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 - ②

　화림은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거참, 그 꼬맹이 녀석 복수 한 번 요란하게 하네. 그런데 왜 의원도 아닌 승희 씨한테 이런 짓을 했을까?”

　동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림을 쳐다봤다. 얼떨결에 동원과 눈이 마주친 화림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요? 뭐 아는 거라도 있어요?”

　동원은 화림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다.

　“실은 저 아까 로텐더 홀에서 기절했을 때 이상한 걸 봤었어요.”

　“이상한 거요?”

　“네.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는데, 거기서 젊은 궁녀들하고 꽃님이가 눈과 귀가 지져지고 혀가 잘려서 죽는 장면이 나왔었어요.”

　화림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건 좀 전에 승희 씨가 당한 거랑 똑같은 거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 승희 씨가 …….”

　“그건 저도 잘 ……. 근데 꽃님이와 궁녀들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게 저와 똑같이 생긴 무당이었어요.”

　“무당이요?”

　“네.”

　“그럼 동원 씨한테 복수하려고 승희 씨를 이렇게 만든 건가? 그치만 아까 민철 씨란 사람은 복수의 대상이 정치인들이라고 했는데.”

　“뭐, 제가 전부를 본 게 아닐 수도 있겠죠. 게다가 꽃님이가 자꾸 저한테 무지개떡을 내미는 것도 이상하고……. 아참, 혹시 타로 카드에 대해 좀 아세요?”

　“네? 뭐 약간은……, 근데 왜요?”

　“‘무너지는 탑’이란 카드의 뜻이 정말 ‘파멸’이에요?”

　“무너지는 탑이라…… 맞아요. 그건 보통 ‘멸망’, ‘최후’ 같은 뜻을 나타내죠. 아 맞다. 또 ‘과거의 청산’이나 ‘새로운 출발’이라는 뜻도 있어요.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그게 왜요?”

　“실은 그게…….”

　그때 화림이 불쑥 동원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 맞다! 우리 최면을 한번 걸어보는 거 어때요?”

　“최면이요? 누구한테요? 저한테요?”

　“네, 당연하죠. 그럼 누구한테 하게요? 실은 나 정신과 병원의 간호사거든요.”

　“정신과요?”

　“왜요? 뭐 정신과는 병원 아닌 것 같아서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뜻밖이라서 …….”

　“암튼 그건 됐고, 요즘 정신과에선 보조 치료 목적으로 최면도 사용하거든요. 내가 딱히 배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옆에서 의사들이 하는 걸 구경해서 흉내는 낼 줄 알아요.”

　“그런데 그걸로 어떻게 하게요?”

　“동원 씨 무의식 속에 있는 기억들이 뭔가 지금 상황과 연관이 있는 듯 하니까 최면으로 그걸 역행해보려고요. 누가 또 알아요? 뭔가 쓸 만한 힌트를 얻을 수도 있을지. 밑져야 본전이잖아요?”

　동원은 언뜻 삼천포로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진지한 화림의 태도에 끝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그러면 해볼……까요?”

　그러자 화림은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동원을 재촉했다.

　“자, 그럼 어서 여기 앉아요.”

　“지, 지금 당장 하게요?”

　“그럼 당연하죠. 뭐 해요? 어서 이리 와요.”

　화림의 성화에 동원은 뭐라 더 대꾸하지도 못하고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화림이 동원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자, 마음을 편하게 가지시고요. 당신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온몸이 축 늘어져서 의자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습니다. 자 이제 제가 셋을 거꾸로 세면, 당신은 머릿속이 텅 비고 온몸이 편안해지면서 마치 공중에 붕 뜬 기분이 됩니다. 셋, 둘, 하나.”

　그러면서 화림은 동원의 얼굴 앞에다 대고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정말 최면에 걸린 것처럼 동원의 몸이 대번에 축 늘어졌다. 화림이 물었다.

　“자, 기분이 어때요?”

　동원은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침대에 누워 있어요.”

　“침대요?”

　“예. 사방이 온통 하얀 게 어디 병실 같은데 …… 웃!”

　동원이 갑자기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인상을 썼다. 화림은 당황해서 물었다.

　“왜요?”

　“손발이 침대에 묶여 있어요! 꼼짝할 수가 없어요!”

　화림은 동원을 진정시켰다.

　“걱정 말아요. 이건 최면이니까 제가 말하는 대로 하면 금방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자, 침대에 편히 누운 채로 다시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과거로 가세요.”

　잠시 후 화림이 다시 물었다.

　“지금 어디죠?”

　동원은 마치 주변을 유심히 살피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꺼풀에 잔뜩 힘을 줬다.

　“캄캄해요. 하지만 사방에서 은은한 붉은색 같은 빛이 새어들어 오고 있어요. 물속인거 같아요.”

　“물속이요?”

　“네. 제가 굉장히 작아요.”

　“설마 태어나기 전?”

　“그런가 봐요.”

　그런데 동원이 또 불쑥 인상을 썼다.

　“어? 저 혼자가 아닌가 봐요.”

　“그래요? 누가 있죠? 혹시 쌍둥이 형제?”

　“저랑 똑같이 생긴 아기가 있어요. 저보다 덩치가 좀 더 큰 것 같기도 한데…….”

　“그럼 쌍둥이 형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갑자기 동원이 막 구역질을 하며 발버둥을 쳤다.

　“우웩! 그, 그러지마! 으아악!”

　화림은 동원의 팔을 누르며 물었다.

　“왜요? 왜 그래요?”

　동원은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막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제가 형을 잡아먹고 있어요! 산 채로 살을 뜯어 먹어요! 우웨엑!”

　당황한 화림은 허둥지둥 동원을 불렀다.

　“이제 그만 그곳에서 나오세요! 더 옛날로 가요! 꽃님이를 만났던 때로요!”

　그러자 곧 신기하게도 동원의 얼굴이 이전의 평온하고 순한 얼굴로 금세 돌아왔다. 그렇게 겨우 한숨 돌리게 된 화림은 다시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으며 동원에게 물었다.

　“꽃님이가 보이나요?”

　동원은 마치 꽃님을 찾아 두리번거리듯이 눈꺼풀을 씰룩거리더니 금방 얼굴이 환해졌다. 화림이 물었다.

　“꽃님일 찾았어요?”

　“아니요.”

　“네? 그런데 왜 표정이 …….”

　화림은 얼떨떨했다. 그런데 동원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의 것이었다.

　“승희예요.”

　“예? 승희 씨요?”

　“승희랑 똑같이 닮은 궁녀가 있어요. 어? 저랑 똑같이 생긴 내시가 승희에게 달려가요.”

　그 내시는 강 내관이었다. 강 내관은 승희를 닮은 궁녀를 보자마자 한 달음에 달려가 아는 척을 했다.

　“승희야!”

　그 궁녀는 이름도 승희였다. 그런데 승희는 자신을 보고 반가워하는 강 내관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당혹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제발 이러지 마.”

　그러나 강 내관은 되레 더 친하게 굴며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건네주려 했다.

　“이거 좀 먹어 봐. 무지개떡이야. 방금 만들어서 아주 맛있어.”

　승희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난 이제 전하의 여자야. 이러다 누가 보면 우리 둘 다 큰일 나.”

　하지만 강 내관은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왜? 동무끼리 뭐가 어때서? 우린 어릴 때부터 동무잖아.”

　그런데 그때 주변을 살피던 승희가 뭘 봤는지 질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강 내관은 어리둥절해하며 승희가 봤던 곳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내 승희와 마찬가지로 기겁하며 승희의 옆에 나란히 붙어 고개를 수그렸다. 승희와 강 내관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 임금과 중전이 수십 명의 궁인들을 뒤에 거느린 채 둘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 장면을 제3자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던 동원은 순간 화들짝 놀랐다. 임금의 얼굴은 학현과, 중전의 얼굴은 지혜와 판박이처럼 닮아있었던 것이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풍기는 분위기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중전은 강 내관과 승희를 잔뜩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리 내관이라고는 하나, 궁 외진 곳에서 남녀가 사사로이 뭘 하고 있었던 것이냐?”

　승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둘러댔다.

　“그, 그게 …… 그냥 지나다가 마주친 …….”

　그러나 중전은 바로 버럭 호통을 치며 노발대발했다.

　“네 이년! 어지서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내가 저기서부터 너희 년놈들이 노닥거리는 걸 봤느니라!”

　승희는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보고 있던 임금이 중전을 타일렀다.

　“중전, 그만 하시오.”

　중전은 고개를 조아렸다.

　“하오나 궁중의 법도가 …….”

　그러자 임금은 강 내관보고 들으라는 듯 빈정거리며 말했다.

　“흥, 그래봐야 고자 놈인데 제깟 녀석이 뭘 어쩌겠소? 이만 갑시다. 하하하.”

　그러고는 원래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중전은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결국 마지못해하며 임금의 뒤를 따라 그 자리를 떠났다.

　승희는 졸였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때 조금 전 임금을 수행해가던 내관들 중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승희에게 전했다.

　“전하께서 오늘 밤 강녕전으로 들라 하셨네.”

　승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그러나 내관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지금 당장 처소로 돌아가 심신을 정갈히 하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게.”

　그러고는 다시 임금이 간 방향으로 서둘러 되돌아갔다. 승희도 갑작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허둥지둥 처소로 돌아갔다. 그러나 강 내관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였다. 불끈 쥔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강 내관의 모습을 제3자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던 동원은 문득 아까 로텐더홀에서 학현이 자신에게 빈정거리며 시비를 걸던 장면이 섬광처럼 뇌리에 스쳤다.

　 - 맨날 고자새끼마냥 찌질거리던 놈이 …….

　동원은 울컥했다. 지금 강 내관이 느끼고 있을 모멸감이 그대로 자신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동원이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떠는 걸 본 화림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왜 더 말이 없어요?”

　그러자 동원은 마치 순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의식 속에서 또 다른 광경이 보이는 장소로 이동했다. 거기선 강 내관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저 앞 연못가에서 한 생각시가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생긴 강 내관은 조용히 그 쪽으로 다가갔다.

　현실의 동원은 화들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설마, 꽃님……?”

　화림은 귀가 번쩍 뜨였다.

　“네? 꽃님이요? 만났어요? 어디예요? 뭐라고 그래요?”

　그때 생각시의 바로 등 뒤까지 다가간 강 내관이 말을 걸었다.

　“얘, 거기서 뭐해?”

　생각시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동원은 잔뜩 긴장한 채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섬광이 터지듯 눈앞이 하얘졌다. 동원은 눈부셔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앗!”

　잠시 후 눈부심이 걷히자, 동원은 어느 캄캄한 산기슭에서 손에 칼을 든 채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번엔 ‘제 3자의 시각’에서 상황을 지켜보는 입장이 아니었다. 동원은 어느 새 강 내관의 복장을 하고, 하얀 가면을 쓴 무당 ‘천명’에게 칼을 겨눈 채 맞서고 있었다.

　그때 천지를 진동케 하는 번개와 천둥이 잇따라 쳤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동원은 마치 까무러치는 것처럼 몸서리를 치다 들고 있던 칼로 엉겁결에 천명의 가슴을 푹 찌르고 말았다. 동원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얼른 칼에서 손을 뗐다.

　“아, 아냐 ……. 내가 한 게 아냐 …….”

　강 내관의 입장이 되어 있던 동원은 횡설수설하며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손과 천명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현실에서 최면 상태에 있던 동원이 진짜로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형, 미안해. 흑 …….”

　화림은 의아했다.

　“형?”

　그 순간 동원이 돌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가슴팍을 손으로 콱 움켜잡았다.

　“커헉!”

　화림은 화들짝 놀라 동원의 손을 붙잡고 다그쳐 물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그때 최면 속 세상에 있던 동원의 눈엔 바로 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부들거리고 있는 강 내관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칼에 찔린 가슴팍을 손으로 움켜쥔 채 입에서 피를 쿨럭쿨럭 토해내면서 강 내관을 향해 “바보 같은 녀석 …….”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느 새 강 내관에서 천명으로 입장이 변해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동원도 마치 진짜 칼을 맞은 것처럼 가슴을 움켜쥔 채 몸을 막 뒤틀며 고통스러워했다.

　“으윽! 으으윽! …….”

　결국 화림은 더는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얼른 동원을 깨웠다.

　“동원 씨, 이제 제가 셋을 세면 최면에서 풀려나는 거예요! 알았죠? 하나, 둘, 셋!”

　화림의 사인과 동시에 동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을 번쩍 뜨며 뒤척임을 멈췄다. 그러나 눈이 부신 나머지 금방 다시 실눈이 되었다. 그러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화림은 티슈를 건넸다.

　“이걸로 닦아요.”

　“아, 고마워요…….”

　화림이 궁금해 하며 물었다.

　“마지막에 도대체 뭘 본 거예요? 몸부림까지 막 치고.”

　하지만 동원은 최면 상태에서 겪었던 일들로 인해 여전히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게 제가 갑자기 이 사람 저 사람을 왔다 갔다 해서 …….”

　그 때문에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들을 금방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화림은 질문을 바꿔 다시 물었다.

　“혹시 쌍둥이 형제가 있어요?”

　동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 외동아들이에요.”

　화림은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그래요? 혹시 어렸을 때나 동원 씨가 태어나기 전에 유산되거나, 혹은 먼저 태어난 뒤 죽은 쌍둥이 형제가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고요?”

　“예. 그런데 왜 최면 속에서 그런 쌍둥이 형제의 태아가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걸까요? 게다가 제가 그 아이를 잡아먹기까지 하고 …….”

　그러면서 그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동원은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화림은 난감해 했다.

　“글쎄요. 그냥 기억의 오류인가?”

　동원은 어리둥절했다.

　“오류요?”

　“네. 최면이란 건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되돌려 보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무의식 속에 기억되어 있는 정보’를 되돌려 보는 거에 불과하죠. 그런데 그 ‘기억’이란 게 그것이 저장될 때나 떠올려질 때 오류나 왜곡이 발생하기도 하거든요. 심지어 어떤 때는 겪지도 않은 일을 마치 겪었던 것처럼 조작해놓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최면에서 본 걸 무조건 믿을 필욘 없어요. 참고만 하는 거죠.”

　동원은 살짝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그래요 ……? 그럼 제가 최면 속에서 봤던 것들이 다 헛것일 수도 있는 거겠네요?”

　화림은 멋쩍어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이거 괜히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 건가?”

　그러나 동원은 더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차례로 떠올리면서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뭔가 연관이 있을 법하면서도 정작 딱 이거다 하고 명확하게 짚어지는 것이 없었다. 학현에게 복부를 맞고 기절했을 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내관과 가면 쓴 무당을 본 일, 꽃님이 떨어져 죽은 임산부의 피로 자신의 얼굴과 가면을 쓴 무당의 얼굴과 민철의 얼굴을 차례로 그려서 보여준 일, 그리고 방금 전 최면 상태에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내관이 승희와 닮은 궁녀에게 거절당하고 학현과 닮은 임금에게 고자 놈이라 멸시를 당하고 지혜와 닮은 왕비에게 야단을 맞은 일, 또 그 임금이 승희를 닮은 궁녀를 밤에 처소로 불러들이려 해서 내관에게 모멸감을 안겨준 일, 끝으로 내관이 가면 쓴 무당을 칼로 찌르는 장면에서 자신의 의식이 두 사람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갔던 일 등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깜빡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것은 바로 최면에서 깨어나기 직전 가면을 쓴 무당이 칼에 찔린 채 비틀거리고 있는 모습 위로, 아주 짧은 순간 지혜가 마찬가지로 가슴에 칼이 박힌 채 피를 토하면서 자신을 향해 히죽거리고 있는 모습이 겹쳐져 보였던 일이었다. 이에 동원은 머릿속이 정리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한편 화림은 동원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표정도 더욱 어두워진 것을 보고는 왠지 자신이 괜한 짓을 해서 그리된 것 같아 괜스레 눈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