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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오늘만 백만번째
작가 : 박재경양
작품등록일 : 2016.8.22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남자를 만나기는 애초에 글러 먹었고, 회사에서 만난 남자친구라는 놈은 등쳐먹고 사기나 치고 다니고. 하는 일 하나없는 여자 나이 서른. 진서는 오랜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제주도로 내려왔다. 이렇게 된 바에 한살이라도 어릴 때 하고 싶었던 일이나 하면서 엄마옆에 있기로 작정했다. 그런데 웬걸, 차주혁, 할리우드에서는 크리스라고 불리는 뮤지컬 배우가 제주도에 찾아왔다. 그것도 진서의 집에! 왜?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잘생긴 남자가 왜 우리 집에 있는거지?

 
4. 야릇한 입술
작성일 : 16-08-31 12:55     조회 : 344     추천 : 1     분량 : 4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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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혁을 태운 택시는 아무말없이 달렸다.

 다행히 택시 기사는 주혁이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주혁은 편히 창밖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국 최고의 관광도시라는 이곳은 별다를 게 없었다.

 제주도에만 있는 낮은 돌담, 검정색 흙과 야자나무, 푸른 들, 한라산…

 모두들 감탄하는 제주도의 풍경이었지만, 주혁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최고의 관광 도시라는 건지. 그냥 작은 섬이잖아.’

 제주도의 풍경보다 미국이 훨씬 더 친숙하고 좋았다.

 주혁의 별장이 있는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보다 더한 광경도 흔히 볼 수 있었다.

 넓게 펼쳐진 오렌지 농장,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미국의 시골보다 더 시골 같군.’

 주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주도에 온 지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당장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버리고 싶었다.

 애착도, 사랑도 없는 이 나라에서 지금 무엇을 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주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택시는 열심히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택시는 멈춰섰다.

 “내리슈. 젊은이가 원하는 대로 가장 한적한 곳이요.”

 “감사합니다.”

 주혁은 군말없이 택시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렸다.

 택시 기사가 내려준 동네는 정말 한적했다.

 겨우 차 한대가 지나갈 법한 도로에는 지나다니는 차도 없었다.

 좁은 도로 옆에 난 골목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낮은 담벼락 너머로는 빨래들이 정겹게 걸려 있었다.

 집집마다 한켠에는 갖가지 채소들을 심어 놓은 텃밭이 있었고, 집인지 창고인지 모를 소박한 집들도 고요했다.

 바닥이 다 보일 정도로 맑은 바다에서는 파도 소리가 났고, 파도에 맞춰 배들이 한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어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새소리가 가득했다.

 주혁은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이제야 조금은 제주도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길 잘한 것 같군.’

 마치, 서울에서 있었던 근심, 바쁜 스케줄, 많은 사람들에서 벗어난 후련한 마음이었다.

 ‘바다가 원래 이렇게 맑았던가?’

 이제는 바다를 자세히 볼 여유까지 생긴 주혁, 천천히 방파제로 가까이 다가갔다.

 제주도 특유의 검정색 돌이 맑은 바다에 비쳤다.

 바다는 바닥의 모래까지 다 보일 정도로 맑았다.

 비릿한 내음도, 나지 않았다.

 멀리에서는 초록색 작은 섬이 동동 떠 있었다.

 에머랄드 빛 바다, 에머랄드…

 헤일리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다.

 헤일리, 주혁의 첫사랑이자 첫 연인, 그리고 마지막 연인이 될 여자였다.

 그리고 주혁의 생에 유일한 여자이기도 했다.

 ‘다음엔 헤일리와 함께 와야겠군…’

 주혁은 헤일리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열아홉살때부터 배우가 되겠다고 하던 주혁은 배우가, 디자인 회사를 차리겠다고 하던 헤일리는 미국 최고의 디자인 회사를 가지게 되었다.

 그동안의 슬픈 일도, 힘든 일도, 기쁜 일도 헤일리와 함께 했었다.

 서로의 일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도와주면서 여기까지 왔다.

 지금이야 너무 바빠서 서로 연락도 거의 못하고, 데이트도 못하고 있었지만 뭐 괜찮았다.

 주혁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리고 헤일리의 마음도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니까.

 ‘헤일리가 기사를 보고 놀랐겠군. 연락을 한번 해야…’

 그제야 주혁은 핸드폰을 켰다.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핸드폰은 미친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문자, 부재중 전화 알람, 또 문자, 또 부재중 전화 알람…

 모두 데이빗 형의 문자 메세지와 전화였다.

 제주도에 오는 동안 꺼놓은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300+통이 와 있었다.

 ‘형도 참…’

 주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긴, 한번도 스케줄을 펑크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곧장 데이빗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좀더 골탕먹어야돼. 그래야…’

 화낼 상대는 따로 있으면서 주혁은 데이빗 형에게 괜히 심통을 부리기로 했다.

 그래서 데이빗 형에게 전화하는 대신 헤일리에게 전화했다.

 “헬로우.”

 아직 잠이 덜 깬 헤일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긴, 지금 로스엔젤레스는 새벽이었다.

 “새벽인 줄 잊고 있었네.”

 불면증이 있는 헤일리는 자고 있는 것을 깨우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주혁은 자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전화를 했다.

 일주일째 헤일리는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주혁은 몰랐다는 듯 일부러 사과를 했다.

 “미안. 알았어. 그럼 이따가 다시 전화 걸게.”

 “기사 때문에 전화 했다면 신경쓰지 말구. 잘 알고 있으니까.”

 역시 여전히 헤일리는 척하면 척이었다.

 주혁은 전화를 끊고 해맑게 웃었다.

 그간 헤일리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눈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주혁은 천천히 바닷가를 거닐었다.

 이 고즈넉함, 오래도록 즐기고 싶었다.

 ‘어?’

 아무도 없다 생각해서 선글라스도, 모자도 쓰지 않은 주혁.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등에 돋는 소름, 기분나쁜 기분, 익숙한 불쾌함…

 ‘파파라치.’

 감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사는 게 주혁의 직업이었다.

 몸의 오감은 조금의 이상한 낌새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안 거지? 도대체 어디서부터 따라온거야.’

 방금 전까지 느꼈던 아늑함이 파파라치 하나 때문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주혁은 황급히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썼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키워드는 차주혁.

 작성 시간 1시간 전에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차주혁, 과로로 그만…

 한국을 방문한 할리우드 스타 차주혁. 입국하자마자 민현우와 스캔들이 터진 와중에 이번에는 과로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소속사는 밝혔다. 병원에는 언론사 등 외부 출입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병원측 관계자들도 차주혁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 한편 차주혁과 열애설이 터졌던 민현우는 광고 촬영을 위해 제주도로 떠나 있는 상태라고 소속사는 전했다. …’

 역시, 그런 거였다.

 스캔들에 대한 의혹 기사는 많았지만, 주혁의 소속사도 민현우의 소속사도 공식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었다.

 추측과 소문만 무성했다.

 모든 스캔들이 그랬고, 모든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그랬다.

 주혁은 데이빗 형 혼자서 필사적으로 막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파파라치는…’

 파파라치가 스타들의 스케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둘이 정말로 연애를 한다고 생각하는 파파라치라면 주혁이 제주도에 올거라는 걸 미리 알았을 거였다.

 민현우는 지금 제주도에 와 있고 말이다.

 ‘사람들의 상상력이라는게 참…’

 사생활이라고는 없는 이 생활…

 아무것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니.

 주혁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어디로든 다시 떠나야했다.

 

 *

 

 주혁은 바삐 몸을 움직였다.

 택시를 잡고 다시 공항으로 가고 싶었지만 사람도 없는 동네에 택시가 돌아다닐 리가 없었다.

 기분나쁜 파파라치의 움직임은 계속 감지되었다.

 주혁은 파파라치를 따라가서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랬다가는 더 큰 일이 생길 테지만…

 ‘뭘 원하는 거야…’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 계속 주혁을 따라다닐 것이었다.

 파파라치가 원하는 건 뻔했다.

 할리우드 스타 차주혁의 연인.

 그 연인이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남자라니…

 둘이서 푸른 바닷가 앞에서 밀회를 즐긴다, 이보다 더 자극적인 기사가 있을까.

 민현우가 제주도로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주혁은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거였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파파라치는 점점 더 대담하게 주혁의 뒤를 쫓았다.

 주혁은 천천히 걸어다니며 주위를 살폈다.

 차 한대가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을 가운데에 두고, 한쪽은 넓은 풀밭과 낮은 돌담이, 다른 한쪽에는 푸르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어떻게 하면 빠져 나갈 수 있을까… 차라리 호텔로 갈걸…’

 도시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니니, 호텔이나 다른 숙박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다.

 호텔이면 방 안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이곳은 호텔은 거녕 숙박시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주혁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

 

 얼마나 더 걸었을까.

 그때 주혁의 눈에 한 집이 눈에 띄었다.

 ‘게스트 하우스?’

 상호명도 없이 꼴랑 게스트 하우스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낮은 돌담에,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저기라도 있는게 어디인가.

 그저 빨리 몸을 숨기고 싶었다.

 주혁은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갔다.

 낮은 돌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마당에는 라벤더며 로즈마리, 페퍼민트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제 막 꽃봉우리가 여물기 시작하는 허브들 사이에서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한눈에 봐도 늘씬한 몸매, 햇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화장기 없는 얼굴…

 “몇분이세요? 오늘은…”

 여자는 인기척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혁의 눈에 여자의 손에 들린 수첩이 들어왔다.

 스케치용 수첩이었다.

 대학시절부터 헤일리가 늘 들고 다니던 거라 기억하고 있었다.

 ‘디자이너인가…?’

 주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상황을 설명하고 숨을 데를 찾는 주혁, 파파라치의 카메라 렌즈가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주혁은 주저없이 여자에게 달려갔다.

 파파라치가 원하는 것을 보내고, 게이라는 오해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부드러운 여자의 입술이 주혁의 입술에 포개졌다.

 ‘응?’

 주혁은 깜짝 놀랐다.

 흔한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여자의 입술에 닿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뭐지…’

 그런데도 여자의 입술은 부드러웠다.

 영화를 찍으면서 숱한 여자들과 키스를 해 보았지만,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다.

 주혁은 파파라치를 쫓으려고 했던 것도 잊고, 여자와의 키스에 빠져들었다.

 부드럽고 야릇한, 하지만 친숙한 느낌이 점점더 주혁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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