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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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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2-01 16:39     조회 : 247     추천 : 0     분량 : 8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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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고의 이야기를 들은 국담은 예식의 배신을 확신했다. 왕이 웅진성으로 입성하는 날부터 예식과 그 주변인들의 움직임이 수상쩍었다. 왕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렸으나 돌아서면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왕의 명령을 따르는 척 하기는 했으나 지극히 수동적이었다. 수성에 만전을 기하기는커녕 툭하면 자기들끼리 은밀한 회동을 하기 일쑤였다. 군사들은 의자의 명령을 이행하기 전 자기가 속한 부대 군관들의 눈치를 먼저 살폈으며 군관들이 지시를 하면 그제서 움직였다. 군관들은 예식이나 예군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의 명령에만 복종했다.

  예식의 동태를 주도면밀하게 살펴온 국담의 수하들도 예식의 음모를 놓칠 리 없었다. 국담은 갑자기 집채만 한 바위덩어리를 등에 진 기분이 들었다. 무왕을 봐서라도 예식은 절대로 배신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무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신흥귀족, 무왕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예씨 가문도 없었을 것이다. 예씨 가문은 이제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여덟 가문과 견주어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 명문이 되었다. 그 대단한 흑치가문도 지방의 유력세력에 불과할 뿐이다. 국담은 흥수와 윤충, 계백, 의직 등을 생각했다. 모두들 의자의 총애를 받았으며 의자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이다. 그들은 백제의 대성팔족은 아니지만 의자를 배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덟 가문에 버금갈 정도로 은혜를 입은 예씨가문이, 더구나 나라가 망할 위기에서 마지막까지 왕을 모시고 있는 예식이 배신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삼백여 명의 수하들로 삼천이 넘는 군사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더욱 기막힌 일은 한 울타리에서 아군끼리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곧 있으면 나당연합군이 들이닥칠 텐데···.’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웅진성의 군사들이 모두 예식을 따른다면 당해낼 수 없다. 더구나 백성들은 예씨가문을 존경하고 있지 않은가. 군사들은 둘째 치고 백성들이 어라하를 버린다면 어쩔 수 없다. 이대로 백제가 망하고 마는가.’

 

  웅진의 강에 비친 아침햇살이 쨍쨍해질 무렵 국담은 예식이 배신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의자에게 고할 채비를 했다.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고해야 하나. 어라하께서 믿지 않으시면 어쩐다. 자칫하면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혼자 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 아니,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 어라하의 윤허 없이는 안 된다. 아니, 그렇다고 두고 볼 수도 없다.’ 국담의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국담은 결국 의자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알현을 청했다.

  “어라하, 다급한 보고가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지금쯤 소정방과 김유신이 사비성을 함락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사비는 아비지옥일 것입니다. 소정방이 언제 이곳으로 몰려올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식이 모반을 꾀하고 있는 듯합니다.”

  “뭐라고? 사비성이? 예식이 배반을? 그, 그럴 리가 있는가. 예식 같은 충신이 왜? 예식을 모함하지 마라!”

  “예식이 그의 형 예군을 비롯해 수하 군관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똑똑히 들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예씨가문과 예식을 굳게 믿는다. 예씨가문이 백제와 국왕인 나를 배신할 리가 없다. 국담, 예식을 모함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의자의 노기가 청사를 쩌렁쩌렁 울렸다. 기둥에 숨어 의자와 국담의 대화를 염탐하던 누군가가 은근슬쩍 빠져 나갔다.

  “어라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서둘러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어라하가 잘못되면 정말로 백제가 망하고 맙니다.”

  “시끄럽다. 만약 네 말이 틀리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어라하!”

  의자의 마음이 심하게 요동쳤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하고 있던 의자였다. 예식이 수상하다는 것도 조금은 짐작했다. 하지만 정말로 배신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대로 좌평을 한데다가 선대왕인 무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충신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담이 예식의 음모를 알렸다. 의자는 국담의 보고를 사실로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식을 두둔하고 나섰다. 예식의 배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국담에게 호통을 쳤다. 예식의 마음을 흔들기 위함이었다. 이 마당에 예식까지 배신을 한다면 재기의 희망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백제건국 이래 이 같은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의자는 지금 닥친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면 백제는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식이 배신을 한다면 지방군을 기다리는 일도 허사가 된다. 사비를 함락한 나당연합군의 다음 목표는 틀림없이 웅진성일 것이다. 백제의 왕인 나를 잡아야만 전쟁이 끝날 테니···. 이 마당에 예식이 배신을 하고···. 우선 예식을 막아야 한다.’ 의자의 생각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끝내 의자를 설득하지 못한 국담은 답답한 마음으로 남문 장대에 올랐다. 광활한 벌판이 하늘과 맞닿은 듯 아득했다. ‘연합군이 한꺼번에 쳐들어온다면 저 벌판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런 놈들을 어찌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의자의 말처럼 지방군이 와 준다면 웅진성을 보루로 쟁쟁한 전투를 벌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의자가 예식을 데리고 장대로 왔다. 의자의 표정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국 달솔, 여기 있었군. 성내를 둘러보고 군사로 쓸 만한 사람들을 차출해야겠네. 사비성의 상황이 궁금하군. 우리 측 첩자로부터 연통이 없나?”

  “쉽게 빠져나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전쟁 중이라 첩보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긴, 역이용 당할 수도 있으니. 이럴 땐 비사도리 놈의 정보가 정확할 텐데.”

  의자와 국담의 대화를 듣고 있는 예식의 심정이 또 다시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배신을 할 것이냐 아니면 의자와 함께 수복운동을 할 것이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한치 앞을 볼 수도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사생결단을 내려야할 예식의 심정은 뙤약볕아래 건초더미처럼 타들어갔다. 예군을 비롯한 웅진성의 지배층들은 그런 예식의 태도에 천불이 날 것 같았다.

  “방령, 우선 성내 백성들 중 군사로 쓸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끌어 모으시오. 그런 다음 짬을 봐서 북방에 속한 군호에서도 군사들을 차출해야 할 것이오. 자, 나와함께 백성들을 보러 갑시다.”

  솔직히, 예식의 배신이 확실시 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 밖 군호에서 군사들을 차출할 여유는 없다. 하지만 성 밖으로까지 영역을 확장시켜 놓아야만 예식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다고 판단한 의자였다.

  의자는 하루 종일 웅진성 내 군호를 돌아보며 백성들의 협조를 당부했다. 군사들을 모으는 일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의자가 모아온 군사는 천명이 넘었다.

  “자, 이제 우리 군사는 4천이 넘어 5천에 육박하오. 우리는 요새에서 방어를 하기 때문에 이 군사라면 50만의 대군이라도 막아낼 수 있소.”

  50만이라는 말도 안 되는 허풍에 예식과 그 수하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라하의 말씀대로 적들을 막아낼 수 있는 충분한 군사들입니다. 우리가 놈들을 막아내는 동안 흑치상지와 귀족들이 지방군을 모아 이곳으로 달려올 것입니다.”

  국담은 일부러 목청을 돋우어 외치듯 말했다. 배신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모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일종의 쇼였다. 국담의 쇼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예식과 그 수하들은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는 의자를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군사를 모으고 50만 대군이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다는 의자의 자신감에 슬쩍 위축이 됐다.

  “형님, 어라하의 말이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결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더구나 군대로 편입한 백성들은 어라하에게 설득 당했습니다. 그들과 국담의 군사들을 합치면 천오백에 가깝습니다.”

  “조금 어려운 상황이 됐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네. 하지만 지방군은 쉽게 올 수 없어. 그 사이 소정방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끝이란 말이야.”

  “압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지켜보시지요.”

  예식형제는 작고 빠른 소리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예식은 자신의 수하들에게 자중해야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 때 파수를 보던 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누군가가 성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정말로 누군가가 어둠의 그림자를 질질 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달리지도 못하고 느릿느릿 휘청거리며 오는 것을 보니 위험한 인물은 아닌 듯 했다. 복신이었다. 복신은 무왕의 조카이자 의자의 사촌동생이었다. 무왕시절부터 워낙 의자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의자에 대한 충성심은 조카인 왕자들에게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터라 의자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왕족 중 한 명이었다. ‘복신은 충신이다. 그가 태를 버리고 올 리가 없다. 그렇다면 사비성이 함락됐다는 말인가.’

  “복신, 태를 보좌하여 사비성을 지키라고 했더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의자는 상황을 빤히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었다. 의자는 일부러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예식과 그의 추종자들을 쳐다봤다.

  “복신아, 이곳은 지금 초 긴장상태다. 어서 사실을 말해라, 어서! 도무지 불안해서 못살겠구나.”

  복신은 어려서부터 재치가 있었으니 상황파악을 빠르게 하고 알아서 보고를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라하께서 저렇게 경망스런 분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긴 있구나. 혹시···.’ 복신은 예식과 그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예식을 제외한 수하들의 표정은 시체처럼 싸늘했다. 그들이 온전히 의자의 사람이었다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헤 벌리며 자신의 대답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한일자(一)로 벌려 꾹 다물고 눈을 가늘게 떠 복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들이 배신의 음모를 꾸미고 있구나. 저들에게 사비성이 함락 당했다고 말하면 다른 마음을 먹을 것이다.’ 복신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올려다보았다.

  “어라하, 문사를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연합군 놈들에게 먼저 항복을 했습니다. 태 왕자는 끝까지 성을 사수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돕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비성은 함락 당했습니다.”

  “뭐, 뭐야? 그, 그래서.”

  짐작은 했지만 사비성이 함락됐다는 말을 들으니 의자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더구나 사비성 역시 웅진성처럼 군사 한 명으로 백 명의 적을 막을 수 있는 철옹성이었다. 그런 성이 그리 빨리 무너졌다는 말은 분명 불리하다. 이는 예식의 배반을 부추기는 말이었다. 의자는 초조한 표정을 감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나라 놈들은 악마로 변해 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무자비한 약탈을 하고 있습니다. 소정방은 당 황제에게 바칠 보물들을 열심히 챙기고 있습니다. 놈들은 여자들을 겁탈하고 건강한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재미에 푹 빠져 있습니다. 김유신이 소정방을 말리고는 있지만 쉬 이곳으로 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김유신은 우리 백제의 군사들이 곳곳에 매복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나라 군사들의 노략질이 시작되면서 백성들의 저항이 격렬해졌습니다. 조만간 지방군이 들불처럼 일어날 듯합니다. 벌써 건지산 주변에서는 작게나마 저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의자의 기대대로 복신은 매우 영리했다. 당군은 약탈의 재미에 빠져 있고 김유신이 매복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루 이틀 사이에 웅진성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방증이다. 여기에 한산의 건지산(주석1) 주변 백성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지방군의 이동을 예고하는 사례임에 틀림없었다.

  “건지산이라면 모시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 아니냐.”

  “그렇습니다. 왕실에 모시옷을 진상하고 있는 충성스런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게 선량한 백성들마저 저항을 시작하다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태 왕자가 항복을 하자마자 사비성을 빠져나간 왕자가 있었답니다. 왕자는 건지산 주변 백성들을 규합하여 나당연합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도대체 백성들이 몇 명이나 되기에.”

  “숫자는 적지만 죽기로 싸워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주변 백성들을 자극하고 있답니다.”

  “왕자는?”

  “함께 전사했다고 합니다.”

  서자를 합쳐 의자는 자신의 아들이 정확히 몇 명인지 모른다. 죽은 왕자는 그 수많은 아들 중에 누군가이겠지만 한 없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더구나 그 아들을 보좌해 싸우다 죽었다는 건지산 백성들을 생각하니 오금이 저릴 정도로 마음이 고무됐다. ‘그들은 군호가 아니다. 군호라면 몇 번의 전쟁을 치러봤겠지만 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었단 말인가.’ 복신이 건지산 백성들을 생각하고 있는 의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단 백성들을 이용하라는 의미였다. 그들을 이용해서라도 예식의 배신을 막아보라는 신호였다. 의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지산 백성들은 군호가 아니라 자연호이다. 우리 백제는 군호만 24만, 자연 호까지 합치면 76만호이다. 건지산 백성들이 저 정도라면 4백만 백성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다. 하물며 18만 연합군 놈들이 두렵겠는가!”

  의자의 말은 예식과 그 수하들에게 쐐기를 박았다. 배신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였다. 백제는 시조인 온조왕 때부터 개병제를 실시해 왔기 때문에 왕의 명령이라면 언제든지 일반백성들을 군사로 소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남아 생활의 터전을 일구어야 했기에 가능한 군호라고 하는 지정된 가구에서 군사를 소집했다. 군호에서만 한 명씩 군사를 모아도 24만 명, 당시 중앙군 1만5천 명과 지방군 11만 명을 합치면 35만 명이 넘는 인원을 군사로 쓸 수 있었다. 18만 연합군이 아무리 정예병이라 해도 35만 아니 4백 만 백제백성들이 포위를 하면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건지산 백성들의 장렬한 전사소식을 듣고 의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예가 놈들이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찢어 죽일 놈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떻든 시간을 벌며 지방군을 기다려야 한다.’ 의자가 기다리는 지방군은 가장 가까운 서방의 흑치상지였다. ‘흑치상지가 움직이면 각 방의 방령들이 달려올 것이다. 동방의 방령이었던 계백은 죽었다. 가장 강한 세력인 북방의 치소는 이곳 웅진성이다. 지금 웅진성의 성주라는 놈이 배신을 계획하고 있지만 눌러만 놓으면 5방과 50개 군, 250개성의 정예병들이 집결해 연합군 놈들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다.’ 복신의 부풀려진 보고에 고무된 의자는 보무도 당당한 명령을 내렸다.

  “복신아, 너는 지금 당장 서방으로 달려가 흑치상지를 데려와라!”

  “예, 어라하.”

  일촉즉발의 전시에서 쉬고 자시고할 여유가 없었다. 복신은 잠시 요기를 한 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방령, 복신의 말을 들으니 연합군 놈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방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국 달솔, 내 좀 쉴 테니 호위 좀 부탁하네.”

  예식을 대하는 의자의 말투가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반 존대가 아닌 반말을 섞어 쓰는 것이다. 예식은 의자의 말투를 대하며 슬쩍 주눅이 들었다. 그들의 미묘한 신경전은 말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도 예식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망루에 올라 성 아래 벌판을 바라보던 예식은 온통 검은색으로 변한 사물을 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백제의 팔대가문에 비해 아직 온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제 겨우 몇 대에 걸쳐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가문이다. 이 상황에서 조상들은 내게 어떤 결정을 요구할 것인가. 어라하의 말은 가정일 뿐이다. 어라하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선수를 치면 그만이다. 죽어 충신으로 남을 것인가 배신을 하여 가문을 잇고 부귀영화를 누릴 것인가. 점풍을 치니 백제는 망하고 세상의 모든 나라는 당나라의 그늘에 있게 된다 하였다. 아, 아! 괴롭고 괴롭도다. 예식의 눈동자가 하리타분해지며 촉촉해졌다.

  꿈인지 생시인지 예식의 눈에 영상처럼 번진 불빛들이 보였다. 웅진성을 포위한 18만 개의 횃불들이었다. 아리도록 아름다운 불빛. 불야성을 이룬 횃불들은 긴 꼬리를 매달고 거대한 원을 그리며 웅진성을 둘러쌌다. 도도히 흐르는 웅진의 강으로도 배를 탄 횃불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웅진성이 수백 겹으로 포위된 것이다. 횃불들은 점점 원을 작게 하여 웅진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예식이 급하게 눈을 씻었다. 환상이었다. 예식은 긴 탄성을 내뱉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세 비라도 쏟아질 듯 하늘이 무거웠다. 조상들의 얼굴 모양을 한 도깨비불들이 오만상을 찡그리며 날아다녔다. 이 때 할아버지 예다의 얼굴을 닮은 도깨비불이 예식의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예식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몸을 피했다. 도깨비불들이 사라졌다.

  예식은 도깨비불로 찾아왔던 예다를 생각했다. 예다가 법왕의 신임을 받기 전 예씨가문은 조정에 출사하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예다가 좌평벼슬을 받고 아버지 사선이 그 지위를 물려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여전히 여덟 성씨들의 세상이다. 예식은 그들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허구한 날 왕을 속여 가지고 놀고, 자기들끼리 권력쟁탈전을 벌이며 나라를 어지럽게 했다. 그러다가 결국 백제 최고의 지략가인 성충과 흥수, 최고의 장군인 윤충, 의직, 계백 등을 사지로 몰아 죽게 했다. 더구나 이곳 웅진성의 내 군사는 삼천 명이 조금 넘는다. 이들을 데리고 18만 대군을 어찌 상대한단 말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죽음이다. 어라하가 도망친 사비성은 불에 타고 백성들은 아비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어라하도 자격이 없다. 복신의 말이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어라하가 기다리는 지방군은 아직 모일 기미조차 없다. 여기서 연합군 놈들과 싸운다 한들, 싸우다가 명예롭게 죽는다한들 남아있는 가족들은 천민취급도 못 받는다. 망해버린 나라에서 놈들과 싸우다가 죽은 장군의 가족을 그대로 둘리가 있는가. 그리되면 할아버지가 어렵게 일군 우리 집안은 끝나고 만다.’ 동녘하늘이 시뻘겋게 달아오를 때까지도 예식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주석*

 1)지금의 서산군 한산면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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