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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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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1-30 16:31     조회 : 247     추천 : 0     분량 : 19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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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파 천

  국담은 둔탁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상의 피 냄새를 맡은 날짐승들이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회오리바람처럼 전신을 휘감아 정수리로 솟구쳤다.

  “어라하, 소신은 수도방위대장을 모시는 국씨집안의 담이라고 합니다. 수도방위대장을 모시고 결사항전 했으나 오천 명이상이 전사했습니다.”

  “뭐, 뭐라고? 미추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서 나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곳이 뚫리면 적들은 순식간에 이곳 사비성으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파천을 하셔야 합니다.”

  “무슨 소리, 왕이 도성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어라하!”

  국담은 긴박한 현재의 상황과 미추의 간곡한 명령 등을 함축적으로 설명했다. 의자는 설명을 듣는 동안 국담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피로 번득이는 얼굴에 어린 지옥 같은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긴박한 상황임에 틀림없구나. 저 녀석이 이무기를 없앴다는 국표의 아들이란 말이지. 미추가 저 녀석을 보냈다면 믿을 만하다.’

  “그대가 저 못된 항복파 놈들의 목을 친 국표의 아들 담이로군. 서 나성에서 이곳은 코앞이다. 미추가 어느 정도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남은 군사들이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지만 한 나절도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나절이라. 알겠네. 미추의 말대로 웅진성으로 가세. 태는 어디 있는가. 좌평들과 함께 들라하라.”

  의자는 왕자인 부여태를 불렀다. 사비성을 그대로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가 사비성에서 버티는 만큼 지방군을 기다리는 시간도 번다. 웅진성을 사수하고 있으면 임존성의 흑치상지를 비롯한 각지의 성주들이 집결할 것이다. 그들과 연합을 한 뒤 사비성을 되찾으면 된다.’ 의자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부여태가 여러 왕자들을 대동하고 의자 앞에 섰다. 왕자들 틈에는 태자 효(주석1)의 아들 문사도 있었다.

  “모두들 들어라. 지금 백제의 운명이 벼랑 끝에 몰려 있다. 미추가 서 나성에서 연합군 놈들을 막고는 있지만 한 나절도 버틸 수 없다고 한다. 그들과 대적하는 우리 군사들 대부분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연합군 놈들이 이곳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이제 너희들 차례다. 너희들은 그동안 이 나라의 왕자로서 호사를 누렸으니 지금부터는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너희들이 버티는 동안 나는 웅진성으로 가서 지방군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들도······.”

  의자는 부여태를 비롯한 왕자들이 사비성 수성을 위해 죽음으로 항전할 것을 명했다. 또한 귀족들에게는 소정방과 화친을 위한 노력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화친외교지 사실은 죽을 각오로 시간을 벌어보라는 명령이었다. 그러자 부여태가 나섰다.

  “어라하, 어라하의 말씀대로 저는 이곳에 남아 결사항전 하겠습니다. 하지만 죽음에도 명분이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바에야 저는 백제의 왕으로 죽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어라하께서 웅진성으로 파천하시는 동안 저는 백제의 왕으로서 사비성을 지키겠습니다. 놈들에게 잡혀 죽는 순간에도 저는 놈들에게 제가 왕위를 전수받았다고 주장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어라하를 잡으려고 혈안이 된 놈들을 헛갈리게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놈들이 그 말을 믿겠느냐?”

  “믿거나 말거나, 이 계책이 잠시나마 놈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시간을 버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여태의 말은 일견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른 왕자들, 특히 태자의 장자인 문사는 잔뜩 의심을 하고 부여태를 꼬나보았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놓여있는 순간에도 왕자들의 생각은 각자가 달랐다. 이때 의자의 서자로서 늘 찬밥취급을 당하던 부여궁이 구시렁댔다.

  “자기는 백성들과 도성을 버리고 피신하시면서 우리는 남아 죽으라는 말이군.”

  주의력이라곤 늙은 곰보다도 못했던 부여궁이었다. 그런 그가 다급한 상황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는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렷했다. 그렇지 않아도 참담한 마당에 부여궁의 비아냥거림은 의자의 심장에 대못을 박았다.

  “이런 멍청한 놈! 그렇게도 천지분간을 못한단 말이냐. 네 눈에는 내가 나만 살겠다고 파천을 하려는 것으로 보이더냐. 네놈은 이 사비성에서 죽을 가치도 없다. 저 놈을 사절로 보내라. 가서 항복을 하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

  의자는 부여궁을 사절단 대표자로 앞세워 소정방에게 보내기로 했다. 술과 안주를 풍성하게 준비해 철군을 요청해 보라는 것이었다. 이 결정은 분명 비겁하고 요청이 받아들여질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벌어보려는 의자의 계산에 따른 결정이었다.

  *

  발그레한 석양이 사비의 강에 나부죽이 엎드릴 즈음, 서 나성의 미추는 남은 군사들의 절반이상을 잃고 끝까지 남아 항전하고 있었다. 나당연합군은 나성의 문을 부수고 미추군과 각개전투를 벌였다.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였다. 성문을 부수고 전투가 시작 된지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미추의 군사는 천명도 남지 않았다. 그 와중에 십여 명의 군사들이 도망을 쳤지만 나머지는 전쟁터를 굳건히 지켰다. 그들의 모습은 눈물겨울 정도로 비장했다. 도망친 군사들 중 국담의 친구인 백고도 있었다. 백고는 전쟁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함이라는 스스로의 명분으로 측근들과 멀리서 관망만하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이제 미추군은 군관 백여 명만 생존했을 뿐 모두가 전멸했다. 미추와 군관들이 연합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아무리 일당백의 군관들이라지만 수백 겹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일렬로 늘어서서 커다란 원을 만들어라.”

  최후의 진법이었다. 미추는 소수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쓰는 진을 짜라고 조용히 명령했다. 이 전법은 숫자가 적은 입장에서 가장 효율적이기는 하나 결국엔 퇴로를 뚫지 못해 전멸하거나 생포되고 만다. 그야말로 최후의 항전인데 미추는 이 전법으로 가능한 시간을 벌려고 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대군을 보유하고 있는 소정방의 입장에서는 어린아이의 객기로만 보였다.

  “저것들이 생 지랄을 하는구먼. 저것들의 속셈에 놀아나지 말고 그냥 화살을 날려버립시다.”

  소정방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하지만 김유신의 마음은 달랐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한 조상의 뿌리요 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비록 적이지만 나라를 향한 충의와 의기가 하늘을 감동시키고도 남습니다. 대총관께서도 무인 아니십니까. 같은 무인으로서 무인답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줍시다.”

  너무도 멋진 김유신의 말에 소정방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소정방 역시 대륙의 무장으로 의리가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소정방의 명에 따라 연합군 군사들은 서서히 미추군을 옥죄어 들어갔다. 그럴수록 백제싸울아비들의 칼과 창끝은 예리하게 곧추섰다.

  “일제히 공격하라!”

  소정방의 명령이 떨어지자 연합군 군사들이 쭈뼛쭈뼛 미추군을 향해 다가섰다. 미추의 칼이 바람살을 일으켰다. 공을 세워보겠다고 미추를 목표로 칼을 겨누었던 신라 병사의 목이 순식간에 떨어졌다.

  “진을 이탈하지 마라!”

  미추는 진을 더욱 굳건히 한 뒤 연합군 군사들을 가차 없이 베고 또 베었다. 백제의 군관들 역시 신라와 당나라군사 삼백여 명을 쓰러뜨렸다.

  “안 되겠소. 이러다가는 아까운 군사들만 다 죽이겠소.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니요?”

  “그, 그렇게 하시지요.”

  ‘더 이상의 명분은 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실로 대단한 결기로다. 저 자들 중에는 그 때 그 자가 있을 텐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저들 중에 그 자가 있다면 창칼로는 쉽게 제압하기 힘들다.’ 김유신은 국담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 물러서라. 지금부터 화살로 공격한다.”

  소정방과 김유신이 입을 맞추자마자 연합군 궁수부대가 진을 갖추었다. 궁수부대를 본 미추가 급하게 명을 내렸다.

  “방패를 들고 열을 다시 만들어라. 일렬은 앉고 이열은 서서 방패로 화살을 막아라. 나머지는 원 안으로 들어와서 방패를 들어라!”

  거대한 우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미추군의 방패위로 화살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어찌나 많이 쏘아 대었는지 방패에 꽂힌 화살이 무거울 정도였다. 두 번째 궁수부대가 활을 들고 쏘았다. 방패는 이제 너덜너덜해졌다. 세 번째 궁수부대의 화살에 백제 군관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정말 저들을 다 죽일 작정이오. 그냥 포로로 잡아두는 것이···.”

  김유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민의 눈빛을 보냈다. 또 국담을 생각한 것이다.

  “이 마당에 포로는 무슨 포로요. 저들은 애초에 죽을 각오를 했소. 살려두었다가는 우환만 될 것이오. 그냥 죽여 버립시다.”

  더 이상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네 번째 화살이 날아들자 방패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네 번째 화살에 백제군관 절반이상이 쓰러져 고통스러워했다. 다섯 번째 화살이 날아들면 전멸을 면치 못한다. 돌아가는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한 백제의 군관 중 한명이 소리쳤다.

  “미추장군을 온 몸으로 보호하라!”

  군관들은 미추가 미처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날렸다. 미추를 덮은 군관들을 멀리서 보니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그 광경을 지켜본 김유신은 계백의 죽음을 생각했다. 계백이 죽을 때도 저랬다. 백제의 왕이나 귀족들은 썩었어도 백제 무사들의 정신은 의롭고 충연하구나. 무차별적인 다섯 번째 화살공격이 끝났다. 미추를 덮은 백제 군관들의 등에는 화살잔디가 빼곡히 자라났다. 잠시 후, 사방으로 무덤이 열렸다. 화살잔디덕분에 살아남은 미추와 몇 명의 군관들이 무덤을 뚫고 나온 것이다. 미추의 눈에 핏발이 섰다. 미추는 온몸의 근육을 목으로 끌어 모아 소리쳤다. 그 소리가 얼마나 웅장하던지 연합군 군사들은 물론 산천초목이 벌벌 떨 정도였다.

  “이놈, 소정방! 김유신! 나와 당당히 겨루어 결판을 내자. 자신이 없는가!”

 ‘아! 정말로 아까운 장수로다. 백제에 계백말고 저런 장수가 또 있었던가.’ 김유신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미추의 기백에 존경심이 일었다.

  “저들을 포로로 잡읍시다. 쓸모가 있을 것 같소.”

  김유신은 미추와 함께 남은 군관들 중 국담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저 놈의 기세는 산이라도 뽑아 올릴 것 같소. 지금 상태로는 저 놈을 당할 수가 없소. 일단 그물로 잡고 봅시다.”

  소정방의 명령에 따라 그물이 날아들었다.

  “피슝 피슝”

  미추는 칼과 창으로 날아드는 그물을 걷어냈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씌워지는 그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미추와 군관들은 결국 그물에 잡힌 물고기신세가 되었다. 미추를 잡은 소정방은 김유신과 생각이 달랐다. 김유신은 미추와 국담 등을 살리고 싶었지만 소정방은 그들을 무척 위험한 인물로 보았다. 저런 기개를 가진 자들은 절대로 포섭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이 소정방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저들을 활로 잡는다.”

  의지가 확고한 소정방이 나지막이 명령하자 김유신이 다시 한 번 청을 넣었다.

  “포로로 잡아 두는 것이···.”

  “살려두었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 결국 아까운 자들이 죽는구나. 미추라는 장수도 아깝지만 저들 중 그자는 대체 누구일까.’ 김유신이 국담을 아쉬워하는 동안 소정방의 명이 떨어졌다.

  “쏴라!”

  화살은 미추와 남은 군관들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미추는 무릎을 꿇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오른손에 단단히 묶은 칼은 지팡이가 되어 미추를 지탱해 주었다.

  “더 쏴라, 더 쏴!”

  끝내 쓰러지지 않는 미추를 보고 소정방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지겹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한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소정방을 괴롭혔다. ‘저런 자를 내 손으로 죽여야만 하다니.’ 화살이 미추의 몸 구석구석에 박혔다. 쓰러지지 않는 미추의 눈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위대한 백제 만세!”

  미추는 온 몸에 정기를 끌어 모아 ‘위대한 백제 만세’를 외친 뒤 그대로 고꾸라졌다.

 

  미추군을 완전 소탕한 나당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사비도성으로 진군했다. 벌판너머 가까운 거리에 사비백성들의 집이 보이고 집들 한 가운데로 넓고 길게 뻗은 대로가 있었다. 어림잡아 3만 가구이상으로 집들은 큰길 양옆으로 늘어져 있었는데 큰길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길들이 반듯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사비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촌락공동체가 아니라 뛰어난 도시계획가가 야심차게 만들어낸 작품임에 틀림없었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삼국 중 가장 작은 땅을 가진 나라의 도성이 이렇듯 방대하다니. 사비는 우리 신라나 고구려의 도성보다 더 웅대하고 찬란하다.’ 김유신은 백제의 도성인 사비의 위용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총관, 저 대로 끝을 보시오. 산자락을 감싸고 쌓은 저 거대한 성, 저곳이 바로 의자가 있는 사비성이오. 이제 백제의 왕만 잡으면 전쟁은 끝입니다.”

  “그렇소이다. 서둘러 갑시다. 빨리 가서 이 전쟁을 마무리 지읍시다.”

  소정방과 김유신은 전군의 맨 앞으로 나아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미추군을 일망타진함으로써 커다란 위험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비성을 함락시켜야 하지만 대규모 병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저건 뭐요.”

  김유신이 바짝 긴장을 하고 큰길이 시작되는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용이 그려진 황색깃발을 펄럭이며 수백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의직과 미추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며 소정방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것들이 또 무슨 수작을 꾸미려고. 전군은 전투태세를 갖춰라!”

  소정방의 명에 따라 전군이 우뚝 멈추어 섰다. 연합군 군사들은 자기들끼리 지겨운 놈들, 징그러운 놈들, 무서운 놈들, 이라는 말을 돌려가면서 했다. 하기야 지겹고 징그럽고 무서울 만도 했다. 황산벌의 계백부터 의직과 미추까지, 그들은 모두 조족지혈의 군사로 십팔만 대군과 당당히 싸워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미추가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김유신의 머릿속에 거미줄이 쳐졌다. 그는 가만히 실눈을 뜨고 대로를 응시했다. 그런데 황색깃발 속에 하얀 깃발이 보였다. 그 깃발은 항복을 상징하는 표시였다.

  “대총관, 저건 항복의 표시가 아닙니까?”

  항복을 의미하는 깃발이 틀림없었다. 대로를 따라 오고 있는 백제 사람들은 의자의 미움을 산 부여궁과 외교사절단이었다. 사절단에는 국표를 비롯한 세 명의 귀족도 포함되었다. 사절단은 소정방과 김유신에게 바칠 술과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타났다.

  “네놈들은 뭐냐?”

  “대총관, 저희들은 백제 어라하를 대신해 온 사절입니다. 작은 나라가 대국 황제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백제를 살려주십시오.”

  부여궁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며 싹싹 빌었다.

  “이런 벨도 없는 머저리 같은 놈들. 그런다고 우리가 철군을 할 것 같으냐. 이깟 음식들은 다 뭐냐. 우리가 이거나 먹고 돌아갈 것 같더냐?”

  소정방이 술과 음식을 발로 걷어찼다. 벌벌 떨며 음식을 들고 있던 백성들은 음식을 땅에 내려놓고 도망치기 바빴다.

  “네놈이 백제의 왕자고 네놈들이 귀족이란 놈들이냐? 네놈들은 그동안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잘 먹고 잘 살았겠지. 살기위해 비겁한 짓 그만두고 그만 죽어라. 계백과 미추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들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더냐?”

  부여궁과 귀족들이 아무리 죄를 빌면서 철군을 요청해도 소정방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백제의 왕인 의자와 귀족들을 조롱하며 사절들을 실컷 가지고 놀았다. 부여궁은 칼춤을 추며 위협을 하는 연합군 무사의 발아래 엎드려 살려달라고 읍소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귀족들도 납작 엎드려 읍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표만큼은 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반듯한 자세를 유지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한 사람처럼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김유신이 국표에게 다가갔다.

  “그대는 누군가.”

  “대 백제의 좌평 국표라고 하오.”

  “그대는 왜 살려달라고 빌지 않는가.”

  “어차피 죽을 목숨 구차하게 빌어서 무엇 하겠소. 먼저 간 백제의 군사들처럼 나 역시 이곳에서 떳떳이 죽을 것이오. 죽이려면 어서 죽이시오.”

  “백제가 이런 처지에 놓인 원인은 저런 한심한 귀족들 때문이었는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은가 보오. 당신 같은 귀족도 있으니 말이오.”

  “우리 백제는 본시 흥망계절의 정신을 이어받은 나라요. 어쩌다가 문란한 귀족들에게 휘둘리게 됐지만 정신은 절대로 죽지 않소. 사비를 함락시키고 우리 어라하를 죽인다한들 백제인들의 가슴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그 정신은 결코 빼앗지 못할 것이오.”

  국표의 입에서 흥망계절의 정신(주석2)이라는 말이 나왔다. 김유신은 흥망계절의 정신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흥망계절의 정신이라면 의자를 잡는다 한들 백제를 완전히 멸하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가 다시 일어나 백제의 부흥운동을 전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이고 뭐고 싹 쓸어버리면 그만이다. 저 놈의 세치 혀에 휘둘리지 말고 모조리 죽여 버려라. 지겹다, 지겨워.”

  “대총관, 저 자는 죽이기에 아까운 인물이오. 백제의 정신을 올곧게 이어받은 사람이란 말이오. 저런 자를 이용하면 훗날 민심을 수습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오.”

  백제의 부흥운동을 염려한 김유신의 포석을 소정방은 깡그리 무시했다.

  “도움이고 뭐고 거추장스런 것들은 싹 죽여 버리고 갑시다. 뭐가 그리 복잡해. 저것들을 단 칼에 죽여라!”

  소정방의 명령에 칼을 잡고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춤을 멈추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잘린 목들이 하나 둘 땅바닥에 굴러 다녔다. 백제의 정신을 올곧게 이어받은 마지막 충신 국표가 죽는 순간이었다.

 

  사절단의 처참한 죽음은 백고에 의해 고스란히 의자에게 전달됐다. 백고는 서 나성의 상황을 의자에게 보고하러 숨어 들어가던 중 사절단의 참상을 보았다. 백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사비성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라하, 수도방위대장과 군사들이 전멸하고 사절단 모두의 목이 떨어졌습니다. 놈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서둘러 피신하셔야 합니다.”

  소식을 들은 국담의 몸이 움찔하며 눈에 핏발이 섰다.

  - 어차피 애비는 죽을 것이다. 나의 죽음에 네가 동요한다면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 지금은 집안이나 개인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나라가 우선이다. 나라를 위해 반드시 어라하를 피신시켜야 한다.

  국담은 아버지의 간곡한 당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괴성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 으아아~ 으아아~”

  국담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존경하는 상사를 잃어버린 청년의 심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국담은 의자의 파천이고 뭐고 무조건 달려가 소정방과 김유신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 때 미추와 국표의 꾸지람이 들려왔다.

  -국 내솔, 자네는 마지막으로 남은 백제의 영웅일세. 내가 자네를 살리고자 했던 이유를 모르겠는가. 자네는 끝까지 살아남아 어라하를 보필해야 하네. 어서 정신을 차리고 어라하를 웅진성으로 모시게.

  -이런 못난 놈,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인정을 버리라고 그리도 신신당부 했거늘. 이 애비는 죽을 자리를 찾아 간 것뿐이다. 이 애비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시간이 없다. 어서 어라하를 모시고 사비성을 빠져 나가도록 해라. 그 길만이 망해가는 백제를 다시 살릴 수 있다.

  미추와 국표의 음성이 가물가물 해질 즈음 가문의 보검이 부르르 떨며 푸른빛을 발산했다. 빛을 보자 신기하게도 국담의 마음이 안정감을 찾았다.

 

  국담이 마음을 다잡고 의지를 다지는 동안 의자는 빠른 걸음으로 성내 곳곳을 둘러보며 방비에 만전을 기했다. 왕자인 부여태에게 거짓왕권을 주고 태의 주도하에 성을 사수토록 했다. 부여태에게 왕권을 주자 문사와 여러 왕자들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의자의 완곡한 명령에 토를 달수는 없었다.

  국담에게 아버지와 미추의 죽음은 이제 슬픔이나 분노보다는 한 가지 목표만을 요구했다. 의자를 피신시켜 후일을 도모하는 것. 결심이 선 국담은 “이제부터는 제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어라하를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벼슬은 비록 육품 내솔이지만 수도방위대장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터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라하를 즉시 웅진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웅진성은 벼랑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곳에서 버티면 지방군이 모여들 것입니다. 그들과 연대해 이 사비성을 다시 탈환하면 됩니다.”

  “웅진성의 성주는 누구인가.”

  “북방령 예식입니다.”

  “그자는 이곳 사비성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내게 달려오지 않았다. 그를 어떻게 믿고···.”

  “지금으로써는 그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라도 배신을 한다면 나는 물론 사직이 완전히 무너진다.’ 의자는 잠시 예식의 집안을 생각했다.

  예식은 조부 때부터 좌평벼슬을 한 백제의 신흥귀족이었다. 예식의 조부인 예다와 부친인 사선은 의자의 아버지 무왕 때도 웅진성을 지키고 있었던 웅진의 유력가문이었다. 더구나 무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거나 수도인 사비를 중건할 때 등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웅진에 머무른바 있었다. 그 때마다 예식의 집안에서 왕을 적극 보필했다. 이러한 이유로 웅진은 백제의 임시 수도나 마찬가지였고 언제나 물자가 풍족했다. 의자는 예식의 집안이라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의자가 예식의 집안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았으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예씨가문이 오늘날 백제의 신흥귀족으로 자리를 잡게 된 데는 예식의 할아버지 예다 때부터이다. 뛰어난 지략가였던 예다는 법왕이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예다는 당시 중앙정계로 진출하지 못한 지방 신흥세력의 일부였지만 과감히 장계를 올려 법왕의 신임을 얻었다. 장계의 핵심내용은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는 살생금지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사람은 물론 가축들마저 함부로 죽일 수 없게 되었다. 선왕이자 형이었던 혜왕이 즉위 일 년 만에 시해를 당하고 일본에 볼모로 잡혀있던 아좌태자가 호시탐탐 왕좌를 노리고 있던 형국에서 법왕이 선택한 카드는 바로 무장해제라는 선수였던 것이다. 전쟁과 반란의 위기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법왕은 예다를 좌평으로 임명하고 예씨가문을 중앙정계로 진출시켰다. 하지만 법왕은 결국 백제를 중심으로 삼국통일을 꿈꾸던 무왕의 추종세력에게 시해를 당하고 말았다. 법왕을 시해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예식의 아버지인 사선이었다. 사선은 자신의 아버지가 법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세력이 무왕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간파하고 사실을 예다에게 알렸다. 이에 예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무왕을 도와 거사를 결행하라는 명을 내렸다. 왕을 배신한 덕분에 사선 역시 좌평벼슬을 얻어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태는 이곳 사비성을 죽기로 사수하라. 조금만 버티면 지방군을 이끌고 이 성을 다시 탈환할 것이다. 혹시 나와 태자가 잘못되면 태자의 장자인 문사를 왕으로 삼아 보필하라. 그 때까지는 태가 이곳에서 내 역할을 한다. 다른 왕자들은 태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 조금만, 조금만 참고 버티면 된다.”

  의자는 태자인 부여효를 데리고 웅진성으로 가면서 후계구도를 확실히 해두었다. 웅진성으로 간 자신과 태자가 잘못될 경우 태자의 아들인 문사를 왕으로 올려야만 반발이 덜할 것으로 생각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피신을 하지만 웅진성으로 가는 도중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의자가 볼 때 사비성이나 웅진성이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위험을 분산시켜 왕조를 지키려는 왕으로서의 간절함이 어린 문사를 사비성에 남겨두도록 한 것이다.

  “어라하, 육로로 가시면 위험합니다. 조금 험하지만 수로를 이용하도록 하시지요.”

  국담은 사비산성 밑 절벽바위 아래에 배를 준비하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육로로 갔다가는 사방에 깔린 적들에게 들킬 것이 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지 못한다. 그럼으로 남은 신하들과 국담을 따르는 수하들이 문제였다.

  “백고, 자네는 수도방위대 군사들을 이끌고 산길을 이용해 웅진성으로 가게. 먼저 도착했다 해도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근처에서 대기하게.”

  국담은 의자를 비롯한 태자와 몇 명의 신하들만 데리고 절벽을 탈 준비를 했다. 그러자 나머지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신하라고 해봐야 고작 열댓 명, 백제의 상층인사 대부분은 나당연합군이 사비로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700년 역사를 가진 나라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는데 백제의 상층인사들 중 성을 베개 삼아 사직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인사들도 의자와 혈연관계에 있거나 도성에 쌓아둔 재물이 아까워 도망칠 수 없었던 자들이었다.

  “그대들은 사비성에 남아 왕자들과 함께 결사항전을 하든 산길을 따라 웅진성으로 오든 마음대로 하시오.”

  사비성에 남아 결사항전을 선택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마당에 사비의 재물을 지키겠다고 남아 있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의자가 선택권을 주었지만 신하들은 대부분 산길을 따라 웅진성으로 가겠다고 했다. 산길이 험난하든 말든 일단 화약고에서 벗어나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의자가 가려는 수로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배를 타려면 일단 절벽바위를 타야한다. 야밤에 미끄러운 바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등에 업힐 수도 없다. 다행히 배를 탔다 해도 무사히 웅진성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다. 적들의 숫자는 무려 십팔 만이다. 그들 중 일부가 강가에 주둔하고 있거나 내가 도망친다는 사실을 아는 백성들 중 밀고자라도 있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간다.’ 의자의 비관적인 생각을 아는지 비를 머금은 검은 구름이 어둠을 재촉하고 있었다.

  “파천은 무슨 놈에 파천. 백성들을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주제에···.”

  백성들 속에 섞여있던 누군가가 웅진성으로 피신을 하는 의자의 뒤통수에 대고 은밀한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

 

  왕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평복차림을 했으나 옷이 바위 뿌다구니에 걸려 찢어지고 이끼를 잘못 디뎌 미끄러지기도 했다. 국담이 업다시피 부축했지만 망국의 한을 품은 밤의 정령들이 의자를 편안히 놔두지 않았다. 천신만고 끝에 바위산을 내려온 의자일행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배를 찾았다. 그런데 배가 보이지 않았다. 일행은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충성스러운 사공이라고 했다. 사비에서 가장 유능하다고도 했다. 사공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사공이 없으면 다시 절벽을 올라 산길을 타고 가야하는데 나에게는 그럴 여력이 없다. 사면초가가 따로 없다. 왜 이렇게 일이 꼬여만 가는 걸까.’ 불안한 마음에 의자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라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틀림없이 이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국담은 의자를 안심시킨 뒤 더듬거리며 하류로 내려갔다.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 오른 국담은 칠흑처럼 깜깜한 강물을 굽어보았다.

  “똬르르, 똬르르······.”

  강물이 좁은 목으로 빨려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순간, 머릿속에 저장된 어떤 기억이 파르르 떨며 튀어 나왔다. 이무기, 과거 이무기를 죽여 없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담은 송곳 같은 눈빛으로 주변을 찔러보았다. 기우였다. 이무기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이무기가 살고 있는 것처럼 분위기는 스산했다. 그때, 개미만한 목소리가 국담의 귀에 들렸다. 뱃사공이었다. 주도면밀했던 그는 누군가의 배신으로 일이 발각될까봐 숨어서 일행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국담임을 확인하자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빠르게 이동을 해야 하니 배가 크지 않습니다.”

  배가 있다는 말에 의자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하지만 배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삼국을 통틀어 가장 융성한 문화를 자랑하던 백제였다. 백제의 조선기술 또한 왜는 물론 주변 각국으로 전파되어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나라의 왕이 작고 초라한 배에 사활을 걸고 쥐새끼처럼 도망을 치려는 것이다. 의자는 검은 강물위에 크고 작게 일어나는 물보라를 바라보며 가슴을 쳤다. ‘모든 것이 내 탓이다. 내가 어리석어 자초한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도성을 되찾고 말겠다.’

  숯처럼 검은 사비의 강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의자가 입을 굳게 다물자 그 누구도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도성을 빼앗기고 도망치는 마당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는 동안 물기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쏟아져 내렸다. 빗방울이 끓는 팥죽처럼 튀어 올랐다. 우산도, 우비도, 비를 가릴 그 무엇도 없었다. 국담이 옷을 벗어 덮어주려 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무거운 갑옷이었다. 신하들이 서둘러 옷을 벗었다.

  “그냥 두시오. 이 마당에 비 좀 맞는다고 대수겠소. 거 시원하고 좋구려.”

  의자가 신하들의 옷을 사양하며 눈두덩에 묻은 비를 훔쳤다. 그 때, 의자의 눈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검은 고기들이 사방에서 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민물고기는 햇살이 강해지는 아침나절과 농익은 석양빛을 받아 튀어 오르곤 하는데 야밤에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이 이상했다.

  “저런 일이 종종 있더냐?”

  사공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공은 의자를 안심시키기로 했다.

  “비가 와서 저런 모양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신경을 안 쓸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긴 꼬리를 매단 고기들이 물뱀처럼 기어서 배 주위를 헤엄쳐 다녔다. 크기도 구렁이 같아서 흉측하고 징그러웠다.

  “대체 이 무슨 망조란 말인가. 아니! 저, 저건?”

  의자가 가리킨 방향은 배의 앞쪽이었다. 이번에는 용인지 이무기인지 배를 덮칠 만큼 커다란 괴물이 배의 전면에 서서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그러자 긴 꼬리를 매단 물고기들이 괴물의 주변으로 헤엄쳐 몰려들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몸을 젖버듬히 누이고 입과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너무나 황망한 일이 눈앞에 펼쳐져 어벙한 소리만 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구, 국담. 저, 저것들을 어찌 좀 해보게!”

  태자와 신하들이 국담을 앞세웠다. 의자역시 간절한 눈빛으로 국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믿을 사람은 국담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담이 뱃머리에 우뚝 서서 괴물을 노려보았다.

  “네 놈은 필시 용은 아닐 터. 용이라면 감히 대 백제국의 어라하를 해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네 놈이 뭐든 우리 어라하를 해치려 한다면 이 칼이 용서치 않으리라.”

  국담은 괴물을 향해 호통을 친 다음 가문의 보검을 빼어 들었다. 세상이 온통 검은색임에도 불구하고 국담의 칼은 시퍼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괴물이 몸을 천년 묵은 느티나무처럼 크게 만들어 꼿꼿이 세웠다. 사공이 혼신의 힘을 다해 역으로 노를 젓고 있었지만 배는 물살을 따라 괴물을 향해 흘러갔다. 가까이서 본 괴물은 용도 아니요 이무기도 아닌 그야말로 괴상하게 생긴 괴물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배의 후면으로 몸을 피했다. 배가 기우뚱 머리를 높게 쳐들었다.

  “겁내지 말고 배의 중앙으로 오십시오. 저 놈은 제가 해치우겠습니다.”

  국담은 코앞에 있는 괴물을 향해 시퍼런 칼을 휘둘렀다. 시퍼런 빛이 괴물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괴물은 빛을 맞고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자 국담이 칼을 정면으로 세웠다. 공중으로 솟구쳐 괴물의 이마를 향해 깊숙이 내리칠 작정이었다. 국담이 검은 하늘로 높이 솟구치려는 찰나, 괴물의 눈이 크게 끔뻑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괴물은 국담의 칼을 전혀 피할 기색이 없었다. 사태파악이 안된 국담이 급하게 칼을 거두고 괴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의자와 신하들도 슬금슬금 뱃머리로 다가와 괴물을 쳐다보았다.

  “앗! 저, 저 놈의 눈에서 이상한 것이 흐릅니다.”

  신하들 중 밤눈이 좋은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 놈은 우리를 해칠 뜻이 없다.’ 국담이 경계태세를 풀고 허리를 잔뜩 구부려 괴물의 눈을 탐색하듯 살폈다.

  “누, 눈물입니다 어라하. 저 놈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괴물이 피눈물을 흘리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괴물의 옆에서 그물거리던 것들도 사라졌다. 놀란 사공도 노 젓는 일을 멈추고 괴물을 살피기에 바빴다. 배는 물살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지만 괴물과 부딪치지는 않았다. 괴물과 배가 일정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네 놈은 뭐냐. 정체를 밝혀라!”

  국담이 다시 호통을 쳤다. 하지만 괴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의자가 나섰다.

  “너는 우리를 해칠 의사가 없는 것 같은데 어찌하여 이러는 것이냐.”

  그러자 괴물은 몸을 더 크게 부풀려 커다란 입을 벌렸다. 사람들은 다시 뒤로 도망쳤다. 국담이 결판을 낼 듯 칼을 높이 쳐들었다.

  “놈이 불을 뿜을지도 모릅니다. 불에 타 죽기 전에 강물로 뛰어 들어야 합니다.”

  신하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괴물의 입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국담이 몸을 잔뜩 고푸리고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단번에 괴물의 이마를 갈라놓을 작정이었다. 그 때 괴물의 입에서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찌 들으면 천둥소리 같고, 어찌 들으면 지옥문을 지키는 옥사장이 지르는 소리 같고, 어찌 들으면 졸지에 부모님을 잃은 자식들이 곡을 하는 소리 같았다. 여하튼 괴물의 소리는 세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희한한 소리였다.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고막을 막았지만 점차 귓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괴물의 소리에 익숙해지면서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괴물은 통곡을 하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한 바탕 통곡을 하던 괴물은 물거품처럼 서서히 자태를 감추었다.

 

  의자의 일행을 태운 배는 빠르게 흘러 웅진의 강가에 도착했다. 기괴하게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가라앉은 의자일행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바람사냥꾼 비사도리로부터 의자가 웅진성으로 파천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예식은 만감이 교차했다. 예식은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망루에 올라 우두커니 사비성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점풍(占風)(주석3), 세상이 장차 어떻게 바뀔지 바람점이라도 쳐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죽기로 어라하를 보필해야 하지만 망한다면 선수를 쳐야 한다.’ 웅진성 성주 예식은 달솔벼슬을 하고 있었지만 백제의 지방군인 5방 중 가장 중요한 북방을 관할하고 있었다. 당시 백제의 군제는 사비를 중심으로 한 중앙군과 다섯 곳의 지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 방 아래 50여 곳의 군과 250여 곳의 성이 있었다. 이곳에 속해있는 군사들은 모두 상비군이었는데 그 숫자는 무려 13만 명이나 되었다.

  백제의 지방군 중 사비성과 가깝고 가장 유력한 북방의 군사들도 3만 명이 넘었다. 게다가 백제는 군호에 속한 일반백성들을 군대로 편입(주석4)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식이 북방에서 차근히 군사를 모은다면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으로 북방령인 예식이 죽기로 왕을 보필한다면 웅진성은 쉽게 함락당하지 않는다. 더구나 웅진성은 강과 절벽을 배후로 한 천혜의 요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방령 예식은 감히 자신의 왕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의자가 사비성을 떠나자 부여태는 태자의 아들 문사를 비롯한 여러 왕자들 그리고 서너 명의 신하들과 함께 수성에 만전을 기했다. 사비성은 도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부여태가 왕이 입는 황금색 갑옷을 입고 장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연합군 군사들이 땅의 끝까지 꽉 들어차 있었다. ‘저들을 막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부여태는 연합군의 군사력에 숨이 턱턱 막혔지만 죽기로 수성을 하려했다. 아버지인 의자대신 왕을 자처하면서까지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그였다. 그 역시 미추처럼 질것이 빤한 전쟁을 치르면서 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은 새벽녘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사비성이 수성을 하기도 좋았지만 그 보다는 죽을 각오로 싸우는 부여태의 기개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 사이 수천 명의 군사와 백성들이 적의 화살에 죽어 나갔다. 노인과 아녀자들은 열심히 돌을 나르고 물과 기름을 끓였다. 사비의 군사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연합군을 향해 돌을 던지고 끓는 물과 기름을 쏟아 부었다. 가까스로 성벽을 타고 성내로 진입한 연합군들은 백제의 싸울아비들이 무자비하게 베어 없앴다. 덕분에 성문은 열리지 않았고 굳건했다. 하지만 불화살이 문제였다. 연합군 화살부대는 몇 시간을 쉬지 않고 화살을 쏘아댔다. 사비성 내를 불바다로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다.

  “디웅~ 디웅~ 디웅~”

  연합군 진지에서 치는 북이 웅장한 공명을 만들었다. 그러자 불화살 공격이 멈추었다. 순간, 사비성이 적막에 휩싸였다. 사비성내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숨을 죽였다.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예감은 정확했다. 성 밖에서 발원한 괴상한 소리들이 성벽을 넘어 오는가 싶더니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화살이었다. 나당연합군이 이번에 쏘고 있는 화살은 불화살이 아닌 맨 화살이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어두운 사비성내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화살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라면 한 시간도 안 되어 사비 백성 절반이 죽을 것만 같았다.

  “하, 항복을 해야 합니다.”

  부여태를 둘러싼 왕자들이 안달복달을 했다.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성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끝까지 성을 지키다가 죽는다.”

  부여태는 늠연한 자세로 호통을 쳤다. 하지만 문사를 비롯한 왕자와 신하들은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연합군은 한바탕 화살잔치를 끝내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북만 둥둥 쳐댔다.

  “도옹~ 도옹~”

  북소리는 일정한 강도와 간격으로 울렸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비성 사람들에게 연합군이 울리는 북소리는 장승곡과도 같았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나가서 항복을 하겠습니다.”

  왕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이 항복을 하건 말건 상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성문으로는 나갈 수 없다.”

  왕자들은 잠시 멈칫 하다가 성벽 위로 올라갔다. 밧줄을 타고 내려가 항복을 하려는 것이었다. 왕자와 신하들이 성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비성내 군사와 백성들이 하나 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동요는 시간이 갈수록 확산돼 더 이상 부여태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태를 위해 죽겠다는 사람은 없었고, 태는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700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왕궁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점령되는 순간이었다.

  “왕자와 귀족들까지 항복을 하는데 왜 우리만 남아 개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백성과 군사들이 따지듯 묻는 소리에 부여태의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아차! 대단한 실수를 했구나.’ 부여태는 항복을 하려는 신하와 형제들을 과감히 죽였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경황이 없었다. 더구나 형제를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방심이 화를 부른 것이다. ‘이젠 어쩔 수 없다. 저 수많은 백성들에게 결사항전을 명령할 수 있는 명분이 없다. 대 백제여! 어라하, 이젠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여태가 결심한 듯 고수를 올려다보았다.

  “항복을 알리는 깃발을 내걸고 북을 울려라!”

  항복을 의미하는 당나라의 깃발이 성첩(城堞)에 걸리자 백성들은 나부죽이 엎드리고 열댓 살 먹어 보이는 소녀는 쪼그리고 앉아 얼굴을 사타구니 사이로 처박았다. 그녀가 떨어뜨린 눈물이 낙수처럼 맨땅을 후비적거렸다.

  “성문을 열어라! 복신 숙부께서는 틈을 노려 웅진성으로 가세요. 어라하께 사실을 낱낱이 보고하고 죽음으로 어라하를 보위하셔야 합니다.”

  부여태는 항복을 하여 백성들의 무고한 희생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황금색 용포를 걸친 부여태가 허우적허우적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지 123년 만에 백제의 도성이 함락되었다.

 

 *주석*

 1)기록에 따르면 의자는 처음 부여융을 태자로 삼았다. 부여융과 둘째인 부여태는 정실부인의 아들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백제멸망 당시에는 부여효가 태자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효는 의자의 애첩이자 후실인 은고의 자식이라는 설이 많은데, 당시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전에서 효의 외가인 은고의 집안이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2)“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후사를 잇게 한다.”는 흥망계절의 정신은 본래 중국의 고전에서 유래됐다. 불교에 이어 유학을 받아들인 백제는 유학에 근거한 이 정신을 백제만의 것으로 승화시켜 귀족과 백성들의 면면에 녹였다. 하지만 백제멸망 당시 많은 귀족들은 이 정신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3)2011, KBS 역사추적의 예식진 묘지석 내용해석 중 점풍이역취일장안(占風異域就日長安), 즉 “바람을 점친다 바람이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에서 인용.

 4) 개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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