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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흑야 ( 黑夜 )
작가 : 은기라
작품등록일 : 2016.9.1
흑야 ( 黑夜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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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몰락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 하르켈과 유르켈. 아버지는 형인 하르켈을 춥고 가혹한 군사 훈련 기관인 챠티크 섬으로 팔아버린다. 아르스. 다섯 개의 땅으로 이루어진 대륙이자 나라. 흔들리는 왕권 사이 자치를 요구하는 귀족들이 늘어가고, 왕자가 귀족이 아닌 북쪽에서 온 보잘것없는 소녀를 사랑하면서 수도는 혼란과 음모에 잠겨간다. 십일년 후에 하르켈이 섬에서 나왔을 때,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은 수도의 대귀족이 되어있었는데…… 네이버 챌린지리그에서도 연재 중입니다 :) http://novel.naver.com/challenge/list.nhn?novelId=561082

 
03 화, 내 생의 빛
작성일 : 16-09-01 14:18     조회 : 649     추천 : 3     분량 : 7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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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 시작되면 농부들은 다음 해에 심을 작물과 씨앗들을 공동으로 보관했다. 숙성시킬 치즈와 말린 짐승의 고기도 종종 함께 보관했는데, 각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의 성에서 그것들을 지켜주곤 했다.

 

 아르스 대륙, 수도 동북쪽인 '세르토'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뱌토비스코 영주의 성 역시, 성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다 농부들의 귀중한 자산을 보관하고 지켜주었다. 영주의 헛간답게 그 규모는 웬만한 성처럼 컸다. 그래서 이쪽으로 맡기려고 오는 농부들이 많았다.

 

 그러나 근래 작물이며 고기를 훔쳐가는 간 큰 것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었다. 겨울이 시작되면 북부로부터 넘어오는 뜨내기들, 무법자로 이루어진 강도 집단들 중 하나란 말이 돌았고, 한둘이 아닌 몇십 명씩 무리지어 다녔기 때문에 주변 지역의 다른 작은 가문의 곳간을 깡그리 털어가는 일도 생겼다.

 

 뱌토비스코 가문은 즉각 반격에 나서기로 했다. 그래서 차기 영주가 될 유라이 뱌토비스코가 직접, 가문의 병사들 일부를 이끌고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길 희망하는 나 역시 함께 숨어있었다. 그의 바로 곁에서.

 

 최근 농부들 사이에 거짓 정보를 잔뜩 흘려놓았기 때문에 강도들은 의심없이 걸려들었고, 우리는 멋지게 기습에 성공했다.

 

 "그 녀석 죽이면 안 되냐?"

 "안 돼."

 "왜?"

 

 유라이의 지극히 본능적이고 야만스런 질문에, 나는 앞으로 나서며 그를 가로막았다. 가로막은 내 등 뒤로 이미 온몸이 꽁꽁 묶인 포로 하나가 겁에 질려 꿈틀거리고 있었고, 병사들은 남은 포로를 데리고 천천히 성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칼에 목숨을 잃은 강도들도 데려갔다. 보름밤 시신은 늑대의 무리를 불러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서 가서 네 병사들을 마저 지휘해."

 "내가 먼저 가라고 했고, 그래서 저기 가고 있잖아."

 "하지만 지휘관으로서, 너는 성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네가 포로를 이끌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단 말야."

 

 차기 영주의 위엄을 보이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나는 참았다.

 유라이는 차기 영주로 정해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문의 후계가 이미 본인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때리고 싶어."

 "누구를?"

 "누구든지! 근데 넌 때릴 수가 없잖아. 난 내 포로를 때리고 싶어. 우리 뱌토비스코 가문의 헛간을 훔쳐낸 저 놈을 잘근잘근 씹어 먹어버리고 싶다고!"

 "유라이. 살려둬야 해. 이제 그만 성으로 돌아가자."

 

 으아아! 하고 소리치는 유라이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숲을 울렸다. 어찌나 컸던지 앞서가던 병사들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웅성거리며 돌아올 정도였다. 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내가 손을 흔들어보여야만 했다. 병사들은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한숨을 쉬듯 대답했다.

 

 "……다리에다가 해 그럼."

 

 

 

 

 

 그 불쌍한 부랑자놈이 유라이가 때리는 동안 너무 심하게 울부짖었기 때문에 나는 그의 두 다리가 무릎 밑으로 죄다 불구가 된 것을 알았다. 놈은 죽어도 할 말이 없어야 할 죄인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좀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됐어, 됐어 이제 그만해."

 

 어둠처럼 깊고, 데일 것처럼 뜨거운 유라이의 눈동자가 거의 풀린 것을 보고, 나는 황급히 녀석을 떼어냈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풀어헤친 셔츠깃 사이로 가슴이 부풀어 터질 것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유라이가 흥분하는 동안 내 등 뒤의 가엾은 죄인은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삼겠다는 둥,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시질 않겠냐는 둥 울면서 온갖 헛소리를 해댔다.

 

 다리불구가 된 그 강도를 내가 말에 얹는 동안, 유라이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혼자서 나무를 때려대고 있었다. 이젠 거의 부러질 것 같은 그 나무가 불쌍할 지경이지만 내가 나무를 싣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먼저 출발해서 성으로 돌아오는데, 흘끔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말에 앉은 유라이는 계속해서 여전히 타오르는 눈빛으로 이 쪽을 바라보며 불만이 많은 듯 연간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보아하니 몇 번 더 때리고 싶은 게 분명해. 나는 녀석이 금방이라도 말에서 뛰어내려 내 쪽으로 달려올까봐, 도망칠 수 있도록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뱌토비스코 가문의 성 입구에서 하인들이 불을 밝힌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눈물이며 침이며 질질 흘러대는 포로를 데리고 일행들 중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 안으로 들어오는데, 유라이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늙은 영주가 지팡이를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내 칼을 받아라, 이 비겁한 놈들아!"

 "아악! 이 늙은이가 진짜!"

 

 그 '비겁한 놈'은 그의 아들이었으며 '늙은이'는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었다. 나이 든 뱌토비스코 영주는 기어이 유라이를 한 대 때려놓고 말았다. 아들의 이마를 제대로 갈겨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노인은 말리는 하인의 품에 안겨서 소리를 질러댔다. 유라이는 퉤 하고 제 아버지 발밑에 침을 뱉었다.

 

 "누가 이 늙은이 좀 방으로 데려가."

 "입 닥쳐 이 놈아, 아직 이 성 주인은 나야!"

 "노망난 늙은이! 시끄러워 죽겠네."

 "네 형이 살아있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어…… 한 번도!"

 

 그 말에 벌떡 일어난 유라이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방금 치른 전투의 흔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유라이의 뺨에는 적들의 몸에서 솟구친 피가 얼룩으로 묻어있었다. 나는 흥분한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에서 내렸다.

 

 "유라이!"

 

 맙소사, 그는 아버지를 때릴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달려간 다음 순간 유라이는, 기어코 하인을 뿌리쳐 바닥에 나동그라진 노인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아들의 어깨에 손을 짚고 초라히 일어난 앙상한 노인을.

 

 늙은 뱌토비스코 영주는 바들거리는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노인의 왼뺨으로 침이 흘러내리고 거기 검은 흙이 묻어있었다.

 

 "형은 이미 죽었어요, 아버지. 이제 올라가서 좀 쉬세요."

 "죽었다고……! 그 애가 죽었다고?"

 "네, 아버님. 정말 죄송합니다."

 

 노인은 갓난아기처럼 엉엉 울며 하인에게 업혀갔다. 유라이는 천천히 걸어 성벽의 아래, 말에게 먹일 건초 더미를 모아둔 곳 옆의 어둠에 가 섰는데 더 이상 그 불쌍한 노인이 자기 때문에 고통 받길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회색 늑대의 털가죽으로 장식된 망토를 입고 달빛 아래 강물처럼 흐르는 은으로 장식된 칼집을 찬 당당한 전사임에도 불구하고, 유라이는 평소처럼 하나의 거대한 맹수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쓸쓸해보였다.

 

 웅얼거리면서 노인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소란이 사라지자 하인들도 각자 할 일을 찾아 흩어졌는데, 나는 앞서 간 병사들이 포로를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몰라 건장해 보이는 하인 둘을 불러서 말했다.

 

 "감옥에다 가두어 놔. 다리뼈가 부서졌으니 너희가 끌고 가야만 해."

 "네가 뭐라고 이 성 안에서 명령이지?"

 

 목소리는 생경한 사람의 것이었다. 나이 든 뱌토비스코 영주의 오른편에 서서, 그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였다. 이 성에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영주의 가장 각별한 신하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었다.

 

 길고 큼직한 체격에 오소리의 회갈색 털로 장식한 검푸른 망토를 입었고, 잘 다듬어진 콧수염에 나이는 내 아버지뻘로 꽤 되어보였다. 회색 눈은 늘 나를 쏘아보았는데 꽤 무서웠다.

 

 "너나 입조심해, 가토 코즈반. 저 녀석은 나한테 고용된 거니까."

 "뱌토비스코 가문의 모든 고용은 영주가 승낙을 해야 해. 유라이, 네가 그걸 모른다고?"

 "알지. 내가 그걸 좆도 신경 안 쓴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가토, 네가 그걸 모르나?"

 "……유라이, 우리 얘기 좀 하지."

 "나중에. 피곤해 죽겠어."

 

 어둠 속을 벗어나는 유라이의 뒤에 대고, 가토 코즈반이 소리쳤다.

 

 "벌써 사흘째 피곤하다는 말만 되풀이 중인데 그 말하는 건 피곤하지도 않나!"

 "십이 년 만에 집에 돌아온 사람한테 죽 한 그릇 안 내온 주제에! 나한테 무슨 피로를 풀라는 거야?!"

 

 아들의 목소리에 대답이라도 하듯, 퇴장한 줄 알았던 뱌토비스코 영주가 창문 너머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네놈 줄 밥이 있느니 차라리 길가의 개한테 먹이고 말지!"

 "제발 좀 자라 이 정신 나간 늙은이야!"

 

 푸흡, 하고 나는 웃고 말았다.

 

 다음 순간 마당의 모든 하인들, 유라이, 그리고 가토까지 죄다 하던 걸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으므로 내가 웃은 걸 후회했음은 물론이다.

 

 "아니 그냥……"

 

 다음 말은 안 했으면 더 좋았고.

 

 "너무 웃겨서……"

 "……"

 

 정말 조롱하려던 뜻 같은 건 없었고 그냥 내 어린 시절과 유라이가 겪었을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그 속에 웃었을 뿐이지만, 안타깝게도 내 농담을 이해해 주는 건 유라이 밖에 없었다. 그는 배를 잡고 킬킬거렸지만, 가토로 말하자면 그는 거의 경멸에 가까운 표정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으니까.

 

 젠장, 어린 시절부터 난 이렇게 멍청하기만 하다.

 

 "저건 대체 뭔가, 유라이?"

 "하르켈!"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라이가 내 이름을 불렀다. 부르면서 장화를 고쳐 신고, 땅을 박차더니, 성큼 다가와 자기 말에 올라탔다.

 

 "오늘 밤은 야영이다. 괜찮지?!"

 

 괜찮을 리 없겠냐! 어제도 야영이고, 그저께도 야영이었는데! 십일 년 만에 아르스 대륙 본토로 돌아온 나는 한 지역의 영주 아들을 친구로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침대는커녕 사흘째 야영 중이었다! 그것도 성 밖에서!

 

 오늘에야말로 뭔가 좀 항의해보려 그를 부르려했지만, 유라이는 벌써 어둠 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별 수 없이 나도 말에 오르려 고삐를 쥐는데 내 손을 누가 움켜잡았다. 가토였다.

 

 "그대는 돌아와서 나와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 하르켈."

 

 아…… 네, 뭐, 그러죠. 차갑게 쏘아보는 회색 눈동자에 기가 죽어 웅얼거리며 대답했던 것 같은데, 유라이가 빨리 좀 오라고 성벽이 부서져라 고함을 질러댔기 때문에 아마 하나도 안 들렸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만 가야했다.

 

 

 

 

 

 우리는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불을 피웠다. 축축하지 않은 마른 가지를 놓고 제법 크게 불을 피워, 오늘도 새벽 추위를 면할 정도는 되겠다.

 

 "내 꼰대 봤냐."

 

 내가 모닥불을 피우는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유라이가 하는 말이 그거였다.

 

 "늙은 게 십이 년이나 됐는데 죽지도 않아. 입만 살아서 여전히 나를 괴롭히지."

 "좀 잘해드리지 그래. 많이 아프신 것 같던데."

 "형이 죽은 이후로 완전히…… 정신을 놓은 것 같아. 내가 도망을 칠까봐 가토 놈은 내가 성에 들어올 때까지 형이 죽은 걸 숨겼지. 안타까운 일이야. 너랑 싸움이나 마구 하며 다닐 줄 알았는데. 이제 내 아비는 원치 않는 아들에게 성을 물러줘야 하고 나는 세르토의 영주가 되야만 해."

 "가토는 그걸 말하려고 하는 거지? 너는 그래서 끝까지, 그와의 대화를 피하고 싶어 하고."

 "그래. 빌어먹을."

 

 타닥 하고 모닥불이 피었다. 딱, 딱 소리를 내며 나무가 타들어간다. 나는 제법 좋은 나무를 골라왔고 그들은 확실히 따스했던 것이다. 나는 불 앞으로 손을 내밀어 장갑을 벗고, 살을 데웠다. 밤공기에 창백해졌던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다.

 

 "너 지금 뭐하냐?"

 "너도 어서 손을 말려. 북부 사람들이 추위에 뭘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구."

 "그래서 계집애처럼 손이나 말리고 있냐."

 "네 손이 동상에 걸려도 내가 눈 하나 깜빡하는지 보자. 그 영감님도 기뻐하실걸!"

 "아버님이 왜 나를 저토록 미워하시는 줄 알아? 왜냐면 내가 그래도 싼 놈이기 때문이지. 효도를 하고 싶다면 동상 정도론 안 되고, 진즉 그 섬에서 죽어 없어져야 했어. 아버지는 유라이 뱌토비스코라는 아들은 싫어하시지만…… 유라이 뱌토비스코의 시신은 사랑하실 거야."

 "이봐. 지금 뭐하는 거야? 그러지마."

 "무엇을."

 "죽는다는 말! 생각조차 하지를 말라고. 맙소사 지금 내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스물 셋의 내 인생에 남은 건 그 지긋지긋한 챠티크 섬의 훈련소에서 얻은 상처들과, 그 곳을 졸업함으로써 내가 받은 명예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내 어린 시절이 무엇이라는 걸 증명하는 건 없었다. 나는 가족도 없고 아무도 없다. 무엇 하나 내 인생에 남아 있어준 게 없었는데, 단 하나 유라이 뱌토비스코가 살아 있어주었고 그가 죽는다는 건 지금껏 살아온 내 인생의 거의 모든 게 사라지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 맹렬해져 있었다.

 

 "제정신으로 한 말은 아니지? 놔두고 죽을 셈이야, 나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충실히 불효를 다하고 있잖냐."

 

 하늘에는 별들이 많았다. 밝고 많았다. 이 곳, 유라이의 고향인 '세르토' 지역은 내가 태어난 북부의 동쪽 아랫부분에 위치해, 흑야가 올 만큼 추운 겨울은 없었으나 깨끗하고 영롱한 이 곳 별들도 퍽이나 볼 만 했다.

 

 은하수는 여기도 찬란하다. 바람 없는 하늘에 소녀가 비단을 펼치듯 고요히 반짝이고 영원한 별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입을 떼고 말했다.

 

 "네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거야, 유라이 뱌토비스코. '세르토'의 차기 영주가 되는 것 외에는."

 "빌어처먹을!"

 "싫어?"

 "좋겠냐?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야. 차라리 가문을 내 손으로 말아먹으라고 그래."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과장된 몸짓, 연극배우 같은 태도. 나는 일부러 유라이가 보고 웃을 수 있는 행동을 취하며 일어났다. 탄식을 하듯 이마에 손을 갖다 대고, 연하고 긴 금발의 머리를 가슴께에 늘어뜨려 꼭 그 말을 들은 내 심장이 아프기라도 한 듯이나 쥐어뜯었다. 푸르고 하얗고, 아름다운 저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탄식하듯 머리를 흔들어대며, 모닥불 위를 마구 돌아다녔다.

 

 "할 수 없다고, 네가! 너 유라이 뱌토비스코가! 네가 할 수 없는 종류의 일도 있던가? 네가?"

 "그만하고 이리 앉아 이 바보자식아."

 

 유라이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걸로 만족했다. 하던 연기를 멈추고 모닥불 앞으로 털썩 주저앉자 내 망토 밑으로 퍼지는 흙먼지에 유라이는 기침을 하면서도 좋아했다. 아, 바보자식. 저 바보자식. 유라이는 기분이 좋을 때도 내게 욕을 하곤 했으므로 나는 그가 다시 본연의 생기를 되찾았음을 알았다. 그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킥킥거리며 웃었다.

 

 "챠티크 섬에서 너 같은 바보라도 안 만났으면 어떻게 버텼을지 몰라."

 

 

 

 

 

 꿈을 꾸었다. 챠티크 섬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됐을 때의 꿈이었다. 그 날 흑야에 유라이와 내가, 섬에서 탈출을 하지 못하고 훈련소로 되돌아왔다. 훈련소는 문이 열려있었고 이미 많은 아이들이 탈출을 하려다 주위에 목숨을 잃은 게 보였다. 그들은 동상처럼 딱딱하게 얼어있었고, 나는 유라이를 데리고 활짝 열린 훈련소의 문으로 들어가 곧장 교관들의 방으로 간 다음 문을 닫았다.

 

 똑똑하지는 않으나 북부에서 자란 나는 날이 이토록 너무 추울 땐 살갗이 얼음에 달라붙어 끔찍한 소리를 내며 찢어지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서랍을 뒤져 장갑 꾸러미를 찾아냈다. 내가 없었다면 유라이는 그 날 양손을 잃었겠지.

 

 우리는 필사적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곳을 막고 불을 피워 버텼다. 이 추위에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다음 추위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다음 추위에도 이 걱정을 하기 위해선 우린 오늘 살아남아야만 했다.

 

 ' 자지마, 이 개자식아. '

 

 유라이는 내 뺨을 때리곤 했는데 그가 어찌나 힘이 셌던지 살아남은 그 다음 날 아침 내 두 뺨이 시퍼렇게 핏줄이 터졌을 정도였다. 제가 때려놓고는 유라이는 그 꼴이 우습고 예쁘다며, 눈이 오지 않는 날 밤에도 내 뺨을 때리면 안 되냐고 내게 물었다. 이 진지한 미친놈을 곁에 두고 나는 펄쩍 뛰어 올랐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유라이는 나 없이 그 챠티크 섬을 어떻게 버텼겠느냐 말하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이후로도 많은 나날을 그가 내 목숨을 살렸다. 물론 자기 혼자만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많이 얻어맞고 걷어차이고 여기저기를 다치곤 했지만, 하늘에 맹세코 유라이 뱌토비스코 같은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미쳤을 뿐 아니라 그에게는 주위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었다. 이를 테면 순수한 분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 힘. 그러나 단순한 사고방식에, 가끔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하게 맡아지는 피 냄새와도 같은 그의 본능.

 

 그는 불이었고 바람이었다. 결코 내 손에 잡히질 않으나 또한 나를 떠나지 않을 내 생의 빛이었다.

 

 나는 그를 어디라도 따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어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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