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2016년 12월 31일, 23:01

　37. 무너지는 탑 - ①

　270번째 의원이 죽었다는 소식은 의원회관에도 동시에 방송되었다. 그곳의 사람들도 본청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송을 듣자마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마치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사람들이라도 된 양 기쁨에 겨워 서로 끌어안기도 하고 악수도 하는 등 아주 야단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참 유난을 떨고 있는 그들의 몸짓들 사이로 지혜가 별안간 기세훈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기세훈은 사람들과 악수를 하기도 하고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다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지혜는 돌연 기세훈에게 야릇한 눈길을 보냈다. 기세훈은 처음엔 선뜻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지만, 곧 그 뜻을 눈치 채고는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지혜는 기세훈에게 한차례 더 눈짓을 보낸 뒤 소회의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회의실문을 완전히 닫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기세훈을 향해 농염한 시선을 보냈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세훈도 한껏 과장된 몸짓으로 능청을 떨어가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척 하다가 슬그머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한편 멀찍이 떨어진 다른 소회의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혜는 기세훈이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 다시 그에게 유혹의 눈길을 보낸 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본 기세훈은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주변을 의식하며 헛기침을 몇 번 하는 척하다가 재빨리 그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기세훈이 문을 열고 소회의실 안으로 들어오자, 지혜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세훈의 넥타이를 확 잡아당기며 자신의 몸을 기세훈에게 밀착시켰다. 기세훈은 그런 지혜의 행동이 갑작스럽긴 했지만 싫은 기색을 내비치진 않았다.

　기세훈은 양손을 지혜의 재킷 안 쪽 허리춤으로 쑥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허리를 단숨에 감싸 안으면서 지혜의 몸을 자신에게 더 바짝 끌어당겼다. 지혜는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기세훈의 눈동자를 다시 야릇한 눈길로 바라봤다.

　“난 성취감을 느낄 때마다 다른 것도 느끼고 싶어져서 말이야. 그러니 당신이 좀 도와줘야겠어.”

　그러면서 지혜는 기세훈에게 입을 맞췄다. 지혜의 촉촉이 젖은 입술은 기세훈의 욕정에 불을 확 댕겼다.

　“원래 너처럼 드센 여자는 나 같은 남자한테 사족을 못 쓰는 법이지.”

　기세훈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 지혜의 등과 엉덩이를 마구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혜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키스를 퍼부었다. 지혜는 마치 술에 취한 창부처럼 깔깔거리며 자지러졌다. 그 웃음소리는 기세훈의 욕정을 더욱 자극했고, 그만큼 지혜의 몸을 탐닉하던 그의 숨소리도 더욱 거칠어졌다.

　기세훈은 지혜를 원탁 쪽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지혜의 상체를 뒤로 밀어 젖히며 원탁 위에 눕혔다. 지혜의 머리카락과 재킷이 원탁위에서 꽃잎처럼 활짝 펼쳐졌다.

　기세훈은 가슴 부분이 봉긋이 솟아올라 있는 지혜의 보라색 블라우스를 내려다보며 입을 히죽거렸다. 그러더니 블라우스를 양손으로 움켜쥔 다음 단숨에 열어젖혔다. 블라우스 사이로 자줏빛 실크 브래지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래지어 사이로 보이는 지혜의 가슴골은 기세훈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몸에 한껏 열이 오른 기세훈은 답답함에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그러고는 지혜의 가슴골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녀의 살결을 정신없이 탐닉하기 시작했다. 지혜의 가슴과 허리, 배를 차례로 더듬어가는 그의 손과 입술은 순식간에 거침이 없어졌다.

　그러다 이윽고 기세훈의 입술이 그녀의 아랫배까지 훑고 내려온 바로 그 순간, 지혜가 돌연 눈을 매섭게 번득이며 품속에서 웬 칼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본회의장에서 꽃님을 보고 질겁하며 달아나던 민철이 내동댕이쳤던 바로 그 단도(短刀)였다. 칼날은 곧장 기세훈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끄허억!”

　기세훈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목을 감싸 쥐었다.

　“끄허억! 그허억! …….”

　그러면서 지혜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다였다. 그러다 결국 더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입과 코에서 피를 쿨럭쿨럭 쏟아내며 앞으로 풀썩 고꾸라져버렸다.

　지혜는 원탁에서 일어나 쓰러져있는 기세훈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순간 기세훈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풀어헤쳐진 지혜의 블라우스 자락을 덥석 움켜쥐었다. 그리고 계속 기를 쓰며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말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지혜는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당신이 했던 말은 사실이야. 언니의 복수만 아니었으면 당신과 한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겠지.”

　그러더니 순간 일변하며 기세훈의 목에 꽂혀있던 단도를 단번에 뽑아냈다. 기세훈은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며 목에서 피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그렇게 한참을 꿈틀거리던 기세훈의 사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힘없이 축 늘어졌다. 기세훈의 죽음을 확인한 지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소회의실의 문틈으로 간간히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지혜는 본청으로 가기 위해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산발이 된 머리에 풀어헤쳐진 옷,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과 터덜거리는 발걸음, 하지만 칼을 움켜쥐고 있는 손은 야무졌고 결연하게 뜬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언제나처럼 다부졌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자 거적때기처럼 수면 위에서 떠다니던 수백 구의 시체들이 지혜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혜는 멈칫했다. 그들을 죽이는 것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지만 그 시체들을 가로질러 가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 망설임도 아주 잠깐이었다. 지혜는 이내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 뒤 다시 시체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체들은 지혜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물결에 휩쓸려 마치 파도를 타는 것처럼 지혜에게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했다.

　시체가 즐비한 물길을 거의 다 지나왔을 무렵, 굽어진 채로 굳어 있던 한 시체의 팔이 지혜의 오른쪽 다리를 마치 붙드는 것처럼 감아 들어왔다. 지혜는 움찔하며 그 시체를 쳐다봤다. 그런데 뒤통수의 모양이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이에 설마 하며 그 시체를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학현이었다. 학현은 무엇이 그리도 원망스러웠는지 당장이라도 하늘을 향해 포효할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지혜는 불쑥 만감이 교차했다.

　“넌 날 배신하고 난 널 함정에 빠트렸으니까, 이제 우리 사이에 남은 빚은 없는 거네. 그렇지?”

　그러면서 손으로 가만히 학현의 눈을 감겨주었다. 순간 학현의 얼굴에 묻어 있던 물기들이 눈두덩을 타고 눈 주위로 고여 들었다가, 이내 눈꼬리의 선을 따라 옆으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지혜는 눈물을 훔쳐 주듯 학현의 뺨에 난 물기 자국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러고 나자 왠지 학현의 얼굴이 한결 더 편안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주 잠깐 지혜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온화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싸늘해졌다.

　잠시 후 지혜는 학현을 뒤로 하고 다시 본청으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통로의 양옆으로 줄줄이 매달려 있던 형광등들이 한순간에 선홍색으로 변하였다. 그러자 물 위를 떠다니던 시체들의 모습이 마치 핏물에 재워진 고깃덩이들 같아졌다. 하지만 지혜는 그런 것들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계속 정면만 뚫어져라 응시하며 본청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본청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위층으로부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대표실 소파에서 승희를 안은 채 깜박 잠이 들어 있던 동원은 난데없는 비명 소리에 움찔하며 깨어났다. 그 기척에 승희도 덩달아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동원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동원의 옷자락을 탁탁 잡아당기며 불렀다. 동원은 불안해하는 승희의 손을 감싸 쥐며 일단 안심시켰다. 그리고 손을 잡고 함께 대표실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수백 개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일순간에 동원과 승희를 덮쳐왔다. 동원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승희조차 놀라 움찔할 정도였다.

　동원은 승희를 데리고 서둘러 소리의 진원지로 보이는 로텐더 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본청 현관 앞에서 계단 너머 로텐더 홀을 올려다보고는 아연실색했다.

　로텐더 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궁녀 유령들은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사람들을 쉴 새 없이 채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피해 도망 다니느라 혼비백산이었다. 공중으로부터는 유령에게 붙들려 사라졌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후드득! 후드득! 철퍼덕! 철퍼덕!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은 마치 천장의 거대한 돔이 뱉어내는 토사물처럼 먼저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피와 살과 뒤엉켜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그 광경은 흡사 새벽에 꽃님에게서 받았던 타로 카드 ‘무너지는 탑’에 그려져 있던 그림을 보는 듯했다.

　그때 뒤에서 한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으악! 살려줘!”

　동원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동원과 눈이 먼저 마주친 건 사람이 아니었다. 궁녀 유령의 퀭하고 공허한 눈두덩이었다. 궁녀 유령은 광열을 결박하듯 등 뒤에서 부둥켜안은 채, 그의 얼굴 옆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밀고 있었다. 광열은 동원을 향해 발버둥 쳤다.

　“제발! 제발, 도와ㅈ……!”

　하지만 도와달라는 그 말마저 미처 다 끝맺지 못한 채, 등 뒤에 난 다른 차원의 틈으로 빨려 들어가듯 유령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동원이 어떻게 손을 써볼 틈도 없었다. 그때 다시 홀 위쪽으로부터 광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악! 악! …….”

　동원은 황급히 홀 쪽을 돌아봤다. 그러나 동원의 눈에 들어온 건 이미 바닥에 부딪혀 팔다리가 부러지고 꺾인 채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광열의 주검이었다. 광열은 그런 가운데서도 마치 여전히 동원에게 도와 달라 애원이라도 하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이를 기화로 이미 홀에 즐비해 있던 시체들이 광열의 주검을 따라 주르륵 계단으로 넘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마치 거대한 마대 자루에서 생선 토막들이 와르르 쏟아져 덮쳐오는 것 같았다. 동원은 식겁하여 허겁지겁 승희의 팔을 옆으로 잡아끌며 피했다. 그리고 일단은 다시 대표실로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