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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백제의 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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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1-30 16:16     조회 : 248     추천 : 0     분량 : 19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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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사항전

  의자가 일만 삼천의 군사를 동원하고 있을 때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왔으면 사비는 순식간에 점령당했을 것이다. 김유신이 소정방과 만나 김문영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취사병들은 저녁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장수가 팽팽한 기싸움을 하고 있었음으로 양측의 군사들 역시 긴장감을 유지한 채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김유신과 소정방이 화해를 하고 밥을 짓기 시작하자 밤이 깊었다. 깜깜한 밤에 배가 부른 군사들을 전쟁터로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으로 계백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계백이 한 나절만 빨리 죽었더라면 백제는 항전을 해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늦은 저녁을 먹은 김유신과 소정방은 다시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작전회의고 뭐고 그냥 밀어붙이면 될 텐데 뭣 하러 허구한 날 회의를 한담!”

  신라의 보초병사 한 명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백제의 수도방위대장 미추(주석1)는 일만 삼천의 군사를 이끌고 즉시 사비의 남쪽으로 내려갔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그동안 의자는 지방에 급보를 보냈다. 특히 임존성(주석2)의 흑치상지에게는 간곡한 부탁까지 곁들였다. 흑치가문은 본래 부여씨로서 왕족에서 분파된 명문귀족이었다. 흑치가문은 대대로 달솔벼슬을 하사받았으며 막강한 군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흑치상지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기만 한다면 전세는 팽팽해질 것이다. 임존성은 사비와 가까이 있는데다가 흑치가문이 각 지방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미추를 가장 가까이서 보좌하는 인물은 당연히 국담이었다. 미추 또한 국담을 깊이 신뢰해 여러 군관들 중 으뜸으로 생각했다. 7월의 밤하늘을 희롱하듯 제멋대로 휙휙 날아다니는 도깨비불을 보며 미추가 말했다.

  “백제는 귀족들의 나라가 아닌가. 나처럼 미천한 신분도 수도방위대장이라는 달솔벼슬을 하고 있는데 자네 같은 사람이 아직도 그 자리라니 참으로 안타깝네.”

  “높이 오를수록 본분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낮은 자리가 있어야 높은 자리가 보존된다는 것을 이 나라 귀족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저까지 그럴 필요는 없지요.”

  “자네는 과거 이무기로부터 이 나라를 구한 영웅일세. 아무리 젊기로 이제 육품 내솔이 뭔가. 최소한 삼품 은솔까지는 올라야지.”

  “부여씨를 비롯한 귀족들은 이무기가 죽었다는 사실은 금세 잊었지만 이무기를 죽인 사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저와 우리가문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지 않은가. 다시 한 번 이 나라를 위해 일어서 주게.”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목숨? 이 전쟁터에서 목숨은 내가 바칠 것이네. 자네는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미추는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했다. 그리고 국담에게는 살아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미추의 머릿속에 지금 벌이려는 전쟁 후의 상황이 확연하게 그려진 것이다.

 

  미추는 미천한 집안 출신이다. 나이는 의자보다 예닐곱 살 아래였고 2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다. 하지만 한동안은 일개 병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를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나라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전쟁터라도 나가야 부모와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추가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한 덕분에 가족은 제법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미추는 지금 계백에 버금갈 정도로 무술의 고수가 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전쟁에 처음 참여할 당시 미추의 무술은 다른 병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온순해서 개미새끼 한 마리도 죽이지 못했다. 미추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여 본 것은 신라와의 전쟁 때, 당시 태자였던 의자가 직접 지휘한 전투에서였다. 우연히 의자의 옆에 서있게 된 미추는 자신도 모르게 신라의 복병을 칼로 찔렀다. 의자를 노린 자였다. 싸움도 할 줄 모르는 미추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 의자는 미추에게 미관말직을 주었다. 미관말직이나마 미추로서는 벼락출세를 한 셈이다. 그날 이후 의자는 전쟁터마다 미추를 데리고 다녔다. 싸움도 자주해본 사람이 잘하는 법인가. 미추의 감추어진 싸움실력은 전쟁을 치르면 치를수록 일취월장했다. 더구나 의자가 바라보고 있는 전쟁에서 의자의 눈에 들고 싶은 공명심이 용기를 백배로 끌어 올렸다. 미추가 결정적으로 큰 공을 세운 전쟁이 있었다. 642년 대야성(주석3)전투, 백제의 대장군 윤충과 함께한 대야성 전투에서 미추는 가장먼저 성벽을 타고 올라가 수십 명의 신라군을 쓰러뜨렸다. 덕분에 백제군은 공격의 물꼬를 텄고 미추가 성문을 열었다. 미추의 공은 윤충에게 그대로 보고되었다. 대야성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인 서부국경 40여개 성 중에서도 최고의 요충지였다. 대야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에 의자는 뛸 듯이 기뻐하며 논공행상을 아주 크게 했다. 이 과정에서 윤충이 미추의 공적과 이름을 올렸다. 의자는 미추의 이름을 보자마자 자신의 무릎을 아플 정도로 때렸다. ‘그럼 그렇지, 미추가 해낼 줄 알았지.’ 대야성에서의 공으로 미추는 미관말직인 십 육품 극우에서 다섯 단계나 오른 십 일품 대덕(주석4)이 되었다. 의자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끊임없이 전쟁터로 나가 싸웠다. 미추는 왕의 호위군관이 되어 위기시마다 왕의 목숨을 건졌으며 의자가 승승장구하는 만큼 미추의 공적도 올라갔다. 그리하여 오늘날 나라의 도읍을 방비하는 수도방위대장의 위치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제가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주겠네.”

  미추는 사비의 남쪽으로 군대를 이동시키면서 요소요소에 함정을 만들어 두었다. 크고 작은 언덕과 성, 늪지대 등. 적들이 피해갈 수 없는 곳에는 지방군에 소속된 군사들을 남겨 지키게 했다. 그것은 자국의 지형지물을 잘 알고 이용할 수 있는 장점 중의 장점이었다. 미추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군에 밀려 퇴각할 것이고 퇴각을 하면서 적들을 괴롭히는 것, 그리함으로써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목숨을 건 최후의 결전장은 나성이다. 특히 사비서쪽과 북쪽강변으로 이어진 서 나성은 북진하는 연합군이 넘을 수 있는 최단거리에 위치해 있다. 나성은 왕궁인 사비성 동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지만 18만이라는 대군이 구지 취약한 곳을 찾아 돌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럼으로 연합군은 반드시 서 나성을 넘어 도읍으로 들어갈 것이다. 미추는 국담이 살아서 해야 할 일을 죽음의 결전장인 서 나성 전투에서 말해주겠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추의 1만 군사들이 동과 서로 길게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을 보며 멈추어 섰다. 언덕 너머가 수상했던 것이다. 연합군이 만약 언덕너머에 바짝 진을 쳤다면 상황이 대단히 불리해 진다. 그것도 모르고 무작정 언덕을 올랐다가는 내리 누르는 힘을 당해낼 수가 없다.

  “척후병은 아직인가?”

  벌써 돌아와 전방의 상황을 보고해야할 척후병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상합니다. 벌써 와야 하지 않습니까.”

  국담보다 두 살이 많지만 같은 군관으로서 친구처럼 지내는 백고(주석5)가 잔뜩 의심을 했다.

  “다른 척후병을 보내보라.”

  미추의 명령에 날랜 병사 서너 명이 언덕을 넘었으나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언덕 너머가 이상합니다. 틀림없이 저곳에 적들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백고의 확신에 국담이 손짓으로 누군가를 불렀다.

  “그럼 바람사냥꾼 비사도리를 보내보시지요.”

  적의 동태를 모르고 대군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던 미추는 국담의 말을 들어 마지막으로 비사도리를 보내보기로 했다. 국담의 천거로 수도방위대에 들어온 비사도리는 일급 연락병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극비의 정보를 말보다 빨리 전달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미추의 명령을 받은 비사도리는 바람처럼 달려 순식간에 언덕을 넘어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언덕을 넘어왔다.

  “매복정도가 아닙니다. 언덕너머에 적들이 대규모 진을 치고 있습니다. 척후병들은 그들에게 잡혀있는 듯합니다. 저도 놈들에게 잡힐 뻔 했습니다.”

  비사도리의 정보는 천만금과도 같았다. 비사도리의 말에 따르면 언덕위로 엄청난 숫자의 궁수부대가 숨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군대를 전진시켰더라면 수많은 군사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활로 기선을 잡은 연합군이 언덕을 넘어 일시에 달려든다면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어차피 놈들은 사비로 쳐들어오는 중이니 우리가 무리하여 다가설 필요는 없습니다. 일단 후퇴하여 유리한 지점에 진을 치시지요.”

  “국담의 말이 맞다. 이대로 후퇴하여 강 너머에 진을 친다.”

  미추는 군대를 십리 밖으로 후퇴시켜 물살이 약한 강가에 진을 쳤다. 적들이 물살이 센 강을 건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동녘하늘이 붉어지며 사물들이 하나둘 제 모습을 찾아갔다.

  *

  소정방과 김유신이라고 백제군의 동태를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한술 더 떠 정찰을 하러 언덕으로 접근하는 미추의 척후병들을 포로로 잡아두기까지 했다. 하지만 소정방과 김유신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별로 급할 것도 없고 전세가 팽팽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추의 군사들이 언덕너머에 진을 치고 있다하나 조족지혈이라고 생각했다. ‘놈들이 설사 기습을 한다 해도 유리한 고지에 진을 치고 있는 한 우리 군사들의 힘은 수십 배로 강해진다.’ 미추의 척후병을 잡아둔 소정방과 김유신은 아주 편한 마음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놈들이 기습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오.”

  “그렇지요.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나방과도 같은 짓이지요.”

  “차라리 놈들의 척후병을 모르는 척 보내줄 걸 그랬소. 화살부대도 배치하지 않고요. 놈들이 기습을 하도록 유도할 것을 그랬단 말이오.”

  “그렇지. 그러면 아주 싱거운 전쟁이 됐을 텐데. 하지만 그런 전쟁은 하나도 재미가 없소이다 그려. 핫, 하 하.”

  “성충이 죽기 전에 의자에게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성충이 누구요?”

  “백제의 마지막 충신 중 한명이자 지략가였소.”

  “그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우리 신라군을 탄현에서 막고, 대총관의 당군을 백강상류에서 막으면 반드시 이긴다 했다 하오.”

  내내 여유로운 웃음을 짓던 소정방은 김유신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탄현과 백강상류라···. 아, 그렇군!’ 소정방이 무릎을 치며 일어섰다.

  “탄현이라면 천혜의 요새거늘. 자칫하면 백제병사 한명이 휘두르는 창에 수십 명의 군사가 당할 뻔 했소이다 그려. 헛, 허.”

  “대총관이 상륙한 백강상류는 어떻고요. 바닷가에 깊은 뻘이 있어 쉽게 상륙할 수 없지요. 그곳 역시 요새 중의 요새, 한 명의 병사가 쏜 화살에 백 명의 병사가 쓰러집니다.”

  “정말 무시무시한 전략이군요. 의자가 성충 같은 인물을 죽인 것은 우리로서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입니다.”

  “그럼요. 하늘은 백제를 버렸습니다. 자, 술이나 한 잔 마시고 아침나절에 슬슬 사냥이나 나섭시다.”

  소정방과 김유신은 느긋하게 술을 마시고 편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일어난 소정방과 김유신은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출전준비를 서둘렀다.

  “용맹스러운 대 당군 군사들이여, 이제 출정이다. 저 사비성은 금은보화는 물론 아름다운 미녀들로 가득하다. 모두 너희들의 것이다. 사비로 들어가 마음껏 약탈하고 모두 가져라. 고생한 너희들에게 주는 우리 황제폐하의 선물이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향해 기세를 올리자 김유신도 목청을 돋우어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저들은 비실거리는 쥐새끼에 불과하다. 비실거리는 쥐새끼 한 마리를 열여덟 마리의 고양이가 잡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금부터 저 사비성을 점령하고 의자를 잡아 대야성의 복수를 하라!”

  두 장수의 독려에 사기가 진작된 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하늘을 찌르는 군사들의 함성에 아침거리를 찾아 나서던 기러기 한 마리가 갈팡질팡 하다가 솟구쳐 올라갔다.

  연합군 군사들이 지르는 함성은 십리 밖의 미추군에게까지 들렸다. 전쟁에 처음 가담한 사비의 백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확장된 동공 속에서 쪼그라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골똘히 생각하던 미추가 조용히 국담을 불렀다.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바닥일세. 무슨 대책이 없겠는가.”

  “제가 나서겠습니다.”

  국담의 생각을 들은 미추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자칫하면 자네의 목숨이 위험하네. 자네는 여기서 죽을 때가 아니라고 내가 말을 하지 않았던가.”

  “저는 죽지 않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미추는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방법 외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놈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면 시간을 벌기는커녕 몰살당할 것이 빤하다. 위험하지만 지금으로써는 국담을 믿어볼 수밖에 없다.’ 결심이 선 미추는 국담을 비롯해 수백 명의 젊은 군관들로 별동대를 만들어 병사들 앞에 세웠다. 별동대를 이용한 기습 교란작전을 쓰기로 한 것이다. 별동대는 철로 된 갑옷과 투구, 방패로 특별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탄 말에도 단단한 마면주와 갑옷을 입혔다. 말안장 뒤쪽에는 깃대를 꽂고 말갖춤에 방울을 달아 오망스런 소리를 내게 했다. 별동대원 서너 명은 황색바탕에 사신도가 그려진 깃발을 하늘로 들어 올려 힘차게 펄럭이도록 했다(주석6). 미추는 이들을 지휘할 장수로 국담을 세웠다. 국담이 별동대의 장수가 되는데 있어 그 누구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국담의 친구인 백고가 국담의 옆으로 말을 몰고 왔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달라는 주문을 하기 위함이었다. 백고가 미추를 바라보았다. 미추는 백고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다는 듯 국담의 이름을 힘차게 불렀다.

  “국담, 이제부터 이 전쟁은 너희 별동대에게 맡긴다. 반드시 공을 세워 나라에 충성하라!”

  미추의 명령이 끝나자마자 백고가 목이 쉬어라 괴상한 소리를 냈다. 별동대 군관들도 백고의 소리를 따라했다. 나머지 병사들이 그 소리를 따라하자 백성들로 구성된 병사들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소리였다. 국담이 칼을 들어 소리들을 잠재웠다.

  “나는 천년 묵은 이무기의 목을 벤 국씨가문의 장남 국담이다. 나는 이 전쟁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고자 한다. 백제의 아들로 태어나 백제를 위해 이 한목숨 바친들 아까울 것이 없다. 자랑스러운 백제의 싸울아비들이여, 나를 따라 백제를 위해 죽자. 우리가 죽어야 우리의 부모형제들이 산다. 모두들 죽을 각오가 되어있는가!”

  국담의 주문은 죽으라는 것이었다. 죽을 각오로 싸워 망국의 위기에 처한 백제를 살리라는 것이었다. 국담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고가 미친 듯이 흥분하며 외쳤다.

  “백제의 싸울아비들이여, 모두 나가 죽자!”

  백고의 외침에 별동대 전원이 죽자! 죽자! 죽자! 하며 칼을 높이 쳐들었다. ‘죽자’소리는 군사들의 앞 열에서 뒤 열로 전달되며 파도를 탔다. 미추가 칼을 빼들었고 기수가 깃발을 높이 올리자 고수들이 전진을 명하는 북을 쳤다. 북소리와 함께 국담의 말이 맨 앞으로 나아갔다. 국담의 뒤를 군관들로 구성된 별동대가 따랐다. 병사들은 오른발을 들어 땅을 쿵쿵 찍으며 천천히 전진했다.

 

  나당연합군과 미추군이 드넓은 벌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섰다. 양 진영은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에 진을 치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신라와 당군은 서로 편을 갈라 미추군의 동태를 살폈다. 신라는 김흠순을, 당은 방효태를 선봉으로 내세웠다. 김유신과 소정방은 각각의 선봉대를 내세웠는데 통상 군사의 숫자가 많은 쪽에서는 구지 부대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그냥 밀어붙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김유신과 소정방은 이 상황에서 머리를 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능한 자신의 군사를 덜 다치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런 가소로운 놈들. 겨우 만 명으로 우리와 상대하겠다니. 신라의 선봉대를 먼저 보내시오.”

  만 명이라고 무시를 하던 소정방이 선수를 쳤다. 수작을 빤히 알고 있는 김유신으로서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무슨 소리, 당군이 수가 더 많지 않소.”

  두 장수가 옥신각신하는 소리에 앞줄의 병사들이 드러내지 않는 짜증을 냈다. 하기야 적진으로 먼저 나가 죽고 싶은 군사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앞줄의 병사들이 전달하는 소리가 빠르게 뒷줄로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끓어올랐던 사기는 먼지처럼 가라앉았다. 도무지 전진명령이 나오지 않자 신라와 당나라 장수들도 짜증을 냈다. 전진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유가 병사들의 맨 뒷줄까지 전달될 즈음 소정방이 김유신의 입을 막았다.

  “조용, 조용히 좀 해보시오. 우리 당군은 신라를 돕기 위한 원병에 불과하오. 더구나 백제는 당신들의 원수 아니오? 이 전쟁은 당신들이 일으킨 전쟁이란 말이오. 그러니 당신들이 먼저 나서야지.”

  김유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소정방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당군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김인문이 김유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외숙부, 이러다가는 군사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칩니다. 이럴 바에는 우리가 선수를 쳐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먼저 승기를 잡는다면 저 소정방 놈도 우리를 깔보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좋은 기회입니다.”

  당과의 연합을 위해 일찌감치 당으로 건너간 김인문은 당 황제인 이치를 설득시키고 백제정벌의 부대총관으로서 소정방과 함께 백강으로 상륙한 신라의 장수이자 김유신의 외 조카였다. 그러니까 그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문명왕후)였고 아버지는 신라의 왕 김춘추였던 것이다. 대답이 궁했던 김유신은 조카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좋소. 우리가 전면을 뚫을 테니 좌우를 책임져 주시오.”

  김유신의 당부에 소정방은 그러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적극성을 띨 생각은 없었다. 전쟁에서 가능한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라는 당 황제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5만 군사를 가진 신라로서 1만 백제군을 소탕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더구나 벌판에서의 백병전이라면 다섯이서 한 명을 놓고 싸우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전투는 신라군만으로도 충분하다. 구지 당나라 군대가 필요 없는 것이다.

  “대장군, 한 번에 들이치면 순식간에 끝날 전투입니다. 당나라 놈들이 저리도 몸을 사리다니. 그럴 바에야 뭣 하러 이 전쟁에 참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익장군 천존이 불만을 터뜨렸다. 천존의 말대로 나당연합군이 합세하여 한 번에 들이치면 간단히 끝날 전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정방은 신라군의 희생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네. 하지만 저들이 없으면 쉽게 이길 수 없는 전쟁일세. 알지 못하는 미지의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 땅의 주인인 적들보다 열배이상은 수가 많아야 하기에 저들의 군사가 필요한 거지.”

  “예, 장군.”

  천복은 김유신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천복은 김법민, 인문, 품일, 품석처럼 김유신과 인척관계는 아니었지만 김유신이 가장 총애하는 오른팔이었다. 그는 평소 김유신을 존경해 스승처럼 받들고 있었다.

  “천복장군, 당나라 놈들을 잠시 이용해 백제를 정복하세. 그런 다음 놈들을 삼한 땅에서 몰아내 버리면 그만이야.”

  김유신은 천복을 다독이며 김흠순을 향해 지휘봉을 높이 쳐들었다.

  “이제 진격이다. 방패부대가 앞장을 선다. 그 뒤를 궁수부대가 따르라. 화살을 날리면 기병부대가 일제히 달려가고 그 뒤를 보병들이 따르라.”

  김유신의 작전은 당시 일반적인 전투방식이었다. 화살을 먼저 쏘고 혼란해진 틈을 타 기병들이 몰아친 뒤 숫자를 앞세워 보병들이 밀어붙이는 작전. 이 작전은 벌판에서 마주친 적을 상대할 때 매우 유용하다. 상대도 이러한 방식으로 전투를 하며 이 전투방식은 숫자가 비슷할 때 이루어진다. 이 때 승패의 관건은 무술의 숙련정도나 병장기의 질적 수준이지만 군사들의 사기와 용기가 매우 중요하다. 한데 군사들의 숫자가 훨씬 많은 신라군으로서 구지 이 방법을 쓸 필요가 있었을까. 김유신이 이 방법을 쓴 이유는 미추가 같은 방법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쥐새끼들이 도망칠 때 모조리 때려잡는다.”

  김유신은 미추가 화살이나 살살 쏘면서 후퇴할 줄 알았다. 한데 김유신의 생각과 달리 미추는 도망치지 않았다. 숫자가 훨씬 적음에도 후퇴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당당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저 놈들이 끄떡도 하지 않는데요? 앗!”

  선봉에서 말을 몰던 김흠순이 경악을 했다.

  “웨, 웬 놈이 혼자서 달려오고 있다!”

  흠순이 보니 미추의 진영에서 말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말에 탄자는 비늘처럼 반짝이는 철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는데 말 등에 납작 엎드려 말만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흠순은 얼른 뒤로 물러나 유신에게 다가갔다.

  “저 놈의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대체 뭘 하려는 의도일까요?”

  “의도고 뭐고 화살을 날려 무조건 잡게.”

  김유신의 명령에 따라 신라의 궁병들이 공중으로 활을 쏘았다. 일제히 날아오른 화살들이 정체불명의 말을 향해 검은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제 잠시 후면 정체불명의 말은 화살의 봉분아래 묻힐 것이다. 이 때 말에 엎드린 누군가가 몸을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창을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째쟁 째쟁 째쟁”

  화살들이 창에 부딪쳐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하나의 과녁을 향해 쏟아지는 그 많은 화살을 바람개비창이 모두 막아낸 것이다.

  “앗! 허걱! 흐미!”

  김유신을 비롯한 법민, 인문, 품일, 흠순, 천복 등 신라 장수들의 입에서 갖가지 감탄사가 쏟아졌다.

  “저, 저 귀신같은 놈은 대체 뭐란 말이냐.”

  김유신이 낮게 읊조리며 다시 화살을 날리라고 명령했다. 신라의 궁병들이 화살을 재장전하는 동안 정체불명의 누군가는 이미 오십 보 앞까지 쳐들어오고 있었다. 궁병들이 활을 쏘았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이번에는 방패를 들고 납작 엎드렸다. 화살은 방패에 부딪쳐 부러졌고 말을 맞춘 화살은 마갑과 마면주를 뚫지 못했다. 비록 일반적인 병사들이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백제의 마갑과 마면주는 실로 대단한 병장기였던 것이다.

  “아니, 화살이 갑옷을 뚫지 못하다니. 놈들의 기술이 저 정도로 발전됐단 말인가.”

  눈 깜짝하는 동안 벌어지고 있는 일에 김유신은 어쩔 줄 모르고 감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이미 진영을 헤집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라 군사들이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동안 수십 명을 쓰러뜨리고 바람처럼 달아났다. 아니, 달아난 것이 아니고 유유히 자기진영으로 말을 몰고 가버린 것이다.

  “서, 서둘러 진영을 갖추어라!”

  김유신이 천둥 같은 고함을 질렀다. 내장에서 들끓어 오르는 소리가 폭발하는 화산 같았다. 하지만 군사들은 김유신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었다.

  “또, 또 온다아!”

  신라군이 진영을 갖추기도 전에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또 다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화살이 말의 갑옷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 그는 방패만으로 몸을 가리고 화살보다 빠른 속력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신라 군사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궁수부대가 날리는 화살도 정확한 과녁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부유하며 서로 부딪치기만 했다.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의 장군들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혼란한 상황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웠다.

  소정방은 유백영, 풍사귀, 방효태 등과 함께 멀찌감치 떨어져서 신라군의 동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대총관, 저 놈들이 왜 저런답니까? 하라는 싸움은 안하고 진열이 개판이네요.”

  풍사귀가 빈정거리며 소정방을 올려다보았다. 체구가 장대하고 영웅호걸처럼 생긴 소정방에 비해 풍사귀는 이름 그대로 사마귀처럼 마르고 초라할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집안이 좋고 그럭저럭 싸움을 잘해 장군의 위치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다.

  “풍사귀, 자네는 저 놈이 안 보이나? 저기, 말 탄 놈. 저 놈이 신라진영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다니지 않나.”

  “아니! 저, 저놈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백제에 저런 놈이 있었던가요?”

  “그러게 말일세. 저 놈 하나 때문에 5만 군대가 꼼짝을 못하다니. 김유신의 체면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생겼구먼.”

  “대총관, 저대로 두면 신라군의 사기가 형편없이 떨어질 것입니다. 저놈에게 놀아나지 말고 전군이 그대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소정방의 책사역할을 하는 유백영이 주먹을 불끈 쥐며 안타까워했다.

  “김유신이라고 그걸 모르겠나.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을 겪다보니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운 거지. 저 꼴을 당하면 우리라고 별 수 있었겠나. 그나저나 대단한 놈이로군. 그야말로 일당 오 만 아닌가. 저런 놈이 내 수하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그러자 방효태가 발끈했다.

  “대총관, 대총관의 곁에는 이 방효태가 있지 않습니까. 내, 저 놈을 박살내겠습니다. 가소로운 놈.”

  “아서게, 자네가 쉬 상대할 인물이 아닐세.”

  평생 동안 전쟁터를 누벼온 소정방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탄을 하고 있는 백제의 싸울아비, 그는 바로 국담이었다. 국담의 두 번째 기습은 신라진영 깊숙이 들어가 김유신을 호위하고 있는 군관들을 위협할 정도였다. 군관들이 온 몸으로 겹겹이 에워싸지 않았으면 김유신의 목숨도 장담 못할 지경이었다.

  “대, 대장군을 목숨으로 보호하라!”

  김법민이 손을 벌벌 떨며 숨넘어가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나 당황스러웠던지 목구멍에 소리가 꽉 들어차 꺽꺽거릴 정도였다.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신라의 장군들이 부랴부랴 김유신의 곁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국담은 더 이상 김유신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작전대로 후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담의 말이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국담을 에워싼 신라 군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국담은 그 틈을 타 말머리를 홱 돌렸다. 군사들이 국담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대들어보았자 목숨만 재촉할 뿐이었다. 국담은 휑하니 뚫린 사람의 길을 따라 질풍처럼 말을 몰았다. 신라군의 진영에 또 한 번의 광풍이 지나갔다.

 

  김유신은 안도의 한숨조차 몰아 쉴 수가 없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다 보니 복잡해진 머리를 정리할 여유도 없었다. 작전이고 뭐고 선택은 딱 하나 뿐이었다. 그대로 총공격. 그것만이 해법이었다. 진즉에 그랬으면 이처럼 황당무계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을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안이하게 대처한 결과 군사들의 사기는 곤두박질치고 신라군의 자존심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국담이 말을 몰고 떠난 자리에는 여전히 흙먼지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그, 그냥 밀어붙여라. 총공격이다!”

  전열을 정비할 새도 없이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군사들은 몽유병환자처럼 비실비실 앞으로 걸어갔다.

  “달려가란 말이다. 기병들은 뭐하고 있는가. 말을 몰고 달려가라고!”

  숨넘어가는 김흠순의 명령에 기병들이 열을 정비하고 말달릴 준비를 했다.

  “열이고 뭐고 그냥 달려! 모두가 달려가 파도처럼 휩쓸어 버리란 말이다.”

  김유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삼한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 그러할진대 다른 장군들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이 그렇다면 일개 병사들이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국담이라는 백제의 군관 한 명이 오만 신라군을 멍청한 바보로 만들어 버린 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앗, 엄청난 놈들이 몰려오고 있다!”

  엎친데 덮쳐 기가 막힌 나머지 숨조차 쉬지 못할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 병사의 외침대로 엄청난 놈들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삼백 여명의 백제 별동대가 말을 몰고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겨우 삼백 명의 별동대였지만 국담의 사건에 혼이 빠진 신라 군사들의 눈에는 해일처럼 보였다. 엄청난 해일이 몰려드는 것을 본 신라 군사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김유신을 비롯한 장군들이 아무리 채찍을 휘두르고 협박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후퇴, 후퇴한다!”

  급기야 김유신이 후퇴 명령을 내렸다.

 

  국담과 그의 별동대 3백 명이 5만 신라군을 후퇴하게 만든 작전. 이 작전은 모두 국담의 대담한 용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미추가 동의를 하지 않았으면 실행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추는 국담에게 이렇게 당부한바 있다.

  - 결심이 정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자네가 거인의 눈에 티끌을 넣고 오게. 자네의 생각대로 거인이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는 거인의 발에 상처를 입힐 수 있네. 하지만 머뭇거리다가는 티끌을 빼낸 거인에게 잡혀 죽고 말걸세.

  미추와 국담의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국담은 별동대와 함께 마지막 기습을 하고 즉시 백제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미추는 국담과 별동대 군관들을 독려하며 다음 작전을 지시했다.

  “놈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었으니 이제 미친개가 될 것이다. 개가 미치면 뇌가 비기 마련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머리를 써서 놈들을 잡아야 한다. 즉시 후퇴하여 각자 정해진 위치에 매복하라.”

  신라군이 후퇴를 한 덕분에 백제군은 매복할 시간을 벌었다. 이를 알 리가 없는 김유신은 백제군이 보이지 않자 불안해졌다. 장군들을 불러 작전회의를 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군사들의 떨어진 사기도 문제였다. 생각해보니 계백의 오천결사대와 싸울 때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행히 반굴과 관창의 죽음으로 황산벌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만 두 번 다시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다. 천존이 무성한 들풀들을 발로 짓이기며 화를 삭이지 못했다.

  “대장군, 우리가 속았습니다. 그놈이 혼자서 말을 몰고 오든 말든 일제히 들이쳤으면 깨끗이 끝날 전투였습니다. 놈들에게 허를 찔린 것입니다.”

  “괜찮네. 병가지상사라는 말도 있지 않나. 잠시 숨을 고른 뒤 일제히 치고 들어가세.”

  김유신이 자위를 하는 심정으로 천존을 위로했다. 엄청나게 화를 낼 것 같았던 김유신이 평정심을 찾자 다른 장군들도 한 마디씩 의미 없는 오지랖을 떨었다. 그 중 한때 당의 우장군이었던 김인문의 말이 김유신의 심기를 건드렸다.

  “소정방을 만나봐야 합니다. 우리 군사들의 떨어진 사기는 웬만한 말로는 다시 올리지 못합니다. 지금은 인해전술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가 왜 당나라와 연합을 했습니까. 그런데 당나라는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김인문의 말처럼 소정방은 여태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소정방의 역할이 있든 말든 5만의 군사로 3백, 아니 단 한명에게 패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마당에 당나라 탓을 하는 김인문이 몹시 못마땅했던 김유신이었다.

  “그럼 소정방을 찾아가 무릎 꿇고 사정이라도 하란 말이냐.”

  “그, 그게 아니고···.”

  김인문이 적당한 대답을 궁리하고 있을 때 막사 밖에서 보초병이 아뢰었다.

  “대총관님이 오셨습니다.”

  소정방이었다. 소정방은 유백영, 풍사귀, 방효태 등의 장수들과 함께 거만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아니, 무슨 전투를 그렇게 하시오. 오만의 군사가 고작 한 놈에게 당한단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김문영의 말에 노기를 드러내고 있던 김유신이었다. 소정방은 김유신이 어떻게 나올 줄 빤히 알면서도 심기를 건드려 떠보려한 것이다. 김유신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짐짓 결연한 태도로 소정방을 노려보았다. 둘 사이에 또 다시 팽팽한 긴장감과 전운이 감돌았다. 하지만 극단적인 행동은 이로울 것이 없다는 것을 둘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김유신은 당나라의 도움 없이 백제를 도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김춘추로부터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은바 있다. 따라서 분기를 내려놓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김춘추는 백제를 이렇게 정리했다.

  - 해동증자라고 칭송을 받던 의자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적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 계백이라는 걸출한 장군이 유린한 신라의 성이 얼마나 많았던가. 병장기 또한 백제와는 견줄 수가 없다. 똑같이 생긴 칼을 부딪쳐도 신라의 칼이 먼저 부러졌고 신라의 화살로는 백제의 갑옷과 방패를 쉽게 뚫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소정방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김유신은 김춘추의 당부를 생각하며 다음 작전을 의논하는 척했다.

  “작전은 무슨 작전이오. 그냥 밀어붙이면 될 것을. 우리 당군이 도울 것이니 미추 놈을 함께 때려잡읍시다.”

  “뭐요?”

  진즉에 그래야 했을 일을 이제 와서 같이하자는 것이다. 김유신은 자신이 거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저놈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었단 말인가.’ 하지만 꾹 눌러 참아야 했다.

  “그나저나 혼자서 신라군 진영으로 뛰어든 그 놈은 대체 누구란 말이오. 그 놈이 미추는 아닐 것이고. 백제에 그런 놈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오.”

  “대총관, 놈이 아무리 뛰어난들 전쟁은 한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소.”

  말은 그렇게 했으나 김유신의 머릿속엔 황산벌전투 당시의 잔상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사지에 몰려 있음에도 배수진을 치고 죽기로 버텼던 계백과 군관들의 투혼이 애잔하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 때 신라화랑들의 살신성인이 없었다면···.’ 김유신은 치를 떨었다. 삽시간에 쓸어버리지 않으면 백제는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황산벌전투를 통해 잘 알고 있었던 김유신이었다. ‘백제의 지방군과 고구려, 일본의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사비성을 무너뜨리고 의자를 잡아야 한다. 기분은 더럽지만 이제라도 소정방이 적극 협조를 한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드디어 나당연합군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신라군의 떨어진 사기는 당군이 가세함으로써 다시 올라갔다. 미추군을 추격하는 연합군 군사들의 발걸음이 맹렬히 두들겨 대는 북소리처럼 빨라졌다. ‘사비를 수성해야 하는 놈들이 언제까지 후퇴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을 터, 그대로 들이쳐 뭉개버리면 그 뿐이다.’ 김유신의 계산대로 미추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미추의 작전은 매우 특이했다. 만 삼천의 군사 중 미추를 중심으로 한 삼천의 군사가 길목을 가로막고 나머지 군사들은 백 명씩 백 개의 부대를 만들어 몸을 완전히 은폐시켰다. 그들은 모두 활을 장전하고 있었는데 한 번에 만대의 화살을 날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미추를 중심으로 한 삼천의 군사는 대개 기병들이었다. 아침나절에 신라의 진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후퇴하게 만든 국담과 백제의 군관들. 백제의 별동대가 비록 삼백이지만 연합군 군사들 입장에서는 삼십 만 이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미추의 작전은 이런 것이었다.

  - 이번에도 소정방은 신라군을 선봉에 세울 것이다. 국담의 별동대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아는 한 신라의 군사들은 전진을 멈추고 우물쭈물 할 것이다. 이 때 요소요소에 매복해 있던 우리 군사들이 화살을 날린다. 화살은 한 명당 최소 세 발에서 다섯 발까지 쏠 수 있다. 그러면 만 명 이상을 쓰러뜨릴 수 있다. 적들이 혼란한 틈을 타 삼천의 기병들이 말을 몰고 들어가 적진을 쓸어버린 뒤 순식간에 후퇴를 한다. 그러면 천 명 이상의 사상자를 추가로 낼 수 있다. 그런 다음 전군은 썰물처럼 후퇴하여 다음 매복장소에서 후방지원군과 합세를 한다.

  미추의 작전은 적중했다. 소정방은 이번에도 신라군을 선봉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김유신의 불만이 거슬려 신라군의 양 옆으로 당군을 배치하고 일제히 진격하기로 했다. 중앙에는 신라군, 가장자리에는 당군이 호위하여 달려가고 있는 형국이 된 것이다. 소정방은 그리함으로써 김유신의 불만을 잠재우고 당군의 희생을 최소화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미추의 궁수들은 측면에 있는 당군을 먼저 겨냥할 것이니 소정방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갈 일만 남겨두고 있었다. 연합군의 선봉이 백강의 지류인 작은 냇가를 건너고 빗물이 고여 자작자작한 벌판에 들어설 즈음이었다.

  “북을 쳐 전진을 멈추어라!”

  나당연합군의 총사령관 소정방이 지휘봉을 번쩍 들어 올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였다. 들판에는 논과 밭이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새끼줄처럼 일구어져 있었다. 논과 밭 주변으로는 듬성듬성 관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들판을 지나 찰진 유방처럼 동긋한 두 개의 야산이 보였고, 그 아래로는 민가들이 올망졸망했다. 군대가 지나가려면 필히 야산을 뚫고 난 협곡 같은 길을 지나쳐야 하는데 낌새가 이상했다. ‘아무리 산이 야트막해도 얼마든지 매복은 가능하다.’ 이런 소정방의 생각은 병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산에 매복이 있을까봐 그럽니까?”

  김유신이 빈정거렸다.

  “있다면 어쩔 것이오.”

  “아, 있다고 가정하고 그냥 넘으면 되지 않소. 이 병력으로 무엇이 두렵단 말이오.”

  김유신이 소정방과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럼으로 이번에는 김유신이 주도권을 잡은 듯 했다.

  “그럽시다. 그냥 밀고 갑시다. 놈들은 사비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 중 이곳과 가까운 서쪽에 진을 쳤을 것이오. 설사 놈들이 이곳에 매복해 있다 해도 더 이상은 놈들의 농간에 놀아날 수 없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밀어붙이면 놈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소정방이 처음으로 김유신의 말에 동조했다.

  “다시 전진한다. 저 산에 매복이 있을지 모르니 2만은 좌측 산을 넘고 2만은 우측 산을 넘어간다. 나머지는 중앙으로 난 길을 따라 사비나성까지 전진한다.”

  소정방의 명령에 따라 신라의 김법민은 좌측 산으로 향했고 당의 유백영은 우측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곧장 전진했다. 연합군의 선봉인 김흠순이 벌판 끝 즈음에 다다를 때였다.

  “저, 적이다!”

  시력이 하도 좋아 독수리눈깔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던 신라병사가 소리를 질렀다. 병사의 말에 김흠순이 반사적으로 지휘봉을 들어 올렸다. 흠순의 명에 따라 모든 군사들이 우뚝 멈추어 섰다.

  “저, 저 놈들은···.”

  연합군 군사들의 동공에 삼십만 명으로 보이는 백제 기병들이 꽉 들어찼다. 송진에 불이 붙을 것처럼 뜨거운 여름인데도 군사들의 몸이 오스스 떨렸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당할 수는 없는 노릇, 김유신이 무조건 돌진을 명령했다.

  “떨지 말고 그냥 밀어붙여라 이놈들아!”

  하지만 군사들은 쉽게 발을 떼려하지 않았다.

  “기병들이 먼저 달려가라. 그 뒤를 보병이 따른다.”

  김흠순이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다. 흠순의 명에 신라의 기병 5천이 일제히 앞으로 내달릴 채비를 했다. 이 때 좌와 우에서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관목 숲이었다. 백 명씩 부대를 나눈 1만 백제의 군사들이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화살을 날렸다. 좌측과 우측 가장자리에서 당나라 군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두 번째 화살과 세 번째 화살이 날아들었다. 화살은 거의 정확히 목표물을 맞혔다. 과녁이 백보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에 노출된 당나라 군사들이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앞사람을 방패막이로 두는 것뿐이었다. 그럼으로 연합군 진영은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악마들의 소굴과 다르지 않았다. 순간 미추가 황색 깃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삼천의 백제 기병들이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내달렸다. 신라의 기병들은 말의 엉덩이에 채찍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백제기병들이 연합군 군사들을 쓸어버리는 동안 활을 쏘던 백제 군사들은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을 쳤다.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5천이 넘는 신라기병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보병들은 수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화살로는 당나라 군사들이 죽었고 칼로는 신라의 보병들이 죽었다. 그 수는 미추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았다. 덕분에 연합군은 야산아래 진을 쳐야 했고 미추군은 일단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연합군의 진군을 막아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추군은 후방의 지원군을 모두 모아 서 나성으로 집결해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계속)

 

  *주석*

 1)가상의 인물.

 2)예산인근으로 추정.

 3)지금의 경남 합천군에 있었던 성.

 4)11품의 품계(관등). 당시 백제의 관등은 총 16품으로 되어 있었다. 나열하면 1품 좌평, 2품 달솔, 3품 은솔, 4품 덕솔, 5품 한솔, 6품 내솔, 7품 장덕, 8품 시덕, 9품 고덕, 10품 계덕, 11품 대덕, 12품 문독, 13품 무독, 14품 좌군, 15품 진무, 16품 극우이다.

 5)백제 대성 팔족 중 백씨가문의 자손. 가상의 인물.

 6)철로된 갑옷과 투구, 마면주, 말안장 깃대, 말갖춤 등 2014년 9월 24일 연합뉴스를 비롯한 각 언론매체에 보도된 내용 중 당시 공산성 내 저수지에서 발견된 전쟁도구들을 각색 인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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