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
이제는 지나간 것들에게
작가 : 은호
작품등록일 : 2017.10.28

"엄마의 새 남편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름과
이제는 식어버린 이름
가까이 있어도 이해하지 못 했던 이름들에게 보내는 이야기

 
1부_12회
작성일 : 17-11-19 11:32     조회 : 213     추천 : 0     분량 : 886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교정을 나선다. 열심히 했든 안 했든 한 학기는 끝나버렸고. 어영부영 했지만 평타는 치지 않았을까? 만사가 다 그렇지 뭐. 어찌하든지 간에 시간이란 놈은 흐르고, 중간쯤 가는 태도에는 중간쯤 되는 결과.

  가벼운 마음으로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타박타박 정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핸드폰에 꽂아놓은 이어폰에서는 헤드윅의 뮤지컬 넘버 ‘디 오리진 오브 러브’의 후반부가 흘렀고. 이번 학기 내내 그랬던 것처럼 아는 사람이라곤 없는 길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에 파장이 일었다.

  “끝났어?”

 깜짝이야! 입에서 헉 하는 소리가 났다. 결단코 생각지 못했던 인기척과 함께, 노래의 음량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몹시도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뒤에서 슬며시 다가와 툭 쳤다. 비겁하게.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만났기에 더 그런 걸까, 가슴을 쓸어내린 뒤에는 곧장 진한 반가움이 찾아왔다. 내 앞에 미소 지으며 서 있는 그는 어느새 이렇게까지 반가운 존재가 되었던가.

  “그렇게 놀랐어?”

  “어떻게…여기 계세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끝나고 들렀어.”

  “이 시간에 끝난다고….” 어떻게 알았어요? 라고 물으려다가 민망해졌다. 내가 이야기했지. 어젯밤, 서둘러 옷을 주워 입고 내방으로 돌아가려던 중이었고. 그런 나를 말없이 지켜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아무 말이나 꺼내 놓았다.

  “내일 종강인데, 지금 잠들면 마지막 날까지 지각하겠네요.”

  “내일 몇 시에 끝나나?”

  “글쎄요. 원래 12시엔 끝나는데, 내일은 그것보단 일찍 나오겠죠?”

 별 생각 안 했는데,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한 학기 고생했겠다, 끝난 기념으로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한다. 다만 오늘은 차가 없단다. 지하철로 가도 괜찮겠느냐고 그는 물었다.

  “얼마든지요.”

 당신과 나란히 길을 걷는 동안에는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시청 역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빛바랜 돌담 너머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몸을 흔드는 덕수궁을 끼고 정동길을 걷다가 바람이 차서 얼마 더 가지 못 하고 정동극장 옆 카페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그는 차를 시키고, 나도 따라해 본다. 곧 여자 점원이 트레이를 받쳐 들고 와서 두 개의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뜨거운 김과 함께 루이보스의 향이 올라와 기분이 느긋해졌다. 그런데 점원이 머뭇거리며 테이블 옆에 계속 서 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신우진 작가님 맞으시죠?” 라고 수줍게 말을 꺼냈다.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그녀는 예전에 모 대학에서 열린 초청 강연 때 갔었다며 그의 팬이라고 조심스레 밝힌다. 아, 네-그는 해야 할 대답만 한다. 그녀가 앞치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사인을 부탁하자 그는 크게 개의치 않고 묵묵히 사인을 해 준다.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사무적인 그의 태도가 좋다. 감사하다며 점원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그는 코트를 벗는다.

  “강의 많이 다녀요?”

  “가끔.”

  “가면 무슨 얘기해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유리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얼굴을 목도리나 코트 속에 파묻고 묵묵히 지나가는 직장인들, 이런 날씨에도 짧은 교복치마 밑으로 살색 다리를 내놓고 걸어가는 여학생들, 사귄지 얼마 안 돼 보이는 같은 디자인의 외투를 입고 찰싹 붙어 걸어가는 연인들.

  “우리 데이트하는 거예요?”

  “응.”

 이런 산뜻하고 정확한 대답을 할 때마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좋게 말하면 너무나 명확해서 더 덧붙일 말이 없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사람을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연인끼리 정동길을 한 바퀴 걸으면 곧 헤어진다는 말 알아요?”

  “알아.”

  “스무 살 되자마자 잠깐 사귄 남자친구랑 이 길을 걸었는데, 얼마 안 있어 헤어졌어요.”

  “그냥 구실이었던 건 아니고?”

  “어쩌면?”

  “힘들었나?”

  “계속 만나는 게 더 힘들었겠죠.”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건 처음이네.

  “제가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 남자친구는?”

  “글쎄요. 그 사람이 먼저 사귀자고 하기도 했고. 헤어지고도 종종 연락이 왔었으니까. 저보다는 더 좋아했던 거 아닐까요?” 대학 첫 학기 교양수업에서 만난 다른 과 복학생이었다. 단순히 ‘나쁘지 않은’ 사람과 하는 연애는 역시, 그저 나쁘지 않은 선에서 끝나, 이제는 흘러간 사람이 되었다.

  “헤어지고도 그렇게 슬프거나 힘들지 않았어요. 그 상실감은…뭐랄까,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버린 정도의 느낌.”

  “그건 슬프네.”

  “그럼에도, 그 사람이 처음이라 기억에 남나 봐요.”

  눈을 들어 바라보는 그. 묻지 않은 이야기를 알아서 하는 내가 의아한 걸까.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껏 아무에게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할 이유도 없었던, 빛바랜 기억.

  “다른 여자들도 그런지 모르겠어요.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요. 가끔은 그래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아주 가끔이지만.”

 응. 그는 아무렇지 않게 반응해주었다. “괜찮아.”

  “작가님은요?”

  “나?”

 첫 기억이 좋았는가, 단지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물어본 것이었는데 그의 얼굴에 문득 스쳤던 표정은 씁쓸해 보였다.

  “설마 누구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건 아니죠?” 일부러 장난스레 말해본다. 그의 얼굴이 풀어진다. “정말 사랑했어요?”

 질문을 곱씹듯 가만히, 그러나 시선만은 계속해서 나를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윽고 그는 “아마도.”하고 입을 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을 거야.”

 괜히 물어봤나, 얼굴조차 알 수 없는 그 사람이 부러워졌다.

 

  갑작스레 아까의 점원이 다시 와서 작은 쿠키들이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래서 대화도 끊기고, 내 감정도 끊겼다. 그녀는 서비스라고 말하고는 돌아섰다. 잠시 나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지금 남자친구는 어때?”

  어떠냐고? 의도가 느껴지지 않는 물음. 약간 식어버린 씁쓸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각설탕 하나를 떨어뜨려 천천히 녹인다.

  “안녕하세요-라고 했었죠.”

  “응?”

  “처음 만난 게, 그 사람이 길에서 설문조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랬군.”

  “다른 건 몰라도. 제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도 나를 똑같이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됐어요.”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에 부유하는 단어들, 깊이 묻었던 기억들, 기억에 붙은 감정들. 그것들이 엉킨 형상. 잠시 테이블 위를 떠돌았던 시선을 모아 다시 그를 보았다. 그는 잠자코 내가 말을 잇길 기다려주고 있었다.

  “기쁜 만큼 상처도 커진다는 건 미처 몰랐고요.”

 뭉뚱그린 설명에, 머릿속을 점령하던 형상들이 떠나갔다. 다시 내 앞에 있는 그가 똑바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느새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구나.

  분위기가 가라앉는 느낌이 들어 나는 서둘러 말을 끝내기로 한다.

  “저는 변한 것 같아요.”

  “얼마나 만났는데?”

  “3년 가까이?”

 우리의 문제일까, 나의 문제일까. 좋아 죽겠다던 날들은 어디로 가고, 원래 마음이란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으로 변하는 거였을까. 아니면….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라는 미술가가 있었는데요. 이름 대단하죠? [완벽한 연인들]이라는 작품 아세요?”

  “아니.”

  “벽에 동그란 시계 두 개를 나란히 걸어놓은 거예요. 처음에는 모든 바늘이 같은 속도로 같은 시각을 가리키면서 가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배터리가 닳으면서 점점 차이가 나고, 결국 서로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리키다가 하나가 먼저 멈춰버리는.”

  “아.”

  “어쩔 수 없는 거죠.”

 

 

 

  카페를 나와서 걷는다. 나는 걸음이 빠르고 그는 보폭이 넓어서 속도는 딱 맞았고, 팔과 팔 사이 절대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지만 그와 나란히 걷는 일이 좋았다. 이렇게 조금만 더 가면 서대문 역. …그러고 보니 남자친구 사무실이 이사 온 게 바로 이 근처일 텐데. 어차피 근무시간이니 괜찮겠지? 그리고 마주친다 해도 이상한 관계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상식적으로 나와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빤히 쳐다본 모양이다. 그는 눈썹을 치켜 올려 이마에 주름을 지었다. 왜인지, 그를 올려다보며 나는 웃고 있었다. 언젠가 딱 한번 내게 찾아왔던 기분 좋은 꿈속에서 느낀 따뜻한 햇살, 손가락 사이로 갈려나가던 간지러운 바람. 할 수만 있다면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그곳에서 피어났던 따스한 기분이 현실에서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뭔가, 현실감이 없어서요.”

  “나도 그래.”

  “작가님은 왜요?”

  나의 말이 그를 멈춰 세웠다.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선 나를 뚫어져라 본다.

  “두리야?”

  그가 입술을 떼던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막아섰다. 한숨이 나오고 만다. 근무시간이잖아. 그런데 왜 밖에 있는 거야.

 

  앞에 섰던 그의 시선이 먼저 내 뒤로 옮겨갔고 나도 표정을 정리하며 돌아섰다. 길 건너편에서 남자친구가 두꺼운 패딩을 입고, 양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 캐리어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굳은 내 얼굴과 달리 그 남자의 표정은 반갑기 그지없다는 것. 우연이 지나쳐, 삼류 드라마 같은 일은 현실에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어쩌면 내 현실이 삼류인 지도. 남자친구가 건너오는 동안 뒤에 선 그를 돌아봤지만 눈 하나 꿈쩍 않고 있었다.

  “학교 끝났어? 아이고, 고생 많았네. 안 추워?”

  “응…괜찮아.”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남자친구가 내 뒤를 보면서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약간 굳은 것 같기도 하고. 경계하는 것도 같은 표정.

  “이분이 신우진 작가님이야. 그때 얘기했지. 우리 엄마….”

  “아.”

 그제야 조금 풀어진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만나서 반갑다며 태연하게 인사를 받는 그의 앞에서 남자친구는 자기 이름을 말하고 악수를 하고 어색하게 웃는다. 차라리 웃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모습을 보자 한 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양심이 살아났는지 마음이 아팠다. 애매하게 나쁜 아이인 나는 그렇다.

  “두리랑 같이 어디 가시나 봐요.”

  “오늘 종강이라길래.”

  “아, 그렇구나.”

 둘이 뭐하는 건지. 서로 더 할 말도 없어 보였고 나는 빨리 이 남자가 회사로 들어가기를 바랐다.

  “오빠 어떻게 나왔어?”

  “내기에서 져서. 커피 사러 나왔지. 참, 좋은 소식 있는데.”

  “뭔데?”

  “오빠 이번에 프로젝트 팀장 맡게 됐어. 자기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고 싶었는데.”

 정말 우습지만, 상황이 이런데도 기뻤던 것 같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고생한 시간들을 가장 가까이서 본 건 나였으니까. “정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고 작게나마 웃음이 지어졌다.

  “축하해. 근데 이제 바쁘겠네.”

  “응, 그래도 크리스마스 정도는 같이 보낼 수 있을 거야.”

 그렇구나. 만감이 교차하는 사이, 남자친구는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얼른 들어가야겠다며 웃는 얼굴로 나와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라는 예의바른 인사도 잊지 않는다. “일 끝나고 연락할게.”

  “조심히 가.”

 멀어져가는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일순간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마음이 복잡했다. 총총총 뛰어서 대로변 어귀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고갤 돌려 그를 살폈다. 다시 걸음을 옮길 때에야 죄송하다고 작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아냐 괜찮아. 직장이 근처인가 보네.”

  “네. 디자인 회사. 작지만 꽤 바쁜가 봐요.”

 아까 한 말이 뭔지 알 것 같다고 그는 웃었다.

  “여자 고생시킬 타입 같진 않네.”

  “그런가요?”

 일부러 매정한 소리를 뱉는다. 내 말투에 가시가 느껴졌던가. 함께 걷는 동안 그는 남자친구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다만,

  “나한테 좋은 일이 생겨도. 그렇게 기뻐해줄 수 있나?”

 그렇게 물었다.

 

  역 앞에서 그는 시계를 봤다. 나도 따라서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더니 아직 4시가 채 되지 않았다.

  “지하철로 갈래? 버스로 갈래?”

  “어디를요?”

 집으로 가려면 버스 밖에 없는데 선택지가 있다는 건…. 그는 추우니까 지하철로 가자며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다소 미심쩍긴 했지만 뒤를 따랐다. 광화문 방면으로 가는 전동차 안에서 드문드문 난 빈자리에 앉으라고 그가 권했지만 그와 함께 서 있기를 택했다. 어차피 두 정거장만 가면 된다고 하니 말이다.

  종로3가역 밖으로 나오자 바로 뒤에 파란 낙원상가 간판이 보였고 쌩하니 더욱 차가워진 바람이 건물 밑에서 불어왔다. 제법 쨍쨍한 날씨였는데 그새 조금 어두워진 것 같았다. 조금만 걸으면 된다 한다.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한데, 정말 그곳으로 가려나.

  아직은 간판에 불이 들어올 시간이 아니라서 길은 깨끗했고, 온갖 식당이 즐비한 먹자골목 역시 밤과는 달리 조용하고 황량했다. 혼잡하지 않은 것은 좋지만, 이 길에 어울리진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해가 사라지면 다시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몇 블록 안 가서 그는 작은 골목길 앞에 걸음을 멈췄다. 나에게로 몸을 돌린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벌린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나왔다. 이럴 줄 알았어. 나의 직감에 감탄하느라 웃음이 나왔다.

  다소 좁은 골목 안으로 어지럽게 늘어진 전깃줄이 하늘을 가르고, 그 양 옆으로는 저마다 다른 모텔 간판들이 길 초입부터 저 끝까지 매달려 있었다. 태연하게 걷던 연인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들어오는 곳. 숨어 있는 것도, 드러내 놓은 것도 아닌 곳에 모여서 손짓하는 간판들.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장소. 단순하고, 복잡하고. 그 앞에 서서 신우진 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뭐가요?”

  “이런 덴 처음이야?”

  “아니요.”

  “간밤엔 적극적이더니, 오늘은 다시 조신한 아가씨네.”

  보통 이럴 땐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들었다. 거절하고 돌아서거나 내숭을 떨면서 따라 들어가거나 앞장서거나.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우리에게 어울리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먼저 씻을래?

  아뇨, 먼저 씻으세요.

  방에 들어가자 담배와 세제 냄새가 섞인 모텔 특유의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이내 익숙해졌다.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방에 있는 모든 것들 중 월등히 큰 침대가 이 장소의 존재 이유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얗고 바스락거리는 이불에 앉았다. 그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것을 보면서.

  “편하게 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를 민망하게 만들려는 듯 그는 속옷만 남기고 옷을 차례차례 벗은 다음 곧바로 모텔 가운을 입고 허리띠를 맸다. 한두 번 봤다고 바로 적응되는 건 아닌데.

  “코트라도 벗고 있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욕실로 들어갔다. 불투명 유리로 된 욕실 안에 불이 켜지고, 그가 움직이는 실루엣이 그대로 보여 고개를 돌렸다. 괜히 실내 곳곳을 관찰하다가 물소리가 들리고서야 마음이 편해진다. 일어서서 외투를 벗어 그의 코트 옆에 나란히 걸고 수증기로 뿌옇게 된 욕실을 한 번 쳐다보곤 니트와 치마를 벗어 개켰다. 레깅스 까지 벗어두고 속옷 위에 가운을 찾아 걸쳤다.

  TV도 틀지 않고, 침대에 반쯤 누워서 물소리를 들었다.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에는 소리가 없다. 수증기가 뭉쳐져서 유리를 타고 흘러내린 자국 사이로 그가 보였다. 길에서 내 남자친구 얼굴을 본 지 한 시간도 채 안 되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문득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물소리가 그친 것이다. 아까처럼 가운을 입고 젖은 수건을 들고 나오는 그.

  “들어가도 돼.”

 나는 머뭇거렸고, 그는 다가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를 대하듯. 그리고 나도 정말로 아이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앉은 채로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는데 어딘지 적절치 못한 기분이 들었고, 그도 느꼈는지 손을 거뒀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냥 다리라도 펴라고 온 거야.”

 네. 거짓말. 고개만 끄덕이고 일어섰다. 그의 곁을 스치자 수증기와 바디샤워 냄새가 났다.

  곧장 욕실로 들어와 일회용품 백에서 꺼낸 칫솔로 양치질부터 한다. 거품을 뱉어내고 고개를 드는데 김이 서렸던 거울의 표면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내 얼굴이 비쳤고.

  “뭐하는 거니.” 나는 그 얼굴에게 웃어주었다.

 

  나왔을 때 그는 침대에 다리를 뻗고 기대앉아서 미간에 주름을 잡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뭇 심각해보였는데 나를 보곤 바로 표정을 푼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뭣 좀 써달라고 의뢰가 와서.”

  “어려운 거예요?”

  “내가 원래 표정이 좀 그래.”

 늘상 듣는 말인가, 금방 내 말뜻을 알아차리니.

  그의 옆에 내가 앉을 만큼의 자리가 비워져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올라가 똑같이 다리를 뻗고 등을 기댔다. 정면의 TV는 꺼져 있었다.

  “좋네요.”

  “뭐가?”

  “TV 안 틀고 있어서요.”

  “누구는 꼭 틀어놓나?”

  “방에 들어오면 영화부터 찾는 사람이 있죠. 뒤에서 뭔 짓을 해도 그게 세팅되기 전에는 반응이 없는.”

 그렇군-하고 대답해준다. 딱히 누구 편도 들지 않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줄곧 손을 깍지 껴서 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는 그의 포즈를 똑같이 따라해 봤다. 손을 넣을 주머니가 없어서 저러는 건가 싶기도 해서 재미있었다.

  “남자친구 이야기 싫지 않아요?”

  “왜?”

  “남자들은 공유하는 걸 싫어한다면서요.”

 내 말이 끝나자, 그가 깍지를 풀고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물기에 젖은 머리를 내 어깨 뒤로 넘긴다. 목이 드러나고 들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름이 돋았다.

  “싫어하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반쯤 거짓말이었으리라. 나란히 앉아있던 우리는 몸을 비틀어 입술을 부딪치고 서로를 끌어당겼다. 내가 먼저 그의 다리 위로 올라가 앉았고 그는 바로 내 가운을 벗기고 드러난 어깨와 가슴을 입으로 빨아들이듯 애무했다. 이윽고 숨을 고르며 이마를 맞대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봐요. 더러운 아저씨.”

 내가 웃고, 잠시 멍한 얼굴을 했던 그도 따라 웃는다. [롤리타]의 대사였다.

  “험버트 그 사람보다는 내가 낫지.”

 그래요.

  내 손은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만지고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팔뚝으로. 그리고 비로소 페니스에 닿자 그가 내 팔을 잡는다. 안 돼요? 잠시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의 까만 눈에 내가 있었다. 그 잔상을 지우기 위해선 다시 집어삼킬 듯이 키스하는 수밖에.

  내 가늘게 뜬 눈이 그와 마주치면 그를 부르고 싶어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가 없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4 2부_1회 2017 / 11 / 24 227 0 9527   
13 1부_13회 2017 / 11 / 21 215 0 6714   
12 1부_12회 2017 / 11 / 19 214 0 8869   
11 1부_11회 2017 / 11 / 17 244 0 7745   
10 1부_10회 2017 / 11 / 14 234 0 9472   
9 1부_9회 2017 / 11 / 11 240 0 8616   
8 1부_8회 2017 / 11 / 9 223 0 5731   
7 1부_7회 2017 / 11 / 7 209 1 4587   
6 1부_6회 2017 / 11 / 4 230 1 5059   
5 1부_5회 2017 / 11 / 1 225 1 3467   
4 1부_4회 2017 / 10 / 30 224 1 3790   
3 1부_3회 2017 / 10 / 28 246 1 2440   
2 1부_2회 2017 / 10 / 28 236 1 3416   
1 1부_1회 2017 / 10 / 28 424 1 543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