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
 1  2  3  4  5  6  >>
 
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백제의 한 더보기
이 작품 더보기 첫회보기

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2-02 13:03     조회 : 274     추천 : 0     분량 : 10853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전북 부안의 개암사는 무왕 때의 왕사였던 묘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묘련대사는 634년 능가산의 웅장한 지세를 품은 우금바위 아래 절을 짓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묘련대사의 수제자인 도침은 스승이 열반한 뒤에도 이 절을 떠나지 않고 수행을 해왔다. 도침은 오늘도 웅장한 우금바위의 천연석굴에 들어앉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의자가 웅진성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무는 즉시 개암사로 향했다. 평소 존경해 의지하고 있던 도침과 국난극복에 대한 의논을 하기 위함이었다.

  “대사께서는 어디 계시냐?”

  “우금암에 가셨당께요.”

  “역시 그러실 줄 알았다.”

  동자는 정무를 보며 싱글벙글했다.

  “옛다.”

  엿을 받아든 동자는 게걸스럽게 빨아먹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정무는 고개를 높이 들어 우금바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른 듯 두 개의 바위가 활짝 열려있었다. ‘바위에 지기가 가득 차 있구나.’ 정무는 두 개의 바위옹두라지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활짝 열린 대문처럼 나란히 선 바위였다. ‘한참을 걸어야겠군.’ 정무는 살걸음으로 달려가 바위굴 입구에 섰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묘련대사는 평소 도침대사에게 바깥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수행에 정진해라. 다만 백제불교가 위험에 처할 때는 앞장서 구하라. 백제는 삼국 중 불교에 대한 자부심이 가장 강한 나라니라, 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호응해 주실 거다.‘

  “대사, 어찌 그리 한가하십니까?”

  “허허, 나라가 망하기라도 했나. 웬 호들갑이야.”

  “그렇습니다. 나라가 망하게 생겼습니다.”

  “바위에 지기가 가득 찬 것을 보고 자네가 올 줄 알았네.”

  정무는 구마노리성(주석1)의 달솔 여자진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여자진은 웅진성으로 들어가는 의자일행을 직접보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와 두시원악(주석2)의 정무에게 서신을 보냈다. 정무는 두시원악의 토착세력으로 당시 조정에 출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세력과 실력으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정무의 아버지는 무왕시절부터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고 스스로 지방의 백성을 살피는 숨은 충신이었다. 정무 역시 그런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깊었다. 정무는 조정에 입조한 좌평시절 신하들 간의 파벌싸움에 신물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두시원악으로 낙향한 사람이다. 하지만 정무는 현직에서 녹을 받는 좌평 이상으로 나랏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여자진은 이런 정무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고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럼으로 필체만 봐도 서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진은 정무에게 어라하는 사비를 버리고 웅진성으로 파천했으며 사비는 연합군에 함락 당했습니다. 지금 사비는 아비규환입니.다. 놈들의 약탈이 악마들의 그것과 같습니다. 여자들을 보기만 하면 강간을 일삼는다 합니다. 놈들에게 쫓겨 강물로 뛰어드는 여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젊은 남자만 보이면 모기를 잡듯 때려죽이고 아이들이 울면 부라질로 던져버립니다. 놈들에게 항복을 한들 우리 귀족들의 자리는 보존되기 어렵습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죽기는 매 한가지인데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것이 명예로울 것입니다, 라고 서신을 보냈다.

  “대사, 솔직히 백제가 망하면 당나라 놈들의 삼엄한 감시를 받을 텐데 얼마나 우리를 무시하고 깔보겠습니까. 백제의 귀족으로서 그런 대우를 받을 수야 없지요. 우리는 흥망계절의 정신을 지녀야 합니다. 설사 백제가 망해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말입니다.”

  “자네는 자네의 입장, 귀족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는군. 평소의 자네답지 않아. 흥망계절의 정신은 백성들보다는 기득권을 잃지 않겠다는 귀족들의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그래서는 안 되지. 백성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겠다고? 이런 염병할 놈들!”

  도침은 정무와 귀족들에게 거침없이 욕을 했다. 타고난 성정이 호방한 도침으로서 못할 욕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젊은 시절 묘련대사에게 적지 않은 꾸지람을 들었지만 늘 반성하며 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도침이었다.

  “대, 대사.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 하· 하. 아네, 알아. 내 자네의 충성심을 왜 모르겠나. 또한 자네의 입장도 이해하네. 팔은 안쪽으로 굽는 법. 인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도침은 실제로 정무의 충성심을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입장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성정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백성들이 흥망계절의 정신에 동조한다면 그 이유는 자기의 가족과 친지들이 적들에게 잔인한 학대를 당하고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겨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도침은 이러한 이유로 백제인들이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봉기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금바위에 지기가 가득 찼던 게로구나.’ 지기란 말 그대로 땅의 기운, 즉 백성들의 기운이다. 바위에 지기가 가득 찼다는 것은 머지않아 백성들의 봉기를 예고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나도 백제의 불교를 위해 일어서야 할 때다. 그것은 스승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대사께서 앞장서신다면 군사 모으는 일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일이 급박하니 서둘러 주십시오.”

  “알겠네. 자네는 두시원악으로 가서 군사를 모아 보시게. 조만간 연락을 할 테니 그 때 군사들을 합치세.”

 

  두시원악으로 돌아온 정무는 자신의 경망스런 생각과 말에 대한 반성을 거듭했다. ‘어쩌자고 대사께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조상 대대로 나라와 백성들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아온 귀족들이었다. 그런 귀족들이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사분오열 흩어져 자신의 살 길만을 찾았다. 또한 남아 있는 귀족들은 흥망계절의 정신이니 뭐니 하며 백성을 이용해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정무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괴롭고 괴로웠다. 더구나 도침도 자신과 같은 백제의 지배층이라 생각하고 귀족의 입장에서 말을 뱉었다. 하지만 도침은 따끔하게 정무를 혼냈다. ‘꼼짝없이 소인배로 전락됐구나.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는 일.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사람답게 살자.’ 정무는 자세를 꼿꼿이 하고 여자진에게 편지를 썼다.

  - 여자진 장군, 장군의 편지를 받고 도침대사를 찾아갔네. 대사께서는 서둘러 군사를 모아야겠다고 말씀하셨네. 나 역시 이곳 두시원악에서 군사를 모아 대사의 군대와 합세하기로 했네. 자네도 성 안팎의 백성들을 모아 도침대사에게로 가게. 우리의 군사들이 모아지면 웅진성의 어라하를 알현하고 연합군 놈들을 치도록 하세. 그리고 흥망계절의 정신은 귀족으로부터가 아니라 백성들로부터 일어나야 하네.

  웅진성 밖 상황이 이랬다. 웅진성으로 집결하라는 의자의 서신은 지방의 모든 귀족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의자는 자신의 서신이 백제 전역으로 빠르게 전달되기를 바랐지만 도성을 빼앗기고 도망친 왕의 명령은 썩은 포승줄에 불과했다. 전달이 된다 해도 사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귀족들에게까지 가려면 어느 곳은 열흘, 어느 곳은 한 달 이상이 걸릴 수도 있었다. 사비와 가까이 있다는 정무와 여자진마저 의자의 서신을 받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의자의 서신을 받은 뜻있는 귀족들은 군대를 모아 의자가 있는 웅진성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하루 이틀 만에 만족할만한 군사들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웅진성의 의자는 하루 이틀이 일 년 이년 같은데 귀족들은 그 같은 사실을 실감하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군사들을 모은다 해도 사비를 중심으로 깔려있는 연합군을 무찌르고 가야만 하는 지방의 귀족들도 있었다.

  정무의 편지를 받은 여자진은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구마노리성은 웅진성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다. 따라서 웅진성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 받는다. 정보의 진위가 불분명하지만 그나마 일관성이 있었다.

  의자가 웅진성으로 피신한지 3일째 되던 날 아침, 세작의 보고에 따르면 웅진성내 기류가 이상했다. ‘예식이 정말로 어라하를 배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라도 웅진성으로 들어가 어라하를 보호해야 하는 것 아닌가. 두시원악의 정무장군은 군사를 모아 도침대사에게 가라고 했다. 하기야 내가 가진 몇 백의 군사로 예식의 몇 천 군사를 어찌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이 살벌한 정국에서 자칫 잘못 판단하면 돌이킬 수가 없다. 정무장군 말씀대로 일단 세를 늘려야 웅진성으로 가든 도침대사에게로 가든 할 수 있다.’

 

  정무는 여자진에게 편지를 보내자마자 두시원악을 중심으로 한 인근의 사람들을 상당수 끌어 모았다. 단 반나절 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만큼 두시원악에서 정무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정무는 노약자와 어린아이를 뺀 남녀 모든 사람들을 군대로 편입시켰다. 군대는 오합지졸이었지만 장정들만 이천 명이 넘었다. 여성들은 후방에서 보급품과 부상병치료, 밥 짓는 일 등을 담당했다. 이들을 먹일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산과 골이 많은 지방이라 지난가을에 파종한 보리도 아직 영글지 않았다. 정무는 자신의 곡간을 모두 열었다. 그리고 부족한 식량은 산과 들에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채취해 죽을 쑤도록 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보리가 영글고 콩과 벼들을 수확할 수 있다. 일단 죽으로나마 견디어 보도록 하자.”

  군사들은 정무의 보살핌에 감읍했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이 없어 보릿고개를 넘기고 있는데 그나마 군대에 편입하니 먹을 것은 생겼기 때문이다. 정무는 그럭저럭 군대라는 체제를 정비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기가 문제였다. 갑자기 철을 두드려 무기를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백성들은 호미며 괭이 등 집안에 있는 농기구와 각종 쇠붙이들을 깡그리 모아 대장간으로 보냈다. 낫은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음으로 숫돌에 예리하게 갈아 옆구리에 칼처럼 차고 다녔다. 무기가 없어 낫으로 칼과 창을 상대한다니. 누가 보면 콧방귀를 뀌며 나자빠질 행동을 정무의 군사들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무를 둘러싼 두시원악의 백성들은 의기와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바람한 점 없는 한여름 밤, 장정들은 대장간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무기를 만들었다. 풀무질과 담금질을 하는 장정들의 뱃가죽에서 짜디짠 소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정무는 이른 저녁을 먹고 대장간으로 가 대장장이를 찾았다.

  “진전은 좀 있는가?”

  “하루 종일 만들었지만 칼 백 자루도 못 만들었습니다요. 쇠붙이도 없고요.”

  “알고 있네. 하지만 하는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주게.”

  대장장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모루 위에 놓인 시뻘건 쇠붙이를 두들겼다. 정무가 대장장이의 어깨를 다독이다 말고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장군, 여자진 장군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정무는 다급히 봉투를 열었다. 서신을 읽는 정무의 안색이 붉게 타들어갔다.

  - 존경하는 좌평어른, 어르신의 서신을 보고 급하게 군사들을 모으고는 있습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어라하가 계신 웅진성의 기류가 이상합니다. 웅진방령 예식이 어라하를 배신할 것이라는 세작의 보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군사를 모아 개암사의 도침대사에게로 가라 하셨지만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서둘러 웅진성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어라하가 급하지 않습니까.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웅진성에 관한 세작들의 보고가 잇따르자 여자진의 마음이 급해졌다. 예식의 배신이 확실한 쪽으로 마음이 굳혀졌기 때문이다. 배신이 아니라면 정무의 말대로 군사를 모아 일단 도침에게 가면 될 일이다.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정무와 도침이 군사를 모은다면 대규모 군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예식이 배신을 하고 의자를 소정방에게 잡아 바친다면 모든 일은 허사로 돌아간다. 상황이 이러한데 정무의 말을 따라 도침에게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여자진은 정무가 도착하자마자 웅진성으로 함께 들어가 예식을 칠 작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당장 군사들을 집결시켜라.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들고 나와라. 연합군 놈들의 무기를 빼앗아 웅진성의 어라하께 간다.”

  두시원악의 정무는 여자진의 서신을 받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하지만 싸울 무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정무의 명에 따라 백성들이 들고 온 무기는 실로 가관이었다. 낫과 죽창은 그나마 쓸 만했다. 백성들이 주로 가지고온 무기는 몽둥이였다.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잡는다, 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정무는 실한 장정 팔백 여명을 이끌고 야음을 탄 기습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몽둥이로 때려죽일 수는 없으나 반병신으로 만들어 무기만 빼앗아 오면 그만이었다. 한 사람당 한 자루의 칼과 창만 거두어 온다 해도 군사들이 어느 정도 무장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습한 장마철 한 여름에 가죽으로 만든 갑옷은 필요가 없었다. 결사대로 구성된 군대인 이상 기동성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몸이 빨라야할 필요도 있었다.

 

  칠흑처럼 깜깜한 밤이었다. 정무의 군사들은 칠악산(주석3)의 성으로 집결했다. 백제인의 얼과 혼이 어린 칠악산, 백제는 오랜 세월 이 칠악산을 진산으로 여겨 성스러운 제천의식을 행했다. 무왕 때 축조된 칠악산의 성은 산이 중첩된 험지에 위치하고 있어 적을 방어하기에 무척 유리했고 유사 시 후퇴하여 숨어있기에도 적합했다. 따라서 정무는 장차 칠악산성을 거점으로 연합군을 기습하고 불리하면 후퇴하여 방어전을 치를 계획이었다. 정무의 군대는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칠악산성에서 나와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사비를 향해 얼마나 전진했을까. 벌판 한 가운데 가물가물한 횃불들이 보였다.

  “놈들의 진영이 틀림없다. 지금부터 낮은 포복으로 기어간다. 신호를 하면 파도처럼 일어나 놈들을 때려 부순다. 다시 신호를 하면 냇가를 낀 산자락을 따라 일제히 칠악산으로 후퇴한다.”

  정무의 작전은 단순했다. 야음을 틈타 기습을 한 뒤 신속히 도망치는 일종의 유격전이었다. 팔백여명의 장정들은 낮게 엎드려 뱀처럼 살금살금 기어갔다. 칠월의 들풀들은 억세게 자라 장정들의 몸을 완전히 엄폐시켜 주었다. 비가 오려는지 바람까지 적당히 불어주어 장정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흡수해 버렸다. 장정들의 선두가 동서로 흐르는 작은 냇가에 다다르자 수상한 횃불들이 냇물에 어려 일렁였다. 정무의 명령을 받은 한 장정이 벌레울음소리를 냈다. 선두는 일단 멈추라는 신호였다. 선두가 멈추자 정무는 자그마한 소리로 명령을 전달했다.

  “벌레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일어나 공격하라. 북을 치면 공격을 멈추고 즉시 후퇴한다.”

  장정들은 정무의 명령이 뒷줄까지 전달되기를 기다렸다. 명령이 다 전달되면 맨 뒷줄에서 벌레울음 소리를 내야했다. 그 소리를 기다리는 동안 장정들의 호흡은 거칠어만 갔다. 장정들이 뱉어내는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던지 들판의 곤충들이 사방으로 튀어 도망을 다녔다. 장정들은 벌레소리 명령을 기다리며 온몸의 근육을 잔뜩 수축시켰다. 이제 벌레소리만 들리면 메뚜기 떼처럼 튀어 나갈 것이다. 그 순간, 끓어오르는 심장에 얼음냉수를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앗, 따거!”

  기다리던 벌레소리가 아니다. 뜻밖의 소리는 분명 누군가에게 변고가 있다는 신호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 소리로 인해 적에게 노출될 수도 있다. 장정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 밖의 소리는 정무의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무언가에 물린 모양이군. 어찌해야 하나. 어차피 들킨 것 이대로 밀어붙여야 하나 아니면 잠시 숨을 죽이고 동태를 살펴야 하나.’ 찰나의 순간에 두 가지 생각이 정무의 머릿속에서 삐죽삐죽 날을 세웠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움직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누, 누구냐!”

  수상한 횃불들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횃불은 정무의 판단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일제히 공격한다!”

  이제 풀벌레 소리 명령 따위는 의미가 없어졌다. 정무의 명령에 장정들은 거대한 파도처럼 일어나 점벙점벙 냇물을 건넜다. 검은 하늘로 튀어 오르는 냇물이 비를 부르는 마중물이 되었을까. 때마침 검은 장대비가 벌판을 후벼 파며 쏟아져 내렸다. 축축한 횃불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었다. 정무의 기습작전이 순조롭지 않을 듯 했다. 하지만 두시원악의 장정들은 그야말로 이판사판 적을 향해 돌진했다. 몽둥이와 칼의 싸움에서 몽둥이가 패할 것은 자명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몽둥이가 칼을 제압하고 있었다. 몽둥이를 칼로 막고 칼이 몽둥이를 막는 과정에서 젖은 몽둥이가 칼을 먹어버리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정무의 입장에서는 천우신조가 따로 없었다. 힘이 센 두시원악의 장정들은 몽둥이에 박힌 칼을 그대로 회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칼을 뺏긴 적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갑옷이 비에 젖어 무거워진 적들은 버둥거리며 자신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기세등등해진 장정들은 적진 깊숙이 들어가 적들을 베고 또 베어댔다.

  “그만, 그만 들어가라. 후퇴한다!”

  다급해진 정무가 소리소리 지르며 북을 쳤다. 하지만 처음 보는 피 맛에 넋이 나간 장정들은 야수의 얼굴로 돌변해 전진을 계속했다. 도무지 명령이 먹히지 않는 상황, 힘과 용기는 있지만 조직생활을 제대로 해보지 않은 군대의 약점이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 들어갔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한다.’ 보다 못한 정무는 미쳐 날뛰는 장정들을 붙잡고 뺨을 때리며 후퇴를 명령했다.

  “내 말 안 들리나. 후퇴, 후퇴를 하란 말이다. 정신 차려!”

  장정들은 뺨을 때리는 정무에게도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자신의 장수를 적으로 오인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정무는 장정들의 몽둥이와 칼을 피해 잠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십여 분이 흐르자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적진 여기저기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튀어 나왔던 것이다. 아무리 힘과 기세가 좋은 장정들이라고는 하나 엄청난 숫자의 군사들을 어찌 당해낸단 말인가. 이때, 적진에서 묵직한 북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장정들과 엉켜 싸우던 적들이 썰물처럼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장정들은 이상한 낌새를 차리고 하나 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갑옷 입은 놈들이 안 보인다. 여기 적들은 없다. 우리뿐이다. 자, 장군님. 어디 계세요?”

  장정들은 그제서 정무를 찾기 시작했다. 정무의 명령이 있어야 다음 행동을 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군. 그나저나 적들이 일제히 물러났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정무는 고수에게 북을 쳐 후퇴를 명령했다.

  “일제히 칠악산으로 후퇴한다!”

  정무의 명령을 알아들은 장정들이 빼앗은 무기를 주섬주섬 챙겨 달아날 채비를 했다. 바로 그 순간 적진에서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목구멍에 면도날을 박아놓고 지르는 소리 같았다.

  “저놈들을 모조리 잡아서 내장을 발라버려라. 감히 우리 신라군을 기습하다니. 한줌도 안 되는 놈들이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무조건 죽여라!”

  장정들이 친 적은 신라군이었다. 명령을 내리는 장군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목소리로 보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임에 틀림없었다. 내장을 발라 버리라, 는 적장의 명령에 장정들의 기세는 마른 들풀처럼 꺾였다. 이대로라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두시원악의 장정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정무의 다음 명령만을 기다렸다. ‘완전히 포위를 당하면 꼼짝없이 덫에 걸린 짐승신세가 된다. 그전에 도망쳐야 한다.’ 정무는 촘촘한 눈빛으로 도망칠 구멍을 찾았다. 그러는 동안 신라의 군사들은 점점 더 불어났다.

  ‘빈틈을 찾아 정공법을 써야한다. 포위망이 뚫리기만 하면 어둠에 묻힌 우리를 쉽게 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놈들은 젖은 갑옷을 입고 있다.’ 생각이 정리된 정무는 북을 쳐 장정들을 진정시켰다.

  “군관들은 일제히 나의 뒤로 서고 나머지는 군관들의 뒤에 서라. 나와 군관들이 포위망을 뚫을 테니 포위망이 뚫리면 각자 흩어져 무조건 뛰어라. 탈취한 병장기는 반드시 챙기고 모두들 살아서 돌아오라. 자, 지금부터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나를 따르라!”

  정무는 명령을 마치자마자 포위한 신라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 뒤를 군관 백여 명이 따르며 칼과 창을 휘둘렀다. 정무와 군관들의 칼에 신라 군사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굴었다.

  “포위망을 더욱 두텁게 하라. 기병들은 포위망 뒤로 서서 도망치는 놈들을 찢어 죽여라!”

  면도날 목소리가 칠흑 같은 밤하늘을 송곳처럼 찔러댔다. 하지만 신라의 정예 군관들에게 포위를 맡기지 않은 면도날 목소리의 실수였다. 면도날 목소리는 갑옷도, 변변한 무기도 없이 싸움에 임하고 있는 두시원악의 장정들을 오합지졸로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무와 그의 군관들이 병사들로만 이루어진 포위망을 뚫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하늘은 또 다시 정무를 돕고 있었다. 정무가 앞장을 서 칼을 휘두르자 줄줄이 나자빠지는 신라병사들. 이에 장정들까지 가세해 신라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퇴로를 만들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면도날 목소리가 길길이 날뛰었다.

  “저런, 쳐 죽일 놈들. 변변한 무기도 없는 오합지졸을 못 막아 내다니. 군관들은 뭐하고 있는가. 빨리 말을 타고 놈들을 막아라!”

  면도날 목소리는 병사들 대신 군관들로 하여금 정무를 막게 했다. 면도날 목소리의 명령에 따라 군관들로 구성된 신라의 기병들이 정무와 장정들을 막아섰다. 하지만 정무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미 퇴로를 뚫었고 힘에 관한 한 당할 자가 없는 백제의 장정들을 믿었기 때문이다. 두시원악이 비록 험준한 산에 둘러싸여 있어 타 지역보다는 식량이 넉넉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백제는 예로부터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먹을 것과 물자가 풍부했던지라 백성들의 힘과 건강은 무척 좋았다. 장정들은 그 중에서 골라낸, 그야말로 장정 중에 장정들이었던 것이다.

  ‘퇴로를 뚫은 이상 이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은 상황이다. 적들이 말을 타고는 있지만 목표물을 쉽게 구분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말을 타고 있는 쪽이 불리하다. 몽둥이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쳐 신라의 군관들을 떨어뜨린 뒤 당황한 틈을 타 목을 쳐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되면 금보다 귀한 말까지 빼앗을 수 있는 기회다.’

 “칼을 쓰지 말고 몽둥이로 말의 엉덩이를 후려쳐라!”

  상황을 파악한 정무의 명령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덕분에 두시원악의 장정들은 특별한 희생 없이 칠악산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주석*

 1)공주 인근에 있는 성으로 추정.

 2)청양에 있었던 성으로 추정.

 3)현재의 칠갑산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2 백제의 한, 스토리야 k노블 마지막 연재작 2017 / 12 / 11 233 0 4661   
21 백제의 한 2017 / 12 / 9 244 0 7135   
20 백제의 한 2017 / 12 / 8 257 0 16936   
19 백제의 한 2017 / 12 / 7 258 0 7909   
18 백제의 한 2017 / 12 / 6 256 0 11449   
17 백제의 한 2017 / 12 / 5 263 0 6549   
16 백제의 한 2017 / 12 / 4 261 0 13536   
15 백제의 한 2017 / 12 / 4 233 0 12463   
14 백제의 한 2017 / 12 / 3 242 0 6775   
13 백제의 한 2017 / 12 / 3 255 0 13611   
12 백제의 한 2017 / 12 / 2 276 0 4059   
11 백제의 한 2017 / 12 / 2 275 0 10853   
10 백제의 한 2017 / 12 / 1 266 0 6167   
9 백제의 한 2017 / 12 / 1 255 0 9794   
8 백제의 한 2017 / 12 / 1 248 0 8730   
7 백제의 한 2017 / 11 / 30 268 0 17194   
6 백제의 한 2017 / 11 / 30 249 0 19844   
5 백제의 한 2017 / 11 / 30 269 0 6760   
4 백제의 한 2017 / 11 / 30 249 0 19474   
3 백제의 한 2017 / 11 / 30 303 0 26230   
2 백제의 한 2017 / 11 / 29 296 0 17760   
1 백제의 한 2017 / 11 / 29 446 0 1824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