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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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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2-01 16:41     조회 : 254     추천 : 0     분량 : 9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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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

  660년 7월 16일, 의자 일행이 웅진성에 도착한지 3일째 되던 날 오후의 햇빛은 양철이라도 뚫을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 의자는 예식에게 성 밖 군호에서도 군사들을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의자의 명령을 들을 리 없는 예식이었다. 의자 역시 그 일에 대한 결과를 확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국담은 수하들과 성내 곳곳을 돌아보며 수성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의자를 직접 보좌하는 달솔이 되었기에 같은 달솔인 예식보다는 권한이 더 컸다. 예식이 비록 백제의 5방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북방령이었지만 왕의 측근인 국담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는 없었다. 그럴수록 예군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당연히 불협화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예식의 사람들은 사사건건 국담이 하는 일에 방해를 했다. 적으로부터 성을 방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국담을 방해한다는 것은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훼방을 놓았다. 그 훼방이 때로는 유치하기까지 했다. 가령 국담이 목책에 기름을 발라두면 즉시 가서 흙으로 닦아버렸다. 토성으로 만들어진 웅진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성 밖에 설치한 목책이었다. 국담은 이 목책에 기름을 바르고 짚으로 엮어 적들이 쳐들어오면 불을 지를 계획이었다. 또 다른 훼방도 기가 막힌 것이 토성위에 촘촘히 박아둔 나무 벽을 허무는 짓이었다. 이 역시 토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국담이 백성들을 동원해 열심히 한 일이었다. 그 밖에도 국담이 한 일은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예식의 측근들에 의해 허사로 돌아갔다. 보이지 않게 은근슬쩍 놓는 훼방들을 보고 있는 국담의 심장은 타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담은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송진에 불이라도 붙일 듯 이글거리던 태양이 서쪽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리자 매미들이 죽어라고 울어댔다. 토성에 말뚝을 박고 있던 백성들의 옷이 흥건해지더니 소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대로 두면 열사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냇가로 가서 몸을 좀 식힙시다. 백고는 남아 방비에 전념하게.”

  국담이 군사와 백성들에게 휴식시간을 제공했다. 국담은 3백여 측근들 중 십여 명만 데리고 냇가로 갔다.

  “첨벙 첨벙”

  백성과 군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냇물로 뛰어들었다. 서쪽 절벽바위 아래서 솟아나는 지하수가 모여 이룬 냇물이라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이 물은 여인네들의 빨래용으로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는데 식수로 마셔도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사내들이 첨벙거리자 손사래를 치며 물방울을 피하는 여인이 있었다. 빨래를 하던 여인은 백성들의 훼방에도 전혀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누리끼리한 베옷에 군청색 옷단으로 마무리한 옷을 펑펑하게 입어 시원해 보이는 여인. 평범한 서민들의 옷을 그냥 걸친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귀품이 나는 여인. 치렁치렁한 머리를 뒤로 대충 묶었음에도 햇빛에 반사된 머릿결이 황홀하게 빛나는 여인이었다. 물장난을 하는 백성들 중 앳된 총각이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군두더기 하나 없는 뽀얀 얼굴에 머루처럼 검고 동그란 눈, 가녀린 턱 선을 타고 오르내리는 이목구비는 하나같이 조화를 이루어 완벽한 작품에 가까웠다. 벌떡 일어선 총각은 한참동안 여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자기의 아랫도리를 꽉 눌러 거시기를 자제시키려 무진 애를 썼다. 그것을 본 것이다. 풍성한 옷을 입은 탓에 겨드랑이 사이로 드러난 유방.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볼록 도드라진 유방 끝에는 연분홍빛 젓꼭지가 매달려 탱탱했다.

  “야 이놈아,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뭉그대는 거여?”

  총각의 아버지뻘쯤 돼 보이는 백성이 사붓이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총각은 깜짝 놀라 거시기를 더 꽉 쥐었다.

  “아악!”

  총각이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 있나?”

  국담이 총각에게 다가가 비명을 지른 이유를 물었다.

  “아니, 이놈이 넋을 놓고 저 처자를 보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지 뭐에유.”

  국담이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으음!”

  국담의 입에서 옅은 비음이 흘러나왔다. 여태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본 것이다.

  “저, 저 여인이 누구요?”

  “아, 예.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저 언덕 너머에 사는 무녀의 딸 같은 디유? 토옹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처자가 웬일이랴?”

  국담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여인에게 다가갔다. 여인의 몸에서 새물내가 났다. 여인은 국담이 바짝 다가왔는데도 놀라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국담의 눈빛이 바람 속을 헤엄치듯 부드럽게 날아가 여인의 얼굴에 앉았다. 여인도 국담의 눈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마주친 눈빛과 눈빛에서 달콤한 사탕냄새가 났다.

  “저···, 이곳은 위험한 전쟁터입니다. 어서 댁으로 들어가시지요.”

  “네.”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네.”

  국담이 과도한 친절을 베풀고 있음에도 여인은 아무런 거부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내 잠시 다녀올 테니 어라하의 호위와 수성에 만전을 기하라.”

  “장군, 지금은 전시입니다.”

  수하가 국담을 만류했다.

  “그렇긴 하다만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니 금세 데려다 주고 오겠다.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알리도록.”

  평상 시 침착했던 국담의 모습이 아니었다. 국담 역시 자신이 왜 그리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자제할 수 있는 힘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앳된 총각은 여인과 함께 둥근 언덕을 넘어가는 국담을 노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늙은 무녀였다. 그녀는 국담을 보자마자 반백으로 산발한 머리칼을 뒤로 질끈 동여매며 큰 절을 했다.

  “상제의 아드님이 오셨군요. 저것이 안하던 짓을 하러 간다기에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무녀는 새된 목소리로 묘한 말을 했다.

  “오늘의 인연이 있으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 아이가 비록 내 딸이지만 본래는 상제를 모시는 아이였습니다. 천상에서 둘은 끔찍이 사랑하던 사이였지요. 하지만······.”

  무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저런 이상한 말들은 다 뭐란 말인가.’ 국담은 무녀의 말에 잔뜩 의심이 갔지만 어쩐지 더 이상 캐묻고 싶지가 않았다. 한참동안 천장을 올려다보던 무녀는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끙’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무녀가 수수께끼 같은 여운을 남기며 문을 열자 향로에서 구름 같은 연기가 피어났다.

  “어딜 가려는 것이오?”

  “시간이 없습니다. 둘이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무녀가 나간 방안은 상량하기 그지없었다. 갑자기 쌔 한 분위기가 한 여름의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여인이 팔뚝의 살갗을 비볐다.

  “추우신가 보군요.”

  “아니요. 기분 좋게 서늘해요.”

  ‘기분 좋게 서늘하다.’ 국담 역시 여인의 말처럼 기분 좋게 서늘했다.

  “정말, 기분 좋게 서늘하다는 말이 맞네요.”

  둘은 고르게 난 흰 이를 드러내며 말없이 웃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요?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라니.”

  “글쎄요.”

  ‘글쎄요’라는 말은 ‘거시기’라는 말처럼 애매하기 그지없다. 국담은 여인에게서도 분명한 무언가를 얻지 못할 것 같아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둘만의 공간에서 남녀 간의 침묵은 기분을 야릇하게 만든다. 비록 백주대낮이지만 혈기왕성한 청춘남녀가 한 방에 나란히 있다 보면 주체하지 못할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국담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점을 치는 도구와 귀신을 쫒는 도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고 약을 달이는 다기도 보였다.

  “여기서 약도 만드나요?”

  “그럼요. 산에서 나는 각종 약초를 이용하여 약을 만들지요. 약들 중에는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것도 있지만 신선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것도 있어요.”

  “신선의 세계?”

  “한 번 맛 좀 보실래요?”

  “아, 아니. 됐습니다. 됐어요.”

  어정쩡하게 손사래를 치는 국담을 보고 여인은 빙긋이 웃었다. 국담은 여인의 웃는 모습을 보고 하늘나라의 선녀가 저렇게 웃을 것이다, 하고 생각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이건 비밀인데···. 제 어머니는 천문과 방술은 물론 변신술에 관한 책자도 가지고 있어요.”

  “변신술과 방술이요? 그건 도교에서 행하는 것들인데······.”

  “그래요, 그 도교. 어머니는 인간도 노력을 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아, 네.”

  백제는 불교를 숭상하고 있었지만 백성들의 세상에서는 여전히 도교가 유행했고 중요한 시기마다 온갖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 때 신과 소통할 능력을 가진 무당이 신의 중계자 역할을 했다. 여인의 어머니는 천지신, 농경신, 백제의 시조인 온조신 등 자연신과 조상신 등을 모시면서 백성들의 신앙생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상제의 아들이고 그쪽은 하늘의 여자란 말이오?”

  “그건 저도 모르겠지만 어머니가 그리 말씀하시니.”

  “그쪽의 어머니는 우리가 천상에서 끔찍이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말했소. 그 말을 믿는 것이오?”

  여인은 국담의 질문에 고개를 살짝 돌려 방바닥만 쳐다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역시···. 국담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포기하고 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갸름한 턱을 타고 흐르는 빛이 신비로운 실루엣을 만들었다. ‘저 여인이 과연 선녀란 말인가.’ 국담은 자기도 모르게 몽환적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방안에 향기가 참 좋구려.”

  “차를 내오겠습니다.”

  여인은 또 국담의 말을 무시하고 딴청을 피웠다.

  “차, 차는 무슨. 그냥 두시오.”

  국담은 만류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차보다는 다른 걸 원했다. 다른 게 무엇일까.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국담 자신도 잘 몰랐다. 다만 마음이 가는대로 하고 싶은 바를 하려던 것뿐이었다. 여인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기다리는 국담의 마음은 방정맞게 초조해졌다. 태어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오묘한 상황에 심장이 오글거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게 이어져 바위처럼 무겁기만 했다. 영겁같은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려는데 여인의 인기척이 들렸다. 순간 국담의 오장육부가 내려앉았다.

  찻잔을 들고 나타난 여인의 머릿결은 섬려했다. 국담은 여인의 머리를 와락 끌어 앉고 싶었다. 여인이 허리를 굽혀 찻잔을 내려놓았다. 선녀의 날개처럼 활짝 핀 여인의 쇄골이 국담의 안광을 꽉 채우는 순간이었다.

 “으음!”

  여인의 유방이 뽀얀 속살을 드러낸 채 달랑거렸다. 터질 듯 탱탱하게 잘 익은 천도복숭아. 국담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침이 천년동굴 속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소리 같았다. 국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인의 내밀한 구석을 살폈다. 군두더기 하나 없는 뱃살과 잘록한 허리가 어우러져 완벽한 조각품 같았다. 이에 국담은 보이지 않는 곳을 상상해 보았다. 바로 허리아래 세상. 그러자 자신의 허리아래에서 뜨거운 불기둥이 용솟음쳤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상황. 국담은 여인의 허리를 끌어 앉고 거칠게 쓰러뜨렸다. 하지만 여인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다. 여인을 안은 국담의 손놀림은 가히 상제의 아들 같았다.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여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서투르지 않았다. 귀공자의 섬섬옥수가 여인의 내밀한 곳을 찾아 물처럼 흐르고, 뜨거운 입김이 곧추선 솜털위에 닿자 화산 같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천상의 악기가 천상의 악공을 만나 천상의 연주를 마치려는 순간, 여인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국담의 허리를 쥐어짜듯 끌어 당겼다. 뜨거운 불기둥이 여인의 근본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격류처럼 요동치는 핏발들의 아우성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는 동안 국담은 현실세계를 잊어 버렸다. 마치 신선의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몽롱해진 국담은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다.

 

  파란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구름이 마법의 잠속에 빠진 것 같은 날이었다. 어린 국담은 하늘을 나는 물고기가 되어 구름사이를 헤엄치고 다녔다. 국담의 시선이 통통 튀며 하늘 여행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무지갯빛 햇살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국담의 몸을 휘감았다. 국담은 그 빛을 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갔다. 국담의 몸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환희가 구불구불 피어올라 자지러질 정도였다. 무지갯빛 햇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청년이 된 국담이 그 자리에 서있다. 하늘은 역시 똑 같다. 국담은 가시지 않은 행복감에 시선을 멀리 하늘과 땅의 경계선으로 옮겼다. 남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벌판 저 멀리 지평선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가물가물하던 지평선이 쫘악 벌어지며 또 다른 세상이 드넓게 펼쳐졌다. 국담의 몸이 순식간에 그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평선이 닫혔다.

  주변은 온통 모래사막이었다. 시선을 가장 멀리 두고 사방을 둘러봐도 세상의 끝은 똑같았다. 국담은 거대한 원으로 만들어진 모래세상의 한 가운데 서있었다. 타들어갈 듯 목이 탔다. 허리춤에 매달린 물병을 꺼내 마음껏 물을 마셨다. 하지만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국담은 지쳐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 무엇도 없었다.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버려진 것과 우주의 미아가 된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외로움과 두려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국담은 주먹으로 모래를 무지막지하게 쳐댔다.

  그러자 생명체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국담의 주변에서 그것들이 보이더니 점차 끝도 없는 모래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모래알만큼이나 많았다. 거미였다. 급기야 거미들이 모래세상을 가득 메웠다. 처음에는 엄지손톱 만했던 거미들이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했다. 국담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대체 저것들은 뭐고 어찌해야 하는가.’ 가문의 보검을 빼들었다. 푸른빛이 거미들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거미들은 푸른빛에 먹혀 사라졌다. 하지만 그 때 뿐이었다. 거미들은 끝도 없이 모래의 틈바구니에서 삐져나와 조금씩 자라났다.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놈들. 국담은 거미들이 두렵지 않았다. 죽이고 또 죽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죽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담은 칼을 모래에 꽂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국담이 잠시 방심한 사이 거미들은 주먹만 하게 골격을 갖추었다. 급기야 국담의 다리를 타고 오르는 거미들. 그대로 놔두었다가는 세상의 거미들이 온통 국담의 몸을 타고 올라와 거대한 산을 이룰 지경이었다. 국담은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거미들을 떼 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국담은 보검을 잡고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푸른빛을 뿌려댔다. 국담의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다. 집안의 가보인 신비한 검이 있다지만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거미들을 어쩔 수가 없었다. 국담은 하늘을 우러러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태어나서 무언가를 대상으로 하는 기도는 처음이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거미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눈을 씻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래사막뿐이었다. 국담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스스로는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울음, 의식이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흘려보는 눈물이었다.

  국담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오자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된 자신의 몸을 지평선이 빨아들였다. 그렇다면 지평선이 이쪽 세상과 저쪽 세상의 경계라는 말이다. ‘지평선 저 넘어 세상은 그리도 행복했는데 이쪽 세상은 아비지옥이구나. 저쪽 세상으로 다시 가야겠다.’ 답을 낸 국담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또 다시 거미가 나타났다. 수많은 거미들이 커다란 원 밖에서 국담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새처럼 훨훨 날 수만 있다면···.’ 국담은 새가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인간이 새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죽지 않는 거미를 상대로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는 지쳐 쓰러질 것이고 쓰러진 자신의 몸을 거미들이 먹어치울 것이다. 국담은 포위망을 좁혀오는 거미들을 무기력하게 쳐다보다가 엄청난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미들의 대장, 그 놈은 주변의 거미들을 쓸다시피 주워 먹으며 몸통을 키우고 있었다. 놈이 아무리 거미들을 먹어도 거미들의 숫자는 그대로였다. 급기야 놈의 몸이 하늘 꼭대기까지 커졌다. ‘저놈 역시 죽지 않으리라. 저런 놈을 상대로 싸워본들 마찬가지겠지.’ 국담은 피차의 경계인 지평선을 향해 죽어라 도망치려는 생각을 했다. 도망치려는 생각 역시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비겁함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국담은 거미들의 왕을 노려보다가 피안의 세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눈앞에 또 다른 거미왕이 나타났다. 거미들의 왕은 이제 한 둘이 아니었고 계속해서 거미들의 왕이 생겨났다. 그들은 국담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어딜 도망치려고. 너는 우리들을 죽일 수가 없다. 우리들과 싸워 이길 수도 없다. 너는 여기서 우리들에게 죽어야 한다. 너는 죽어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다.”

  국담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죽일 수도, 싸워 이길 수도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국담은 또 다시 하늘을 우러러 기도를 드렸다.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하지만 거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거미들은 사방에서 입으로 동아줄 같은 거미줄을 뿜어댔다. 국담의 몸이 친친 동여매져 거대한 고치열매 같았다. 거미들이 다시 입을 벌렸다. 이번에는 거미줄이 아니었다. 검붉은 불덩어리. 거미들은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는 국담의 몸에 불을 뿜어댔다. 몸이 활활 탔다. 놀라 몸부림을 쳤다. 거미줄이 터졌다. 양팔을 날개처럼 벌려 퍼덕였다. 날개가 생겨났다. 불이 활활 타는 붉은 날개. 날개를 펄럭이자 국담의 몸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온통 새빨간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여긴 또 어딘가. 조금 전에 나는 불새가 되지 않았던가. 앗! 여긴 무녀의 집이 아닌가. 그렇다면 조금 전에 불새는 꿈이란 말인가. 혹시 여인도, 무녀도 모두 꿈속의 사람들인가. 꿈속에서 꾼 꿈은 또 뭐란 말인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국담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 남쪽으로 난 방문이 빠끔 열리고 눈부신 햇빛이 국담의 눈을 찔렀다.

  “아, 아니. 그, 그쪽은?”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벌써 일어나셨나요? 주무신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잠을 잤다. 그렇다면 저 여인과의 일은 생시이고 그 처참한 일은 꿈이었단 말인가.’ 꿈에서 겪은 일도 생시 같았다. ‘도대체 생시는 뭐고 꿈은 뭐란 말인가. 여인의 말에 따르면 잠깐 동안 잠을 잤다. 잠깐이라···.’ 믿어지지가 않았다. 잠깐 잠들어 겪은 세상이 그렇게 길고 참혹할 수가 있단 말인가. 국담은 악몽을 떨쳐내려 거칠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신발을 신으려는데 등 뒤에 있는 여인이 걸렸다. ‘아! 저 여인을 어찌한단 말인가.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어쩌자고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줄 압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서방님을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연합군 놈들로부터 이 나라를 살려놓고 돌아오겠소. 그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겠소?”

  여인은 국담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국담이 다시 한 번 채근하려 하자 무녀가 나타났다.

  “당연히 기다릴 것입니다. 저 아이는 이생뿐만이 아니라 저 생에서도 장군을 기다릴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갈 길을 가세요. 그나마 이렇게라도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역시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무녀였다. 서방님을 이렇게 만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여인도 알 수 없었다. ‘뭐가됐든 저 여인과 이대로 눌러 살았으면 좋겠다.’ 국담은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부하의 말처럼 지금은 전시이고 무엇보다 의자가 걱정이 됐다. 국담은 여전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여인들의 세상을 뒤로하고 웅진성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물어가는 들판의 벼들은 칠월의 힘센 햇살에 강건한 몸통을 나부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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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백제의 한 2017 / 12 / 1 255 0 9794   
8 백제의 한 2017 / 12 / 1 248 0 8730   
7 백제의 한 2017 / 11 / 30 266 0 17194   
6 백제의 한 2017 / 11 / 30 248 0 19844   
5 백제의 한 2017 / 11 / 30 267 0 6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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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제의 한 2017 / 11 / 30 302 0 26230   
2 백제의 한 2017 / 11 / 29 295 0 17760   
1 백제의 한 2017 / 11 / 29 444 0 18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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