흰 해바라기밭이 펼쳐져 있다.

 

 새끼짐승이 양수에 젖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을 때처럼 경이로움 온몸을 휘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머리로 느끼는 감동과 달리 가슴은 오물을 뒤집어쓴 것 마냥 거북했다. 엘가는 손톱을 잘근 씹었다. 당장 맨홀 구멍으로 뛰어내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기분.

 

 엘가는 헛구역질했다. 누군가 강제로 목젖에 손을 비집어 넣었는지 그 자리에서 속을 두세 번 게워내고 걸음을 뗄 수 있었다. 드디어 별세계, 낙원에 첫발을 딛는다.

 

 엘가는 힙색에 넣어둔 지도를 꺼낼까 하다 말았다. 씹어먹을 기세로 암기했던 지도가 그린 듯 눈앞에 펼쳐졌다. 제대로 온 게 맞는다면 이곳은 악아왕의 모형 정원이다.

 

 해바라기 줄기는 엘가의 키를 훌쩍 넘었다. 줄기를 헤치며 밭을 벗어나자 거대한 구조물이 나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하얀 새가 나는 듯한 왕궁의 모양. 왕궁을 등지고 일직선으로 걸어가면 아치형의 입구 앞에 근위병이 창을 들고 서 있다. 엘가가 근위병을 발견함과 동시에 근위병도 엘가를 발견했다.

 

 엘가는 시치미 뚝 떼고 아치 밖으로 걸어 나왔다. 너무 당당해서 근위병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늦게 엘가를 향해 소리쳤다.

 

 “☜☞!!?”

 

 난해한 언어. 당연하게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화가 난건 확실해 보인다. 엘가는 군중 속으로 도망쳤다. 약 한 시진을 도망 다닌 끝에 끈질기게 쫓아오는 근위병을 따돌릴 수 있었다. 엘가는 흐물거리며 분수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제대로 앉을 기력도 없다. 몸을 반 접은 상태로 힙색에서 물병을 털어먹고 남은 육포와 말랭이를 먹었다. 뱃속이 채워지자 좀 살 것 같다. 엘가는 시원하게 물줄기가 뿜어지는 소리에 등을 돌렸다.

 

 “분수대라면….”

 

 광장의 랜드마크가 있는 곳이다. 엘가는 흩뿌려지는 물방울 속의 조각상을 보기 위해 목을 쭉 뺐다.

 

 조각상 받침대에 글씨가 휘갈겨져 있다. 조각가가 남긴 문구일까. 뭐라고 쓰여있는 걸까. 꼬부랑거리는 글씨를 읽을 수가 없다.

 

 시선을 올리자 알몸의 처녀가 베일을 덮고 두 손은 교차하듯 포개어 기도하고 있다. 살짝 감은 눈과 순결한 미소에 눈을 뗄 수 없다. 조각상에 맞춘 초점은 선명해지고 주변 배경은 흐려졌다. 열병에 시달리는 것처럼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뭘까 이 기시감은.’

 

 한순간 자기 자신을 잊은 느낌이 들었다. 엘가는 조각상을 옆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아래에서도 봤다.

 

 “이상하다. 이상해.”

 

 설명할 수 없지만, 조각상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강하다. 어렴풋이 그런 확신이 들었다.

 

 “조각상도 짝퉁이 있나? 아님 졸작(拙作)인 건가?”

 

 “하-.”

 

 명백한 비웃음. 어처구니없어하는 소리에 엘가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거장의 작품을 품평하다니. 아는 게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는 법이지. 이래서 천한 노예는 상종할 수 없는 거다. 대체 주인이 누구냐?”

 

 건너편 분수대 가장자리.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블론드 단발의 아이가 제 얼굴만 한 사탕을 빨아 먹고 있었다. 위아래가 붙은 동물 옷을 입고 있는데 귀가 달린 후드 모자까지 쓰고 있으니 영락없는 생쥐였다. 깨물어주고 싶게 사랑스러운 생쥐. 아이는 코끝을 까맣게 칠하고 양쪽에 세 가닥씩 수염을 그렸다. 다양한 이종족을 봤지만 이종족처럼 분장한 인간은 처음 봤다.

 

 아이의 옆에는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판다가 있다. 둥근 얼굴에 눈 가장자리의 반점, 폭신해 보이는 배, 넥타이와 멜빵바지를 입은 판다는 엘가가 지그시 쳐다보자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이상한 모습이랑 이상한 거. 엘가는 조심스럽게 힙색에서 잭나이프를 꺼내 소매 안으로 숨겼다.

 아이는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청잣빛 눈동자로 엘가와 허공에서 시선을 부딪혔다. 사나운 전기가 튄다. 먼저 입을 땐 건 엘가였다.

 

 “노예? 난 노예가 아니야.”

 

 사탕을 핥던 아이가 사탕을 어금니로 깨물어 먹었다.

 

 “건방진, 말을 높여라. 이 솔(Sól, 태양)님이 하류층 발음을 쓰고 있다고 너와 계급이 동등하다 여기느냐? 천한 것들이 상류층 발음은 알아듣질 못하니 이 몸이 기꺼이 써주는 것이다.”

 

 잔뜩 거드름피우는 태도에 엘가는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네 주인이 누구냐 물었다. 목줄은 어딨지? 어떤 낙인이 있느냐? 왜 대답을 못 하지? 설마 탈주한 것이냐?”

 

 솔이 속사포로 쏘아붙이며 양 볼 가득 사탕을 물었다.

 

 “그만두세요. 솔. 행색을 보아하니 유기종(遺棄種)은 아닌 것 같고 도축장에서 태어난 노예라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린 인간족의 살은 부드럽고 육즙의 풍미가 좋아 별미로 먹곤 합니다. 가엾은 것. 무서워서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판다의 등 뒤에서 색소가 전부 빠진 듯 온몸이 새하얀 여자가 나왔다. 흰 생머리에 흰 난방, 흰 여우 모피, 진주와 모조 안개꽃 머리 장식이 두 눈을 덮었다. 여자는 자신과 대조되는 검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다. 워낙 존재감이 없어서 있는지도 몰랐다.

 

 “하- 가축 노예였군. 가축 노예에게 동정심을 갖는 건 마니(Máni, 달)가 유일할 거야. 나의 상냥한 동생아.”

 

 그들의 대화는 엘가의 기준에서 정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넘나들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저들이 이상한 건가. 더 듣고 있으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솔의 눈동자가 비색으로 짙어졌다.

 

 “어이 노예. 괴이한 걸 달고 다니는구나. 끔찍한 해충이군. 저리 추한 몰골로 살아가는 게냐.”

 

 스스-

 

 언제 따라온 걸까. 패러사이트가 길쭉한 다리를 접고 엘가의 뒤에 서 있었다.

 

 “나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마. 패러사이트는 익충이야. 겉모습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건 부끄러운 짓이고 교양 없는 짓이지.”

 

 “가소로운지고. 이 몸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냐? 아르콘인 나에게?”

 

 솔은 폭소했다. 손에 쥔 사탕을 떨어뜨리고 고개를 숙인 채 배를 잡았다. 솔의 작은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어리석은 것. 목숨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보아라.”

 

 솔이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엘가는 한순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식은땀이 흐른다.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신을 차리니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다. 곧바로 무형의 칼날이 내장을 헤집고 간다.

 

 “너는 방금 이 몸에게 2번 죽었다. 심장이 터져서, 사지가 찢겨서. 그런데 왜 살아있지?”

 

 솔이 커다란 눈을 더 커다랗게 뜨며 물었다. 순수한 호기심. 광기 어린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판다의 뒤에 숨어있던 마니도 궁금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솔은 파랗게 변한 혓바닥으로 새로운 사탕을 뜯어 아래에서 위로 핥았다.

 

 “대답하라. 왜 신력이 통하지 않지? 너는 불사인 건가? 아니면 특별한 능력을 가졌나?”

 

 “설마….”

 

 전율이 정수리를 관통한다. 엘가는 하얗게 질린 주먹을 꽉 쥐었다. 둑에 금이 가면서 범람한다. 급히 보수작업을 해보지만 깨진 틈은 막을 수가 없다. 엘가는 미동 없이 서 있는 패러사이트를 미묘하게 바라봤다. 낯빛에 먹구름이 낀다.

 

 “왜 내가 죽지 않는지 알고 싶어?”

 

 “이 몸은 네게 명령을 하는 거다. 이 몸이 물으면 넌 답한다. 그게 순리다.”

 

 “내가 답해주면 넌 나한테 뭘 해줄래?”

 

 “괘씸한! 이 몸과 거래를 하자는 거냐? 배짱이 두둑하구나.”

 

 솔이 분수대 가장자리 위에서 일어나 엘가를 내려다봤다. 엉덩이에 달린 앙증맞은 꼬리가 솟아올랐다. 공기가 말라비틀어진다. 마니가 솔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솔이 씩 웃었다.

 

 “원하는 걸 말하라.”

 

 엘가는 목에 걸린 펜던트를 꺼냈다.

 

 “이 펜던트의 주인을 만나게 해줘. 그러면 네가 궁금한 건 뭐든 대답해줄게.”

 

 “빅맘. 마차를 가져와.”

 

 대화가 길어지자 앉아서 대나무를 씹고 있던 판다가 벌떡 일어나 네 발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빛의 속도로 사라진 빅맘이 입으로 마차의 고삐를 물고 나타났다.

 

 “타거라. 어디로 가면 되지?”

 

 엘가는 머뭇거렸다. 처음 보는 이들을 신용할 수 있나. 함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설사 계략인들 부딪혀보지 않고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야.”

 

 “단서가 될 만한 정보는 없나요?”

 

 마니가 좌석에 얌전하게 자리 잡고 말했다.

 

 “이름은 비비안. 종족은 인어. 그리고 이 펜던트가 전부야.”

 

 마니는 음각이 새겨진 펜던트를 유심히 감정했다.

 

 “이 펜던트… 블랑슈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엘가는 마차의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을 관찰했다.

 

 마니는 장신구로 두 눈을 가렸는데 앞이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솔은 이상한 동물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게 퍽 잘 어울린다. 엘가는 그들과 자신의 옷차림, 외모를 번갈아 쳐다봤다.

 

 “인어는 희귀한 종입니다. 짚이는 게 없으신가요. 솔.”

 

 “오래전, 인어를 첩처럼 물고 빨던 얼간이가 있었는데. 리비도(Libido) 블랑슈란 녀석이었지.”

 

 “그는 지금 노예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찾는 인어를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엘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빅 맘. 72° 35' S(위도), 30° 56' E(경도)로 가주세요.”

 

 마니가 상냥하게 부탁하자 빅맘이 마차의 고삐를 물고 일어섰다.

 

 “잠깐.”

 

 스스-

 

 엘가는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분수대 앞에서 망부석마냥 있는 패러사이트를 바라봤다. 마음이 심란하다.

 

 “네 집으로 돌아가.”

 

 마차가 출발했다. 엘가는 멀어지는 패러사이트를 보며 의자에 착석했다. 솔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더니 손톱만 한 디바이스를 꺼냈다.

 

 “이어윙을 귀에 꽂거라. 네 수준을 맞추기 위해 저급한 발음을 썼더니 입안에 가시가 돋쳤다.”

 

 이어윙을 귀에 꽂자 삐 하고 소리가 나면서 눈앞이 컴컴해졌다. 누가 손으로 뇌를 주물럭거리는 이질감에 이어윙을 빼려고 하자 솔이 저지했다.

 

 “이 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알 듯 말 듯 한 발음이 귓속으로 들어오면서 번역됐다.

 

 “자, 이제 말을 해봐.”

 

 “느낌이 이상해.”

 

 혓바닥에 버터를 바른 것처럼 발음이 부드럽게 굴러갔다. 엘가가 제가 한 말에 화들짝 놀라자 솔이 배꼽이 빠지라 웃었다.

 

 마차는 안정적이고 빠르게 이동했다.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바깥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숲 어귀에 들어섰다.

 

 “이봐 노예”

 

 “난 소유물이 아니야.” 엘가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렸다.

 

 “흥. 그건 이 몸에게 중요치 않다. 네가 패러사이트라고 부르는 것은 네 수하인가?”

 

 “수호신 같은 거지.”

 

 “한낱 노예에게 수호신이라?”

 

 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값을 매기는 눈길. 그리고 조소. 솔은 두 손을 깍지끼고 턱에 괴더니 다시 질문했다.

 

 “어디서 왔지.”

 

 솔의 목소리에는 무게가 있었다. 짓누르는 압박이 심해질수록 엘가는 연신 침을 삼켰다.

 

 “레드존.”

 

 “레드존? 들어본 적 없는 지명이다." 솔은 엘가의 겉과 속을 꿰뚫어봤다. "거짓말은 아니군. 왜 인어를 찾고 있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부탁할 것도 있고.”

 

 “주인도 없고, 희귀한 인어를 만나려 하고, 넌 이상한 노예다.”

 

 “너야말로 이상한 꼬마다.”

 

 “꼬마? 방자하구나. 이 몸을 꼬마라 부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재밌군. 재밌어. 그렇지 않아? 마니?”

 

 "네. 당신은 아르콘을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마니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날카로웠다. 솔은 부담스러울 만큼 엘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 눈 속엔 이 몸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지 않군. 어째서?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나?” 솔은 엘가의 턱을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담대한 것인지 무지한 것인지. 그것도 괴이한데 괴충에게 가호를 받는다니. 아니, 애초에 노예가 맞는 건가? 정체를 숨겨야 하는 사정이 있는 거냔 말이다.” 엘가는 입을 맞출 듯 다가오는 솔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왜 자꾸 너와 나의 수준을 나누려 하지? 아까부터 죽음을 다스리는 신처럼 말을 하는데, 너도 인간일 뿐이잖아." 엘가는 한숨을 쉬었다. "괴충이 아니야 패러사이트다. 몇 번을 말하지만 난 노예가 아니야. 정체? 아버지의 자식이다.”

 

 마차가 멈췄다. 솔의 뺨에 볼우물이 생겼다. 무형의 악력이 엘가의 목을 비틀었다. 엘가는 목을 움직여보며 태연자약한 솔을 노려봤다. 육체는 멀쩡하지만, 정신적 희롱을 당하는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왜 네겐 신력이 통하지 않지? 너는 뭔가 다른가? 아무리 봐도 볼품없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데.”

 

 솔의 눈길이 엘가를 위아래로 핥았다. 말없이 있었지만 마니도 부정하진 않았다.

 

 “그 질문의 답은 인어를 만나고 나서 해주지. 아직 비비안을 만난 게 아니잖아.”

 

 “그래. 우리의 거래에 규칙을 세우진 않았다.”

 

 솔이 소악마처럼 웃었다. 깜찍하면서 사악해 보이는 전매특허 미소. 솔은 주머니 뒤적이며 토끼 귀. 토끼의 코와 이빨이 달린 반 마스크, 목줄을 내밀었다.

 

 “얼른 착용하지 않고 뭘 가만히 보고만 있느냐.”

 

 “이게 뭐야?”

 

 “네가 이 몸의 노예라는 증표.” 솔은 지금까지 중 가장 즐거워 보였다.

 

 “나는 네 노예가 아니야.”

 

 “저택에 들어가려면 이 몸의 노예가 돼야 해.”

 

 엘가는 입을 앙다물고 솔이 준 장신구를 착용했다.

 

 “깔깔깔. 잘 어울린다. 넌 이제부터 바니족 몸종이다.”

 

 솔과 마니, 엘가는 마차에서 내렸다. 빅맘도 물고 있던 고삐를 놓았다.

 

 솔과 마니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엘가가 뒤따라갔다. 솔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기억력이 형편없군. 넌 바니족이야. 토끼처럼 행동해야 할 것 아니야.”

 

 “….”

 

 엘가는 깡충깡충 뛰어갔다.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뒤통수에 대고 욕을 한 바가지 해주는데 돌풍이 엘가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온몸에 신경이 바짝 섰다. 솔, 마니와 판다는 느끼지 못하는 건지 익숙한 것인지 태도에 달라진 점이 없었다. 엘가는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셨다. 숲에서 숲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지독한 악취는 무엇이란 말인가.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8 낙원으로 2016 / 9 / 11 323 0 5574   
7 낙원으로 2016 / 9 / 4 529 0 7925   
6 낙원으로 2016 / 9 / 2 326 0 8892   
5 돗가비와 꼬마 스케빈져 2016 / 8 / 20 302 0 8566   
4 돗가비와 꼬마 스케빈져 2016 / 8 / 17 384 0 5500   
3 돗가비와 꼬마 스케빈져 2016 / 8 / 15 320 0 7431   
2 돗가비와 꼬마 스케빈져 2016 / 8 / 15 365 0 7813   
1 돗가비와 꼬마 스케빈져 2016 / 8 / 15 587 1 5773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