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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일반/역사
백제의 한
작가 : 바위
작품등록일 :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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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가능성 있는 허구, 그 상상의 날개를 펼치다.

 
백제의 한
작성일 : 17-11-29 19:47     조회 : 296     추천 : 0     분량 : 17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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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 담

  계백의 시신이 백성들에 의해 수습되던 시간, 사비에서는 임시 정사암회의(주석1)가 열렸다. 소정방을 막으라고 백강으로 보낸 의직이 2만의 대군을 잃고 계백의 결사대마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달됐기 때문이다. 나라가 패망의 위기에 놓인 것이다. 하지만 의자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백제 제일의 씨족이자 왕족의 대표로서 마땅히 귀족회의에 참석해야 하지만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정사암회의에는 부여씨의 대표인 의자를 빼고 나머지 여덟 씨족의 대표들이 모였다. 귀족들은 의자가 참석하지 않음을 탓했다. 임시회의의 좌장이 된 국표(주석2)는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입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지휘봉을 번쩍 들고 자그마한 북을 쳤다. 무조건 조용히 하라는 약속된 신호였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요. 어찌하면 좋겠소?”

  “고구려와 일본에 원병을 요청해야 한다. 지방군을 모아 결사항전 해야 한다. 당과 화친을 해야 한다. 감히 당에 화친을 요구하다니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

  항전보다 항복과 화친을 주장하는 말들로 난장판이 벌어졌다. 국표가 다시 북을 쳤다.

  “원병요청은 당연하나 당과의 화친이라니요. 게다가 당에 항복을?”

  국표는 그러고도 니들이 이 나라의 귀족이냐, 니들은 조상 대대로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산 놈들이다. 그게 다 나라가 있었기 때문인데 나라가 망할 위기에 놓이니 이젠 나라를 팔아먹겠다고? 하며 호통을 치고 싶었지만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북채를 쥔 국표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정사암회의는 이제 항복파와 항전파로 나뉘어 팽팽하게 진행됐다. 항복파는 의자의 친고구려 반당노선이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전제아래 이제라도 고구려를 버리고 당에 납작 엎드림으로써 연합군을 물러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친이 아니라 항복을 해서라도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국표를 비롯한 항전파는 나라를 통째로 들어 바치면 백제라는 나라는 완전히 사라지니 망하더라도 결사항전을 해 백제의 자존심을 지키자고 맞섰다. 하지만 그들은 그때까지도 당나라의 진정한 속내를 모르고 있었다. 당의 목표는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였으며 백제를 통합한 신라에게 고구려를 치게 한 다음 한반도 전체를 먹어치우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 최고 귀족이라는 사람들이 어찌 저런 생각을 한단 말이오.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국표와 뜻을 같이하는 항전파 귀족들은 더 이상 가치도 없는 회의를 지속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국표의 집으로 향했다. 통일된 생각과 통일된 행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항복파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재 회합을 하기 위한 장소로 이동했다.

  “어서 가서 담이를 들라 해라.”

  국표는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아들인 국담을 찾았다. 수도방위대의 군관으로 있던 국담을 불러 돌아가는 사정을 자세히 물어보기 위함이었다.

  “도련님은 아직 방위대에서 퇴청하지 않았습니다. 인편을 보낼까요?”

  “그렇게 하게. 서둘러야 하네.”

  국표는 집사에게 국담을 불러오라고 말한 뒤 일행과 함께 집무실로 들어갔다.

  *

  그 시간, 국담은 수도방위대장과 수도방위에 대한 작전을 짜고 있었다.

  “의직과 계백장군이 패배했다. 당나라 놈들이 사비남쪽 들판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한다. 당군은 신라군이 도착하는 대로 연합하여 도성을 칠 것이다.”

  “그렇다면 나아가서 막아야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군사들은 고작 7천여 명에 불과하다. 어라하의 명을 받아 군사를 더 증가시켜야 한다.”

  “그럼, 어서 가서 재가를 받아야지요.”

  “정사암 회의를 거쳐야 한다.”

  수도방위대장과 군관들이 긴급회의를 했지만 결국엔 정사암회의에서 막혀 버렸다. 정사암회의를 통해 왕이 명령을 내려야만 지방군을 불러들이든 백성들로 급조된 오합지졸이든 군사를 증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은 정사암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그나마 열린 임시회의에서는 패만 갈렸다.

  “장군, 지금 저희 집에 귀족들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마침 아버지가 저를 부르시는데 가서 장군의 말씀을 전달하겠습니다.”

  “지금 백제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이라고 말씀드려라. 반드시 좌평어른이 어라하를 알현토록 하라.”

  국담은 수도방위대장의 명을 받고 집으로 말을 몰았다. 그사이 국표는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었다. 귀족들 대부분은 국표와 뜻이 같았다. 그들은 즉시 지방군을 불러들여 사비를 사수하는 한편 고구려와 일본에 원병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백제의 지방군은 중앙군의 숫자보다도 수십 배는 더 많았다. 지방군이 집결해 수도를 방위하는 동안 고구려와 일본의 원병이 도착할 것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들은 왕이 명령만 내리면 전국의 지방군이 득달같이 달려올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

  660년 7월10일 이른 저녁, 계백을 물리치고 뒤늦게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던 김유신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김문영을 미리 보내 소정방의 노여움을 달래려 했지만 군기가 엄하기로 소문난 당군이었다. 김유신의 우려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소정방은 김문영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같이 화를 내며 김문영을 참형하려 했다. 소정방은 나당연합군의 실질적 수장이었다. 그런 그가 김문영 정도를 처리하는 일에 고민이라는 단어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너를 지금 당장 죽일 수도 있지만 김유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분기를 다스리지 못한 소정방은 당장이라도 김문영의 머리를 쳐 허겁지겁 달려오는 김유신에게 보내고 싶었다. 전쟁의 주도권을 확실히 하려면 그렇게 센 방법도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정방이 김문영을 죽이지 않고 김유신을 기다린 것은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 주도권을 잡고자 하기위한 속셈이 깔려있기도 했다.

  김유신이 도착하자 소정방의 질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저놈을 당장 참수해라!”

  소정방의 명령에 따라 김문영이 포박되어 무릎을 꿇었다. 말로 잘 사과하여 사태를 수습하려던 김유신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무슨 짓이오!”

  “무슨 짓이라니. 전쟁에서 군기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오. 군기를 어겼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할 것 아니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정상참작이라는 것이 있거늘, 내 말이나 좀 들어 보시오.”

  “말은 무슨 놈에 말, 그대는 할 말이 없소. 당장 저놈의 목을 쳐라!”

  김유신은 더 이상 말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고 군문에 걸린 도끼를 빼 들었다.

  “너 이노옴! 그대는 황산벌의 상황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기일이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가. 나는 죄 없이 욕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아무리 대총관이라고는 하나 내 심복을 멋대로 죽이는 것은 나와 신라를 무시하는 처사다. 구지 그렇게 하겠다면 당나라와 먼저 결판을 내고 백제를 멸할 것이다.”

  김유신의 노여움이 얼마나 컸던지 머리털은 마치 심어놓은 듯 꼿꼿이 서고 허리에 찬 칼이 저절로 움직여 금방이라도 칼집에서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정방도 굴하지 않았다.

  “오냐, 해볼 테면 해보자. 나는 당 황제폐하의 명을 받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왔다. 네놈이 내 명을 거역한다면 폐하를 능멸하는 것이다. 네놈의 방자함을 이 칼로 다스려 주리라.”

  육십 구세의 소정방과 육십 육세의 김유신. 머리털과 수염이 하얗게 샌 두 장수의 충돌이 일촉즉발이었다. 이들의 결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연합은 깨지고 전쟁이 시작된다. 그 때, 당나라군의 우장인 동보량이 소정방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속삭였다.

  “우리는 이놈들을 이용해 고구려를 먹으러 왔습니다. 대의를 위해 분기를 가라앉히십시오.”

  그제야 소정방은 칼을 내리고 호탕하게 웃었다.

  “과연 백전불패 명장의 기개요. 장군의 기개에 내가졌소. 당장 김문영을 풀어주어라.”

  이로써 나당연합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그들의 목표는 사비성으로 진격해 의자를 잡는 일이었다.

  *

  국담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집무실로 향했다. 항전파 귀족 서너 명이 국표와 국정을 의논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날이 밝는 대로 의자를 찾아가 항전의 의지를 전달할 생각이었다. 국담이 아뢰자 귀족들은 어서 들어오게, 하며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국담이 들자 귀족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국담을 올려다보았다. 환한 이마에 짙은 눈썹, 알맞게 조화를 이룬 이목구비가 옥골선풍이었다. 국담은 고개를 조아려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들만 오신 겁니까? 다른 귀족들은요?”

  “그들은 당에 항복을 하자고 주장하네.”

  “네에? 그들은 역적입니다. 이전에도 성충과 흥수어르신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더니···.”

  “그러게 말일세. 그나저나 지금 상황은 어떤가?”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의 남쪽 아주 가까운 곳에 집결했습니다. 오늘 밤에라도 당장 쳐들어올 기세입니다.”

  “뭐, 뭐야? 그, 그렇다면 큰 일 아닌가. 이를 어쩌면 좋지?”

  “수도방위대장이 지금 당장 어라하를 알현해 군사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밤에?”

  “지금 밤이 문제가 아닙니다. 수도방위대장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라하가 허락을 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그땐 여기계신 귀족 어르신들이 독단으로 결정하셔서 군사를 모으고 놈들을 막아야 합니다.”

  “독단으로 결정하라?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더니 국 좌평어른, 담이가 문제를 아주 쉽게 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국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맞겠네요.”

  국담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귀족들은 전처럼 왕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아뢰는 일만을 반복했을 것이다. 귀찮아진 왕은 결국 정사암회의를 통해 중지를 모을 것이라고 했을 것이고, 중지가 모아졌다 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반려를 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사암회의는 왕의 눈치를 보며 왕의 뜻에 따라 아부나 하는 거수기모임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지금은 정사암회의의 귀족들마저 패가 갈린 마당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먼저 어라하를 알현해야 합니다. 어라하께서 도저히 허락하지 않으실 때 이 방법을 써야 합니다.”

  “수도방위대장도 같은 생각이냐?”

  “예, 아버지. 대장은 놈들이 지체하고 있는 오늘 밤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수도방위대장을 만나보고 그와 함께 입궐을 하도록 합시다.”

  “그럼, 저는 수도방위대로 돌아가 대장께 이 사실을 보고하겠습니다.”

  국담이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자 널따란 등짝에 어린 귀족들의 그림자가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자랐단 말인가. 저 녀석이 진정 난세의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계백도 못해낸 일을 저 녀석이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이무기를 때려잡은 녀석이라지만···.’ 국표의 기억이 3년 전 사비의 강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

  사비의 강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그 이무기는 새끼구렁이 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기상이 대단해 수많은 뱀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용이 되어 승천하려는 원대한 꿈이 있어 정도만을 걸어갔다. 시비를 거는 뱀들이 있어도 참고 지냈으며 가능한 포악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며 살다보니 상제는 그 구렁이에게 특별한 수명을 허락해 주었다. 특별한 수명을 허락했다는 것은 이무기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의미였다. 보통의 뱀들은 모두 주어진 수명이 있어 단명했으나 상제에게 특별한 수명을 허락받은 뱀들은 수양의 정도에 따라 이무기와 용이 될 수 있었다. 그 구렁이는 몇 백 년을 살아 드디어 이무기가 되었다. 상제는 그 이무기에게 사람을 취하지만 않으면 천 년 후 승천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든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그 이무기는 가장 넓고 깊은 사비의 강을 차지했다. 사비의 강은 이무기들이 용으로 승천할 수 있는 제일의 등용문으로써 억겁의 세월동안 사비의 강에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는 별로 없었다. 그럼으로 다른 강이나 호수에 살고 있는 이무기들이 호시탐탐 사비의 강을 노렸다. 특히 그 이무기에게 쫓겨난 터줏대감 이무기는 다른 이무기들을 이끌고 싸움을 걸어오곤 했다. 그들이 싸울 때는 강력한 비구름이 몰려와 장대같은 비가 사비의 강에 쏟아져 내렸다. 그 이무기는 폭풍을 동반한 번개와 우박을 불러 다시는 도전을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러한 힘은 용이 되어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천 년이 가까워 오자 그 이무기에게 폭풍과 번개, 우박을 부를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겨났다. 상제마저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힘이 그 이무기에게 생긴 것이다. 그러자 사비의 강을 차지하려고 그 이무기에게 도전하는 이무기들이 사라졌다.

  완벽하게 사비의 강을 차지한 이무기는 깊은 강물에 잠긴 바위굴에 들어앉아 조용히 수양을 하며 살았다. 배가 고프면 물고기를 잡아먹었지만 과도하게 많이 잡지는 않았고 물밖에 다른 생명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천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이무기는 승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사비의 강 이곳저곳을 헤엄쳐 다녔다. 그러던 중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위위에 앉아 하염없이 물만을 바라보는 여인이었다. 이무기는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놀라보기는 천 년에 딱 한 번 이었을 것이다. 단아한 자태를 휘감고 있는 신비한 기운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이무기는 넋을 놓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곁으로 가까이 갔다. 한데 여인은 여전히 물만을 바라보며 이무기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여인의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여인은 소위 눈뜬 소경이었던 것이다.

  이무기는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취해 자신의 동굴로 데려갔다. 무얼 어쩌려고 한 것도 아닌,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안전하게 데려왔을 뿐이었다. 그때 폭풍이 일며 강물이 집채만 한 파도를 만들어 냈다. 파도위로 강물을 갈라놓을 것 같은 번개가 치면서 웅장한 우레가 하늘을 삼켰다. 우레와 함께 들리는 목소리는 상제의 그것이었다.

  “너는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너는 천 년 묵은 이무기로 또 천 년을 살아야 용이 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이무기는 상제를 우러러 울부짖었다.

  “저는 여인에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제는 더 이상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천년이 지난 다음 날이 되어도 그 이무기는 이무기의 모습 그대로 동굴에 있었다. 천년을 고대하고 하루하루 인내하며 살아온 이무기에게 앞으로의 천년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너무나 억울해 도저히 화를 참지 못한 이무기는 여인은 갈기갈기 찢어먹어 버리고 악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그 이무기의 몰골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흉악하게 변해 버렸다.

  악귀로 변한 이무기는 강물에 사는 수많은 물고기를 사악하게 먹어치우고 뭍으로 올라가 가축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툭하면 사비의 마을에 출몰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눈에 띄는 사람을 잡아먹었다. 사람들은 이무기가 무서워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국담이 열 일 곱살이 되던 해였다.

 

  혈기가 탱천한 국담이 이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인 국표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라에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어린 네가 어찌 해낼 수 있단 말이냐.”

  “아무도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저라도 나서야 할 것 아닙니까. 그 놈은 나라의 대 재앙입니다.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겠습니까.”

  “계백을 비롯한 명장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면 해결할 것이다.”

  “그러다가 백성들이 다 죽습니다.”

  “그래도 너는 아직 어리다. 그 괴물을 어찌 당한단 말이냐.”

  “아버지, 이제 우리 집안이 나라에 입은 은덕에 보답할 차례입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국표는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겠다는 자식을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럼, 이것을 가지고 가거라.”

  칼날에 승천하는 용이 새겨진, 고이왕시절부터 전해 내려오는 국씨가문의 보검이었다. 그 검은 바위를 내리쳐도 부러지거나 날이 무디어지지 않았으며 도둑이 훔치려 들어오면 스스로 신비스러운 소리를 내어 범접하지 못하도록 하는 신물이었다.

  국담이 이무기를 죽이러 간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장안으로 퍼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국담을 도와 함께 가려 하지는 않았다.

  이무기가 산다는 수중동굴에 이르러 국담이 이무기를 불렀다. 이무기는 심한 욕을 하면서 귀찮게 구는 놈이 몹시도 괘씸했다. 천년을 사는 동안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보았어도 욕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무기가 굴 밖으로 나와 보니 과연 그럴듯한 청년이 우뚝 서 있었다. 그냥 죽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청년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기상이로다.’ 이무기는 국담을 올려다보며 경탄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이무기의 눈에는 국담을 에워싸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상서로운 기운이 보였다. ‘저 녀석은 사람들의 무리 속에 있는 용이다. 내가 대적하기에 버거운 상대다. 내가 죽든 저 녀석이 죽든 오늘에서야 결판이 나겠군.’ 이무기는 갑자기 폭풍을 불러 파도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가장 높은 물결을 일으키는 파도의 맨 끝에 올라타 천둥 같은 고함을 질렀다.

  “너, 이노옴! 네 놈이 감히 내게 욕을 한단 말이냐. 네 놈을 한 입에 삼켜주겠다.”

  “네 놈은 천년 악귀가 틀림없다. 어찌하여 죄 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느냐.”

  천년 악귀라는 말에 참을 수 없었던 이무기는 눈에서 무시무시한 광채를 뿜어냈다. 국담은 용의 비늘에 버금가는 이무기의 비늘을 건드린 것이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이무기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기절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국담은 강철 같은 눈빛으로 이무기를 쏘아보았다.

  “내가 너희들을 괴롭히는 것은 하늘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하늘이 너와 네 백성들마저 버릴 것이다. 하늘은 자기 마음대로 법을 정하고 일체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나는 그런 하늘과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싸운다는 것이 고작 죄 없고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히는 일이냐.”

  “죄가 있건 없건 괴롭히는 자는 자기 멋대로 누군가를 괴롭힌다. 나는 그것을 하늘에게서 배웠다. 힘없는 자들이 힘 있는 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 그것이 하늘이 정한 세상의 이치이다. 내가 아니라도 너와 네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은 무수히 많다.”

  “하늘의 이치는 사람이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한낱 미물에 불과한 이무기 따위가 하늘의 이치를 운운하다니 가소롭군.”

  “네 놈이 나를 섬기면 세상을 주겠다. 나는 얼마든지 그럴 힘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오늘 여기서 죽게 된다.”

  승리에 자신이 없었던 이무기가 잔머리를 굴렸다. 사람들의 용인 국담을 손에 넣고 주무름으로써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숙원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거기까지가 이무기의 한계였다. 이무기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타고난 뱀의 사악함이 있었던 것이다. 이무기가 만약 사악한 뱀의 성정을 완전히 버리고 수양을 했더라면 천년이 되는 날 용으로 승천해 상제의 곁에 머물렀을 것이다.

  “천하에 요괴가 따로 없구나. 네놈의 도움으로 세상을 얻느니 네놈과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이무기는 몸을 길게 뻗어 꼿꼿하게 세웠다. 이무기의 몸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이무기는 몸을 활대처럼 구부려 하늘로 튕겨져 올라갔다. 입을 쩌억 벌린 이무기가 빠르게 회전을 하며 국담을 향해 내리꽂았다. 국담은 보검을 빼들고 하늘을 응시했다. 이무기가 자신을 잡아채 삼키려는 순간 몸을 날려 머리를 잘라버릴 계산을 했다.

  “커엉!”

  이무기의 입에서 검붉은 불이 쏟아져 나왔다. 그 불은 금세 이무기의 온 몸을 뒤덮어 불의 갑옷을 만들었다. 국담은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며 불을 피해냈다. 이무기가 머리를 홱 돌려 공중으로 떠오른 국담을 삼키려 했다. 국담은 급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가문의 보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신비로운 빛이 보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보검보다 빠르게 이무기의 왼쪽 뿔로 스며들었다. 이무기가 괴롭게 울부짖었다. 순간 보검이 가차 없이 이무기의 왼쪽 뿔을 베어버렸다. ‘사람의 칼이 내 몸을 벨 수 있다니···.’ 이무기는 괴로워하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간의 검으로는 불의 갑옷으로 무장한 이무기의 몸을 벨 수가 없다. 하지만 국씨가문의 보검은 그야말로 신검이었다. 신이 내린 검만이 이무기를 벨 수 있었던 것이다. ‘저 놈이 상제가 보낸 사자란 말인가.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 이무기는 국담에게서 상제의 기운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국담을 죽여 상제에게 대항하고 싶어졌다. 국담은 다시 한번 보검을 휘둘렀다. 이무기의 오른쪽 뿔을 향한 것이다. 오른쪽 뿔만 제압하면 이무기의 행동은 확실히 둔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무기는 고개를 돌려 국담의 칼을 피해냈다. 칼날은 미치지 못했지만 칼날에서 뿜어진 신비한 빛이 수중동굴을 파괴했다. 이무기의 거처가 없어진 것이다. 천년거처가 없어진 것을 본 이무기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이무기는 사악한 뱀의 본능으로 미친 듯이 불을 뿜어냈다. 불은 산천초목을 태워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멀찌감치 숨어 기가 막힌 장면을 지켜보던 백성들은 허겁지겁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러는 동안 국담과 이무기의 싸움은 계속됐고 사비의 강으로 황금빛 석양이 내려앉을 즈음에야 끝이 났다.

  사람들은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서야 되돌아 왔다. 그리고 엄청난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드디어 이무기의 목이 잘린 것이다. 잘린 목에서는 붉은 피가 하염없이 새어나와 사비의 강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석양마저 이무기의 피에 물들어 검붉게 타올랐다. 이무기의 몸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백성들은 국담을 급히 찾았다. 하지만 국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성들은 감히 이무기의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한 채 멀찌감치 서서 술렁였다.

  “이무기에게 먹힌 건 아닐까? 이러면 안 되는데. 불쌍해서 어쩌나······.”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땅거미가 내려앉은 산자락을 타고 올라갔다.

  “저를 찾고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국담이 이무기의 몸을 훌쩍 뛰어 넘어 사뿐히 착지했다. 죽은 이무기의 몸을 가까이서 보니 어마어마하게 크고 징그러웠다. 백성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하늘을 찔렀다.

  국담이 이무기를 죽였다는 소식은 바람보다 빠르게 사비로 전달됐다. 바람을 달고 뛰는 한 소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사도리. 비사도리(주석3)는 사비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바람처럼 빠르게 뛰는 재주가 있어서 뒷산에 사는 온갖 동물들을 잡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사도리를 일러 ‘바람사냥꾼’이라고 불렀다. 그런 비사도리가 국담의 소식을 달고 사비로 뛰었으니 백성들은 저녁 먹을 생각도 잊은 채 국담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표는 국담이 이무기와 싸우러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당에 들어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들의 의로운 죽음을 맞이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이 천년 묵은 이무기를 상대로 싸워 이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신성인하려는 아들의 충성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천년 묵은 이무기를 죽이는 일은 하늘이 내린 영웅이 해야 할 일이었고, 국표는 자신의 아들이 그런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련님이 이무기의 목을 베었다합니다. 그 일로 지금 장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집사가 아뢰었다. 소식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사실을 확인한 국표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진정 내 아들이 상제가 내린 영웅이란 말인가. 상제는 내 아들을 통해 무엇을 하려함인가.’ 국표는 자신의 아들을 상제가 낙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상제의 뜻을 몰라 두렵기만 했다.

 

  국담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사비의 거리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오십여 만 명이나 되는 도성인구 절반이 뛰쳐나와 국담을 연호하며 만세를 불렀다. 이 사실을 목도한 태자 부여융은 군사를 풀어 백성들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달아오른 민심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태자는 국담으로 모아진 백성의 힘에 모골이 송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저런 자가 백성의 영웅으로 떠오른다면 왕실이 감당하기 힘들다. 다행히 저 자는 아직 앳된 청년이다. 더 자라기 전에 싹을 잘라놓을 필요가 있다.’ 융은 그 길로 의자를 찾아가 사실을 고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어찌 그 어린 나이에 천년 묵은 이무기를 죽일 수 있단 말이냐. 그것도 혼자서.”

  의자는 융의 말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의 재앙덩어리인 이무기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확인 질문을 했다.

  “어김없는 사실이더냐?”

  “백성들이 직접 목격한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치하할 일 아니냐. 국담이란 자가 나라의 재앙인 이무기를 죽였다면 경사란 말이다. 나라의 경사. 그런데 넌 왜 그 자를 경계하고 있느냐.”

  융은 의자의 말에 대답이 궁해졌다. 그렇다고 국담을 질투해서 그런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부여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의자의 치명적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건드렸다.

  “그자는 백제최고의 귀족이자 좌평인 국표의 아들입니다. 그런 자를 백성들이 영웅으로 추앙한다면 왕실의 위협이 됩니다.”

  의자는 태자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다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구나. 국씨집안은 대대로 백제의 충신가문이다. 그 가문은 우리 부여씨인 왕실이 있어야 존재한다. 절대로 배신을 할 가문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도 태자가 그리 생각한다면······.”

  의자는 부여융의 염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국담에게 대수롭지 않은 벼슬을 내리고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의자는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의리와 신의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다. 의자는 젊은 시절 해동증자로 추앙을 받으며 효와 신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삼았다. 서른일곱에 태자로 책봉된 의자는 마흔 중반 왕위에 오를 때까지도 부왕인 무왕에게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 우의가 깊었다. 의자가 왕이 된 이후 그를 믿고 따르는 젊은 인재들이 많았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의자는 그 중에서도 흥수와 성충, 의직, 계백, 윤충 등을 귀애했다. 의자는 그들과 함께 수많은 전쟁터를 누볐으며 신라의 대야성을 비롯한 30개가 넘는 성을 빼앗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 그러니까 국담이 스무 살이 되던 첫해 봄부터 의자의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다. 임자를 따르던 신하들과 어울려 향락에 빠진 것이다. 의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만이었다. 신라의 성을 차례로 빼앗고 국력이 강대해지자 숙적인 신라를 우습게 봤다. 향락도 즐겨본 사람이 그 맛을 아는 법. 방탕한 유희의 맛을 제대로 알게 된 의자는 신라와의 국경을 살피지 않고 고구려에만 의지하려했다. 특히 양만춘이 안시성에서 당태종을 물리친 사례를 들어 고구려가 최고라고 추키어 세우곤 했다.

  흥수와 성충 등은 자꾸만 엇나가는 의자에게 죽기로 간언했다. 하지만 임자는 흥수와 성충이 왕의 총애만 믿고 날뛰는 건방진 자들이라는 죄명을 뒤집어 씌웠다.

  성충이 옥사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흥수가 귀양지에 있던 서기 660년 7월 초,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을 하여 쳐들어오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다급해진 의자는 밸도 없이 귀양 간 흥수에게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충신 흥수는 돈수백배하고 다음과 같은 방법을 고해 올렸다. 과거 성충이 죽어가면서 올린 상소와 같은 내용이었다.

  - 백강상류포구에 진을 쳐 당군을 막고 신라군은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어라하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질 때를 기다려 일제히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임자를 비롯한 귀족들은 생각이 달랐다. 군사의 수가 달릴 때는 적들이 강을 건너기를 기다려 몰살시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임자의 말에 현혹된 의자는 중앙군을 비롯한 2만의 군사를 의직에게 주어 당나라 군대를 막게 하고, 동방의 방령이었던 계백으로 하여금 신라군을 무찌르게 하였다.

  의직은 백강으로 가는 도중 크고 작은 성에서 군사를 더 모아 모두 네 개의 부대를 만들었다. 제1진은 자신의 결사대, 2진은 우소군, 3진은 자간군, 4진은 무치군이었다. 의직은 제1진을 선봉으로 세운 뒤 나머지를 후방에 배치했다.

  - 적들이 강을 건널 때를 기다려 칠 것이다. 워낙에 대군이니 완전섬멸은 어렵다. 타격을 입은 적들이 강을 건너면 후퇴를 하면서 후방에 진을 친 군대와 합세한다. 적들은 후방에 진을 친 우리군대와 싸우는 과정에서 섬멸되다시피 할 것이다.

  의직은 이 같은 작전을 세우고 백강의 포구로 진격했다. 의직이 선봉대를 이끌고 백강포구에 다다를 즈음 척후병의 긴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자, 장군. 놈들이 백강을 넘고 있습니다.”

  “뭐? 어느 쪽이냐.”

  “뻘이 있는 곳입니다.”

  의직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의직은 당군이 강을 깊숙이 거슬러 올라와 배를 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소정방은 함대를 2군으로 나누어 1군은 백강을 거슬러 오르게 하고 자신이 이끄는 주력군은 백강의 한 포구를 통해 상륙을 시도했다. 소정방은 풀과 나무를 베어 뻘 위에 깔고 무사히 상륙을 마쳤다.

  “장군, 저기를 보십시오. 놈들의 함대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습니다.”

  의직은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강을 따라 오르는 적들을 상대해야 하지만 소정방이 이끄는 대군이 육지를 통해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략적 요충지를 미리 차지하지 못한 의직의 군대는 결국 대패했고 탄현에 이르지 못했던 계백의 결사대도 황산벌에서 전멸했다. 의직을 격멸한 소정방은 후방 요소요소에 배치된 백제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하며 김유신과의 약속장소로 진격했다.

  *

  “지금이야말로 국담이 나설 차례입니다. 하지만 직책이···. 이무기를 단칼에 해치운 백제 영웅의 관등이 이제 겨우 6품 내솔이라니.”

  귀족들은 일제히 국담을 돌아보았다. 의자가 태자 융의 질투를 받아들여 국담을 꽁꽁 묶어두는 동안 태자와 항복파 등의 기세에 눌려 적극성을 띠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국표는 아들의 출세에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성들이 추앙하는 영웅이 승승장구 한다면 태자를 비롯한 권력자들이 가만둘 리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자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의자가 국담을 벼락출세 시키지 않고 수도방위대의 군관자리에 머무르게 한 건 국담을 무척 아꼈기 때문이다. ‘국담이 살벌한 권력의 세계에 휘말릴 경우 결과는 불을 보듯 빤하다.’ 백제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젊은이의 희생을 내버려둘 리 없는 의자였다.

  ‘하기야 이제 녀석도 드러날 때가 됐지. 나이도 그만하고. 더구나 지금은 국가최고의 위기상황 아닌가. 내 아들이지만 녀석은 백제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국표는 지금이야말로 국담이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아들을 추켜세울 수는 없었다.

  “이제 스물이 갓 넘은 어린 아이입니다. 계백과 의직이 죽었다지만 백제에는 아직 수많은 영웅들이 남아 있습니다.”

  흑치상지를 비롯한 지방의 장군들을 염두하고 한 말이었다. 이럴 때 그들이 움직인다면 전세는 달라질 수 있다. 임존성의 흑치상지가 사비성을 방비하는 동안 정무와 여자진 등 지방의 장군들이 달려와 준다면 전세는 역전될 수도 있었다. 국표는 국담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수도방위대장을 도와 나라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어라하를 알현하고 서둘러 이 사실을 알려야 하네.”

 귀족들은 수도방위대장을 만나자마자 사비성으로 입궐할 것을 재촉했다.

 

 “어라하, 지금 나당연합군이 사비성 30여리 밖에 집결해 있다 합니다. 당장 오늘 밤이라도 쳐들어올 기세입니다.”

  의자의 혈관을 따라 흐르던 피가 격류처럼 요동쳤다. 귀족들은 의자가 어떻게 나올지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신들에 휘둘려 향락을 일삼았던 왕이었다. 국표는 의자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억지를 부릴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이다. 역적죄를 뒤집어쓸망정 단독으로 결행하리라.’ 하지만 의자는 전쟁터에서 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었다. 상황에 대한 판단을 정확하게 한 것이다.

  “사비성 남쪽에 진을 치고 죽기로 버티면 시간을 벌 수 있소. 지금당장 파발을 보내 지방군을 집결시키시오. 수도방위대장, 방위대 전원과 사비의 백성들을 모아 놈들을 막으라. 사생결단의 각오로 시간을 지연시키란 말이다.”

  “예, 어라하.”

  귀족들은 전혀 뜻밖이라는 태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 전까지 자만과 향락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던 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의자는 과거 현명하고 용감무쌍한 왕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해 있었다. 계백이 황산벌에서 죽기 전 기대했던 의자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었던 것이다.

  수도방위대장과 국담은 의자의 명에 따라 군사들을 끌어 모았다. 방위대와 백성들로 조합된 일만 삼천의 오합지졸이었다. 의자는 성 밖에 집결한 군사들을 독려한 뒤 높은 단상위로 올라갔다.

  “사랑하는 대 백제의 백성들이여, 상황을 이렇게 만든 나를 원망해라. 하지만 저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너희 부모가 유린을 당하고 너희 자식들의 미래가 암담하다. 너희들이 적들을 막아 시간을 벌면 백제의 지방군이 속속 사비로 집결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 부모가 살고 너희 자식들의 미래가 보장된다. 나가 싸우라. 너희들의 부모와 자식을 위해 저 위대한 황산벌의 결사대처럼 명예롭게 싸우라!”

  왕관을 벗어던지고 금빛갑옷으로 무장한 의자가 칼을 높이 빼들었다. 군사들의 함성이 어두운 밤하늘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이때, 항복을 주장하는 귀족들이 나타났다. 의자의 결정을 바꾸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패배를 너무나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차피 진 전쟁이니 일신의 안위가 무엇보다 중요한 인사들이었다.

  “어라하, 일만 삼천의 오합지졸로 18만 정예병을 어떻게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개죽음입니다. 차라리 항복을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불쌍한 백성들의 목숨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나가는 늙은 개가 비웃으며 짖어댈 말이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고 살던 저들이 백성들을 불쌍하다고 하다니.’ 국담은 분기를 참지 못하고 칼자루를 잡았다. 이무기를 잡았던 신검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국표가 아들에게 주의를 주며 의자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항복파 귀족들과 어울려 희희낙락했던 의자였다. 항복파 귀족들은 자신들과 어울려 방탕하게 놀던 때의 의자를 생각하며 저희들끼리 소곤거렸다.

  “우리가 강력하게 주장하면 어라하의 마음이 흔들릴 것이오. 인간의 마음은 원래 그런 것 아니오? 어라하는 예전의 해동증자가 아니오.”

  하지만 그들은 의자의 다음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의자는 하늘로 쳐들었던 칼끝을 부르르 떨며 항복파 우두머리의 목젖에 바짝 갖다 댔다. 깜짝 놀란 항복파 귀족들의 머리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 행동과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런 간신 같은 것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데는 나의 책임이 크다 하겠으나 네 놈들도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라까지 팔아먹자고? 네 놈들은 이 나라 귀족으로서 자격이 없다. 저 놈들의 목을 당장 쳐라!”

  그렇지 않아도 버거운 뇌를 굴릴 필요가 없어졌다. 의자의 명령은 항복파들에게 잔머리를 굴려야 하는 노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의자의 명령에 국담이 칼을 빼들었다. 이때, 국표가 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자신의 칼을 국담에게 건넸다.

  “저런 더러운 것들을 죽이는데 가문의 보검을 사용하지 마라.”

  국담은 아버지에게 칼을 받자마자 몸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렸다. 국담의 움직임은 아침안개 같기도 하고 회오리바람 같기도 했다. 긴 꼬리를 매달고 사방으로 움직이는 바람이 부유할 때마다 항복파 귀족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귀족들은 자신의 차례가 언제인지도 모른 채 순식간에 당했다. 땅바닥에 나뒹굴던 머리들이 떨어져나간 제 몸뚱이를 발견했다. 머리들은 그제서 두 눈을 부릅뜨고 피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넋을 잃고 칼의 춤을 바라보았다. 안개 같기도 하고 회오리바람 같기도 한 칼의 춤이 끝나는 시간은 불과 십여 초에 불과했다.(계속)

 *주석*

 1)백제는 고이왕 때 귀족들의 회의인 남당회의를 만들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뒤 이 회의는 정사암회의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정사암(政事巖)이란 한자 그대로 정사를 보는 바위이다. 백제의 귀족들은 재상을 선출할 때 후보의 이름을 봉함해 바위위에 올려놓고 인장을 받은 사람이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국사를 위한 회의를 열었다.

 2)가상의 인물. 좌평으로 국담의 아버지.

 3)가상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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