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 - ③
그때 마침 승희가 깨어났다.
“으음 …….”
동원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승희 곁으로 다가가 손을 부여잡았다.
“승희야! 정신이 들어?”
그런데 승희는 정신이 들자마자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발버둥을 쳐댔다 .
“으읍! 으읍! …….”
승희는 눈앞도 캄캄하고,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이 말할 수 없이 당혹스럽고 무서웠다. 단지 할 수 있는 거라곤 허공을 더듬으며 잘되지도 않는 비음을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내뱉는 것뿐이었다. 당황한 동원과 화림은 승희의 몸을 붙잡고 누르며 진정시켰다.
“승희씨! 진정해요!”
“승희야! 오빠 여기 있어! 승희야! 승희야!”
이것저것 해보던 동원은 보다 못해 승희를 품에 꼭 안았다. 그러자 승희는 그제야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동원을 부여잡고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읍, 으, 으, 으 …….”
동원도 울컥했다.
“승희야 …….”
화림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어느 새 눈물도 말라 버리고 그 만큼 마음도 많이 진정이 되자, 승희는 문득 승호의 일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동원의 손바닥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우리 오빠 어디 있어?’
동원은 처음엔 좀 얼떨떨했지만, 곧 그 뜻을 알아채고 똑같이 승희의 손에다가 답을 해주었다.
‘처음 숨어 있던 곳에 안전하게 있어.’
승희는 다시 동원에게 손바닥 글씨로 말했다.
‘만나고 싶어. 데려다 줘.’
동원은 망설여졌다. 승호가 지금 승희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충격을 받게 될지 그것도 걱정됐고, 또 승희가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금방 움직여도 되는 건지도 은근히 걱정이 됐다. 동원의 눈길이 다시 자연스럽게 화림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화림은 동원의 고민이 뭔지 눈치 채고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승희 씨 몸은 괜찮아요.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말 만에 하나 나중에 모두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만날 수 있을 때 만나게 해주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동원은 승희의 손바닥에 이렇게 썼다.
‘움직일 수 있겠어? 업어 줄까?’
승희가 손바닥 글씨로 대답했다.
‘아니, 걸을 수 있어.’
그렇게 세 사람은 승호와 학현이 있는 통한당 대표실로 향했다.
승희가 동원과 화림의 부축을 받으며 대표실로 들어서자, 책상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학현이 한달음에 달려와 맞이했다.
“승희야, 괜찮아? 언제 깨어났어?”
동원이 대신 대답했다.
“방금 전에요.”
하지만 승희는 지금 자신 앞에 있는 게 누군지, 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시선조차 학현이 아닌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학현은 그런 승희의 모습이 가여워 괜스레 코끝이 찡해졌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곧 눈시울에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얼른 고개를 돌려 동원에게 물었다.
“그런데 여긴 왜왔어?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승희가 승호 형을 보고 싶다고 해서요.”
“뭐? 그래도 괜찮겠어? 승호 충격 받을까봐 승희 이렇게 된 거 아직 얘기 안했는데.”
“그게 …….”
그때 갑자기 화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안에서 밖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승호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것이다.
“승희가 왜? 뭐가 잘못됐어?”
동원은 깜짝 놀라 얼른 대표실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리고 속닥이는 목소리로 승호를 나무랐다.
“형, 목소리 낮춰!”
하지만 승호는 이미 아무 말도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승희가 이상하다는 걸 대번에 느꼈기 때문이었다. 승호는 승희의 뺨이며 손을 마구 어루만지면서 동원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동원아, 승희 눈이 왜 이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왜 말을 안 해? 승희야, 말 좀 해봐. 오빠야.”
그러나 동원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학현이 대신 말했다.
“아까 본회의장에서 사고가 있었어. 그래서 시력도 잃고, 청력도 잃고, …… 그리고 혀도 …….”
“뭐?”
승호는 기막혀하며 동원을 쳐다봤다. 동원은 승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승호는 그때 문득 지인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인은? 지혜랑 같이 있어?”
동원은 이번에도 역시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학현이 대신 대답했다.
“죽었어.”
“뭐?”
승호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승호를 동원과 화림이 황급히 부축했다. 승호는 눈물을 글썽이며 동원을 원망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넌 뭘 한 거야? 어?”
그러고는 승희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흐느꼈다. 그런데 이미 한 차례 울음바다를 겪었기 때문이었을까? 승희가 덤덤히 승호를 꼭 끌어안더니, 마치 우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승호의 등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승호는 오히려 더 감정이 북받쳐서 우는 소리에 서러움이 더해졌다. 그로 인해 안 그래도 침울했던 방안의 분위기는 다시 더욱 가라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별안간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 보좌관님! 안에 계세요? 근데 이거 왜 잠겨 있는 거야?”
그 소리에 안에 있던 모두는 황급히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학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문을 열었다. 밖에는 남자들 여럿이 서 있었다.
“어이구, 안에 계셨네? 계셨으면 대답을 하시지 않고요.”
학현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애써 속내를 감추며 능청을 떨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 녀석들하고 좀 심각한 얘기를 하느라 …….”
“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학현의 뒤에서 어색하게 서 있던 동원, 승희, 화림에게로 쏠렸다. 학현은 다시 둘러댔다.
“아 글쎄 저보고 유승호 살려내라고 어찌나 지랄을 하던지. 그 바람에 곤욕 좀 치렀죠.”
사람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었군요. 하긴 저 사람들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겠네. 그럼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 우리가 좀 지켜드려야 하나?”
“괜찮아요. 쟤들은 원체 소심한 애들이라.”
학현은 그러면서 동원에게 확 고함을 쳤다.
“야, 강동원! 이제 적당히 하고 얼른 꺼져!”
그러자 바로 학현의 속내를 눈치 챈 동원이 어색하게나마 찔끔 겁먹은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 알았어요. 가면 되잖아요. 승희야, 화림씨, 가요.”
화림도 얼떨결에 연기에 동참했다.
“네.”
그렇게 세 사람은 사람들의 눈치를 피해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대표실에서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지게 되자 화림이 말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될 때까지는 대표실에 안 가는 게 좋겠어요. 아까 보니까 우릴 보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더라고요.”
동원도 동감이었다.
“그래야겠어요. 승희도 자기 오빠가 무사한 거 알았으니까 이제 이해하겠죠.”
그런데 얘기 도중 화림은 문득 동원의 얼굴에 유난히 핏기가 없는 걸 발견했다. 게다가 식은땀도 흘리는 게 영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동원 씨,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어디 아파요? 피 뽑아서 그런가?”
“네? 아니,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 그런 거겠죠.”
그러면서 약간 겸연쩍은 기분이 든 동원은 괜스레 손으로 뺨과 턱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화림은 자기 직업상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승희도 저대로 그냥 둬선 안 될 것 같았다.
“여기 구내식당이나 매점 같은 거 있죠?”
“1층에 있긴 한데 …….”
“그럼 승희 씨 데리고 먼저 의무실로 가 있어요. 난 거기 가서 먹을 것 좀 가져오든지 만들어 오든지 할 테니까.”
“아니에요. 귀찮게 그러실 필요 없어요. 게다가 이럴 때 인적이 드문 곳에 여자 혼자 다녀오는 것도 위험하고.”
그러자 화림은 씩 웃으면서 재킷 주머니에서 은장도처럼 생긴 작은 붉은색 칼을 짠 하고 꺼내 보였다. 동원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칼도 가지고 다녔어요?”
정말 생각할수록 화림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나 보다시피 한가락 하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
“게다가 동원 씨 때문에만 가는 것도 아니에요. 승희 씨도 안정을 취하려면 영양보충이 필요해요. 또 혀가 없는 상태에서 음식을 먹는 방법도 배워둬야 하고요. 그러니 고집 피우지 말고 먼저 의무실로 가 있어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동원도 더 이상 말리기만 할 순 없었다.
“어쩔 수 없네요. 대신 조심하시고요.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돌아오세요. 알았죠?”
“걱정 말아요. 그럼 다녀올게요.”
화림은 그렇게 말한 뒤 동원과 승희를 뒤로 한 채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동원은 제자리에서 저만치 가고 있는 화림을 계속해 바라보고 있었다.
화림은 동원이 움직이는 기척이 안 느껴지자 괜히 뒤통수가 간지러워졌다. 그래서 막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돌연 뒤를 돌아보며 동원을 향해 찡긋 윙크를 해줬다. 그리고 바로 다시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동원은 그런 화림의 행동에 왠지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화림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남다른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화림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동원은 그제야 승희를 데리고 의무실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