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백제의 한 더보기
이 작품 더보기 첫회보기

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1-30 16:51     조회 : 266     추천 : 0     분량 : 17194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제2부-수 성

  웅 진 성

  예식의 고민이 시소처럼 까딱까딱하는 동안 의자 일행이 웅진성에 도착했다. 성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과 함께 당당하게 들어가려고 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위엄을 갖추려 평복을 벗고 용포를 걸쳤어도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비성에서 출발한 국담의 군관들은 험한 산길로 오는 도중 선발과 후발대로 나뉘었다. 군관들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신하들 때문이었다. 국담은 이들의 지휘를 백고에게 맡겼으나 백고는 선발대에 없었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이리저리 성벽 위를 왔다 갔다 하던 예식이 보기에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왕의 행색이었다. ‘저런 자가 왕이라니. 황금빛 용포에 쥐새끼 한 마리가 들어가 있는 것 같구나.’

  “어라하, 비사도리로부터 어라하의 파천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던 중입니다.”

  예식이 의자를 내려다보며 무릎을 꿇었다. 무릎은 꿇었지만 위치는 높은 곳이다. 원래 무릎이란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꿇는 법. 때마침 아침안개가 성벽을 타고 내려가 의자를 휘감고 있었다. ‘마치 오랏줄에 묶인 포로 같구나. 포로, 포로라···.’ 예식은 의자를 내려다보며 포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소. 당장 내려와 성문을 열고 이 아래에서 무릎을 꿇으시오!”

  국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한 호통이 웅진성 곳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아, 알겠소.”

  예식은 총총걸음으로 내려와 직접 성문을 열었다.

  “어라하.”

  예식과 그의 형인 예군 그리고 여러 무장들이 촘촘하게 엎드려 절을 하였다. 의자가 태도를 단단히 하며 위엄을 갖추었다. 웅진성까지 뱃길로 오는 동안 비를 맞고 괴물을 만났으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적들을 경계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고 다음 일들을 준비해야 한다. 어쨌든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의자는 성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면밀히 살펴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북으로는 넓은 강이 성을 두르고 흐른다. 강은 성의 절반가량을 감싸고 있어 절반의 군사들을 번 셈이다. 더구나 성은 산위에 위치해 있다. 그럼으로 기어오르는 적들이 환히 보인다. 이쯤 되면 용력이 출중한 군관 한명이 한 자루의 창으로 몇 백 명의 적을 능히 무찌를 수 있다.

  웅진성은 백제 제2의 수도답게 물자도 매우 풍족했다. 성 밖 군호에서 군사들을 모집하는 것은 물론 무기와 군량미 조달에도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조건이라면 적어도 보름은 버틸 수 있겠구나. 버티는 동안 지방군이 와 준다면 사비성을 되찾을 수도 있다.’ 의자는 푸르른 잎사귀에 동글동글 매달린 이슬을 손바닥으로 쓸어 눈을 씻은 뒤 웅진성내 모든 군사와 백성들을 불러 모으라고 명령했다.

  “비사도리는 어디 있습니까?”

  국담이 비사도리를 찾았다.

  “사비성으로 다시 돌려보냈소. 소정방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 보고하라고.”

  “그자는 어라하의 신하요. 어찌 방령께서 어라하의 명을 받은 비사도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단 말이오.”

  첫 만남부터 분위기가 편치 않았다. 이를 눈치 챈 의자가 손을 번쩍 들어 주위를 정리했다.

  “이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이곳이라면 용감한 병사 한 명이 수백 명의 적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물자도 풍족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우리가 버티는 동안 지방군이 흑치상지가 있는 임존성으로 집결할 것이다. 지방군이 다 모아지면 어마어마한 대군이 된다. 설사 적들이 이 웅진성을 공격한다 해도 임존성에 집결한 지방군이 대 반격을 한다면 다시 사비로 도망칠 것이다. 사비에 갇힌 연합군은 퇴로가 없어진다. 그동안 고구려 지원군이 올 것이고 바다건너 왜에서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할 것이다. 결국 놈들은 무기와 식량의 보급로가 끊겨 항복을 하고 말 것이다. 버티면 버틸수록 우리가 유리해진다. 다시 한 번 전 지방군에 급보를 보내라!”

  의자는 제일먼저 목표와 비전을 제시했다. 목표와 비전이 있는 군대는 일사분란 해진다. 그렇게 군대가 하나로 통일되어야만 한 명의 군사가 수백 명의 적을 무찌를 수 있는 것이다. 의자는 다음으로 조직을 정비했다. 명령의 체계를 다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전투지휘를 할 것이다. 또한 백제의 대 귀족이자 국씨집안의 장남 국담은 지금부터 달솔로 승차해 나를 직접 보좌한다. 웅진방령 예식은 독자적인 명령을 내릴 수 없다. 모든 일들은 국 달솔과 상의해 내게 보고토록 하라.”

  아무리 백제의 대 귀족 집안이라고는 하지만 6품 내솔에서 네 단계나 뛰어넘어 2품 달솔이 된 국담. 이는 평생을 의자와 함께 전쟁터를 누벼온 미추와 같은 품계이며 백제 최고의 관직인 좌평보다 한 단계 낮은 위치인 것이다. 예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발하려 했다. 하지만 예식이 지그시 발을 밟아 자제시켰다. 달솔이라면 웅진성 방령인 예식과 같은 품계였다. 게다가 왕을 직접 보좌하는 달솔이니 실질적으로 권력의 핵심인 것이다. 하지만 예식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긴박한 전시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라하! 다, 달솔이라니요. 너무 과분한 품계입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국담이 어찌할 바를 모르며 사양했다.

  “아닐세, 자네는 백제의 대 귀족이며 사비의 재앙이었던 이무기를 죽인 영웅이네. 그런 사람을 여태 한직에 머무르게 했던 나의 불찰이 크네. 그리고 지금은 자네 같은 영웅이 구심점이 되어야만 이 난국을 풀어갈 수 있다네.”

  국담이 다시 사양을 하려는데 파수를 보던 한 병사가 밥사발 깨지는 소리를 냈다.

  “성 밖에 이상한 놈들이 몰려들고 있다!”

  의자가 빠른 걸음으로 망대에 올랐다. 그의 뒤를 국담과 예식일행이 쫒았다. 아무런 방비도 안 된 상태에서 연합군의 침공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의자는 바짝 긴장을 하고 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 다행이로다.’

  “어라하, 천만 다행입니다. 우리 군사들입니다.”

  사비성에서 산길을 따라 웅진성으로 온 후발대와 신하들이었다.

  “어라하, 이 늙은 귀족들 때문에 좀 늦었습니다. 어찌나 징징거리던지 끌고 오느라 혼났습니다.”

  국담이 백고를 흘깃 째려보았다. 아무리 사정이 형편없다 해도 직책이 훨씬 높고 나이도 많은 신하들을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군사들의 지휘를 맡은 사람으로서 선발에 서지 않고 후발대와 함께 도착했다. ‘백고가 어찌 저런 말을···.’ 국담은 살짝 짜증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백고일행을 반겼다.

  “귀족들을 모시고 오느라 수고했네.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 이제부터 할 일이 아주 많다네.”

  웅진성에 도착한 국담의 수하들은 백제 최고의 싸울아비들로서 삼백 명이 넘었다. 모진 비바람을 맞으며 험준한 산길을 타고 왔지만 모두가 범상치 않은 기개를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함께 온 신하들은 초죽음이 되어 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여기저기 쓰러져 잠자기에 바빴다. ‘고관대작들의 꼴이 거지와 다를 바가 없구나.’ 의자는 혀를 차며 청사로 들어갔다.

  “방령, 저 놈들은 보통 놈들이 아닐세.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겠어.”

  예군이 국담의 수하들을 둘러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예군은 바짝 마른 체구에 성마르게 생겼지만 돌아가는 머리가 비상했으며 무술 또한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출중했다. 그가 비록 웅진성의 성주이자 북방령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했지만 아버지 사선의 당부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각별히 형제애가 좋았던 예군과 예식은 효자로도 소문이 났다. 예식형제는 아버지 사선의 뜻을 단 한 번도 거스르지 않았다. 사선은 죽으면서 예군에게 동생인 예식을 부탁했다. 그는 아우인 예식을 집안의 대표로 세워야 가문을 길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좌평이었던 사선은 신흥귀족인 예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 침착했던 예식을 선택했다. 예군은 머리는 좋았지만 성격이 급해 가문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만큼 백제에서 예씨가문은 아직 완벽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예군은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또한 자신의 자식보다 예식의 아들 예소사를 더 귀애했다. 백성들도 이런 예씨형제를 존경하고 따랐기 때문에 웅진성은 안정적이었고 모든 것이 풍족했다. 예씨가문이 비록 토착귀족들인 대성팔족(주석1)에 밀리고 있었지만 웅진성만큼은 그들의 독립된 왕국이었던 것이다.

  “형님, 우리는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예식 역시 예군의 생각과 같았다. 국담과 그의 수하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특히 이무기를 때려잡았다는 국담에게서 개세지풍의 기개를 느꼈다. 더구나 의자는 지방군의 집결을 확신했다. 이런 마당에 함부로 배신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방군이 미적거리고 있는 사이에 나당연합군이 이곳을 총공격한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이다. 전쟁에 패하면 죽거나 포로가 될 것이고 겨우 자리를 잡은 우리가문은 끝장이 난다.’ 예식의 머릿속이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만 갔다. 하지만 예군의 생각은 달랐다.

  “방령, 어라하가 저렇게 말은 하지만 믿을 수가 없네. 진즉 성충과 흥수의 말을 듣고 탄현과 기벌포에서 적을 막았더라면 계백이 불리한 황산벌에서 패전을 하지는 않았을 걸세. 임자 같은 간신들만 싸고돌아 많은 귀족들이 이미 등을 돌렸네. 그런 줄도 모르고 군사력 과시만 하다가 패망을 좌초한 왕이야. 더구나 지금은 전세가 매우 불리하네. 평상시라면 몰라도 지방의 귀족들은 어라하의 명령을 듣지 않을 거야. 머뭇거리다가 연합군이 들이친다면 아무리 난공불락의 요새라 해도 당해낼 수가 없어.”

  역시 예군의 머리는 비상했다. 예식은 형세를 정확히 분석하고 시원하게 답을 내는 형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형님, 저 국담이라는 놈과 그의 부하들을 보셨지 않습니까.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닙니다.”

  “방령, 우리에게는 우리를 따르는 백성들과 성 안에만 3천이 넘는 군사들이 있네. 저 놈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겨우 삼백 명에 불과해. 걱정하지 말고 명령만 내리게.”

  “조금 더 두고 보시지요.”

  “방령, 이러다가 실기라도 하면 우리는 멸문지화를 당한다니까.”

  성질이 급한 예군이 펄펄 뛰었다. 그러자 웅진성 군관들도 예군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섰다.

  “예군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백제는 이미 망했습니다. 더구나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연합군 놈들에게 쑥대밭이 되기 전에 어라하를 잡아 바치는 것이 현명합니다.”

  다른 무장들도 한 목소리로 예식의 결단을 촉구했다.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배롱나무에 매달려 죽어라 울어대던 말매미가 오줌을 찔끔 저릴 정도였다. 이때 국담이 나타났다.

  “어라하께서 방령을 찾으십니다.”

  “그대는 수도방위대장 미추의 군관 국담 아닌가.”

  “방령, 저는 이제 어라하를 지근에서 보좌하는 달솔입니다.”

  “달솔은 무슨 달솔. 너 혼자 실컷 달솔해라.”

  예군이 칼을 빼들고 국담을 위협했다. 국담의 실력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기분이 상했으면 칼을 빼라. 내 나이 마흔 여덟이지만 아직은 한창이다. 전쟁한번 제대로 치러보지 않은 애송이 따윈 한 칼에 없앨 수 있다.”

  “왜 이러십니까. 지금은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닙니다.”

  “우리끼리? 누구 맘대로 우리끼리냐. 너흰 너희고 우린 우리야. 잔말 말고 내 칼이나 받아라.”

  ‘저자가 패를 가르려 하는구나.’ 국담은 예상치 않은 예군의 행동에서 배신의 기미를 느꼈다. ‘지금은 이들과 싸울 때가 아니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고 보자.’

  “난 우리끼리 싸우지 않겠소.”

  국담이 한 발 물러나자 이번에는 웅진성의 군관들이 나섰다.

  “네 놈이 이무기를 때려잡은 영웅이라며. 실력 좀 보여주시지?”

  예군보다 군관들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웅진성의 군관 십여 명이 한꺼번에 국담을 향해 달려든 것이다.

  “이얍!”

  군관들의 칼끝이 코앞에 닿을 듯 말듯 하는 순간 국담이 지축을 박차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얼마나 높이 차고 올랐는지 국담의 몸은 배롱나무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듯 했다. 헛방을 친 군관들이 입을 헤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융”

  떠올랐던 국담의 몸이 바늘처럼 내리꽂았다. 군관들이 놀라 엉거주춤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시 일어선 군관들은 칼과 창을 휘두르며 국담을 덮쳤다.

  “촤아악”

  국담의 칼이 반원을 그리자 군관들의 병장기가 우수수 잘려 나갔다. 단신으로 나당연합군 진영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수십 명을 베어버린 국담이었다. 웅진성의 군관들이 연합군 군사들이었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승사자가 되었을 것이다. 병장기가 무용지물이 되자 군관들은 더 이상 싸울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군관들은 무술로는 도저히 국담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자 예군이 나섰다.

  “쉬이익”

  예군의 칼이 칼집에서 나오자마자 살아 움직이는 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백제 싸울아비들이 사용하는 검법이 아니었다. 예군은 집안 대대로 물려 내려온 검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백여 년 전 중국에서 백제로 이주한 예씨가문의 한 선조는 그 특별한 검술로 텃세를 극복했다. 그리고 검술을 더욱 발전시켜 비밀스럽게 기록해 두었다. 그는 죽음에 이르러 유언을 하기를 예씨 중 무술에 가장 뛰어난 자손에게만 비기를 전달하고 발전시켜 맥을 이어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무술이 뛰어난 자는 가문의 전면에 나서지 말고 가문을 보존시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후 자손들은 선조의 유언을 충실히 이행했다.

  “재애앵”

  국담이 예군의 칼을 받아쳤다. 예군이 흠칫 놀라며 칼을 정면으로 다시 겨누었다. 시험을 해 보려고 홀략하게 휘두른 칼이었지만 가문의 검법을 받아낸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군관들은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신기한 검법에 코 평수를 잔뜩 넓힌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군이 혼신을 다해 칼을 찌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칼을 휘두르며 들어오는 검법이라면 몸을 위 아래로 움직여 피할 수 있지만 정면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칼은 쉽게 피할 수 없다. 더구나 칼은 예군과 한 몸이 되어 춤을 추듯 요동치고 있었다. 칼은 목표물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현란하게 움직였다. 칼이 국담의 코앞에 닿는 순간 예군의 몸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칼만이 커다랗게 확대되어 국담의 목을 향해 들어왔다. 그러니까 지금 예군이 사용하는 검술은 백제로 이주한 선조이후 가장 진화된 수준이었던 것이다.

  “촤아앙”

  국담은 아주 어렵게 예군의 칼을 자신의 칼로 비껴 막았다. 마주친 칼에서 신비한 소리가 났다. 다음 공격을 예상한 국담이 서너 걸음 뒤로 후퇴를 했다.

  “그만, 그만 하시오.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없소.”

  ‘이 싸움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있는데 힘겨루기라니. 아니, 저 자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나를 죽여야만 목적을 이루기가 쉽겠지. 더구나 저 자의 무공은 절대고수의 수준이다. 내 수하들이 백제 최고의 실력을 갖추고는 있지만 저자를 쉽게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저런 자라면 얼마든지 어라하를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와 싸워서는 안 된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으니 명분 없이 죽일 수도 없다. 지금으로써는 물러서는 길만이 최선이다.’ 국담은 한낱 객기에 불과한 싸움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무슨 개소리냐. 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어서 승부를 가르자.”

  어차피 가문의 무공을 사용했으니 끝장을 봐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문의 수치로 남을 것이 자명했다. 예군이 전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국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죽일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 ‘그렇다면···.’ 판단이 선 국담은 자세를 반듯이 잡고 예군을 응시했다. ‘이제야 놈이 본색을 드러내는군. 건방진 놈. 본때를 보여주마.’ 예군이 공격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리 빨리 승부를 가르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절대고수끼리의 대결은 빈틈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이얍!”

  예군이 칼을 팽이처럼 돌리며 들어갔다. 목표물로 가까이 갈수록 칼의 궤적이 커지고 마침내 예군의 몸이 칼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상대방은 넋을 잃고 뒤로 물러나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마련이다. 공격에 빈틈이 없기에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받아치려 해도 워낙 변화무쌍하게 회전하며 들어오는 칼의 진원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함부로 칼을 휘둘러 헛방을 치게 되면 회전하는 칼날이 순식간에 몸통을 꿰뚫어 버릴 것이다. 국담 역시 예군의 칼을 막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럴 땐 공중으로 몸을 띄워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 하지만 상대방이 절대고수라면 착지하는 순간을 기다려 칼을 날릴 것이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몸이 착지하는 순간 아무리 고수라도 약간의 빈틈은 생기는 법. 국담은 그런 경우의 수를 우려하면서 몸을 날리려고 했다.

  그런데, 회전하는 칼 사이로 예군의 몸이 보였다. 예군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무공은 칼의 회전속도와 몸의 이동속도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완벽한 것인데 급한 성격이 부조화를 만든 것이다.

  “채앵”

  국담은 몸을 솟구치려다 말고 우뚝 서 예군의 칼을 그대로 받았다. 춤추는 칼의 진원지를 보지 못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국담은 예군의 칼을 튕겨낸 뒤 칼날을 뒤집어 내리쳤다.

  “억!”

  예군이 목을 잡고 쓰러졌다. 잠시 후, 예군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전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렇다면 죽지 않은 것이다. ‘칼등으로 나를 쳤구나. 저놈이 어찌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예군은 심사가 뒤틀려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칼을 다시 잡고 승벽을 부리려 했다.

  “형님, 그만 두세요. 형님이 졌습니다. 부하들이 보고 있지 않습니까.”

  예식이 말렸지만 예군은 분기를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부하들이 보고 있는 마당에 다시 공격을 하다가 패하게 되면 체면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내가 방심했지만 다음엔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예식이 일행을 이끌고 의자 앞에 섰다.

  “어라하, 무슨 일로 찾으셨나이까.”

  “성내를 더욱 철저하게 방비해야겠네. 시간이 없어. 함께 둘러보세.”

  지형이 높은 곳에 위치한 성에서는 웅진의 강이 훤하게 내려다 보였다. 강물은 성을 절반쯤 휘감고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강폭이 넓고 물이 깊었으며 산세가 가팔랐다. 다시 보아도 난공불락의 요새임에 틀림없었다. 의자는 선왕들의 역사를 회고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개로왕이 전사하고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됐다. 뒤를 이은 문주왕은 이곳 웅진으로 도망쳐 굴욕적이나마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권이 약해 선왕들은 수시로 시해됐다. 24대 동성왕이 여러 귀족들을 다독여 어수선한 나라를 정비했지만 좁은 웅진 땅에서는 백제의 옛 영화를 되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26대 성왕은 지금의 사비로 천도를 결행했다. 그리고 빼어난 지혜와 결단력으로 삼국 중 최고의 나라를 만들었다.

  의자는 성왕을 생각하며 자신감을 가지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인 무왕시대를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무왕시대에 이르러 또 다시 약해진 왕권. 의자는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강경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왕좌에 앉은 뒤 부패한 귀족들을 과감히 정리한 이유가 그것이다. 그럼으로 왕권은 다시 강력해졌으며 하나로 집중된 힘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귀족들이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분오열로 갈라져 겉으로는 의자에게 아첨을 했고 속으로는 등을 돌렸다. 그 결과 임자 같은 자는 김유신의 간자노릇까지 하며 영달을 꾀했다. 충신인 성충과 흥수 등을 죽게 한 것도 사실은 귀족들의 모함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간과했던 자신의 잘못도 컸다. ‘과연 지방의 귀족들이 한 걸음에 달려올까? 그들은 아마도 눈치를 보며 저울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존성의 흑치상지가 움직여 준다면 주변의 성주들이 합세할 것이고 그 파급효과는 전국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의자는 흑치상지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지방군의 집결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방군을 기다려야만 했다. ‘과거 문주왕께서 이곳으로 도망칠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지만 나 역시 쥐새끼처럼 도망쳐 이곳으로 왔다.’ 의자의 심장에 패배자와 쥐새끼라는 단어가 각인되며 뱃속의 장기들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어라하, 웅진성은 물자가 풍족합니다. 어라하의 말씀대로 이곳에서 버티고 있으면 지방에서 군사들이 모여들 겁니다. 그들과 함께 연합군 놈들을 들이친다면 놈들은 보급로가 끊겨 몰살당하게 됩니다.”

  예식이 의자의 기분을 맞추었다. ‘정말로 그리만 된다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왕을 도와 나라를 다시 일으킨 일등공신이 된다. 그럼으로 우리 가문은 백제최고의 명문인 8대 성씨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 때와는 확연히 다르다. 나라 안의 권력쟁탈전이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에서 도성을 빼앗긴 상황이다. 더구나 중원의 패권국인 당나라와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신라가 연합을 했으니 당할 수가 없다.’ 예식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앞서가던 국담이 발길을 멈추었다.

  “어라하, 예식방령의 말처럼 이곳 웅진성에는 병장기와 각종 생활물자가 풍족한 것 같습니다. 상인들은 주판을 이용해 정확한 계산을 함으로 상거래 또한 야무지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활물자를 저장할 창고가 부족해 보입니다.”

  국담의 지적은 정확했다. 일반 백성들은 시장에서 상거래를 통해 생활물자를 확보한 뒤 개별창고에 보관하지만 이렇다 할 공동저장고가 없었다. 성내에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려면 군수품이나 식량 등을 보관할 창고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더구나 당시 백제는 개병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 군호의 백성들을 군대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들이 군대로 들어오면 지금보다 몇 배나 많은 물자가 필요할 것이다. 국담은 이런 점을 감안해 대형 저장고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국 달솔의 말이 맞네. 웅진방령은 즉시 저장고를 짓도록 하시오. 저장고가 다 지어지면 우선 성내 백성들을 대상으로 군사를 차출하고 성 밖에서도 군사들을 모집해야할 것이오.”

  전시에 떨어진 명령은 즉시 시행해야 한다. 계획을 세워 준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준비가 철저하지 않으면 허술한 결과물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백제의 장인들은 고구려와 신라를 넘어 멀리 왜와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기술의 탁월함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웅진성의 장인들은 예식의 명령에 따라 저장고를 짓기 시작했다. 일단 어른 열 명이 들어가서 생활해도 될 만큼 땅을 사각으로 깊게 팠다. 골조는 통나무를 이용했는데 필요한 부분을 끌로 파내 얼기설기 단단히 박아 넣었다. 그런 다음 판자를 켜켜이 덧대고 못을 박았다. 못과 망치역시 나무였음으로 창고는 순전히 나무로만 지어진 것이다. 창고는 이동이 편리한 중요지점 곳곳에 배치했다. 그럼으로 유사 시 필요한 물자를 가장 빨리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점심 무렵부터 시작된 이 공사는 겨우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웅진성 백성들이 하나같이 기술자인데다가 나라를 살리고자 하는 애국심이 투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 자랑스럽고 대단한 나의 백성들이로다.’ 의자는 공사의 진행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며 감개가 무량했다.

  “저 창고에 지붕을 만들어라.”

  의자의 명에 따라 장인들은 뚝딱뚝딱 지붕을 만들어 씌웠다. 완성된 창고를 보니 그럴듯한 집처럼 보였다.

  “저 창고는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으니 이름을 목곽고로 정한다. 이제 저 안에 필요한 물자를 차곡차곡 저장해 두어라.”

  비록 급조된 목곽고(주석2)였으나 의자가 보기에 매우 훌륭했다. ‘나라가 안정되면 저 목곽고를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하여 백성들을 평안케 하리라.’ 반나절 만에 수십 개의 목곽고가 완성되자 휘영청 밝은 달이 배롱나무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세상은 환했고 저수지의 개구리들이 합창을 해 모처럼 한여름 밤의 정취를 만끽할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웅진성내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은 의식의 자유로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라는 단일의식으로 꽁꽁 동여매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그런 와중일지라도 생각을 달리하는 집단은 언제든 존재한다. 그들은 백성을 선동해 조국을 신앙처럼 받들게 하며 자기들 멋대로 조국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영광을 부여한다. 그들은 바로 예식을 중심으로 한 웅진성의 지배층들이었다.

 

  지금, 달빛을 받아 숭고하게 빛나고 있는 배롱나무아래 예식과 예군 그리고 웅진성의 지배층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선택을 하기위해 회합을 했지만 예식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지는 이미 결정이 난 듯 했다. 예식은 하루 종일 왕의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머릿속 뇌구조는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온몸에 곤충 같은 더듬이가 돋아 사방팔방으로 쉴 새 없이 꼬물거리는 것 같았다. 예식을 따르는 웅진성의 지배층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의자의 명에 따라 목곽고 짓는 일을 거들면서도 틈만 나면 자기들만의 비밀스런 눈짓을 주고받았다. 70을 바라보는 의자는 결사항전의 각오로 국난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웅진성 깊은 곳에서는 새로운 힘을 따르는 무리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방령, 의자와 그의 수하들이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연합군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오늘 밤에 선수를 쳐 어라하를 잡아 바칩시다.”

  왕을 잡아 바친다. 그들의 목적이 정확하게 드러나는 말이었다. 예식의 고민 역시 그 말에 함축되어 있었다. 예식과 웅진성의 지배층들은 조국을 배신하고 왕을 포로로 잡아 나당연합군에 넘길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방령, 그렇게 하게. 우리와 우리 가문이 살 길은 그것뿐이네.”

  “형님, 우리는 지금 나라를 배신하려 하고 있습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자칫 지방군이라도 집결하면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됩니다. 더구나 저 국담이라는 놈과 그의 수하들은 만만치 않습니다.”

  “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아 탈이야.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일세. 때를 놓쳐 실기를 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

  “방령,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들이치면 될 일입니다. 설사 지방군이 오더라도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 밤에 선수를 쳐 어라하를 들어 바치면 모든 일은 끝납니다. 예군장군의 말처럼 연합군 놈들에게 이 성을 뺏기게 되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글쎄, 좀 더 두고 보자니까 그러네.”

  군관들의 말에도 예식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선이 예식을 가문의 대표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침착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구름을 따라 구르던 달이 예식일행의 머리위로 꼿꼿이 섰다.

  “에이, 알겠네. 방령 말대로 좀 두고 보지. 일단 가서 자세.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알려라.”

  예군은 군관들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갔다.

  “어서 가서 척후병을 불러오라.”

  매사 주도면밀했던 예식은 척후병을 웅진성 밖 전방으로 보내 나당연합군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사비성으로는 이미 세작을 들여보내 유사시 즉시 알리도록 조치해 두었다. 세작으로 발탁된 자는 바람사냥꾼 비사도리였다. 예식은 비사도리가 의자의 파천소식을 들고 오자마자 뇌물을 주고 협박을 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우연히 오줌을 누다가 예식일행의 음모를 듣게 된 백고가 살금살금 기어 국담을 만나러 갔다.

  *

  부여태가 항복을 한 뒤 사비도성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무리 숫자가 많은 나당연합군이라 해도 하루 밤 만에 무너질 성이 아니었다. 죽기로 버텼으면 적어도 사 나흘 이상은 연합군의 발목을 잡아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소정방은 사비성을 점령하자마자 의자를 찾았다. 하지만 의자는 보이지 않고 부여태가 왕권을 이어 받았다고 박박 우겨댔다. 부여태의 말에 소정방과 김유신은 잠깐 혼란스러웠으나 부여효의 적자인 문사와 여러 왕자들이 일러바쳐 부여태는 졸지에 사기꾼이 되었다. 의자를 잡지 못한 소정방은 길길이 날뛰었다.

  “의자가 도망을 쳤소. 쥐새끼 같은 놈. 백성들을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을 치다니. 어서 의자를 잡으러 갑시다.”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해서 전쟁이 종식된 건 아니다. 백제의 왕인 의자를 잡아야만 전쟁을 완전히 마무리 짓는 것이다. 김유신 또한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김유신은 침착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소. 잠시나마 이들을 쉬게 하고 욕구를 충족시켜 줘야 하오.”

  “욕구? 그렇군! 하기야 제깟 놈이 도망쳐 봐야 독안에 든 쥐지.”

  의자를 잡으러 갈 것인가, 군사들과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 상황으로 봐서는 의자를 잡는 것이 우선일 것이나 사비점령 후 약탈을 허락했던 소정방이었다. 김유신의 결정에 소정방은 대단히 좋아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한 군사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즐거움은 바로 전리품이다. 더구나 사비는 백제문화의 집결지이다. 그럼으로 사비의 전리품은 곧 백제였던 것이다.

  “아! 생각만 해도 즐겁구나. 백제를 통째로 들어 황제께 바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당 황제 이치를 생각하니 전리품에 대한 소정방의 즐거움은 배가됐다. 소정방이 들뜨자 김유신은 실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 저놈은 엄청난 노략질을 해댈 것이다.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정도껏 해야 합니다.”

  “당연하지요.”

  이로써 연합군에 의한 사비의 대 약탈이 시작되었다. 약탈에는 당군이나 신라군이나 차별이 없었다. 하지만 신라군은 김유신의 명에 따라 정도껏 욕구를 충족시켰다. 약탈을 하되 사람을 해하지는 않았다. 동족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당군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물건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취했다. 당군의 약탈행위는 악마들의 그것과 같았다.

  능욕을 피하기 위해 사비의 여자들이 집단으로 도망을 쳤다. 그들은 사비성을 탈출해 산과 들로 뛰었다. 그 뒤를 당나라 군사들이 개침을 질질 흘리면서 쫒았다. 그 모습이 마치 발정 난 수캐가 도망치는 암캐를 쫒아 죽자 사자 달려가는 것 같았다. 힘에 부친 여자들이 쓰러지면 그대로 펄쩍뛰어 덮쳤다. 무작정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터질 듯 유방을 주물렀다. 그런 다음 즉시 치마를 걷어 올려 더러운 이물질을 마구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놈들은 더욱 미쳐 날뛰었다. 갑자기 초능력이 생겼는지 앞서 도망치는 여자들을 순식간에 따라 잡았다. 사람약탈이 시작 된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사비의 산과 들에는 여자들과 당나라 군사들이 엉겨 붙어 엎치락뒤치락 거렸다. 다행히 잡히지 않은 여자들은 산꼭대기와 강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보이는 건 벼랑과 시퍼런 강물뿐이었다. 씩씩거리며 뒤쫓아 오던 당나라 군사들은 보일 듯 말듯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드디어 군사들이 배설구를 찾아 남상거렸다. 순간 여자들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강물로 인한 두려움은 깡그리 잊어 버렸다. 야수로부터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강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벼랑에서 뛰어 내리는 여자들의 치마가 백합처럼 활짝 퍼졌다. 강가의 여자들은 성큼성큼 강물 깊숙이 들어가 배주룩이 목만 보였다.

  찬란하게 꽃피웠던 백제의 문화유산이 연합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방화에 짓밟히자 김유신의 심정은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소정방을 탓할 수도 없었다. 왕궁을 점령한 소정방은 백제 왕실의 보물들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정방은 백제 왕실의 진귀한 물품들을 모조리 꺼내 물품목록을 작성하라는 명을 내렸다. 소정방은 백제 왕실의 보물들을 모조리 장안성으로 쓸어가려고 작정했다. 김유신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처참하게 희생당한 사비성의 백성들. 신라는 이러한 꼴을 보려고 출정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김춘추의 개인적 복수심이 있었으나 크게는 삼한통일의 대업을 완수해 삼한 백성들을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구제하고자 하는 대의가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이 싸늘하게 널려있는 백제 백성들의 시신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태자 김법민이 찾아왔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당장 가서 소정방 놈의 목을 칩시다.”

  “태자마마, 분기를 가라앉히십시오. 우리에겐 삼한통일이라는 대의가 있지 않습니까.”

  “백제의 백성들도 삼한의 백성입니다. 그들을 지키는 것도 대의란 말입니다.”

  “태자마마, 알겠습니다. 신이 지금당장 소정방을 만나보겠습니다.”

  “내 반드시 놈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복수를 할 것입니다.”

  태자의 말을 뒤로하고 김유신은 소정방을 찾아갔다.

 

  “더 이상의 살육과 약탈을 하면 당신들과 여기서 전쟁을 치르겠소.”

  감히 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협박에 소정방은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김유신의 성질을 잘 알고 있기에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좀 살살 하라고 해라.”

  무법천지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뺏는 일은 아주 쉽다. 또한 이미 약탈의 맛을 알게 된 군사들을 일시에 제어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소정방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살살 하라니요. 아예 멈추게 하라니까요.”

  “저들의 욕구를 한꺼번에 뺏을 수는 없소. 하루 이틀 더 기다리면 잠잠해질 것이오.”

  노략질에 쏠쏠한 재미를 느낀 소정방은 급할 것이 없었다. 웅진성은 코앞에 있고 대군을 몰아 쓸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소정방에게는 군사들의 사기와 당 황제에게 환심을 살 전리품이 더 크게 보였다.

  ‘의자는 언제 잡으러 간단 말인가.’ 김유신은 답답하기만 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칠 리는 없겠지만 백제의 지방군이 움직인다면 전세가 불리해질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비성 점령 즉시 웅진성으로 달려가는 것도 무리는 무리였다. 소정방의 생각처럼 군사들의 사기도 끌어올려야 했고 웅진으로 가는 동안 있을지 모르는 백제군의 매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대단한 실수가 됐지만 김유신은 군사들의 욕구충족을 이유로 잠시 숨을 고르려 했던 것이다. 김유신은 척후병을 보내 웅진성으로 가는 길목을 세심히 살펴보도록 했다.

 

 *주석*

 1)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刕氏)·해씨(解氏)·정씨(貞氏) 또는 진(眞)씨·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

 2)2014년 9월, 문화재청이 충남 공주 공산성에 대한 제7차 발굴조사에서 발견. 목곽고의 크기는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이며, 너비 20~30㎝ 내외의 판재를 기둥에 맞춰 정교하게 조성했다. 바닥면에서 벽체 상부까지 부식되지 않고 조성 당시 모습 그대로의 원형이 남아 있다. 공주 공산성 백제 목곽고 내부에서는 복숭아씨와 박씨가 다량 출토됐다. 이와 함께 무게를 재는 석재추와 생활용품인 칠기, 목재망치 등의 공구도 수습됐다. 석재추는 원형으로 중앙에 고리가 있으며, 무게는 36g이다. 칠기는 목재를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표면에 옻칠이 정교하게 되어있다. 또 나무망치를 비롯하여 목재공이와 손잡이, 목재가공품 등이 수습됐다. 그동안 백제 유적에서 목곽고는 대전 월평동 산성, 부여 사비도성 내에서도 발굴됐지만 심하게 훼손돼 있었으며, 하단의 바닥과 50㎝ 내외 높이의 벽면만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공산성 목곽고는 상부 구조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목조 건축물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으며, 당시의 목재 가공 기술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백제시대 건물 복원과 연구 등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22 백제의 한, 스토리야 k노블 마지막 연재작 2017 / 12 / 11 232 0 4661   
21 백제의 한 2017 / 12 / 9 243 0 7135   
20 백제의 한 2017 / 12 / 8 255 0 16936   
19 백제의 한 2017 / 12 / 7 256 0 7909   
18 백제의 한 2017 / 12 / 6 255 0 11449   
17 백제의 한 2017 / 12 / 5 263 0 6549   
16 백제의 한 2017 / 12 / 4 260 0 13536   
15 백제의 한 2017 / 12 / 4 232 0 12463   
14 백제의 한 2017 / 12 / 3 240 0 6775   
13 백제의 한 2017 / 12 / 3 254 0 13611   
12 백제의 한 2017 / 12 / 2 276 0 4059   
11 백제의 한 2017 / 12 / 2 273 0 10853   
10 백제의 한 2017 / 12 / 1 264 0 6167   
9 백제의 한 2017 / 12 / 1 255 0 9794   
8 백제의 한 2017 / 12 / 1 248 0 8730   
7 백제의 한 2017 / 11 / 30 267 0 17194   
6 백제의 한 2017 / 11 / 30 248 0 19844   
5 백제의 한 2017 / 11 / 30 267 0 6760   
4 백제의 한 2017 / 11 / 30 248 0 19474   
3 백제의 한 2017 / 11 / 30 302 0 26230   
2 백제의 한 2017 / 11 / 29 295 0 17760   
1 백제의 한 2017 / 11 / 29 444 0 1824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