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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신월이 뜨던 밤
작가 : 달리아
작품등록일 : 2017.11.13

신월이 뜨던 밤, 죽은 중전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시각, 서울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한 소월. 눈을 떠보니 내가 중전? 소월의 좌충우돌 중전 적응기.

 
누구…세요?
작성일 : 17-12-03 05:32     조회 : 234     추천 : 0     분량 : 7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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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타임 슬립이라니…. 조선이라니…!'

 

 나는 계속해서 얼굴을 가리는 거추장스러운 머리칼을 쓸어넘길 생각도 못한 채 실성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엔 상황만 파악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마음에 다시 절벽 아래를 둘러보았다.

 

 기울어가는 초가집, 으리으리한 기와집. 날렵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궁궐과 그 주변을 따라 둘러친 견고한 성벽. 아까와 한치의 변함도 없는 풍경이 날 산뜻하게 반겨주었다. 한산한 거리에는 그 흔한 자동차 하나 보이지 않는듯하다. 그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길거리를 샅샅이 뒤지던 내 눈에 무언가 바퀴 달린 물체가 굴러가는 것이 포착되었다. 뭐지? 자, 자동차인가? 제발 자동차여라! 자동차…가 아니라 소달구지? 그 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툭하고 놓아버렸다.

 

 "하하…. 붕붕이가 다 어딜 갔지…? 거짓말, 이건 다 거짓말이야! 내 머릿속의 지우개!"

 

 붕붕! 나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얼굴로 운전대 잡듯이 팔을 휙휙 돌려댔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덩달아 내 머릿속도 딱딱하게 굳어졌고.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해? 대책이 없다는 막막함에 눈물이 다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전하…. 되살아나신 까닭인지, 먼젓번 내리친 번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중전 마마의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 하옵니다. 일단 하산하시고, 의녀로 하여금 시료를 하게 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용케도 나와 남자의 사이에 흐르는 이 어색한 기류를 뚫고 다가온 비대한 몸집의 사내가 말했다. 그 말에 공중에 휘두르던 손을 멈춘 나는 사내를 휙 째려보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덕분에 막 나오려던 눈물이 쏙 하고 들어가 버렸다. 너 지금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니? 더 열받는 것은 남자의 태도였다. 눈앞의 남자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순전히 저 덩치 큰 사내의 말속에서 어딘가 낯익은 어감이 느껴지는 단어를 찾아냈기 때문이었다. 전하…? 그럼 이 미친놈, 아니 이분이 이 나라의 왕이란 뜻? 나는 헉 소리를 내며 충격에 빠졌다. 어쩐지 중전이니 뭐니 자연스럽게도 불러대더라니. 진작부터 눈치챘어야 하는 일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버린 듯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말조심할걸. 지금까지 내뱉었던 말을 떠올린 내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졌다. 이거 꼼짝없이 불경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다. 막 왕족 모욕죄 같은 걸로 모가지 댕강하는 거 아니야? 온갖 상상의 나래를 뻗치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흠. 그대의 말이 옳구나."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마치 제가 언제 경악에 물들기라도 했냐는 듯이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안 죽이는 건가? 슬쩍 왕이라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던 나는 순간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감탄성을 내뱉었다. 아 맞다! 나보고 중전이랬지? 그럼 됐네 뭐. 안심!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잠깐만. 지금 안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난 진짜 중전이 아닌데! 잠시 당황하던 나는 이내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된 이상, 진짜 중전을 제거하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떡하니 앉아 주지! 뭔가 사람으로서 할 짓은 아닌 것 같지만… 내가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시시각각 다채롭게도 변하는 내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는 갑자기 다가오더니 내 오른팔을 붙잡았다.

 

 "갑시다 중전."

 "이, 이거 놔… 아니 놓으십시오. 대체 어딜 가자고 하시는 것이옵니까?"

 

 나는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기어이 어깨너머로 보았던 사극 말투를 흉내 내어 물었다. 제법 잘 하잖아, 나! 방금 완전 중전 같았어! 나는 정녕 내 뛰어난 순발력과 재치에 놀라고 말았다. 남자는 친절하게도 곧장 내 궁금증을 해소해주었다.

 

 "의원에게 가는 것이오."

 

 의원이라는 말에 나는 잠자코 반항을 멈추었다. 일단 빠진 팔부터 끼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뭐…. 아까 팔이 아팠다는 말을 내심 신경 쓰고 있었는지, 다치지 않은 팔을 조심스레 이끄는 모습에 아주 쪼금은 감동하기도 했고. 어쨌든 나쁘게 대하려는 건 아닌 것 같으니, 따라가도 괜찮은 거겠지? 나는 잠자코 왕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

 "중전!"

 

 갑작스레 느껴진 현기증에 다리가 풀린 나는 휘청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어라? 방금까지만 해도 잘만 뛰어다녔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당최 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숨이 점점 차오르는 것이 몸 상태가 이상하다. 앞서가던 왕은 그런 내 모습에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다급히 달려온 그가 나를 부축해 들었다. 내 평생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왠지 부끄럽다.

 

 "…괜찮아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사극체로 말한다는 게. 창피한 탓인지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서 나와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내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연 등을 내밀었다.

 

 "업히시오."

 

 뭐시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어떻게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건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죄송하지만, 정중히 사양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 뭣이냐…왜 예로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사양이에요 사양! 나는 차마 겉으로는 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은 끝끝내 내민 등을 거둘 생각이 없는듯했다.

 

 "자. 어서 업히시오 중전."

 

 너무 재촉하지 마세요. 저도 힘들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서 주저하고 있는데, 문득 이 광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핫. 정말 부끄럽잖아? 정말 야속하게도, 이 남자는 여전히 굳건한 태세로 등을 내밀고 있었다. 다리도 안 아픈가, 미치겠네. 심지어 업히기 전에는 절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기에, 나는 쭈뼛쭈뼛 왕의 등으로 다가가야만 했다. 까짓것 업혀주지 뭐.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계속 이러고 쪽팔린 상태로 있느니 차라리 빨리 해치우는 편이 속이 편할 것 같았다. 왕의 목에 팔을 두르고 막 매달리려는데, 어떤 여자가 제 치마를 잡고선 황급히 뛰어와 그런 내 팔을 잡아챘다. 공교롭게도 여자가 잡은 팔은 빠진 팔이었고, 그 손아귀에는 만만치 않은 힘이 실려 있었기에 나는 낮게 신음하고 말았다.

 

 "아읏…."

 "이게 무슨 짓이오!"

 

 살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내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순간 아픈 것도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게는 내내 따스한 어투로 말해왔던 왕이었기에,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싸늘한 말투에 적응이 안 되는 탓이었다. 조심스럽게 내 팔을 풀어낸 그는 벌떡 일어나 차가운 눈으로 여자를 내려다봤다. 노여움으로 굳게 다물어진 입에서 무정한 말이 흘러나왔다.

 

 "인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소."

 

 인빈이라 불린 여자는 마치 왕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다는 듯이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저는 그저 부축을 하려…."

 

 뭐? 부축을 하려 했다고? 나는 되지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여자를 힘껏 째려보았다. 누가 봐도 고의인 것이 뻔한 상황이다.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내가 왕에게 업히자마자 잽싸게 달려와서는 아픈 팔을 잡아채지 않았던가. 나와 마찬가지로 여자를 강하게 노려보던 왕의 시선이 갑자기 어디론가 향했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겼는데, 그 자리에는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남자의 단단한 인상 뒤에 숨겨진 적의를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고아라는 미명 하에, 한 평생을 적의 어린 눈길 속에서 살아왔던 나였다. 그런 나는 짐짓 태연함을 가장한 저 눈빛 속의 숨겨진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짙은 혐오와 멸시. 대체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혹시 중전이라는 사람이랑 내가 닮아서? 중전이랑 사이가 많이 안 좋았나? 홀로 종알대고 있자니, 왕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걱정이 가득 들어찬 눈빛.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고는 흠칫했다.

 

 "괜찮소?"

 "네. 괜찮아요."

 "당장 내려가야겠소. 다시 업히시오."

 

 네. 그래야겠네요. 이번에는 군말 없이 그의 등에 업혔다. 그나저나 이 무신경한 남자는 오락가락하는 내 말투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태도에 적잖게 마음이 놓였다. 에라이.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 신경 쓰기도 귀찮은데 그냥 편하게 말하자. 그리고 그런 우리를 보며 분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대던 여자는, 갑자기 내 옆으로 끼어들며 짐짓 환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마마. 이제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이 인빈이 그동안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시나이까?"

 

 요 년 요거, 가식으로 똘똘 뭉친 것 보게나. 나는 사과조차 하지 않고 뻔뻔스레 걱정 운운하는 여자를 보다가 기가 찬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 예. 그거 정말 고마운 말이네요. 근데 죄송해서 어쩌죠. 제가 팔이 좀 아프네요. 그쪽이 잡은 이쪽 팔이요."

 "아… 송구하옵니다."

 

 송구 같은 소리 하네. 아니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내 말투가 의아한 것인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던 여자는 이내 왕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인정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표독함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제법 아름다운 편이었다. 여자는 애교가 듬뿍 묻어나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어허이, 그 거지 같은 애교 저리 안 치워?

 

 "전하. 날이 춥사옵니다. 혹여 신첩이 부축하려던 것이 마음에 걸리셨다면, 신첩이 타고 온 가마를…."

 "필요 없으니 그만 비키시오."

 "하오나 전하…."

 

 왕은 더 이상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나를 업고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까득. 어디선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킥킥. 나는 인빈이라는 여자만 볼 수 있게끔, 고개를 살짝 틀어 승리의 미소를 보내 주었다. 찡긋. 물론 윙크도 잊지 않았고. 내 의뭉스러운 태도에 여자의 얼굴에도 황당한 기색이 떠올랐다. 곧 여자의 만면에 독살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오우 살벌한걸. 눈빛으로 사람도 죽일 기세야. 나는 구태여 그 눈빛에 못 이기는 척 왕의 등에 폭하고 고개를 묻었다. 내심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인빈이라 불리는 것으로 보아하니 후궁인 모양인데, 그런 여자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역시 후궁보다는 중전이란 건가. 휴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신경전이 끝나고 나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그것보다 방금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몰랐는데. 이 남자의 등은 생각보다 포근하고… 아늑하고, 무엇보다도 넓었다.

 

 '뭐… 승차감은 그럭저럭 괜찮네.'

 

 모든 것이 아리송한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얼굴에 와닿는 까끌까끌한 옷감의 감촉까지도 기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연유인지, 남자는 나를 업고 산 길을 내려가는 내내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괜찮다고. 이제 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굉장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나는 대답도 안 하는데, 혼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 조금 또라이 같기는 했지만… 어쨌든 듣기 좋으니까.

 

 '잠깐쯤은 이러고 있어도 괜찮겠지.'

 

 나는 희게 웃으며 그의 등에 편히 기대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왕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불편하지는 않소?"

 "아…네. 뭐, 그럭저럭…."

 

 쑥스러운듯한 내 말에 남자는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왠지 모를 청량감마저 느껴지는 그 소리에 나는 괜스레 툴툴거렸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부끄러워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웃었소."

 "네에?"

 

 우와… 느끼한 말을 그렇게 쉽게! 볼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홧홧한 느낌으로 미루어 보건대, 틀림없이 내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을 것이다. 좋다기보다는 그냥 낯부끄러워 그런 것에 가까웠다. 아하하. 쥐구멍이 어디 있나. 멋쩍게 웃던 나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 그것보다…! 원래 이렇게 아무 여자나 잘 업어주시나 봐요?"

 

 이런 젠장…. 나는 왜 하필 해도 이런 말을 했을까. 시간을 10초만이라도, 아니 단 5초만이라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과거로 돌아가 얼른 내 입을 틀어막아 줬을 텐데. 나는 무심코 내뱉은 말을 격렬하게 후회했다. 왜 이런 순간엔 타임 슬립이 발동하지 않는 거지? 바로 그 순간, 피식하고 웃은 왕의 입에서 오늘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나가 아니오. 그대는 나의 부인이지 않소."

 

 부인이라는 말에 나는 흡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거 봐라?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와 버리네. 아, 안 되겠다.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어떤 무서운 말이 또 나올지 몰라. 중전이니 조선이니 지금까지 나온 것만 해도, 대한민국의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것들이다. 하물며 누가 또 알겠는가? 이러다가 덜컥 내 아버지가 영의정이라는 말이 튀어나올지도. 나는 짐짓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숨죽여 키득거렸다.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비장의 무기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파묻고 자는 척을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도 나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왕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부인, 자는 것이오?"

 

 부인이라는 말. 솔직히 처음 들었을 때는 체감이 잘 안됐었는데, 두 번 째로 들으니까 진짜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숨소리를 연기해야만 했다.

 

 "코오…."

 '그래. 나는 잔다. 그니까 제발 부인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여태 남자친구 한 번 안 사귀어 본 꽃다운 처녀한테 부인은 뭔 얼어 죽을 놈의 부인이야!'

 

 무사히 속아 넘어간 것인지, 왕은 한동안 잠잠했다. 문득 그가 궁금해진 나는 실눈만 살짝 뜨고서는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왠지 그 미소가 서글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애달픈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대는 그때보다도 더 가벼워졌구려."

 

 엄…칭찬이잖아? 뭘 이런 말을 하는데 그렇게 분위기를 잡고 그래? 괜히 어색하게 말이야. 그의 말대로라면, 진짜 중전은 나보다 무거웠던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말인데, 나도 나름 여자라서 그런 건지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안에 있는 살을 앙하고 깨물었다. 음. 그나저나 진짜 중전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언제까지 속일 수는 없을 텐데. 나는 자못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을 했다. 아까는 홧김에 제거를 하느니 어쩌니 했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사람의 생명이 장난도 아니고. 기회를 봐서 도망쳐야 하나? 근데 여기 조선이라며, 나 갈 곳도 없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는 진짜로 잠에 들어버렸나 보다.

 

 눈을 떠보니 낯선 방 안에 누워있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꽤나 맹랑해 보이는 얼굴의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마마.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얘는 또 누구지?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일이 따지고 들기에는 몸이 너무나도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러지, 정신이 반쯤 빠진 것 같아. 졸리다…. 나는 잠결에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이 덜 깬 부스스한 목소리로 거울을 찾았다. 자고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거울부터 찾는 것, 그것은 내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거울…."

 "면경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내가 작게 긍정을 표하자, 그 아이는 얼른 뛰어가 수수한 모양의 손거울을 가져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잠이 확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거울에 비춘 내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홑꺼풀인데도 크고 동그란 눈이며, 마르다 못해 움푹 들어간 볼, 낮지 않은 코와 가늘게 말려 올라간 붉은 입술, 그리고 치렁치렁한 긴 생머리까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 저기…. 누구…세요?

 

 

 
작가의 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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