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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신월이 뜨던 밤
작가 : 달리아
작품등록일 : 2017.11.13

신월이 뜨던 밤, 죽은 중전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그 시각, 서울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한 소월. 눈을 떠보니 내가 중전? 소월의 좌충우돌 중전 적응기.

 
대체 왜 이러세요…
작성일 : 17-12-01 19:15     조회 : 240     추천 : 0     분량 : 8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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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어떤 이는 말했다. 인생은 누구나 한 번쯤 시도해 볼만한 것이라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온갖 불행으로 점철된 내 인생에서도 오늘은 단연코 최고로 기쁜 날이었으니까. 생활고에 시달리며, 낮에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밤에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 공부를 했다. 잠을 자는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에 없는 나는 다행히도 타고난 강골이었기에 별 무리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를 이년 반, 드디어 내 보잘것없는 삶에 한 줄기 광명이 비쳤다.

 

 틈틈이 짬을 내어 학업에 전념한 결과, 마침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만 것이었다. 최고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상위권의 대학을, 그것도 전액 장학금을 받고서! 합격을 통지하는 짤막한 문자를 받고서, 나는 한참 동안이나 멍하게 앉아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을 읽고 다시 읽어봐도 합격을 의미하는 글자들은 변하지 않았다.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나는 벌떡 일어나 비좁은 단칸방을 나섰다. 바지 주머니에는 회심의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대담하게도 근처에 있는 아울렛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몇 천 원짜리 보세 옷을 사면, 헤지다 못해 찢어질 때까지 주구장창 그것만 입어대는 나였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런 나에게도 상을 줄 생각이었다. 처음으로 아울렛에서 옷을 사는 사치를 부려볼 생각이었다. 왜냐고? 나도 오늘부터 여대생이니까!

 

 음… 그러니까 90퍼센트 세일하는 곳이 3층이었던가? 나는 얼마 전 오다가다 봤던 큼지막한 전단지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일단 가보면 알겠지.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침 날도 좋겠다,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따사로운 햇볕이 내 뺨을 간질였다. 벌써부터 들뜨는 마음에 입꼬리가 자꾸만 씰룩거렸다.

 다 왔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아울렛이… 나와야 하는데…?

 

 "어어?"

 

 돌연 눈앞에 강렬한 빛이 번쩍하고 터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굴러떨어지는 돌덩이 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이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우욱… 어지러워. 마치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몸이 이리저리로 튕겨나갔다. 뒤죽박죽.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엉망으로 뒤섞이는 바람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그때 조그만 돌멩이가 내 머리를 딱 치고 지나갔다.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아으…제기랄."

 

 아파. 아프다고! 벌컥 짜증을 낸 나는 서둘러 앞을 가로막는 돌덩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죽기 싫어!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채 한 시간도 안 됐다는 말이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서 돌에 깔려 죽을 수는 없었다.

 

 "아…젠장. 뭔데 이렇게 무거…워!"

 

 얼핏 보기에는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몸뚱이 하나는 정말 잘 타고났다. 여느 남자들 못지않게 힘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다 착각이었나 보다. 이깟 돌덩이 한두 개 밀어 내기가 이렇게 힘이 들다니. 끙끙대며 간신히 장애물들을 다 치우고 나오려는데, 왼쪽 어깨에서 뿌득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 팔 빠졌네."

 

 황당하다 못해 웃음이 흘러나왔다. 팔이 빠지는 건 또 오랜만이네. 어릴 때 멋모르고 끌려갔던 공사장에서 한 번 빠졌었지 아마? 그나저나 몇 년 동안 고생을 해서 그런가, 몸이 이상하게 허약해진 느낌인데. 나는 작게 한숨지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뭐 그리 힘든 일을 했다고 잔뜩 배어 나온 땀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어? 이상하다.

 

 '내 머리가 이렇게 길었었나?'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낮이었는데,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그리고…

 

 "주, 중전 마마께서…살아나셨다…!"

 

 에? 그게 뭔 소리래.

 

 

 

 ***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번화한 도심지는 어디로 가고 웬 산골짜기가 눈에 들어왔다. 더욱 이상한 것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하나같이 누런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텁수룩한 수염을 달고 있는 남정네들은 상투를 틀었으며, 여인네들은 죄 머리에 비녀를 꽂고 있지 않은가.

 

 '무슨 사극 코스프레라도 하나?'

 

 가장 처음으로 든 생각이었다. 아니면 이 근처에서 영화 촬영을 한다는 말이 있었나?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까. 갑자기 산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며, 나는 왜 돌에 깔려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길어진 머리까지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점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들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기분 나쁘게?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작게 투덜거린 나는 잠자코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누군가 나서서 이 상황을 설명해주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게 웬걸 한참을 기다려도 어느 누구도 입을 열 생각을 않았다. 결국 이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여기가 어디예요?"

 

 여전히 대답은 들려올 생각을 않았다. 사람들은 더욱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만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진짜 뭐라도 묻었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진짜 이상한데? 내 얼굴이 이렇게 말랐던가? 물론 못 먹어서 조금 마른 편이긴 했지만, 이건 진짜 심각한 편인걸? 나는 심각한 얼굴로 저녁 식사를 고민했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니까 우삼겹 정도는… 아니야 역시 우삼겹은 너무 비싸. 대패 삼겹살 정도로 합의를 보자.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노라니, 어디선가 쉬이이잇 물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시선이 한 남자의 바지춤에 닿았다.

 

  '어… 오줌 싼다.'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리는 반투명한 액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금쯤 민망해서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을 아저씨를 위한 나의 소소한 배려랄까. 그나저나 보아하니 다 큰 어른 같은데 저게 무슨 추태야? 쯧쯧 혀를 차던 나는 뒤늦게 아저씨의 아랫도리에서 피어오르던 하얀 김을 떠올렸다.

 

 '가만, 왜 김이 나지? 분명 여름이었는데?'

 

 갑작스레 싸늘한 바람이 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오한이 밀려왔다. 나는 그나마 멀쩡한 오른팔로 몸을 감싸 안았다. 아으 추워. 왜 갑자기 날이 쌀쌀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날씨에 달랑 반팔 티 한 장 걸치고 있으려니 당연히 추울 수밖에… 응? 나는 손에 닿는 까끌까끌한 감촉을 느끼며 망연한 얼굴이 되었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입고 있던 옷은 죄다 어디로 가고, 내 몸엔 하얀 수의가 입혀져 있었다. 뭐, 뭐야? 내 옷이 왜… 대체 누가? 법과 질서가 살아 숨 쉬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감히 어느 변태 같은 인간이 멋대로 숙녀의 옷을 갈아입힌다는 말인가! 어서 경찰에 신고를…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핸드폰이 없었다. 아니, 아예 옷에 주머니 자체가 없었다. 아직 약정이 잔뜩 남았는데! 이 자식들이 성추행에 도둑질까지 해? 나는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선 빼액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뭐야! 강도야? 대답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옷이랑 핸드폰은 어딨어? 이런… 으헉!"

 

 화도 났겠다 속시원히 욕이라도 퍼부어줄 심산이었는데, 다음 순간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그건 그저 상상으로 남겨야만 했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어떤 남자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던 것이다. 미처 대처할 틈조차 없이 강제로 품에 안긴 나는 숨이 막혀 팔을 위아래로 버둥거렸다. 그런 나의 귀로 낮지만 따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오."

 

 뭐, 뭐야?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이거 놔! 나는 캑캑거리며 필사적으로 그 남자를 밀쳐냈다. 어찌나 세게 껴안았는지, 숨이 막히는 건 둘째치고 돌무덤에서 기어 나올 때 탈구됐었던 왼쪽 어깨가 격렬하게 아파왔다.

 

 "아악! 팔 빠졌다고, 팔! 이익…! 이게 무슨 짓이에요!"

 "중전…."

 

 나는 한참이나 끙끙대며 고통을 삭였다. 관절이 빠진 부분을 있는 대로 눌러 댔으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절반쯤 이성을 잃을 정도로 아팠다. 내가 조금만 더 성격이 나빴더라면 무작정 주먹부터 날렸을지도 모른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나는 쌍심지를 켜고 노려봤다. 그리고 이내 어이없는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그 남자는 뭔가 반가우면서도 슬픈 듯한,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 반쯤 출타 나갔던 내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 사람 미쳤나? 다짜고짜 껴안은 것도 모자라서, 저 애수에 잠긴듯한 얼굴은 뭔데? 그런 표정으로 한다는 말이 뭐, 중전? 열심히도 투덜거리던 나는 남자의 말을 떠올리고는 대략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본다면 굉장히 멍청해 보였을 것이다. 나는 왠지 모르게 삐질삐질 흘러나오는 땀을 닦으며 물었다.

 

 "중전…이요?"

 "다행이오. 참으로 다행이오 중전."

 

 내 말에 잔뜩 화색이 도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사극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남자가, 나를 더러 중전이라 부르다니.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말문이 막혔다. 멀쩡한 예비 여대생에게 중전이라니, 조선시대 역할극이야 뭐야? 이거 혹시 몰래카메라 아니야? 의심이 많은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숨겨져 있을 카메라를 찾았다. 그러나 주변에는 카메라맨으로 보이는 사람은커녕 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극에 나올 것 같은 사람들만 잔뜩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 남자의 얼굴은 지나치게 진지했다. 마치 진실로 내가 '중전'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처럼. 설마 미친 사람인가? 나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남자의 등 뒤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중전 마마!"

 "중전 마마께서 살아나셨다!"

 "마마!"

 

 나는 기함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더니 바닥으로 엎어져 절을 해대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 사람들 왜 이래… 질색한 표정을 짓던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중전이라 외치고 있었다. 설마 다른 사람한테 하는 말?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나는 필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타깝게도 주위는 휑했다. 저들이 쳐다보는 자리에는 웬 미친 남자 하나랑 나밖에 없었다.

 

 '이 미친…분이 중전은 아닐 테고.'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이내 상쾌한 얼굴이 되었다. 아하!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나 보구나. 그럼 그럼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지. 어느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스스로의 명석함에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 중전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것 같아요. 그럼 이만."

 

 나는 말을 하면서도 잽싸게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됐든 빠르게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았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런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을 계속 상대하다가 나까지 미쳐버릴지 누가 알겠어.

 

 "중전 마마! 어딜 가시옵니까!"

 "돌아가셨던 분이 살아나다니! 선녀님이야! 중전 마마는 선녀님이 틀림없어!"

 "대체 왜 이러세요…저 중전 아니라니까요. 선녀도 아니에요. 막지 마세요, 비켜 주세요 좀…. 팔 건드리지 마세요! 아파요!"

 

 나는 숫제 울먹이며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뚫고 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나 나를 향해 몰려오는 이 거대한 인파는 말 그대로 사람들의 파도였다. 아무리 제치고 제쳐도 벗어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아까는 막연하게 많다,라고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지금 몰려드는 사람들의 규모로 보건대, 족히 수 천 명은 될 듯싶었다. 한참을 징징거리며 달려드는 사람들과 씨름하던 나는 이내 기진맥진해서 뒤로 물러났다.

 

 '역시 팔이 한 짝이라 힘들다…!'

 

 분하다! 씩씩대며 숨을 고른 나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는 뒤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앞에는 좀비 떼들, 옆에는 미친 남자가 있다면 뒤로 가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지 않겠는가. 뒤편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이 험악한 낭떠러지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악!"

 

 낭떠러지를 본 나는 비명을 질렀다. 말도 안 돼! 이제 어디로 탈출하지? 뒤에서 또 중전 어쩌고 하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워워. 나는 마치 흥분한 짐승을 다루는 조련사처럼 힘겹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행히도 그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방금까지 미친개처럼 발광을 하던 군중들이 아주 조금씩 잠잠해졌다. 오, 옳지! 잘 한다! 그때, 절벽 너머를 바라본 내 표정이 굳어졌다.

 

 '눈에 모래라도 들어갔나. 왜 헛것이 보이지?'

 

 나는 급하게 눈을 비볐다. 절벽 아래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수많은 초가집과 기와집. 그리고 성과 궁궐로 보이는 큼지막한 건물이었다.

 

 "어…어라?"

 

 넋이 나간 내가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 순간, 다급히 달려온 예의 '미친놈'이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아! 그 팔 아프다고!"

 "미, 미안하오…. 그래도 중전, 그대를 두 번씩이나 떠나보낼 수는 없소."

 

 황급히 팔을 놓은 남자는 약간 시무룩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이 자식이! 표정 똑바로 안 해? 이게 누굴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화가 끝이 없겠어. 무언가 접점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이렇게 각자가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는 날이 새도 모자랄 것 같았다.

 

 '물론 허락도 없이 끌어안은 건 용서할 수 없지만!'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하자, 얼굴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이건 절대로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아파서 그런 것이다. 어쨌든 나는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얘기나 좀 들어보죠. 당신들은 누구예요? 여긴 어디고, 또 내가 중전이라는 건 무슨 소리예요?"

 "중전…?"

 

 이봐요. 그런 표정을 지어야 되는 건 그쪽이 아니라 나 같은데.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남자. 어쩐지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남자는 이내 알겠다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역시 내가 미워서 그러는 것이오? 내가 미안하오 중전. 아무리 그래도 이런 농은 그만두시는 것이 좋겠소."

 "아…!"

 

 짧게 소리를 지른 내가 입을 다문 것은 그렇지 않으면 무심코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잖아. 혹시나 도움의 손길이 있을까 싶어 뒤를 둘러본 나는 아무리 봐도 역사 속 주인공 같은 사람들의 모습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되겠어.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이쯤에 와서는, 슬슬 이 상황이 진짜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눈앞에 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돌무더기에 파묻힌다? 웬만큼 세상 돌아가는 일엔 빠삭하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멀쩡히 도심지에 잘 있다가 뜬금없이 산에 와 있지를 않나. 괴상한 차림새를 한 사람들이 나를 더러 중전이라고 하지를 않나.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 투성이였다. 이 모든 게 장난이라면 아주 질 나쁜 장난이었고. 더 중요한 점은 그 질 나쁜 장난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를 빼고, 여기에 있는 모두가 이 상황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까 절벽 아래로 내려다 본 풍경도 그렇고… 역시 이곳은 내가 알던 그 서울이 아닌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어쩐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러니까 정확히 이곳의 지명이 어떻게 되죠? 왜 서울이라던가… 그 도시 이름 있잖아요?"

 

 내 말을 들은 남자는 자못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왠지 모르게 저 입에서 내가 중전이라는 말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예감 아닌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하시는 것이오? 지명이라니… 이곳은 한양이지 않소."

 

 아, 역시 물어보지 말 걸 그랬어. 남자의 말을 들은 내 얼굴이 새하얘졌다. 남자는 이곳이 한양이라 말하고 있었다. 자그마치 오백여 년 전에 존재했던 그 조선의 수도인 한양 말이다. 거짓말이지? 거짓말이라고 말해!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형형히 빛나는 남자의 눈동자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한양이라니… 내가 타임 슬립이라도 했다는 거야? 이런 날벼락 같은 일이 또 있을까. 꿈이겠지? 꿈일 거야. 볼을 꼬집으며 현실을 부정하는 나의 눈앞으로 대학 합격 문자가 아른거렸다. 아, 아프잖아! 진짜 말도 안 돼… 내가 거길 어떻게 붙었는데!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런 눈빛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당장 내가 죽겠는데 누굴 챙기겠냐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날은 장장 22년을 현대인으로 살아왔던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오게 된 날이었다.

 

 

 

 
작가의 말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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