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2016년 12월 31일, 21:47
35. 외통수(Checkmate) - ②
로텐더 홀은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이루고 있는 수백 명의 남자들로 가득했다. 조원 편성 일을 맡았던 하정훈 경위가 학현에게 와 보고했다.
“남 보좌관님, 편성 완료됐습니다. 진입 조 총원 487명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하 경위님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여기서 의원들을 감시하고 계시겠습니까?”
“아니요. 아무래도 제가 주력을 이끌고 선두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 여긴 정 경사가 제 부하 30명 정도를 데리고 지키고 있을 겁니다. 능력은 확실한 친구니 염려마세요.”
“그거 잘됐군요. 하 경위님처럼 이런 일에 경험이 많으신 분이 지휘를 해주면 저야 안심이죠.”
둘의 표정은 이미 결과가 나온 것처럼 밝았다. 학현은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지금이 9시 38분이니까, 40분에 출발하는 걸로 하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 경위는 대열을 이루며 서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자, 여러분! 2분 후에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마지막 점검을 해주세요!”
하 경위의 말에 로텐더 홀의 분위기는 긴장감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9시 40분 정각. 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하 경위가 옆의 학현과 한차례 시선을 교환한 뒤 사람들에게 구령을 내렸다.
“전원, 회관으로 출발!”
“와아!”
사기가 워낙 충천해 있었던 탓에 사람들 중에는 기세 좋게 함성을 외치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무기를 손에 들고, 선두에 선 학현과 하 경위, 전경들, 그리고 경위들을 따라 지하통로로 향했다. 동원도 승희를 데리고 대열 끝에서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지하통로 중간의 갈림길.
왼쪽으로 가면 국회도서관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의원회관이었다. 하지만 의원회관 쪽은 여전히 조명이 다 나가 있는 상태였다.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니 검붉은 피가 고여 울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바닥이 드러났다. 게다가 안 그래도 지나기 꺼림칙한 곳이었는데, 이젠 아예 멀리서 물 흐르는 것 같은 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세등등할 수가 없었던 사람들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학현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티를 냈다간 자칫 사람들이 동요해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튈 수도 있었기에 애써 태연한 척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학현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지고 온 손전등을 모두 켜세요!”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불이다! 불이 들어왔어!”
‘뭐?’
학현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정말로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마치 활주로에 불이 들어오듯 조명들이 연달아 켜지고 있었다. 피의 늪 같던 바닥도 점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설마 ……?’
그러면서 학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꽃님이었다. 꽃님이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학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꽃님이 회관으로 가는 길을 터준 거란 생각에 모두들 단숨에 사기가 치솟았다.
“여러분, 지금입니다! 갑시다!”
“와아!”
회관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몇 배로 빨라졌다. 그 바람에 승희를 부축하며 행렬을 따라가던 동원은 자연 뒤쳐지고 말았다. 동원은 승희를 업고 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승희가 입고 있던 원피스의 치마 길이가 별로 길지가 않았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앞서가던 학현은 문득 뒤에서 동원과 승희가 쳐져서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속으로는 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칫 지금 그랬다간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될 수도 있을 터.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모른 척하고 계속 앞으로 향했다.
드디어 선두의 학현과 하 경위가 회관 방향으로 난 지하통로의 끝 부분에 도착했다. 계단 아래쪽에 커다란 욕조처럼 움푹 들어간 바닥의 공간엔 물이 차 있고 천장의 스프링클러들에선 계속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수위는 기껏해야 무릎 위를 간신히 넘길 정도였다. 하 경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학현에게 말했다.
“설마 이것만 믿고 저렇게 버티고 있는 건 아니겠죠?”
학현도 설마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 편으론 정말 이게 그들 자신감의 원천인가 하는 생각에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만약 그렇다면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 생각했다. 학현은 돌아서서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여러분! 녀석들은 겨우 이 정도 갖고 우리가 물러 설 줄 알았나 봅니다! 얼른 가서 싹 쓸어버립시다!”
“하하하! 저 새끼들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러게.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어떻게 돼 버렸나봐.”
사람들은 저마다 그렇게 한마디씩 하며 첨벙첨벙 앞으로 나아갔다. 스프링클러에서 얼음장 같은 물줄기들이 소나기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이미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던 그들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마치 비오는 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며 뛰놀고 있는 소년들처럼 잔뜩 신이 난 표정이었다. 하 경위는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었고, 학현은 뒤에서 이를 독려했다.
선두의 하 경위는 어느 새 비상계단을 올라가 회관 지하 1층의 비상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안쪽에서도 소화전 호수로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던 탓에, 문아래 틈으로 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각 층의 비상문들도 마찬가지 상황이어서, 비상계단 전체가 완전히 물바다였다. 하 경위는 불쑥 짜증이 났다.
“새끼들, 귀찮게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죽으려면 곱게 죽지.”
그러면서 미리 챙겨온 열쇠를 비상문의 열쇠구멍에 꽂고 돌렸다. 그러나 이리저리 힘을 줘 돌려봐도 뭔가에 걸린 듯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역시……인가? 할 수 없지. 이봐! 해머랑 연장 가져와!”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경들이 곧바로 해머와 각종 연장들을 들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일단 해머로 손잡이부터 부숴봐.”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선두에서 문을 부수는 작업에 막 착수하려고 할 때, 후방에서도 마침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와 있었다. 학현도 막 계단 아래로 내려간 참이었다.
그때 동원과 승희가 계단 쪽에 도착했다. 학현과 동원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그리고 우연하게도 초점을 잃은 승희의 시선도 학현이 있는 방향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학현은 반가운 마음에 승희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그 때였다. 학현이 순간 요란하게 몸서리를 치는가 싶더니, 곧바로 등 뒤에 칼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심하게 경직되면서 일그러졌다. 학현 뿐만이 아니었다.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던 모든 이들의 몸이 갑자기 바싹 타들어간 고목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져버렸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던 말소리와 첨벙거리던 물소리로 소란스럽던 공간이 일순간에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동원은 얼떨떨했다. 그 광경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승희 또한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잔뜩 불안해했다. 그 와중에 아직 계단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십여 명의 사람들 중 한명이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머지, 한발 앞서 내려간 사람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이봐? 갑자기 왜 그 ……!”
그러나 그의 손이 앞 사람의 몸에 닿자마자, 그 또한 아주 잠깐 부르르 몸서리를 치더니 이내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져버렸다. 그 순간 동원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섬광처럼 스쳤다.
‘설마, 감전?’
그때 동원과 학현의 사이로 꽃님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꽃님은 계단 중간에서 학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학현의 눈빛이 당혹감과 분노로 어지럽게 흔들렸다.
지난 새벽 로텐더홀에서 다른 이의 시체를 가져와 사람들 앞에 내밀며 승호를 죽였던 척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회의장 전광판에 승호가 죽은 것으로 표시되었던 일이 뇌리에 스쳤다.
‘알면서 일부러? …… 빌어먹을 꼬맹이 년……!’
그러고는 이내 감전의 충격을 더 이겨내지 못한 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첨벙!
그렇게 한번 물에 처박힌 학현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연달아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아무렇게나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회관 진입구의 공간은 마치 물에 젖은 수백의 거적때기들이 겹겹이 쌓여버린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 차 버렸다. 끄트머리에 있었던 덕에 운 좋게 살아남게 된 몇 안 되던 사람들은 그제야 기겁하며 모조리 본청 쪽으로 다시 달아나버렸다.
동원은 다리가 힘없이 꺾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텅 빈 눈동자가 허공을 어지럽게 더듬었다. 조금 전 자신이 본회의장에서 사람들에게 회관으로 쳐들어가자며 선동하던 모습이 뇌리를 조여 왔다. 숨이 턱 막혔다.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쥔 것 같았다. 가슴팍을 막 쥐어뜯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방금 전 눈앞에서 한 순간에 몰살당한 사람들의 얼굴이 한 명 한 명 다시 어른거리는 듯했다. 아찔했다.
“으으으으, 으아아아아아!”
당황한 승희는 옆에서 동원을 흔들며 불렀다. 하지만 동원의 시선은 오히려 앞에 서 있는 꽃님에게로 향했다. 꽃님을 쏘아보는 동원의 눈빛이 원망과 분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꽃님은 그런 동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동원은 울컥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회관 쪽에서 웬 젊은 여자가 표독스럽게 웃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봐! 거기 아직 누가 살아 있어? 깔깔깔!…….”
동원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혜? …… 설마, 김지혜야?”
“동원? 강동원? 거기 있는 거야? 아하하, 마침 잘 됐네!”
동원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김지혜! 이거 니가 한 짓이야?”
그러자 지혜가 잔뜩 조롱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럼? 나 말고 이런 걸 할 수 있는 머리가 되는 사람이 또 있어?”
그러면서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이렇게 한순간에 참혹하게 죽여 놓고도 저렇게 웃을 수가 있다니, 동원의 머리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너 미쳤어? 니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 줄 알기나 해?”
그러나 지혜는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흥, 웃기시네. 너야 말로 지금 당장 니가 뭘 해야 되는 진 알고 있냐?”
“뭐?”
동원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해야 할 일이라니……. 동원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지혜는 대뜸 표독스럽게 쏘아붙이며 말했다.
“병신 새끼. 이제 열 한명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뻔하잖아? 이래도 모르겠어?”
지혜의 말에 동원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설마 승호 형을? …… 아냐, 그럴 리 없어! 쟨 승호 형이 살아 있단 걸 모르잖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승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선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지혜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원에게 끝까지 빈정거렸다.
“처리가 끝나면 방송으로 알려주는 거나 잊지 마. 우리가 또 다른 일을 벌이길 원치 않는다면 말이야. 알았어? 깔깔깔! …….”
그러고는 도로 비상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소리에 동원은 다시 엉겁결에 다리가 풀려버리면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꽃님의 눈길이 수면 위에 엎어져 있는 학현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천천히 동원에게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학현의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가 나와 꽃님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며 동원의 앞으로 둥둥 떠갔다.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든 동원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꽃님을 쳐다봤다. 그러나 꽃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잠시 동원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가싶더니 이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동원은 꽃님이 건네 준 열쇠를 바라봤다. 그것은 한참 전에 동원이 학현에게 건넸던 대표실 내 화장실의 열쇠였다.
동원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도대체 꽃님이 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 것인지, 설마 꽃님이가 지혜를 돕기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왜 그러는 것인지,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머릿속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동원은 이후로도 한참을 그 스산한 공간에서 승희와 함께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