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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백제의 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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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2-04 16:25     조회 : 233     추천 : 0     분량 : 12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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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부 - 배 신

 소정방의 회유

  숙소로 돌아온 예식과 예군의 마음은 화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예군은 약이 올라 주먹으로 탁자를 쿵쿵 내리찍었다. 귀신에 홀린 것 같은 지난밤이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을까?”

  “형님, 우리가 어라하에게 속은 겁니다. 어라하는 긴장감을 고조시켜 우리가 딴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한 겁니다.”

  “그렇다면 의자도 우리의 거사계획을 눈치 채고 있다는 것 아닌가.”

  “확실히 그럴 것입니다. 결국 국담의 말을 믿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며 전쟁의식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들의 공격에 잔뜩 겁을 먹은 우리 군사들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야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거사를 명한들 먹히기나 하겠는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방군까지 온다고 하니 백성들은 희망을 품고 어라하를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하지만 지난밤 지방군은커녕 연합군 놈들도 보이지 않았네.”

  “형님, 그래서 오늘 밤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라하의 거짓말에 군사들은 물론 백성들마저 실망을 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세. 오늘 밤엔 반드시 의자를 잡아 소정방과 타협을 해보세. 차일피일 일을 미루다간 정말로 지방군이 이곳으로 올 수도 있네. 지금 두시원악의 정무를 비롯한 지방의 귀족들이 신라군을 치는 등 소소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첩보일세.”

  “임존성으로 간 복신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흑치상지가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복신을 따라 벌써 왔을 것 아닌가.”

  “하여간 지금 지방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우리가 선수를 쳐 어라하를 잡아 바친다면 백제는 망하게 되고 지방군도 주춤할 것입니다. 오늘이라도 소정방의 답신이 오면 좋으련만.”

  “언제까지 답신만 기다리겠나. 일단 일을 치르고 보세.”

  “알겠습니다 형님, 그러면 우리 군관들과 병사들에게 거사계획을 알리고 오늘 밤에 결행하기로 합시다.”

  예식의 거사 일정이 잡혔다. 이에 예군은 군관들을 자기의 집무실로 집결시켰다.

  “제장들은 단단히 들어라. 어젯밤 어라하는 새빨간 거짓말로 우리를 속였다. 금세 올 것이라고 하던 지방군은커녕 연합군 놈들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 제장들도 알다시피 백제는 18만 연합군을 막을 수가 없다. 이미 망했단 말이다. 어라하는 귀족들의 신임을 잃었다. 따라서 귀족들은 어라하를 구하러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백제의 패망을 인정하고 살길을 찾아 눈치만 보고 있을 것이다. 소정방은 백제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 우리의 계획대로 어라하를 잡아 바치고 끝까지 살아남아 남은 인생의 영화를 누리자. 어라하를 잡아 바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가족들을 위하여 나와 방령의 뜻을 따르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의자를 잡아 바치자던 군관들이었다. 군관들은 이제나저제나 지금과 같은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국담의 콧대만 잔뜩 올려놓았다. 게다가 어젯밤의 전쟁의식으로 백성은 물론 자기 측의 일부군사들까지 의자를 추종하게 되어 기가 죽어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방령의 확실한 결단과 예군의 연설이 식어가던 열기에 기름을 부어넣었다. 예군의 명을 받은 군관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은밀하게 거사계획을 전달했다. 예군은 자신의 군사들 중 누군가가 의자에게 고변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의자가 사실을 알고 선수를 치려하면 그 때 가서 쳐도 늦지 않다. 차라리 의자가 알고 먼저 움직여 준다면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다.’ 예식형제가 구지 거사를 밤으로 늦춘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동안 소정방의 답신이 온다면 명분과 영화를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고, 백성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

  사비성의 소정방과 김유신은 약탈한 전리품을 다 챙기고 다음 일정을 의논했다.

  “대총관, 어찌됐든 백제의 왕을 잡아야 전쟁이 끝나는 게 아니겠소?”

  “그렇지요. 그런데, 웅진성 성주 예, 뭐라는 놈이 서신을 보내온 것 같은데. 어디 있더라. 야, 그 서신 좀 가져와 봐라.”

  전리품 약탈에 혈안이 되어있던 소정방은 예식의 편지를 대충 읽고 처박아 두었다. 어차피 의자가 웅진성으로 도망쳤다면 아무 때나 들이쳐서 잡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식의 편지는 자신의 영달을 꾀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고 무시하고 있었다.

  “예식이 서신을 보냈다고요? 무슨 내용입니까?”

  “거, 시답지도 않은 협상안을 보냈더군. 감히 대총관인 나하고 협상을 하자고? 의자를 잡아 바칠 테니 지들의 신변안정과 당나라 벼슬을 보장하라나?”

  “그, 그것 좀 보십시다.”

  김유신은 소정방에게 건네받은 예식의 서신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 대총관, 소인은 백제의 북방령이자 웅진성 성주인 예식이라 하옵니다. 저의 조상은 과거 본토에서 이곳 백제로 건너왔음으로 저희 가문의 뿌리는 본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조부와 부친은 이곳 웅진에 기반을 두고 백제의 좌평벼슬을 한 백제의 귀족이며 저 또한 북방령으로 현재 달솔벼슬을 하고 있습니다. 미천한 솜씨나마 제가 정성을 다하여 바람 점을 쳐보니 천하의 모든 나라가 상국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고 나왔습니다. 이 기회에 백제가 상국의 보호를 받는다면 백제의 백성들이 모두 편안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해서 저는 백제의 왕 의자를 잡아 상국의 황제께 들어 바치고자 합니다. 부디 저의 뜻을 가상히 여겨 받아 주십시오. 또한 저와 제 가문의 안녕과 작은 벼슬을 앙망하나이다. 대총관의 명령을 받는 대로 거사를 치르겠사오니 빠른 시일 내에 답신을 주시기 바랍니다. 북방령 웅진성주 달솔 예식 배상.

  “이런 간악한 놈. 지가 모시던 왕을 지 놈의 영달을 위해 팔아넘기겠다는 게로군. 이런 놈은 잡아다가 단 칼에 죽여 버려야 합니다.”

  김유신은 격하게 혀를 차며 서신을 구겼다. 그러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차라리 그게 깨끗하겠군. 이놈과 임자라는 놈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아니, 이놈은 임자보다 더 쓰임새가 있다. 임자가 우리 신라의 간자로서 오늘날 사비를 점령하는데 일조를 했다면 이놈은 백제를 끝내는데 아주 커다란 공을 세우는 것이다. 어차피 웅진성으로 가자면 곳곳에 백제 놈들의 매복이 있을 수 있고 걸리면 적지 않은 피해를 입는다. 그렇지 않아도 두시원악의 정무란 놈의 기습으로 우리 군이 호되게 당했다. 정무를 비롯해 또 다른 놈들이 없다는 보장도 없다.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을 종식시켜야 하는 상황에서 제가 모시던 왕을 잡아 바친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잘만하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아주 좋은 기회다. 아주 좋은 기회야.’ 생각을 마친 김유신은 정색을 하고 소정방을 쳐다보았다.

  “대총관, 부끄러운 말이지만 사비의 외곽을 지키던 우리 군이 백제 놈들에게 당했습니다. 놈들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오라며 5천의 군사를 내주었지만 어찌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김유신은 감추고 싶었던 정무의 기습사건까지 밝히며 백제 지방군의 매복을 경계했다.

  “까짓 한 줌도 안 되는 놈들에게 당해요? 그리고 신라군은 매번 놈들에게 당하기만 하는구려.”

  설득은커녕 비웃음만 잔뜩 샀다. 하지만 김유신은 꾹 눌러 참고 다시 한 번 장황한 논리를 펼쳤다.

  “대총관, 대총관께서도 알다시피 우리는 전투의 기본 틀을 깨고 오로지 사비성 함락만을 목표로 진격했습니다. 그것은 대총관의 작전이었으며 덕분에 이렇듯 성공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시한 백제의 여러 성들이 여전히 건재합니다. 그곳에는 지방군이 득실득실합니다. 그들이 웅진성으로 집결해 의자를 돕는다면 전세는 팽팽해질 것입니다. 물론 승리야 할 수 있겠지만 이국에서의 전투라 어렵게 전개될 것입니다. 다행히 그들은 아직 특별한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급품이 문제입니다. 백제의 왕인 의자를 잡지 않고서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할 수 없습니다. 철옹성에 숨어있는 의자를 잡으려면 얼마간 시일이 걸릴 것이고 만약 인근의 지방군이 측면을 공격한다면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우리가 의자를 잡으려고 시일을 보내는 동안 군량미는 바닥날 것이고 결국 신라에서 보급품을 전달받아야 합니다. 그 보급품을 후방의 각 성에 남아있는 백제의 군사들이 차단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우리는 꼼짝없이 굶어 죽겠군.”

  소정방은 김유신이 그동안 수차례 반복했던 백제 지방군의 집결에 관한 우려를 흘려듣고 있었다. 하지만 정무의 기습과 예식의 서신을 놓고 김유신이 다시 한 번 상황설명을 하자 우려를 가능성 있는 현실로 받아 들였다. 이제야 제대로 말이 통한 것이다. 소정방을 설득하는 데는 이처럼 길고 정확한 논리가 필요했다. 김유신은 상황을 꿰뚫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소정방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답답했지만 꾹 참고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유신의 논리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지략가의 그것이었다. 예식이 의자를 배신하지 않고 의자와 똘똘 뭉쳐 항전을 한다면 김유신의 말대로 연합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거나 백제의 지방군에 포위되어 패전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김유신은 바로 이 점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식이란 놈이 자기 왕을 배신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로서는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 의자가 웅진성으로 도망을 쳤다면 예식을 가장 믿었다는 말인데 그가 흔들리고 있으니 백제의 다른 귀족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지방의 귀족 놈들을 회유할 수 있는 서신을 보냅시다. 그렇지 않아도 지방 놈들의 반란이 신경 쓰였는데 잘만하면 아주 손쉽게 백제 전역을 장악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정방은 김유신의 지략과 논리에 내심 감탄을 했다. ‘과연 삼한 제일의 명장이로다. 저자의 말대로 하지 않고 예식을 무시한다면 다 이긴 전쟁이 역전될 수도 있겠군.’ 소정방은 지필묵을 내오라 명했다.

  “대장군의 말을 따라 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소.”

  - 북방령 웅진성주 달솔 예식은 보아라. 나는 나당연합군 대총관 소정방이다. 그대의 서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대의 뜻대로 하라. 우리 당국은 그대의 공을 가벼이 여기지 않겠다. 그대의 소원대로 그대와 측근들을 당으로 망명케 하고 황제께서 높은 벼슬을 하사하시도록 주청하겠다. 그러니 이 서신을 받는 대로 거사를 행하도록 하라. 그대의 거사를 돕는 의미에서 적지 않은 원병을 웅진성으로 보내겠노라.

  예식이 대단히 만족할 만한 답신이었다. 소정방은 답신의 안전한 전달을 위해 대여섯 명의 전령을 웅진성으로 보냈다. 답신을 받은 전령은 각기 다른 길을 찾아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연합군의 원병이 웅진성으로 떠날 준비를 하자 비사도리도 신발 끈을 고쳐 맸다.

  *

  악전고투 끝에 탈출에 성공한 정무는 칠악산성으로 집결한 장정들을 일일이 돌아보며 격려했다. 신라군의 말과 병장기를 빼앗는데도 성공해 적지 않은 장정들이 무기를 갖게 되었다. 정무는 여세를 몰아 의자가 있는 웅진성으로 달려가고자 했다. 그런 뜻을 담은 서신을 여자진에게도 보냈다.

  “돌아오지 않은 군사들은 없는가. 부상병은 얼마나 되는가.”

  “꽃뱀에 물린 병사는 물론 대다수가 복귀했습니다.”

  대다수가 복귀했다면 그야말로 대승이었다. 이번 기습작전의 승리로 두시원악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정무 역시 전쟁에 자신감을 얻었다. ‘숫자가 적다하여 무조건 불리한 것은 아니로구나. 더구나 이번 전쟁은 생소한 국경도 아닌 본토에서 치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쪽이 훨씬 유리하다. 비록 사비성이 함락되고 어라하께서 파천을 하셨지만 지방군이 건재하지 않은가. 그들이 뭉친다면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낼 수 있다.’ 정무는 기세가 등등한 군사들에게 외쳤다.

  “전열을 정비한 뒤 웅진성으로 달려가 어라하를 구한다. 낮에는 이동이 쉽지 않으니 오늘밤에 저 예식을 칠 것이다. 이 사실을 도침대사에게도 전해라!”

  정무의 당당한 목소리가 산 속 깊숙한 곳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패전을 한 면도날 목소리는 김유신에게 그럴듯한 변명을 해야만 했다.

  “두시원악의 정무라는 놈을 비롯해 백제의 지방군이 장마철 개구리들처럼 득실거립니다. 저들을 제압하지 않으면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닙니다. 날이 밝는 대로 우리를 기습한 놈들을 일망타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래야만 지방군의 예봉을 꺾을 수 있습니다.”

  “장마철 개구리들처럼 득실거려?”

  면도날 목소리의 보고에 모골이 송연해진 김유신은 무려 5천의 군사를 내주었다. 김유신에게 백제의 지방군은 그만큼 위협적이었다. 김유신은 면도날 목소리에게 다소 거친 표현의 명령을 내렸다.

  “반드시 놈들을 깨부숴야 한다. 놈들은 웅진성의 의자에게로 갈 것이다. 그러면 전세가 불리해진다. 어서 가서 놈들을 가루로 만들어 다시는 수작을 못 부리도록 하라.”

  김유신의 명령을 받은 면도날 목소리는 먼동이 트자마자 군사들을 집결시켰다. 면도날 목소리는 집결된 군사들 앞에 서서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로 외쳤다.

  “위대하고 용감한 대 신라의 군사들이여! 우리는 지난밤 백제 놈들의 기습에 꼼짝없이 당했다. 군사들 같지도 않은 조무래기들에게 당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칠악산에 숨어있는 놈들을 들이쳐 잃어버린 자존심을 회복하자. 전우들의 복수를 하잔 말이다. 알겠는가!”

  면도날 목소리가 비록 정무의 기습으로 무참하게 패했지만 그 역시 신라의 귀족이자 화랑출신이었다. 신라의 군사들은 전우들의 복수를 하자, 는 면도날 목소리의 말에 벅찬 감동을 받았다. 군사들의 사기가 오르고 진군을 명하는 북소리가 떠오르는 태양빛을 삼켰다. 면도날 목소리의 이름은 김흥원(1), 아버지는 진평왕의 아들 호원공이고 어머니는 태양공주였다.

 

  7월의 일기는 불순하기 그지없어 대낮의 화창함을 믿을 수 없었다.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칠악산으로 향하는 김흥원의 모습이 어느덧 검은 대지에 휩싸여 칠흑처럼 보였다. 김흥원이 군사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정무는 칠악산을 내려와 웅진성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김흥원은 정무가 웅진성으로 갈 것을 빤히 알고 있었다.

  “저 야산을 넘어 늪지대 앞에서 매복한다. 모두 횃불을 꺼라.”

  김흥원은 정무가 반드시 지나쳐야할 길목을 골라 매복을 했다. 우연이었지만 산기슭 남쪽으로는 드넓은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이에 김흥원은 정무의 군대가 늪지대 중간쯤 다다르기를 기다려 일제히 공격하기로 작전을 짜두었다. 신라군이 매복을 한 지 한 시간쯤 되자 멀리서 가물가물한 횃불들이 보였다. 정무의 군대였다. 잠시 후 신라의 척후병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장군, 노, 놈들입니다.”

  “알고 있다. 모두들 긴장을 늦추지 말고 명령을 기다려라. 화살부대는 다섯줄로 나란히 도열하라.”

  한 줄에 2백 명, 모두 다섯줄의 궁수부대가 도열했다면 순식간에 천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날리겠다는 것이다. 이 공격으로 늪에 빠진 정무의 군사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할 수도 있다. 우왕좌왕하는 틈을 이용해 신라보병 3천여 명이 달려든다면 정무는 순식간에 절반이상의 군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자칫하면 늪에서 정무의 군사들이 전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매복의 유리함이었다. 게다가 매복하고 있는 군사들이 상대보다 월등히 많다면 그 효과는 몇 배 이상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김흥원은 이번 기회에 지난번의 빚을 단단히 갚을 작정이었다.

  드디어 정무의 군대가 눈앞에 또렷이 나타났다. 결코 적지 않은 군사들이었다. 정무와 몇몇 군관들 외에 나머지는 갑옷을 입지 않았지만 제법 그럴듯한 병장기를 갖추고 있었다.

  “저것들이 우리의 무기를 가지고 폼을 잡고 있네. 저 말도 우리한테 뺏은 것이렸다.”

  김흥원은 약이 바짝 올라 당장이라도 공격명령을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몽둥이로 칼과 창을 상대했던 저들이었다. ‘놈들이 몽둥이가 아닌 칼을 손에 쥐었다면 쉽게 상대해서는 안 된다.’ 김흥원은 두시원악 장정들의 용맹과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정무는 야산 앞에 늪지대가 있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받고도 구지 돌아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하지만 정무의 척후병은 전쟁에 관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초짜였다. 그가 만약 늪지대를 직접 건너보고 시야의 확보를 위해 야산까지 넘으려는 시도를 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매복을 들킨 김흥원은 척후병을 잡아들였을 것이고 정무는 척후병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함부로 늪을 건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흥원은 늪지대를 건너와 매복한 자신의 군사들 앞에서 알짱거리는 척후병을 잡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척후병은 더 이상 전진을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렸다. 정무는 앞에 적이 없다는 척후병의 보고를 그대로 믿고 늪으로 들어갔다.

  “그리 깊지 않은 늪이다. 그대로 전진하라.”

  정무의 군사들은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갔다. 척후병의 보고대로 늪은 그리 깊지 않았다. 발목정도 밖에 빠지지 않는 것이 늪이라고 하기보다는 빗물이 아직 빠지지 않은 벌판에 불과했다. 정무와 군관들은 신라군에게서 빼앗은 말을 타고 가능한 빨리 늪을 건너기 위해 채찍을 가했다. 그러자 말들이 거침없이 뛰기 시작했다. 수상한 밤공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말들이 놀란 것이다. 어떤 말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앞발을 들어 기수를 떨어뜨렸고 어떤 말은 늪에 발이 빠져 고꾸라졌다. 정무는 언짢은 긴장감에 마음이 산만해졌다.

  “말들을 진정시켜라. 군사들은 서둘러 늪지대를 빠져 나가라!”

  정무의 명령은 한 치의 여과 없이 김흥원에게 또렷이 들렸다. 정무의 목소리를 들은 김흥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다. 화살을 날려라!”

  김흥원의 명령에 따라 맨 화살과 불화살이 늪으로 쏟아져 내렸다. 김흥원은 궁수부대 1열과 2열에게는 맨 화살을, 3열은 불화살을, 마지막 4열과 5열에게는 맨 화살을 쏘도록 명령했다. 처음 맨 화살을 쏘게 한 것은 불을 보고 피하지 못하게 함이요, 두 번째 불화살은 적이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요, 마지막 맨 화살은 적을 확실히 보고 쏘기 위함이었다. 이 같은 김흥원의 작전에 정무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할 것이고 참혹한 죽음을 당할 것이 빤했다.

  김흥원의 계획대로 화살이 쏟아지자 정무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하여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했다. 방패도 많지 않았으며 몸을 가릴만한 엄폐물도 거의 없었다. 모두 천 발의 화살에 삼백 명 이상이 맞았다. 신라군의 화살은 함정에 빠진 짐승에게 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럴 때는 누구라도 도망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후퇴, 후퇴한다!”

  하지만 정무의 명령은 뒷북에 불과했다. 정무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군사들이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화살 공격에 당황한 그들은 방향감각을 못 잡고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질퍽거리는 늪지대를 수천 군사들의 발길이 지범거리자 발은 더 깊이 빠졌다.

  “뒤로, 뒤로 후퇴하란 말이다!”

  두시원악의 군관들이 목청이 터질듯 소리를 지르며 앞장을 섰다. 그 모습을 는질맞게 지켜보고 있던 김흥원은 예정된 다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신라의 보병 3천 명이 피에 굶주린 좀비들처럼 늪지대로 쏟아져 들어갔다.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마라!”

  김흥원은 ‘한 놈도, 한 놈도’를 노랫가락처럼 흥얼거리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김흥원은 잠시 후 벌어질 기가 막힌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정무가 대담하고 뛰어난 지략을 가진 장수임을 여전히 잘 모르고 있었다. 신라의 군사들이 늪지대로 몰려오자 정무는 갑자기 후퇴명령을 철회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는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힘들다. 놈들의 갑옷이나 우리 군사들의 옷도 검은색에 가깝다. 이들이 한데 엉겨서 싸운다면 오히려 숫자가 많은 쪽이 불리해진다. 죽기 살기로 싸움에 임하는 군사들은 누구를 구별할 새도 없이 무조건 병장기를 휘두를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라 군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었다. 반면 우리 군사들은 몸이 가볍다.’ 상황이 대단히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무는 역발상의 지재를 발휘했다. 그러자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차라리 전면전을 치르는 것이 유리하다.’ 정무는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신라 군사들이 늪으로 들어오기를 충분히 기다려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놈들을 몽둥이로 때려잡아라. 반드시 몽둥이를 써야 한다. 몽둥이로 투구를 박살낸 뒤 놈들의 칼을 빼앗아 목을 딴다. 각자 한 놈씩만 해치우고 후퇴하라!”

  다시 한 번 몽둥이의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단단한 나무로 만든 몽둥이는 어지간한 칼로는 벨 수가 없고 칼보다 다루기가 쉽다. 더구나 그 몽둥이가 물에 젖었다면 칼을 먹어버릴 것이기 때문에 칼은 무용지물이 된다. 몽둥이의 경험이 있었던 두시원악의 군사들은 정무의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세 알아 차렸다. 그리고는 두 발을 단단히 지탱하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그 사이 화살에 맞아 부상을 당한 백제 군사들은 기다시피 모걸음으로 후퇴를 했다.

  드디어 신라군이 우악스럽게 정무의 군사들을 덮쳤다. 밀고 들어오는 기세가 성난 황소 같았다. 이들의 공격이 대낮, 평원에서 이루어졌으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세는 늪의 한 가운데 쯤 이르자 속절없이 주저앉았다. 갑옷과 투구를 쓰고 철제무기로 무장한 몸은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앞에서 넘어진 군사에 걸려 뒤따르는 군사들이 넘어지고, 급기야 여기저기에 넘어진 군사들의 무더기가 만들어졌다. 그 틈을 정무의 군사들이 놓칠 리 없었다. 몽둥이를 든 정무의 군사들은 넘어진 신라 군사들의 무더기로 뛰어올라 투구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몽둥이로 투구를 맞은 신라 군사들은 머릿속에 파리가 들어가 앵앵거리는 느낌을 받으며 나뒹굴었다. 정무의 군사들은 쓰러진 신라 군사들을 걷어치우고 밑에 깔린 군사들에게도 몽둥이세례를 퍼부었다. 몽둥이를 피한 신라 군사들은 뒤뚱거리며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그 칼에 다친 군사들은 대부분 아군이었다. 정무의 예상이 정확히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3천 명이나 되는 신라 군사들을 언제까지 두들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제히 후퇴하라!”

  “두둥~ 두둥~ 두둥~”

  정무가 후퇴를 하라는 북을 쳤다. 정무의 명령에 군사들의 몽둥이질이 기계처럼 멈추었다. 조직의 질서가 그 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덕분에 몽둥이를 맞지 않은 신라 군사들이 가슴을 쓸어 내렸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인마!”

  “그래, 고마워!”

  정무의 한 병사가 몽둥이질을 멈추고 이죽거리자 김흥원의 한 병사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마워했다. 신라의 군사들은 상대적으로 몸이 가벼운 정무의 군사들을 쫒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흥원은 멀찌감치 앉아서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탁탁 때리고만 있었다. 정무의 군사들이 후퇴를 하여 늪지대를 거의 빠져나갈 즈음 신라의 군관 한 명이 김흥원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장군, 아군의 피해가 심각합니다. 놈들은 모두 후퇴를 하였습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흥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확인을 했다.

  “뭐가 어쨌다고?”

  “느, 늪에 빠진 우리 군사들을 놈들의 몽둥이가···.”

  김흥원의 발차기에 군관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벌러덩 뒤로 나자빠졌다.

  “또 그 놈의 몽둥이.”

  김흥원은 기가 막힌 사실을 확인하러 늪지대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횃불을 밝혀라!”

  군관의 보고는 모두 사실이었다. 나자빠져 있는 자들은 대부분 신라 군사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화살을 맞고 초토화되었을 텐데. 어떻게 놈들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3천이 넘는 우리 군사들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놈들에게 당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김흥원은 약이 바짝 올라 발을 동동 구르며 비명에 가까운 명령을 내렸다.

  “전군은 놈들을 쫒아라!”

  김흥원은 말의 엉덩이에 무자비한 채찍을 내리쳤다. 채찍을 맞은 말은 힝힝거리며 늪지대를 미친 듯이 쑤시고 다녔다. 김흥원의 군사들이 늪지대를 빠져 나오는 데만 두 시간 이상이 걸렸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정무의 군사들 전원이 원대로 복귀했을 시간이다. 간신히 늪지대를 빠져나온 김흥원은 어처구니가 없고 약이 올라 허공에 대고 칼질을 해댔다.

  “놈들의 본거지는 저 칠악산성이 틀림없다. 전군은 칠악산으로 들어가 놈들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라!”

  칠악산성으로 들어온 정무는 일단 군사들을 돌아보며 격려했다.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신라의 궁수부대가 쏜 화살에 적지 않은 군사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들을 무시하고 웅진성의 의자에게로 갈 수는 없었다. ‘웅진성으로 가는 지름길은 김흥원의 군사들이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 길을 피해 웅진성으로 가려면 험준한 산길을 선택해야 한다. 산길을 통해 웅진성으로 가려면 족히 이틀은 걸린다. 이 사실을 여자진에게 알려야 할 텐데. 그렇다고 앞을 막고 있는 신라군과 전면전을 벌일 수도 없다. 아! 어라하가 급하다. 이를 어쩐다.’ 웅진성으로 가려던 정무의 계획에 대단한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 때 척후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숨넘어가는 보고를 했다.

  “아까 그 신라 놈들이 이곳을 향해 이리떼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주석*

 1)태양공주가 금륜태자나 다른 신하들과 관계를 맺는 등 불륜을 저지르자 진평왕은 호원공을 자신의 정실자식(정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전군(殿君)으로 삼았다. 이에 김흥원은 늘 불만을 가졌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와 딸을 당시 권력자였던 흠돌의 집안으로 시집보냈다. 이 과정에서 김흥원은 누이를 흠돌에게, 딸을 흠돌의 아들에게 보냈다. 김흥원은 668년 고구려를 침공할 때 계금당총관으로 참전했지만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후퇴를 하곤 했다. 그는 훗날 파진찬의 신분으로 흠돌과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고 실패하자 처참하게 처형을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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