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 - ④
1층.
문 위에는 ‘직원식당·매점’이라고 쓰인 팻말이 걸려 있다. 화림은 문에 바짝 붙어 안쪽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재킷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든다. 문손잡이를 잡는다. 심호흡을 한다. 손잡이를 쥔 손과 칼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잡이를 돌린다. 문을 천천히 밀며 안으로 발을 들인다.
다행히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화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긴장이 그 한숨에 실려나간 뒤 함께 사라졌다. 칼을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에서도 힘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사방이 나무 패널과 유리창으로 된 매점 부스가 식당 안 한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벌써 누가 다녀갔는지 매점 출입문 옆의 유리창은 몇 개가 깨져있었다. 다시금 살짝 긴장이 된 화림은 매점 안을 살피기 위해 유리창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창 너머로 안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좀 어질러져 있긴 했지만 먹을거리들은 그다지 없어지지 않은 듯 했다. 화림은 옆의 문 쪽으로 돌아가 문손잡이를 돌려봤다.
딸깍.
예상한 대로 잠금이 풀려 있었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자,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발밑에서 빠작거렸다. 안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흠, 이 정도면 양호하네. 비닐봉지가 어디 있으려나 …….”
경계심이 풀린 화림은 칼을 카운터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걸려 있던 비닐봉지를 한 개 떼어 들고는 빵 같은 먹을거리들을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 화림이 냉장고 문을 열고 막 오렌지 주스를 집어 들 때였다.
빠작.
매점 문 쪽에서 유리조각이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화림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가 그만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곳엔 웬 정장 차림의 중년 남자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도 화림만큼이나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져있었다.
“화림?”
남자가 화림을 아는 척 했다. 화림도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픽 웃었다.
“뭐야, 당신이었어?”
그런데 남자는 다짜고짜 화림에게로 다가와 애원했다.
“화림아, 나 좀 도와줘. 지금 사람들이 의원들 다 잡아 죽이겠다고 아주 난리야.”
“흥, 지랄하시네.”
“뭐?”
남자는 화림의 난데없는 비아냥에 당황했다.
“화림아, 갑자기 왜 그래? 사람이 변한 것처럼.”
그러나 화림의 빈정거림은 계속되었다.
“이것보세요, 백철훈 국회의원님?”
“응?”
철훈은 얼떨떨했다.
“내 아기를 죽일 땐 언제고, 이제 와 무슨 양심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거야? 어?”
철훈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러자 화림은 돌연 정색을 하며 철훈을 쏘아붙였다.
“태어나지도 못한 채 내 배속에서 죽은 나와 당신의 아기! 반은 당신의 피를 갖고 있었던 내 배속의 아기! 아비의 손에 죽은 불쌍한 내 아기! …… 이래도 계속 모른 척 할 거야?”
철훈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모르는 일이야!”
화림은 철훈이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것이 기가 막혔다. 그래서 조목조목 따져가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조금만 기다려주면 부인과 이혼하고 나와 결혼해주겠다며 입버릇처럼 말했었지? 하지만 정작 내가 임신했다고 하니까 당신은 똥 씹은 얼굴이 됐었어. 그렇지 않아?”
철훈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내가 언제? 나 그때 정말 기뻤어!”
그러나 화림은 콧방귀를 뀌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흥, 웃기시네. 암튼 난 그때 두려웠었어. 애와 함께 당신한테서 버림받을까봐. 그런데 침대 밖에서는 언제나 쌀쌀맞고 권위적이었던 당신이 그 주말엔 난데없이 서프라이즈 이벤트라며 여행을 가자고 했지. 게다가 콘도에선 친절하게 손수 요리까지 해줬어. 난 아기 때문에 당신이 변한 거라 생각했지. 그래서 별로 맛은 없었지만 주는 족족 다 먹어치웠었어. 바보같이 말이야.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난 당신 계획대로 유산을 해버렸지. 안 그래?”
철훈은 동요한 기색이 역력했다.
“계, 계획이라니? 난 그때 아이를 낳으면 정말 너랑 결혼할 생각이었어.”
화림은 피식 웃었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로만 알았지. 내가 당신의 아기를 가졌기 때문에 당신이 정말로 기뻐서 나한테 잘해주게 된 거라 믿었으니까. 그랬는데 막상 그런 상황에서 유산을 하고 나니까, 난 내가 잘못해서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당신한테 너무 미안했었어. 양수가 터진 채 아직 사람 형상도 다 못 갖춘 핏덩이들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 아이가 불쌍하단 생각보단 당신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을 정도였으니까. 훗, 지나고 생각하니 나도 당신만큼이나 나쁜 엄마였더라고.”
그 말에 철훈은 이때다 싶어 맞장구를 쳤다.
“나도 그때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정말이야. 믿어줘!”
하지만 화림의 눈엔 철훈의 절박해 하는 얼굴 이면에 감춰져 있는 비굴함이 빤히 보였다.
“그래? 그럼 그 바로 얼마 뒤에 내가 당신 책상 서랍 속에서 발견한 미페프리스톤하고 미소프로스톨*은 뭐지? 왜 정신과 의사 서랍 속에 산부인과에서나 쓰는 유산유도제가, 그것도 포장이 뜯어진 채로 들어 있었던 걸까?”
철훈은 하얗게 질려갔다.
“그, 그건…….”
뭔가 변명을 해보려고 했지만, 한번 벌어진 입은 마치 경기 들린 사람처럼 벌벌 떨리기만 할 뿐 다시금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더니 결국엔 다리에서마저 힘이 풀려버리면서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선 유리 파편들이 박혀 피가 스며 나왔다. 화림은 그 모습이 내심 통쾌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걸 알게 된 난 당연히 당신한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지. 그런데 얼마 안 있다 갑자기 문제가 생겨버린 거야. 당신이 비례대표 공천을 받게 되면서 의사 생활을 정리하려 한 거지. 난 당신이 그걸 기회로 우리 관계까지 정리해 버릴까봐 덜컥 겁이 났었어. 그대로 헤어지게 되면 자칫 복수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화림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돌연 몸매를 과시하듯 사뭇 도도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서 한발 한발 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며 철훈에게 다가갔다. 하이힐의 또각거리는 굽 소리와 유리조각을 밟을 때마다 나는 빠작거리는 소리는 철훈을 한층 더 겁에 질리게 만들며 점점 구석으로 몰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더 물러날 곳이 없게 되었을 때, 화림은 비로소 걸음을 멈추고 철훈에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뭔 줄 알아?”
그러나 이미 혼이 다 달아나버린 상태였던 철훈은 대답은커녕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화림의 얼굴만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무력해진 철훈의 모습에 기분이 흡족해진 화림은 엉덩이를 한껏 뒤로 뺀 관능적인 자세로 허리를 숙이고는 철훈의 귀에다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건 바로 요부가 되는 거였어. 기억나? 내가 언제부터 지금처럼 싼 티 나는 여자가 됐는지.”
그러더니 자신의 젖가슴을 넋이 나갈 대로 나가있던 철훈의 뺨에다 갖다 대고 쓰윽 쓰윽 비벼댔다. 철훈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황급히 고개를 뒤로 뺐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더 뒤로 도망쳐 보려고 팔다리를 막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리파편들만 손바닥에 더 박힐 뿐이었다.
화림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도도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 화림은 오른손을 허리에 얹은 채 한껏 조롱하는 눈초리로 철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간 우리가 의원실에서 가졌던 관계들은 휴대폰으로 다 촬영해놨어. 그게 여의치 않을 땐 녹음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말이야. 거기엔 재밌는 내용들이 꽤 많아. 다음 공천을 위해 누구한테 뇌물을 줬는지, 또 누구에게 뇌물을 받았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야. 그런데 그게 내년 총선 직전에 턱 하고 세상에 공개된다고 생각해봐. 그럼 과연 어떻게 될까?”
하지만 이미 머릿속이 텅 비어버린 것처럼 하얘진 철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의원실에서 정부와 섹스를 벌인 국회의원이라 ……. 정말 전대미문의 스캔들이 될 것 같지 않아? 게다가 옵션으로 뇌물 스캔들까지. 낙선은 따 놓은 당상에 각종 벌금과 추징금으로 빈털터리가 되는 건 당연지사. 그런 다음 나락으로 떨어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당신을 위로하듯 유혹해 목을 딴다. 어때? 내 계획이?”
화림의 말에 철훈은 화들짝 놀라며 허겁지겁 양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화림은 철훈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마치 자신의 복수가 이미 이뤄지기라도 한 것 같은 희열이 느껴졌다. 속이 후련해진 화림은 다시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자신이 조금 전 떨어트렸던 비닐봉지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런데 방금 계획이 바뀌었어. 내가 조금 전에 의원 죽이는 걸 주도하고 있는 사람하고 안면을 텄거든? 그래서 그 사람한테 부탁하려고.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의원 11명에 당신이 포함되지만 않게 해달라고 말이야. 그럼 내가 굳이 힘들이지 않고도 당신은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되는 거지. 개처럼 비참하게 이리저리 도망다니다 말이야. 난 그걸 즐기기로 했어. 꼬마 귀신이 복수는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고 자기는 구경만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어때, 재밌겠지?”
철훈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화림은 그런 철훈에게 다가가 희롱하듯 뺨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롱 섞인 이별 인사를 남기며 홀가분하게 매점을 나섰다.
“어디 날 농락했듯이 사람들을 농락하면서 끝까지 잘 도망 다녀보세요, 백철훈 의원님. 깔깔깔깔!”
매점에서 나오는 화림의 얼굴에선 승자의 여유 같은 게 묻어났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이 남지 않게 된 화림은 동원에게 돌아가기 위해 식당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별안간 식당 문이 활짝 열어젖혀지더니 학현이 무리를 이끌고 식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화림은 마침 잘 됐다는 얼굴로 학현을 반갑게 쳐다봤다. 그런데 학현은 화림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소리쳤다.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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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과 미소프로스톨(misoprostol)의 혼합약물은 인공유산을 유발한다. 산부인과에서도 흔히 사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