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반목(反目) - ⑥

　그때 학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뭐 해? 승희 의무실로 옮겨!”

　동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응? 아 …… 그런데 선배 수혈할 줄 알아요?”

　“수혈?”

　“승희 피를 너무 많이 흘렸잖아요. 수혈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때 웬 젊은 여자가 나섰다.

　“제가 도와줄게요!”

　30세 전후로 보이는 그녀는 왠지 국회 직원 같진 않아 보이는 화려하고 도발적인 붉은 색 투피스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소 화장이 짙긴 했지만 얼핏 봐도 이목구비가 또렷한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저 간호사예요. 이 아가씨 혈액형은 알아요?”

　동원은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네? 네. A형이요. 저랑 같아요.”

　“그럼 됐어요. 그리고 …… 손수건, 손수건 있어요?”

　학현은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옆에 떨어져 있던 승희의 잘린 혀를 주워 손수건으로 쌌다.

　“나중에 접합 수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것도 가져가서 냉동고에 넣어야 돼요.”

　사실 동원과 학현은 처음엔 여자의 평범하지 않은 겉모습 때문에 정말 제대로 된 간호사가 맞기는 한 건지 의심을 했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하나하나 확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의심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이윽고 동원은 승희를 안아 들고 학현과 간호사라던 여자와 함께 서둘러 의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지혜가 양팔을 활짝 펼치며 네 사람의 앞을 가로 막았다.

　“우리 언닐 죽여 놓고 어딜 가? 못 가!”

　정색하고 막아서는 지혜의 기세에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원망과 분노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는 지혜의 눈빛은 흡사 학현과 동원의 눈을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처럼 맹렬하고 위협적이었다.

　학현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지혜를 쳐다봤다. 하지만 동원은 아까 지인의 손을 놓아버린 일이 면목이 없어 지혜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잃은 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승희가 눈에 들어왔다. 얼굴은 물론 전신이 피투성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시가 급했다. 그래서 면목이 없더라도 일단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지혜 씨, 언니 때문에 이러는 마음은 알겠는데 그게 우리 탓은 아니잖아? 우리 모두 피해자야.”

　그러나 지혜의 생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닥쳐! 승희 살리려고, 유승호 그 자식 살리려고 우릴 언닐 죽음으로 내몰았잖아! 내 말이 틀려?”

　동원은 답답했다.

　“내몰긴 누가 내몰았다 그래? 지인 씨가 승호 형 살리려고 자발적으로 그랬던 거잖아.”

　하지만 지혜는 여전히 막무가내였다.

　“웃기지마! 그렇게 되면 내가 죽을 상황이었는데도? 그러니까 니 말은 지금 우리 언니가 일부러 날 죽도록 내버려 두기라도 했었다는 거야?”

　동원은 이러는 지혜의 마음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배배 꼬여 있는 지혜의 심사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고자 다시 조곤조곤 달랬다

　“지혜 씨, 그런 뜻이 아니잖아. 지인 씨는 단지 승호 형하고 당신 둘 다 살리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는 거 당신도 실은 잘 알고 있잖아.”

　그러나 지혜는 알아듣기는커녕 오히려 발끈했다.

　“알긴 뭘 알아? 니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니 니가 정말 사람이라면 우리 언니 손을 그렇게 쉽게 놔버릴 순 없었어! 안 그래?”

　동원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땐 어쩔 수 없어서 그랬노라 변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자칫 지혜의 화를 더 돋울 것만 같아서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무조건 사과를 해서라도 일단 이 상황은 넘기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지혜에게 읍소했다.

　“지혜 씨, 정말 미안해. 나중에 지혜 씨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 지금은 좀 비켜 줘, 응? 승희는 살려야 될 거 아니야.”

　하지만 지혜는 마음이 누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울컥했다. 지혜에게 방금 전 동원의 말은 자기 언니는 어떻게 됐든 상관없고 일단 승희만 살리면 된다는 식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지혜의 얼굴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순식간에 벌겋게 상기됐다. 그런데 그 상태에서 곧 폭발해버릴 줄 알았던 지혜가 돌연 피식 웃더니, 안색을 180도 바꿔 승희를 보고 빈정거렸다.

　“흥, 나한텐 애인 죽였다고 그 잘난 척을 하면서 지랄을 해놓고는 정작 지는 지 오빠 살리겠다고 우리 언니한테 동생을 죽이라고 하더니, 꼴좋네. 너 같은 년은 죽어도 싸! 안 그래? 큭큭큭큭, 깔깔깔깔깔! …….”

　동원은 순간 눈이 확 뒤집혔다.

　“뭐, 임마?”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 지혜의 멱살을 잡고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품에 안고 있는 승희 때문에 몸만 앞으로 움찔했을 뿐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다만 이를 빠득빠득 갈며 지혜를 노려보는 것으로 분을 삭일 따름이었다. 대신, 보다 못한 학현이 앞으로 나서며 지혜를 버럭 쏘아붙였다.

　“야, 김지혜! 분풀이도 그 정도 했으면 됐잖아? 그러니까 이제 비켜!”

　그때였다. 지혜가 순간 학현에게로 달려들더니 곧장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이 배신자!”

　순식간의 일이었다. 학현은 물론 지혜마저도 스스로에게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현은 순간적으로 얼떨떨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지혜를 쏘아붙였다.

　“어차피 너도 니 애인에겐 배신자였어! 비켜!”

　그러면서 지혜를 뒤로 확 밀쳐 넘어트렸다.

　“아악!”

　중심을 잃은 지혜는 통로 옆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학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동원을 재촉했다.

　“야, 빨리 승희 데리고 가!”

　지혜의 돌발 행동에 얼이 빠져있던 동원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에? 아, 네.”

　그리고 간호사라던 여자와 함께 승희를 데리고 서둘러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 학현은 세 사람이 본회의장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지혜가 다시 방해하지 못하도록 뒤에 남아 견제를 하고 있다가 곧 뒤따라 나갔다.

　지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멀어져 가는 네 사람의 뒷모습을 한 서린 눈으로 노려봤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과 충혈된 두 눈엔 마치 원수에게 자식을 잃은 어미의 그것처럼 원망과 슬픔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지혜는 그들의 등 뒤에다 대고 저주를 퍼부으며 목 놓아 통곡했다.

　“다 죽일 거야! 전부 다! …….”

　그런데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 민철과 함께 방청석에서 기자들과 정보기관원들을 죽였던 사람들이 승희 일행을 빙 둘러쌌던 것이다. 동원 일행은 얼떨결에 로텐더 홀 한 가운데서 고립된 채 옴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간호사라던 여자가 앞으로 나와서 길을 막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항의했다

　“왜들 이래요? 응급 환자 있는 거 안 보여요? 비켜요!”

　하지만 잠시 후 무리를 대표해 앞으로 나온 남자는 되레 동원을 향해 딴 소리를 했다.

　“이봐 당신. 당신은 유승호 의원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며? 거기가 어딘지 당장 말해. 안 그러면 우리도 길을 비켜줄 수가 없어.”

　동원은 당혹감에 빠졌다.

　“그, 그건 …….”

　그러자 학현이 동원의 말을 가로채며 대신 대답했다.

　“나도 승호가 어디 있는지 알아! 내가 당장 잡아 올 테니까 지금은 일단 길을 터줘! 내가 책임지고 잡아 올게!”

　그러나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신이? 정말이야?”

　“그래!”

　“그럼 그냥 우리한테 말해. 우리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

　하지만 학현은 즉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

　그때 어느 새 로텐더 홀로 나온 지혜가 학현을 몰아세웠다.

　“야, 남학현!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 내가 모르는 걸 니가 어떻게 알아?”

　학현은 발끈했다.

　“닥쳐! 내가 왜 몰라? 난 단지 승호를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야!”

　동원은 깜짝 놀라 학현을 쳐다봤다. 동원에게 승호가 있는 곳을 대라던 남자도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튀자 얼떨떨해졌다. 그래서 지혜에게 물었다.

　“이봐, 당신. 저 남자 말이 사실이야? 유승호 의원하고 저 남자가 무슨 원수지간이라도 돼?”

　잔뜩 흥분해 있던 지혜는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게 되자 얼떨결에 그 기세가 한풀 꺾여버렸다.

　“뭐, 그리 좋다고는 …….”

　지혜의 말에 동원을 윽박지르던 사람들의 기세도 덩달아 한풀 꺾여버렸다. 간호사라던 여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우리 지금 의무실로 가는 거예요! 이 아가씨 때문에 어디 도망도 못가! 그러니 계속 협박을 하고 싶으면 나중에 그리로 와서 해요! 그래도 늦지 않잖아요? 하지만 지금 이 아가씨는 한시가 급하다고요!”

　그러더니 그녀는 이젠 아예 앞장을 서서 길을 막고 있던 사람들을 양옆으로 밀쳐내며 길을 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얼떨결에 별 저항도 못한 채 그녀가 밀쳐내는 대로 주춤주춤 양옆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어느 정도 길이 트이자 그녀는 동원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뭐해요? 얼른 와요!”

　“네? 네 …….”

　멍하니 있던 동원은 그제야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동원이 그곳을 무사히 벗어나자, 학현은 사람들에게다 대고 큰소리로 호언장담을 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당장 승호를 잡아 올 테니까!”

　그러고는 곧바로 동원과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상황이 그렇게 어수선하게 전개되자, 사람들은 선뜻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돌아가는 형편을 그냥 손 놓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로텐더 홀로 올라오는 중앙 계단 아래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사람들의 이목이 단숨에 그 쪽으로 집중됐다. 언제부터였는지 학현이 대단한 사냥감을 잡기라도 한 사냥꾼처럼 당당한 얼굴을 하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학현의 등 뒤로 피투성이의 시커먼 뭔가가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양복차림을 한 남자의 시체였다. 그 시체는 학현에게 한쪽 발목을 붙들린 채 거적때기처럼 아무렇게나 늘어져서 질질 끌려올라오고 있었다.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 돼버린 남자의 머리통은 그렇게 매 계단 끌려 올라올 때마다 일일이 계단에 걸리며 공이 튀기듯 텅 텅 텅 텅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찐득찐득한 핏덩이들이 꿀럭꿀럭 여러 구멍들에서 넘쳐 흘러나왔다.

　학현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정작 학현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지혜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학현이 잘해야 승호를 붙잡아서 데리고 올 거라 예상하고, 오는 즉시 죽이겠다 잔뜩 벼르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막상 승호를 그런 몰골로 끌고 오는 것을 보게 되자, 마치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처럼 기분이 멍해졌다. 그렇게 학현에게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한 사람들은 학현이 로텐더 홀로 다 올라올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모습을 그저 우두커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마침내 로텐더 홀로 다 올라온 학현은 끌고 온 시체를 사람들 앞에다 휙 팽개치듯 던져놓았다. 그리고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여러분들이 그렇게 찾던 유승홉니다. 여기 재킷에 의원 배지 달린 거 보이시죠?”

　사람을 저토록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고도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그제야 학현이 지금껏 여 경위와 기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 온 장본인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지혜는 약간 달랐다.

　“이봐, 이거 유승호 맞아? 얼굴을 왜 이렇게 망가트려놨어? 바꿔치기라도 한 거 아냐?”

　그러나 학현은 오히려 피식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두들겨 패다 보니 갑자기 그 동안 쌓인 게 생각나버리는 바람에 말이야.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돼버렸네? 하하.”

　학현이 그렇게 나오니 지혜도 더는 토를 달지 못했다.

　“흐음 …….”

　그때 본회의장안에서 웬 남자가 달려 나와 소리쳤다.

　“전광판에 이상한 게 떠요!”

　사람들은 뭔 소린가 싶어 본회의장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투표 집계용 전광판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의원들의 이름이 일제히 나타난 뒤 곧이어 여러 내용들이 연달아 표시되기 시작했는데, 그게 평소완 달리 뭔가 좀 특이했다.

　우선 전광판 제일 윗줄에 하얀 글씨로 ‘재적: 281명’, 붉은 글씨로 ‘사망: 182명’, 녹색 글씨로 ‘생존: 99명’이라고 표시되었고, 그 아래에는 가나다순으로 의원들의 이름이 붉은색 혹은 녹색으로 나란히 표시되었다.

　사람들은 설마 하는 생각에 얼핏 생각나는 대로 그간 죽은 의원들의 이름을 전광판에 표시된 것과 맞춰보았다. 역시나 전광판에 표시된 정보는 정확했다. 실제 죽은 의원들의 이름과 전광판에 붉은색으로 표시된 이름이 일치했다. 사람들은 혹시 누군가 일부러 저렇게 작동시킨 것은 아닌지 서로 확인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전광판을 건드린 사람은 없었다.

　한편 지혜는 전광판의 의미를 확인하자마자 먼저 유승호의 이름부터 찾았다. 확인한 결과 유승호의 이름 역시 사망을 뜻하는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반면 학현은 전광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갑자기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그러더니 지혜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유승호의 이름을 찾았다. 그러다 유승호의 이름이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을 발견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잠시 후 학현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슬그머니 승희가 옮겨진 의무실로 향했다. 한편 지혜도 아까 민철이 자신을 위협하다 꽃님이 나타나는 바람에 내동댕이치고 간 단도를 주워들고는 학현을 몰래 따라 나갔다. 그러자 전광판에 불이 들어왔을 때부터 아무도 모르게 방청석의 어둑한 구석에 나타나 본회의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꽃님도 볼일을 다보고 돌아서듯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