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된 거지?”
동굴에서 눈을 뜬 척유한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고개를 들자, 벽면에 자신의 얼굴이 비춰 보이고 있었다.
‘이런 곳에 동경(銅鏡: 거울)이?’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진실을 알게 됐다.
“크윽!”
가슴 한복판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동굴 벽면이 붉은 빛깔 일색이었다. 가슴팍이 축축했다. 늑골 틈에서 뭔가가 솟구치고 있었다.
촤아악!
...피였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기이한 동굴에 들어온 지 십여 일째.
먹지도 자지도 못한 탓에, 의식을 잠시 잃었던 것 같은데... 깨어나 보니, 동굴 벽면에 피분수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응조수(鷹爪手)에 당한 상흔이었다. 살점이 뜯겨나간 곳에서 핏물이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심장을 비껴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체...!”
환부에서 시금털털한 혈향과 함께, 금창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신의 손으로 응급조처를 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의식을 되찾던 중, 심하게 몸을 뒤틀면서 상처가 벌어진 모양이었다.
“젠장!”
혈도를 틀어막으며, 척유한은 기함을 토했다.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황당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의식이 차츰 명료해지면서, 머릿속에 기억이 돌아왔던 것이다.
‘난 분명 죽었는데!’
치명상은 가슴이 아닌 목이었다.
지금은 찌르기 전으로 돌아와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운 상태.
그 목을 찔렀던 것은... 다름 아닌 척유한 자신이었다.
***
혈령신교(血靈神敎)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초창기의 원시마교(原始魔敎)에서 갈라져 나온 이후, 더욱 악랄해졌다는 설이 있으나, 마교측의 함구로 인해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들은 사이한 술수에 매달렸고, 무학의 상궤와 동떨어진 일가(一家)를 이뤘다.
기문둔갑, 환상대법, 이형지진, 묘리방술 등,
고래(古來)로 이름만 전해지는 괴이쩍은 술수들을 구현해냈다.
사이악랄(邪異惡辣) 자체가 목적이라는 듯, 괴랄한 연구에 매진했다.
천기를 거스르는 역천 회귀(逆天回歸)의 진법(陣法).
상대의 진기를 역이용하는 흡성(吸成)의 대법.
변용(變容)과 환술(幻術) 등의 미혹술까지.
독심(毒心)에 인성마저 저버린 것일까.
인세를 벗어나 지옥을 부르려 했다.
저들을 구제할 길은 하나뿐...
멸(滅)!
***
‘그런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척유한은 이곳에 오기 전, 정도맹(正道盟)에서 전해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정도맹 순찰 십삼 조장’
그것이 척유한의 신분이었다. 혈령신교에 관한 건, 이번 순찰을 떠나기 직전, 조장 교육에서 들었다.
하지만 의무 조항이기에 시간만 때웠을 뿐, 전해주는 담당자도, 척유한도 건성이었다.
당대의 강호에서 혈교 따위에 신경 쓸 이는 없었다.
뭣보다도, 실무라는 게 그렇듯이 귀담아 들을 시간조차 없었다. 투덜거리는 조원들을 챙겨서 곧바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이야 어쨌건, 지금에 충실할 수밖에.”
척유한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머릿속에선 조금 전의 일들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단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찔렀던 최후까지도!
“하지만, 말도 안 되잖아?”
물론 죽었다 살아난다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강시가 아니고서야 그런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때.
고오오...
암굴의 저편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척유한은 불길한 느낌과 함께, 소리의 정체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은... 조금 전, 자신이 죽기 직전과 똑같았으니까!
-혈루염화(血淚炎華)...
-혈세무량(血世無量)...
-혈천만극(血天滿極)...
암동 저편의 어둠에서 귀신처럼 스산한 음성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다가왔다.
구결을 암송하는 소리.
하지만 여타의 무공 구결들과는 사뭇 달랐다.
피에 대한 탐심만을 읊조리는 기괴한 장소성은 일부만으로도 듣는 이의 심장을 압박해왔다.
꽈악!
척유한은 주먹을 불끈 틀어쥐었다.
지혈을 해뒀던 상처에서 어느 틈엔가 핏물이 꾸역꾸역 흘러나왔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액체가 주먹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사중혁...!”
척유한의 입가에서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상처가 도지는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의 상황이 현실인지를 따지는 것도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이 순간, 척유한의 뇌리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했다.
사중혁.
정도맹 외순찰대 십삼 조원.
척유한에게는 각별한 인물이기도 했다.
동굴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날 한 시에 죽을 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던 수하 중의 하나이자, 친혈육보다 중했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배신자의 더러운 흉명일 뿐.
암동 속의 괴이한 구결을 얻은 이후로 그는 돌변했다.
구결을 해석하고, 공력이 향상하며 빠르게 어둠에 동화되었다.
고작 십여 일만에, 암영과 하나가 되어 모습을 감추는 경지가 됐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도검보다 강력한 조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악귀가 되었다!
동료들을 암습하여 얼굴을 짓뭉개고 가슴을 파헤쳤다. 심장을 뜯어낸 후, 피에 굶주린 걸귀처럼 시신의 체혈을 남김없이 빼먹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척유한은 핏물을 되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 의문을 품어본들,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지금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심장을 노리는 사중혁을 상대해야 했다.
으드득!
척유한은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입가에 고인 핏물 탓에 이물감이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검집에 손을 올려 검파(劍把)를 틀어쥐었다.
‘한 번 더 생(生)이 주어진 이상, 이번에야말로 조원들의 고혼(孤魂) 앞에 네놈의 피를 뿌려주마!’
다른 한 손은 품 안을 더듬어 보았다.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단검이 만져졌다.
조금 전, 스스로 목을 찔렀던 단검이었다.
‘그렇게 못한다면... 내 피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