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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라디오 생존 법칙
작가 : 야기꾼
작품등록일 : 2017.11.6

눈도 많고 말도 많은 방송국에서 막내작가 살아남기

 
생존의 법칙 2단계, 말
작성일 : 17-11-22 01:36     조회 : 239     추천 : 0     분량 : 9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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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2시 50분.

 본부장이 빨간 사인펜으로 얼룩덜룩 엉망이 된 편성표를 들고 최근 넓어지기 시작한 이마가 신경 쓰이는 듯 살짝 인상을 쓰고 앞머리를 내리며 들어온다. 부모님이 큰 키와 적당한 덩치. 남자다운 동굴 목소리까지 주셨지만 하필 두 분 다 M자 탈모라 스트레스 받는 거에 극도로 예민한 본부장은 시계를 보며 묘하게 웃는다.

 “본부장님 지금 도착해있는데 들어가라고 할까요?”

 “응 그래. 들어오라고 해.”

 오호 일찍 왔네. 회사 다닐 준비는 돼있군.

 몇 초도 안돼서 똑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안녕하세요. 최고미입니다.”

 반듯한 정장과 깔끔한 헤어스타일. 혹시 아나운서를 준비하다가 잘못 알고 온 거 아닌가 싶었지만 똑 부러진 대외용 미소를 보니 제대로 찾아 온 것 같다. 들어오자마자 악수를 건네는 기세가 웃기다. 그래도 불쾌함을 겉으로 티내는 건 방송쟁이가 할 일이 아니지.

 “어서 와요. 일찍 왔네요. 뭐 마실래요?”

 겸손을 떨까 자랑을 할까.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이력서 여기 있습니다.”

 요것 봐라. 아무것도 안하네. 바로 본론으로 가자는 건가.

 말을 마치고 바로 알아서 자리에 앉는 폼이 자신감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넘겨받은 이력서도 앞에 있는 사람 그대로 깔끔하고 어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심지어 해외 명문대 졸업에 5개 국어 가능이라니. 지역방송 작가 지원자치고 너무 고스펙 아니야?

 혹시 다른 방송사에서 보낸 산업스파이 같은 게 아닐까 갸우뚱하고 있는데 밖에서 쿠당탕 소리가 나더니 전화가 울린다.

 “본부장님, 다른 지원자 왔습니다.”

 “안내해줘.”

 또각또각 콩콩콩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나더니 끽 문이 열린다.

 청바지에 티셔츠, 겨우 정장재킷만 하나 걸친 단발머리 여자애가 밖에 비가 오는지 우산에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인사한다.

 “죄송합니다. 밖에 비가 와서 조금 늦었습니다.”

 아직 3시 안되긴 했는데. 먼저 온 면접자 최고미와 자신을 번갈아보며 불안해하는 모습이 딱 잘못하고 엄마한테 혼날 준비하는 아이다. 근데 비가 온 게 늦은 거랑 무슨 관련이 있지. 아무튼 미소^∪^

 “괜찮아요. 여기 앉아요.”

 본부장은 맞은편 옆자리를 가리키며 비 때문에 눅눅해진 조금은 구깃구깃한 이력서를 건네받았다.

 마신이. 이름처럼 글자들이 맘껏 신나게 놀 수 있을 만큼 여백이 많다. 심지어 수기로 작성한 삐뚤빼뚤 경력이라니. 자신의 여유로운 품성을 보여주려는 건지 아니면 투철한 잉크 절약정신을 보여주려는 건지 속을 알 순 없지만 증명사진 속 신이는 걷잡을 수 없이 맑고 밝다. 빙구 같은 웃음. 특이한 애다. 위험해.

 “안녕하세요. 마신이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여기는 무.엇.을 어.떻.게 잘~ 하는지가 더 중요한데.

 붕붕 뜨는 말에 본부장은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지만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빙긋 웃었다.

 “패기가 좋네. 그럼 둘 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분명히 났지만 본부장은 모른 척하고 묻는다.

 “이 이력서와 마신이 이력서, 이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마신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두 개의 이력서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집에 있던 프린터가 갑자기 고장이 나는 바람에 급한 대로 그전에 대충 초안으로 뽑아 놨었던 이력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게 하필 저렇게 손색없는 이력서와 대놓고 견줄 줄이야.

 본부장 손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이력서는 ‘어머니 저 부끄러워요. 저 이렇게 비교 당하게 내버려 두실건가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마신이는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뭐라도 말하고 싶지만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얘져서 답답하기만 했다.

 본부장은 당황한 마신이의 표정을 보면서 속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뭔 말이라도 해라. 마신이 옆을 흘긋 보니 아니나 다를까 최고미는 벌써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다. 분명 자신을 칭찬하는 거라 생각하겠지. 너무 티난다 티나. 정말 티없이 맑고 깨끗하게 자신의 감정상태를 그대로 표정으로 나타내는 둘을 관찰하면서 본부장은 출연자처럼 화려한 표정과 몸짓이 아닌 수려한 말솜씨와 상대를 감동시키는 글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야 하는 예비 작가들이 이럴 때 말 한마디 안하고 오히려 행동으로 자신의 속내를 다 드러내고 있는 걸 보니 한심하기까지 했다.

 “순발력은 둘 다 영 꽝이군. 이거 꽤 중요한 건데.”

 둘 다 아차 했는지 순간 멍해 보였지만 금세 아닌 척 한 쪽은 여유로운 척 미소를, 한쪽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그럼 이번엔 차례로 묻지. 마신이씨. 내가 몇 살 같아 보이나.”

 이건 또 무슨 개똥같은 질문이지 하는 표정들. 방송작가라면 긴장을 풀어줄 유머와 센스는 기본이다. 자 어떻게 대답하는지 볼까.

 마신이는 ‘뭐야 지금 나랑 소개팅하나 나이는 왜 물어봐.’라는 속마음은 얼른 숨기고 사바사바 컨셉으로 이력서 실수를 만회하려고 눈웃음을 장착했다.

 “음 본부장님 주름도 없으시고 키도 크고 몸도 좋으신 것 같은데 목소리도 좋으셔서 인기 좋으시겠어요. 아 그 커피프랑스 이성균씨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으시죠?”

 최악이다. 나이 말하랬지 누가 아부하랬어. 물론 아부한 내용도 재미없고 진부하다. 이성균이라니. 내가 더 낫지 않나.

 “자네는 내가 몇 살 같나.”

 조금 갸웃거리며 본부장을 빠르게 스캔하고는 곧 바로 대답한다.

 “나이에 부쩍 신경 쓰시고 탈모 초기 진행형이신걸 봐선 최소 50은 훨씬 넘으셨을 텐데 그래도 비교적 짧은 시간에 성과를 계속 내셔야 본부장도 다는 거니까 대략 50대 초반이실 것 같습니다.”

 아주 셜록 나셨네. 심지어 틀렸어. 50이 훨씬 넘었다고? 내가 어딜 봐서. 내가 어딜 봐서!

 본부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최고미의 의문과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마신이의 절망이 맞은편에서 서라운드로 느껴진다.

 “마지막 질문. 만약 내가 작가가 돼서 글을 쓴다면 뭐부터 시작하겠나. 소재는 파스타야.”

 마신이가 ‘파스타’라는 단어에 ‘뜨끔’하고 눈을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나는 듯했지만 본부장은 모른 척 무시하고 최고미를 먼저 쳐다본다.

 “파스타에 대한 조사를 먼저 하겠죠? 파스타는 어떤 음식이고 뭐가 좋은지.”

 “아니야. 구성을 먼저 해야지. 파스타에 대해 기본적인 건 모두 아는 거니까. 구성을 잘해야 재미와 감동이 나오는 거야. 그래서 제일 중요하지. 구성을 잘 짜는 감도 있어야 되고. 예를 들면 드라마 ‘파스타’에 나온 배우들의 최근 근황으로 시작해서 이성균의 다음 작품 그리고 그의 선행 이런 식으로.”

 방송작가는 구성작가라고도 불린다. 이걸 알면 바로 답이 나왔을 텐데. 최고미는 역시 처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군. 무작정 방송국에 들어와 일하다가 캐스팅 당하는 꿈이라도 꾼 건가.

 “그럼 마신이는 자기가 직접 프로그램을 새로 구성한다면 어떻게 하고 싶나.”

 망설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바로 대답한다.

 “제가 작가가 되는 게 오래 전부터 꿈이었는데요. 저처럼 꿈을 꾸고 그걸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저 말고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 그들의 이야기로 매일 아침 출근하거나 학교 가는 친구들의 하루의 시작을 응원하는 라디오 쇼를 해보고 싶습니다.”

 “작가에 대한 로망이 큰 애들은 대게 방송국 와서 현실을 겪고서는 며칠 만에 나가떨어지던데...... 조금 일 해보고 그만 두겠다고 하는 거 아냐?”

 정말 그랬다. 꿈 쫓아 입사한 친구들 태반이 꿈을 뺏겨 쫓겨났다. 현실 앞에 꿈은 힘이 없다. 계약직에 적은 봉급. 그리고 멘탈노가다라고 불릴 정도로 하루 종일 계속되는 스트레스는 하고 싶었던 것을 모두 잊고 도망가게 만드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자신도 방금 들고 왔던 편성표를 보며 어떻게 해야 할까 설레기보단 짜증이 나지 않았던가.

 마신이는 멈칫 하더니 이내 담담해진 얼굴로 본부장을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어차피 어딜 가나 힘든 일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더 만들고 배운다고 생각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본부장은 살짝 놀랐지만 아닌 척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마인드 좋네. 그럼 두 분 다 내일 7시까지 라디오국 제 1 부스실로 오세요.”

 갑작스런 출근 통보에 놀란 마신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재차 물었다.

 “7시에요? 그럼 저희 둘 다 합격 된 건가요?”

 “일단 내일 방송현장 직접 눈으로 보고 들어갈 프로그램은 추후에 알려주겠습니다. 그럼 잘가요.”

 입에 파리 들어가겠네. 본부장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쿵 나고 나서야 실감이 드는지 마신이의 입꼬리가 광대를 밀어올린다.

 “우왁! 됐다! 속으로 떨어졌구나 했는데!”

 마신이는 소리를 지르고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며 입을 가린다.

 “축하합니다. 앞으로 자주 보겠네요.”

 자신의 합격은 당연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건네는 최고미의 약간 뻔뻔한 축하를 마신이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만날 때마다 인사하면서 서로 힘줘요 우리!”

 우리라는 단어에 살짝 놀란 듯 보였지만 마신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리며 ‘화이팅’하고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그게 마신이와 최고미의 처음이자 마지막 격려였다.

 

 나름 일찍 도착한 제 1 부스실은 방송 준비로 다들 분주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밤새 한숨도 못자고 나왔지만 마신이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현장을 스캔하고 또 스캔했다.

 NBS에서 7시에서 9시까지 하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주파수 93.9Hz에 30분씩 나눠서 4부로 진행되는 이 라디오를 마신이가 모를 리가 없다. 시간대만 듣고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좋아했던 매일 아침 들리는 목소리. ‘내일도 당신을 응원해요.’ 크 역시 다한님 목소리가 다 하시네 다 하셨어. 드디어 실물영접이라니. 콩닥콩닥.

 유리창 너머로 오프닝 멘트 발음을 체크하고 자신이 수기로 직접 작성한 원고를 수정하는 옆선이 시간이 지나도 역시 잘 나가는 탑아이돌이었던 과거를 충분히 증명해준다. 까맣고 단정한 머리에 높고 존재감 뚜렷한 코 오물거리는 도톰한 입술. 어떻게 이 시간에 저런 미모지. 미쳤다 진짜.

 사실 다한이 정말 잘 나갈 때 신이는 다한을 알지 못했다. 막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신이는 연예인에 관심을 끄고 처음 사귄 남자애에게 온통 빠져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자신을 꾸미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애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신이는 자신이 얼마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지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엄마가 아닌 누군가에게 처음 거짓말도 해보고 비밀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게 노력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 남자애가 사실은 자신을 좋아해서가 아닌 친구들에게 주목받고 싶어서 그랬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지만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고 신이는 이상한 애가 되어 버렸다. 신이는 다시는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고 꿈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나이 고작 15살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소위 잘나간다는 일들을 성인이 되면서 하나씩 해보기 시작했다. 설레는 시작과 달리 어디에도 신이의 길은 없었다. 어딜 가도 너무 늦었다 재능이 없다 희망을 잘라버리는 말들뿐이었다. 심지어 대놓고 외모로 평가되는 경우도 많았다. 힘이 빠지고 자존감이 바닥까지 추락하고 있었을 때였다. 늘 훈화말씀을 늘어놓던 아빠가 웬일로 안 듣던 라디오를 켜놓고 조용했다. 덕분에 다한의 클로징 멘트를 듣게 된 건.

 “금도끼도 은도끼도 내가 가진 도끼만 못하죠. 나무꾼 자신은 몰랐지만 후에 자기만의 도끼로 모두를 얻었던 것처럼 남의 꿈을 부러워하지도 내 꿈을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오직 자신을 꿈꾸고 이루세요. 사실 당신의 꿈속에 다 있으니까요. 내일도 당신을 응원해요.”

 그 멘트를 듣고 정신이 맑아지면서 힘이 솟았다. 마치 그리웠던 임을 만난 것처럼 마음속에 서렸던 한이 녹고 생각이 하나로 집중됐다. 내가 좋아하는 거. 내가 잘 하는 건 뭐지? 찾아내기 위해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글이 즐겁고 의미 있다는 것.

 그렇게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하고 여기까지 왔다. 자신이 작가가 되면 모닝라이브쇼를 스쳐서라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예 부스 안에서 대놓고 구경한다니. 마신이 성공했네 성공했어.

 최종 원고가 전달되고 다한은 모든 방송장비를 직접 조절하며 능수능란하게 진행을 시작했다. 실수 따윈 없었고 모든 게 완벽했다. 심지어 다한은 부스 안에서 광고가 나오거나 노래가 나오는 중간마다 아령을 들거나 맨손 운동을 했다. 그 여유까지 신이는 신기했다. 신이가 다한을 알게 됐을 때는 다한이 이미 아이돌 활동을 일체 그만두고 뜬금없이 지방으로 내려와 라디오만 진행하던 때라 과거 사진이나 영상으로 본 게 전부였던 신이는 지금 앞에 살아 숨 쉬는 다한이 꿈같다.

 방송이 끝나고 다한은 부스에서 나오며 기지개를 켠다. 별 탈 없는 방송, 별일 없는 하루가 다한에겐 너무 소중하다.

 다한이 나오자 마신이와 최고미는 벌떡 일어나 우렁차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방송 견학 온 신입 작가입니다.”

 다한은 평화로운 아침을 깨는 큰 소리에 곤두선 신경으로 그녀들을 쳐다봤다.

 “나 한명한테 하는 인사치고 너무 큰 거 아냐. 그리고 처음 왔으면 이름을 얘기해야지. 오늘 신입 작가들 온다는 건 나도 들어서 알아.”

 잉 이게 아닌데. 마신이는 자신이 생각했던 다한과 살짝 다른 것 같아 흠칫했다. 최고미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곧바로 사과하고 다시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최고미라고 합니다.”

 최고미의 인사에 타이밍을 놓친 신이가 어버버 하고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다한은 들릴 듯 말 듯 큭하고 소리를 내더니 일순간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이름.”

 “마...마신이입니다.”

 신이가 겨우 대답이 끝나자마자 다한은 풀썩 자리에 앉는다.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요. 큰소리 내는 것도 듣는 것도 싫어하고. 늘 시끄러운 곳에서 말하는 직업이다 보니.”

 다한은 다리를 꼬고 삐딱하게 두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방송 들어 본 적 있어요? 그래도 4년 동안 DJ도 안 바뀌고 계속 했는데 한번은 들어봤겠지.”

 당연하지. 딴 건 몰라도 이 라디오는 매일 아침마다 버스에서 꼭 들었다고. 바로 대답하고 싶었지만 신이는 꾹 참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날카로운 남자의 호감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떠올렸다. 애석하게도.

 “물론입죠. DJ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요.”

 순간 다한의 표정이 놀랍도록 빠르게 차가워졌다. 감히 처음 온 신입이 내 앞에서 날 따라하면서 장난을 쳐? 신이가 따라한 건 어느 날 라디오에서 그가 처음으로 시도했었던 콩트의 대사이다. 난생처음 도전해 본 콩트의 우스꽝스러운 말투에 청취자게시판은 이상하다 하지마라 돌려달라 등 난리도 아니었고 다한은 그 계기로 콩트는 다시 하지 않기로 했다. 근데 그걸 굳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다니. 사실 신이는 자신이 열심히 챙겨들은 이 프로의 애청자라는 걸 드러내고 싶었을 뿐이지만 말이다.

 “지금 뭐하는 거야.”

 신이는 다한의 차가운 반응에 되레 당황하며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응 이게 아닌데.

 옆에 있던 메인 작가가 조용히 대화를 듣다가 더 이상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은 낌새를 느끼고 끼어들었다.

 “최고미씨, 마신이씨 오늘 방송 잘 들었어요? 어땠어요?”

 잠자코 있던 최고미는 바로 반응한다.

 “네 재미있었어요. 신기하기도 하고.”

 “본부장님이 방송 끝나고 바로 보자셨으니까 어서 본부장실로 올라가 봐요.”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최고미는 얼른 인사하고 거의 울 것 같은 마신이를 데리고 나갔다.

 메인 작가는 살았다는 듯 한숨을 잠깐 돌리고 다한의 눈치를 보며 혼잣말을 되뇐다.

 “쟤는 안 되겠네.”

 무슨 소리. 다한은 그 겁 없는 계집애를 생각하며 화를 삭이고 생각한다. 마신이. 데려와서 A부터 Z까지 알려줘야겠군.

 

 본부장실 앞에서 노크하니 안에서 곧장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린다. 마신이는 아직도 다한의 표정을 생각하면 동공이 좌우로 덜덜 떨리지만 겨우 추스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본부장은 따뜻한 미소로 마신이와 최고미를 맞이했다.

 “어서와. 견학은 잘 했나.”

 “네 재미있었습니다.”

 재미라. 본부장은 하루 새 부쩍 마른 것 같은 마신이의 영혼 없는 말에 의미를 특별히 두지 않기로 했다. 표정을 보니 조금은 자기에게 곧 닥칠 현실을 느꼈겠지. 설마 라디오 안하고 싶다고 하는거 아냐.

 “지금 자리가 나는 곳이 저녁 TV쇼 하나랑 라디오 하난데 둘은 어디로 가고 싶어요?”

 최고미는 TV쇼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에도 티가 더 나고 자신과도 그럴 듯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디오도 청취율만 잘 나오면 되는 거니까 자신이 가서 인기를 확 올려놓으면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것 같긴 했다. 어차피 지역방송 거기서 거기지만 인기 있었던 서울출신 DJ를 끼고 하는 방송이 승률에 더 유리했다. 게다가 호되게 찍힌 마신이에 비하면 자기가 더 유리한 상황인 것 같았다.

 “저는 둘 다 좋습니다만. 라디오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잘 해줬나? 걔 성격에?’

 평소 다한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데다가 최근 모닝라이브쇼로 새로 들어가는 작가들이 계속 관두는지라 고미의 말이 의외였지만 본부장은 티내지 않기로 했다.

 “신이는?”

 본부장은 창백해진 신이를 보며 물었다. 신이의 입에선 분명히 ‘TV로 보내주세요. 라디오 절대 못합니다.’라고 나올 게 분명했다. 그런데 더 예상 밖이었다.

 “라디오, 하고 싶습니다.”

 굳은 결심으로 대답한 건지 앙 다문 입술이 빨개지고 있었다. 최고미는 빨개졌다 하얘졌다 하는 마신이의 얼굴을 보며 희한하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음 알겠어요. 일단 선택은 그쪽 프로에서 하는 거니까 얘기해보고 알려줄게요.”

 마신이와 최고미는 문을 나서자마자 서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풀리려는 다리를 부여잡고 마신이는 중얼거렸다.

 ‘난 라디오 작가가 꿈이잖아. 누가 뭐래도 자신을 이뤄야지. 맞아 그리고 들어가는 프로가 아까 그 프로가 아닐 수도 있잖아. 침착해. 길은 아직 있어. 같은 프로가 아니면 나중에 만나서 사과하면 돼. 일부러 장난친 거 아니라고.’

 그리고 다음날 온 문자에는 ‘내일, 5시, 라디오국 제 1 부스실, 시간엄수’라는 글자만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게 벌써 며칠 전이다. 본부장은 마신이의 첫인상이 떠올라 쿡하고 웃었다. 지나가던 문이나는 숙직실을 보며 몰래 웃는 본부장을 보며 정말 변태인가 하는 수상한 생각으로 곁에 다가간다. 인기척을 느낀 본부장이 문이나를 슥 보더니 아는 체를 했다.

 “어 아직 퇴근 안했네.”

 “본부장님도 아직 퇴근 안하셨는데 제가 먼저 갈 수 야 있나요. 내일 뉴스도 준비해야 되고. 신입 작가는 오늘도 열정 있네요.”

 문이나는 숙직실을 휙 쳐다보며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본부장은 그녀의 속내를 알지만 모른 척 문이나에게 슬쩍 동조한다는 눈짓으로 말했다.

 “이나야, 나랑 내기할래. 신이 얼마나 버틸지.”

 문이나는 뜬금없는 본부장의 내기 제의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곧 재밌겠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전 일주일.”

 그렇게 착해 보이는 얼굴로 일주일이라니 야박도 하다. 본부장은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미소를 보였다. 문이나는 자기 선택이 너무 합당해서 어쩔 도리가 없겠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러나 본부장은 이나와 다른 대답을 던졌다.

 “그럼 난 한 달에 걸지.”

 그건 무리라는 듯, 이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본부장은 몸을 획 돌려 복도를 빠져나가며 외쳤다.

 “지는 사람이 본부 실무진 회식.”

 이나는 본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돈 굳었네."하고 예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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