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쓰러진 그녀를 급하게 안아든 재현은 백화점에서 3분 거리인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코트를 벗긴 후 두 팔과 다리를 걷고 열을 내려주려고 하던 참이었다. 발에는 발톱과 살점이 여기저기 뜯겨 있었고 특히 발톱은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채 일그러져 있었다. 소매를 걷은 팔에는 멍과 칼자국으로 인한 흉터가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었고 그녀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울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재현은 손수 차가운 손수건으로 그녀의 이마와 팔과 다리를 닦으며 열을 내리게 했지만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울음소리만 커질 뿐이었다.
"제발... 제발 나도 데려가줘요... 나 혼자 너무 무섭단 말이야...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요..."
계속 흐느끼는 그녀에 재현은 급히 그의 집사를 불렀다.
"사이토, 찬물을 더 가져와줘."
사이토는 고개를 한 번 숙이곤 찬물을 가지러 나갔다. 이젠 하다하다 집에 들이다니. 잘생긴 얼굴과 어마어마한 재산과 대비되게 겸손한 성격으로 많은 여자를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울렸지만 여자에 관심이 없던 제 주인을 저렇게 만든 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팔과 다리에 있는 상처며, 뜯긴 발톱이며 누가봐도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의 몰골이었는데 그런 심한 고문을 받을 만한 죄목은 독립운동, 독립운동 밖에 없었다. 하필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여자가 독립운동가라니. 언제나 자신의 주인만을 생각하는 사이토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전개가 아닐 수 없었다.
사이토가 가져온 찬물을 수건에 묻혀 그녀의 팔과 다리를 닦아주던 재현은 문득 그녀와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오며가며 안경점에서 말은 걸어보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지켜본 적은 있었다. 항상 싹싹한 직원. 그 날의 총성을 듣기 전에 재현이 연에게 느꼈던 감정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그날 그녀가 사사키에게 했던 말을 전부 들었던 그는 왠지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단순한 동정이라고 치부했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느꼈던 익숙한 감정은 동정이 아닌 사랑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확한 건, 그는 그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사토 마시타케... 미친놈... 미친놈..."
이번에는 사토 마시타케라는 이름을 부르짖으며 발작을 일으키는 연에 정신이 든 재현은 그녀가 불렀던 이름을 되내이기 시작했다. 사토 마시타케. 사토 마시타케라... 그는 그의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듣기론 손녀가 하나 있다던데 손녀 얘기가 나올때면 항상 화재를 바꿔 말하던 기억이 있다. 연이 꿈속에서도 저주할만 하다고 생각했다. 전에 연이 쏜 사사키와는 언제나 1 더하기 1은 2라는 공식처럼 항상 따라붙는 이름이었다. 친일파 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기로 소문난 이 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재현의 할아버지가 그에 버금가는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였다. 개성 최고의 부자는 맞았지만 여느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재현의 할아버지는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돈 방석 위에 올랐고, 결코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조선인을 도와줬으면 도와줬지 멸시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신의 손자에게도 조선말과 문화와 역사를 함께 가르쳤고 자신의 손자가 독립운동 같은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도 언제든지 후원해주던 그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함께 타던 차가 엔진 과열으로 폭파해 의도치 않은 사고로 돌아가신 후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모든 것들은 모두 재현의 몫이 되었다. 너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아라.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었다. 할아버지의 조언을 항상 새겨들었던 그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제 속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몰래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있던 것도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본인으로 컸던 그는 이 험한 세상의 단면을 누구보다 많이 목격해왔고 특히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가해오던 손찌검과 발길질은 만약 제가 자신의 할아버지의 손자가 아닌 평범한 조선인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일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기에 더 끔찍했다. 그저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이 연을 만나고 기름위에 불을 붙인 것 처럼 더욱 타올랐다. 그 때문에 우연, 그녀를 조금 더 알고 싶었다. 무엇을 얼마나 더 숨기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