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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고잉홈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덩치 큰 사회, 덩치 큰 사람들, 덩치 큰 세상속에 작은 사회, 작은 사람들. 치이거나 가려지거나 소멸되거나 하는 이 작은 사람들의 공간에 빛을 비춰주고 싶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는 그들의 이야기이다.

 
인연
작성일 : 17-11-17 13:19     조회 : 237     추천 : 0     분량 : 17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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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부모와의 인연이란 어떤 것일까.

 

  자취를 시작한 이유는, 물론 집과 학교와의 거리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2학년 때까지는 그 수고를 감수하고라도 대중교통을 이용해 통학을 했었다. 3학년이 되면서 자취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데는 얼마든지 이유가 있었다.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만만치 않았다. 내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약간의 돈과 엄마의 월급으로는 더 이상 충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려면 우선 통학시간을 줄여야 했다. 학교 근처 오래된 주택가의 작은 단칸방 사글세는 한 달 치 통학 교통비와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다. 난 집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학교와 집, 일을 오가는데 교통비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는 서울에 혼자 계신 엄마였다. 물론 한 집에 살 때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진 앉았지만 서로 떨어져 사는 것도 처음이었다. 바쁜 회사 일에 홀로 지내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처음 집을 나왔을 때에는 아침저녁으로 몇 번씩 엄마와 통화를 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엄마가, 엄마가 안 하면 내가 먼저 연락을 하곤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수시로 체크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작년 가을부터는 엄마에게 전화하는 일이 보통의 일상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는 엄마는 그랬다. 어디냐고 물으면 집이라고 하면서 빨리 끊기를 바라셨다. 씻다가 나왔다거나 가스 불에 뭔가 올려놓고 깜빡했다거나, 택배가 왔다거나 하면서 엄마는 핑계를 대는 것 같았다. 엄마 옆에 누군가 있을 거라는 것은 내 예측일 뿐이었지만, 난 그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았다. 좋지 않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고 엄마가 언젠가 내게 이야기 해 주길, 또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될 일이라고 그냥 여겼다. 그리고 엄마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일은 일주일에 두 번으로, 집에 가는 일은 처음엔 매주, 그 다음엔 한 달에 한 번, 지금은 학 학기에 한두 번 정도로 줄었다.

 

  나도 자취생활엔 금세 익숙해졌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늦게 들어오지만, 이제부턴 취업준비를 해야 해서 자기 전에 꼭 취업 정보를 확인한다거나 관련 서적을 보며 공부하는 일을 빼놓지 않았다. 식비를 줄이기 위해 간단한 식사나마 웬만하면 집이나 학교에서 해결하려 했다. 4학년이 되면서 이렇게 난 점점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었다.

 

  “미리 좀 연락 해주지. 어제 카페에 급하게 야기하느라 엄청 곤란했어.”

  지난 밤, 잠깐 날 보러 오시겠다는 엄마의 연락을 받고 난 카페 매니저에게 쉬는 날을 조율해 줄 것을 부탁했다. 토요일이어서 아르바이트를 대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결국 매니저와 주중 파트타임 알바생에게 눈초리를 받으며 쉬는 날을 어렵게 바꾸었다.

  “그래서 어제 연락했잖아.”

  엄마는 당당하게 말했다.

  “더 일찍 했어야지. 알바 급하게 바꾸느라 엄청 욕먹었거든!”

  “그래? 미안하다.”

  바로 사과하는 엄마를 향한 원망스러운 눈빛을 난 거두었다. 엄마는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다. 난 그것들을 받아들었다.

  “뭐야? 웬일로 딸내미한테 오면서 뭘 무겁게 들고 왔어?”

  “밑반찬 몇 가지랑 냉동밥. 오래두고 먹어도 되는 것들이니까 두고두고 먹으라고.”

  엄마는 손에 든 짐을 내게 모두 내어주며 말했다.

  “정말? 웬일이래? 안하던 걸 다 하시고......... 뭔가 불안한데?”

  “불안하긴........”

  농담처럼 건넨 내 말에 엄마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정말 무언가가 감지되었다. 집으로 걸어가면서 그동안 엄마와 연락하면서 하게 되었던 생각들을 정리해 보았다. 말없이 걷고 있는 나에게 엄마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걷고 계셨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한 눈에도 들어오는 방 안을 굳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집이 좀 추운 것 같다. 곰팡이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전혀 안 추운데. 방바닥은 되게 따뜻해. 곰팡이도 없는데.........”

  엄마의 눈동자는 또 흔들렸다. 난 엄마가 가져온 밑반찬들을 정리하고 커피를 타기 위해 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말했다.

  “자고 갈 거지? 내일은 아침부터 아르바이트가 있긴 한데, 엄마만 괜찮다면......... 오랜만에 저녁이라도 편하게 먹고........”

  “아니야. 자긴 뭘....... 너 편하게 일해. 엄마도 바빠.”

  엄마는 차분히 말했다. 물이 끓자 난 머그컵 두 개에 믹스커피를 털어 넣고 물을 부었다. 책상 겸 밥상 앞에 엄마는 앉아 있었고 난 커피를 가져갔다.

  “연희야........”

  엄마는 내가 건네준 머그잔을 받아들어 두 손으로 감싸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도 잔을 손으로 감싸며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날 불러놓고 한참을 뜸을 들였지만 난 기다렸다.

  “연희야, 엄마......... 이사 가려고.”

  “이사? 어디로?”

  엄마는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난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태연한 척 물었다.

  “부산!”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부산은 무척 생소한 곳이다. 하지만 난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음....... 부산이라........ 좀 머네?”

  놀라지 않는 나를 보고 엄마가 더 놀란 듯 그제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보다 얼굴보기 더 힘들겠네. 어차피 나도 이제 졸업반이라 바쁘긴 하지만. 안 그래도 나도 엄마한테 야기하려고 했어. 연락 잘 못할 것 같아서........”

  엄마는 내 말을 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머뭇거리셨다.

  “딸아, 엄마........ 좋아하는 사람 생겼는데....... 그 사람이 참 좋아. 같이........ 있고 싶어서....... 그래서 이사 가는 건데....... 괜찮아?”

  엄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힘들어 하셨다. 더듬거리며 말을 해 놓고 큰 숨을 들이마셨다.

  “엄마! 긴장하지 마! 내가 남이야? 딸한테 얘기하는데 왜 이렇게 긴장을 해?”

  머그잔을 감싸고 있는 엄마의 두 손이 떨리는 것을 보고 난 말했다.

  “어? 어, 그래........ 그러게 말이다.”

  엄마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내가 괜찮고 말게 어디 있어? 엄마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엄마 결정인데........ 엄마 인생이니까 엄마가 원하는 대로 살아. 나도 그렇게 사는데 뭘........ 난 엄마랑 내가 그냥 무사 무탈하게만 지내면 된다고 생각해. 세상에 가족이라고는 우리 둘 뿐인데 서로 원하는 대로 살아야 그럴 수 있지 않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는 내 엄마고, 나는 엄마 딸이라는 건 변하지 않잖아. 꼭 같이 있어야만 가족인 건 아니니까....... 각자 행복하고 그걸 서로 확인하면서 살면 되는 거지........”

  난 말했다. 엄마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았지만 조금 전까지 떨리던 손은 진정 된 것 같았다.

  “연희야........ 참....... 딸이 엄마보다 낫네!”

  엄마의 눈 주위가 붉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어보였고 나도 그랬다.

  “그래도 연희야, 엄마가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은 꼭 해야 될 것 같아. 엄마가 이런다고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그냥, 엄마 미안한 마음........ 받아 줘. 엄마가 이기적인 건 맞는 것 같아. 앞으로 네가 날 원망할 수도 있고........”

  엄마가 말했다.

  “알았어. 받아 줄 테니까, 됐어? 더 이상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돼. 이제 나도 성인이고, 나도 내 맘대로 살 거 거든! 그러니까 나한테 애처럼 잔소리나 하지 마요!”

  난 말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녀는 끝까지 울지 않으려, 약해 보이지 않으려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일주일 후, 엄마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부산에 잘 도착했다고 하셨다. 난 아르바이트 때문에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와 함께 지내게 된 아저씨는 엄마가 다니는 회사의 간부이신데 이번에 부산에 공장을 증설하면서 그곳 책임자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보다는 한 살 많으시고 결혼을 한 번 하신 적이 있고 성실하고 자상하신 분이라고 엄마는 내게 설명했다. 언제든 기회가 되면 나와 하루라도 꼭 함께 보내고 싶다고도 하셨다.

  물론 근래부터 엄마와의 연락이 줄었던 상황이었고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지만, 갑작스레 변한 상황이 그리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은 않았다. 엄마는 많지는 않아도 한 달에 한 번씩 나에게 용돈을 챙겨주겠노라 하셨고 그에 대해 아저씨도 동의하셨다고 한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주일 전 엄마가 내 손에 쥐어주려 했던 돈 봉투는 받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엄마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엄마와는 달리, 특별한 것 없는 내 생활은 상대적인 느낌이었을까. 불연 듯 외롭고 고달프게 느껴지는 것이. 생각해 보면 그럴 것도 없었기에 괜한 생활 피로쯤으로 난 여겨버렸다.

  4학년이 되면서 더 신경 써야 하는 학점관리, 스펙관리와 아르바이트, 늘 똑같은 일과 속에서 외로워할 틈도, 고달프다고 느낄 여유도 없었다. 엄마가 내 곁에 없었던 것도 늘 그랬지만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장소에 미지의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면 문득 느껴지는 것이었다.

  엄마가 부산으로 가고 나서 딱 4주가 지났을 때 그녀에게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엄만 잘 있어. 우리 딸도 잘 지내지? 얼마 안 되지만 용돈 써. 다음 달에 또 보내줄게.]

  그 날, 난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디 아프니? 그 다크 서클 뭐야?”

  “......... 주문, 도와 드릴게요.”

  카페 마감시간을 삼십 분정도 남겨두었을 때 그가 찾아왔다. 얼마 전부터 알바생이 한 명 빠지는 바람에 그 시간을 메우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카페로 향해야 했다. 최근 그는 커피를 마시러 곧잘 이곳에 오곤 했는데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아메리카노.”

  그는 커피 주문을 마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카페 안에 있던 손님들은 하나둘 가게를 나서고 있었고 난 마감준비에 바빴다. 요즘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부쩍 는 카페 손님에 끼니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던 나는 마감을 마치고 어서 빨리 내 방으로 달려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야!”

  출입문 창가 쪽에 여전히 그가 앉아 있었지만 난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카페를 나섰다. 몸으로 문을 밀고 나가려할 때 그의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야! 기다린 사람 안 보이냐?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아......... 나 기다린 거야?”

  “참 나, 보면 모르냐? 진짜 둔하네.”

  그는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지만 난 대꾸할 힘도 없어 열어놓았던 문틈으로 그냥 몸을 들이밀었다.

  “야, 송연희! 기다려!”

  그는 나를 부르며 가방을 챙겨 따라 나왔다. 난 천천히 집을 향해 걸었고 그도 어느새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가보네........ 밥은 먹었어?”

  그가 물었다. 난 대답하지 않았다. 말할 힘도 없었다.

  “밥 먹고 들어갈래? 사실......... 나도 못 먹었거든. 배고픈데..........”

  “밥 때문에 기다린 거야? 휴........ 난 지금 밥보다 잠이 우선이야.........”

  그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배고픔을 내게 호소했지만 난 진심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일하고 왔거든! 너만 졸리고 피곤한 건 아니라고......... 그러니까 밥이라도....... 같이 먹고 가자. 내일 어차피 토요일인데.........”

  그는 처음엔 날 원망하듯 말했다가 내 눈치를 보며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때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여왔다. 난 걸음을 멈췄다. 그도 멈췄다. 잠시 생각하다가 그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낸 뒤 앞장섰다.

  “그냥 따라오긴 했는데, 라면이 뭐냐? 맛있는 거 사주려고 했는데.......”

  난 집 근처에 있는 24시간 영업하는 분식집에 들어갔다. 라면 두 개를 주문하면서 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날 마주하고 앉으며 궁시렁댔다.

  “다른 거 먹고 싶으면 시키든가.”

  난 테이블에 젓가락을 세팅하며 그에게 말했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사장님을 불렀다.

  “사장님! 여기 공기밥 두 개 추가요!”

  “난 밥은 안 먹을 건데?”

  “누가 너 먹으래? 내가 먹을 거야.”

  그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잠시 후 라면과 공기밥, 그리고 김치와 단무지가 테이블에 놓였다.

  “맛있겠다! 맛있게 먹어라.”

  그는 내게 말하고 밥 한 공기를 자신의 라면에 쏟아 부었다.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는 나를 힐끗 보며 눈웃음을 치고서 라면 한 젓가락을 크게 집어 입에 넣었다. 그가 먹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나도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야! 그거 알아? 우리 이거 다 먹는데 5분도 안 걸렸어!”

  그의 그릇은 비어 있었고 내 것에도 국물만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난 웃음이 나왔다.

  “하하........ 안 먹을 것처럼 그러더니.”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안 먹으려고 한 게 아니고 빨리 쉬고 싶었을 뿐이야. 나도 배고픈 건 사실이었는데 뭘.”

  “이것 봐. 사람이 배고플 때랑 부를 때가 이렇게 다르다!”

  그는 나를 보며 계속 웃어댔다.

  “그럼 됐지? 이제 가자. 피곤해.”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계산을 하고 나를 따라 나왔다.

  “가끔........ 이렇게 같이 저녁 먹을까?”

  “........ 왜?”

  다시 집을 향해 걷다가 새로운 제안을 하는 그를 난 힐끗 보았다. 그는 앞을 보고 걸으며 말했다.

  “너도, 나도....... 그렇지 않으면 저녁 챙겨먹긴 그른 것 같아서. 나 한 달 사이 살이 3키로나 빠졌다.”

  “넌, 왜? 뭐하는데?”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하지, 나도....... 가구공장 아르바이트. 시급이 꽤 짭짤해서 시작했는데 학생이라 시간이 넉넉지 않다보니, 잡일이 많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이 정말 힘들어 보였다. 조금 전엔 몰랐던 땀 냄새도 좀 나는 것 같았다.

  “그래........? 힘들겠네........ 그러자.”

  난 그의 모습을 잠시 훑어보고 나서 말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밥....... 먹자고. 가끔. 같이 먹을 사람 없으면.”

  난 걸으며 말했다. 그는 얼른 나를 쫓아와 다시 내 옆에 나란히 걸었다. 우리는 곧 집 앞에 도착했다.

  “배부르다. 잘 자!”

  그는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조심히 가.”

  내가 말했다.

 

  용준이와 나는 그렇게 가까워졌다. 늦은 저녁을 함께 하며 서로 하루 일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고단함을 씻어냈다. 그는 날 좋아한다고 고백도 했다. 푸르름이 절정을 이루고 여름이 가까워짐을 느끼게 하던 오월의 어느 날, 우린 월급날 기념으로 분식집 대신 삼겹살을 먹었다. 물론 소주도 한 잔 하면서.

  “요즘은 재영이랑 왜 같이 안 다녀?”

  그가 내게 물었다.

  “같이 다녀. 점심도 가끔 같이 먹고....... 아무래도 내가 바빠지니까 예전 같진 못하지만.”

  난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바빠진 것도 이유가 될 순 있었지만 재영이는 확실히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오전 수업에도 제일 먼저 와서 내 자리까지 맡아놓곤 했었는데 얼마 전부터는 아슬아슬하게 수업시간을 맞춰 오거나 지각하기 일쑤였다. 나와 점심을 함께 먹긴 했지만 가끔은 약속이 있다며 다른 친구들과 먹기도 했다. 평소 그녀가 뒤에서 흉을 보던 아이들과 함께이기도 했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물론 난 카페로 직행해야 했기에 당연히 그녀와 함께 있을 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멀어지는 느낌이었던 건 맞다.

  “걔, 나 모른 척 하더라? 저번에 교양수업 때 마주쳐서 인사했더니 모른 척 하고 지나가더라고. 뭐, 나도 다시 인사하려다 그냥 말았지만.”

  그가 말했다.

  “그래.......?”

  난 의아했다.

  “그럼....... 이제부턴 나랑 다니면 되겠다! 자! 그럼 이제부터 우린 단짝인 걸로!”

  그가 소주잔을 치며들며 말했다. 우리는 잔을 부딪치고 동시에 술을 넘겼다.

  “나........ 너 좋아해!”

  소주를 단번에 마시고 그는 다시 고기를 구우며 뜬금없이 말했다.

  “........... 하긴.......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난 사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뭐, 아예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기에 담담한 척 말했다.

  “무슨........ 무슨, 고백을 하는데 그런 반응을.........!”

  그는 고기를 굽다 멈칫하며 나를 보았다.

  “그럼, 뭐........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란 척이라도 해야 돼? 얼굴 빨개지고 수줍어 하면서? 그러는 넌, 삽겹살에 소주 마시면서, 그것도 고기 뒤집으면서 고백을 하냐?”

  내가 말했다. 그는 할 말을 잃고 다시 묵묵히 고기를 구워 내 앞에 쌓아 놓았다.

  “먹어!”

  “왜 다 날 주니? 내 건 내가 먹을 테니까 너나 먹어!”

  우리는 다시 먹는 데에 집중했다.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먹는 동안, 입에서 녹는 듯한 궁극의 삼겹살 맛을 느끼고 있는 서로의 표정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면........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는 법이라면....... 너도 그렇다는 거야? 너도 내가 싫지 않다는.........”

  그는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흠....... 좋을 대로 생각해. 난 원래 너처럼 직접적으로 말 못해. 이건 알아둬야 할 걸? 난 겉과 속이 아주 다르거든. 마음은 안 그래도 표현엔 서툴러. 놀라울 만큼.”

  어렵게 얘기했지만 그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길 바랐다. 그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풉! 큭........ 하하! 알았어, 알았어!”

  “왜 웃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소리를 내며 대답하는 그가 난 왠지 기분 나빴다.

  “미안, 미안........ 네 말이 웃긴 게 아니라....... 흠! 좋아서 그래, 내가. 기뻐서.”

  그는 계속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눌렀다.

 

  배도 꽉 찼고 뭔가 마음도 꽉 채워진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어느새 나의 집 앞까지 와 있었다. 그는 그저 내 옆에서 함께 걸으며 늘 했던 것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오늘 하루 있었던 학교 얘기나 가구공장에서 자기가 만든 가구가 어떤 가구인지, 작업하다가 위험했던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 등.

  “이제 가. 피곤할 텐데.”

  난 대문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큭....... 알았어. 오늘 저녁, 진짜 맛있게 먹었지, 그치? 배불러 죽겠다.”

  그는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 그래. 나도 배불러.”

  어색할까봐 나도 웃었지만 그게 더 어색했다.

  “하하, 그럼 이제 우리 사귀는 거 맞지? 응?”

  “.......... 말했잖아. 나 원래 직접적으로.........”

  “알았어, 알았어! 그래, 그럼 내가 하지 뭐! 너랑 나, 연인이다. 오늘부터! 큭........”

  그는 몹시 신이 나 보였다. 실은 나도 속으론 그랬다. 그를 와락 안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에게 난 말했다.

  “그만해! 닭살 돋으려고 해.”

  난 양팔을 움츠려 손으로 내 팔뚝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우린 약 5초간 가만히 있었다. 그의 품은 따뜻했다.

  “흠! 잘 자! 나, 갈게. 문 잘 잠그고 자!”

  그는 나를 놓으며 말했다. 표정과 목소리를 가다듬고 뒷걸음질을 치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자....... 잘 가.”

  나도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뒤돌아서서 계속 나를 확인하더니 모퉁이를 돌기 전 뒤돌아서서 내게 들어가라 손짓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문틈으로 그를 보았다.

  “빨리 들어가! 방에 불 켜지는 거 보고 간다!”

  그가 소리쳤다.

  “알았어! 너나 빨리 가. 동네 시끄러!”

  난 얼른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잠시 책상에 걸터앉았다. 정신이 아득하고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연희야, 잘 있지? 엄마도 잘 있어. 이번엔 적어서 미안. 엄마가 필요한 게 있어서 뭣 좀 사느라고 좀 덜 넣었어. 혹시 부족하면 얘기하렴. 사랑해! 딸!]

  오월 말일에 엄마에게 문자가 왔다. 난 문자 메시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엄마는 ‘사랑해’라고 내게 말한 적이 없다.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엄마가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내가 엄마의 바로 그런 성격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엄마가 내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물론 메시지를 통해서였지만 난 왠지 그 말이 편치 않게 느껴졌다. 문자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가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엄만 받지 않았다.

  ‘일할 시간이니까........ 바쁘시겠지........’

  난 시간을 확인하며 생각했다. 신경이 쓰였지만 나도 아르바이트를 가야 할 시간이라 별 일 아닐 거라 여기려 했다.

 

 4. 여름 나기

 

  6월이 되었다. 방학을 목전에 두고 학교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것과 교내외에서 진행되는 취업 설명회와 기업별 전형 안내 특강 등으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만의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졸업반 아이들은 도서관과 과 사무실을 오가며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다녔다. 한편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잃지 않는 부류도 있었다. 그들은 교수 연구실을 들락거리며 로비에 힘썼다. 물론 또 다른 부류도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못해 아예 학교도 잘 나오지 않는. 대학생활을 보내는 동안 남은 거라곤 빚뿐이라 아르바이트를 놓지 못하는 나와 같은 근로자 부류이다. 나 또한 게시판에 붙은 취업 설명회나 인턴십, 신입사원 모집 공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난 강의동 앞 게시판에 붙은 한 중소기업의 신입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있었다. 놀라서 돌아보니 용준이가 뒤에 서 있었다.

  “지원하려고?”

  그가 물었다.

  “아니.”

  난 대답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디 봐 둔 데 없어? 가고 싶은 데나.”

  그는 다시 물었다.

  “없어......... 너는, 있어?”

  “정말 없어? 음........ 난 한 군데 아니, 두 군데 정도 있긴 한데........ 경쟁이 좀 센 것 같아서 다시 생각해 볼까 해.”

  그가 대답했다. 왠지 자신감 없는 말투였다. 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정말 없어? 뭐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없어......... 우리, 기말고사 공부나 하자. 시험이나 잘 보고 뭘 얘기하든가.”

  난 화제를 돌리려 시험 얘기를 꺼냈고 그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미소 지었다.

  물론 당장 기말고사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내 진로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야했고 내게 있는 돈으로는 부족한 상황이었다. 며칠 전, 난 그 일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바쁜 것 같았다. 서너 번쯤 시도하고 나서야 통화가 됐는데, 겨우 들을 수 있었던 엄마의 목소리는 진지하고 사무적으로 들렸다. 엄마는 내가 돈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내게 먼저 설명했다. 부산 공장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의 매출에 영향을 주는 정도로 자리를 잡아야 하고 지역사회에도 적응해야 하는 시기여서 여러 가지로 조심스럽고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아저씨가 많이 힘들어하시고 엄마도 정신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하셨다. 납득이 되는 상황임엔 분명했지만 엄마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가 없어서 걱정이 되고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돈 얘기도 꺼낼 순 없었다. 엄만 내게 안부를 물으셨다. 난 잘 지내고 있다는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매달 내게 보내던 용돈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당분간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송금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회사 일이 잘 정리되는 대로 보내주겠노라 하셨다. 난 엄마에게 공장이 잘 자리 잡길 바란다고, 건강 챙기시라고 얘기했다. 엄마는 또 말했다.

  “고마워. 사랑해, 딸!”

  엄마는 내게 또 사랑한다고 말했다. 통화를 마치고 난 마음이 무거웠다. 겨우 생각 끝에 우선 기말고사나 잘 봐야겠다는 결말에 닿았다. 다음 문제는 그 다음에 생각해야 했다. 과부하였다.

 

  “어때? 잘 본 것 같아? 잘 봤겠지, 뭐.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기말고사에 온통 기를 빼앗긴 것 같아 난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축 쳐진 내 어깨를 뒤에서 주무르며 말했다. 그가 보기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난 시험을 망쳤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시험 기간 동안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고 시험을 보면서도 그랬으니까. 시험이 끝나고 나오면서 이미 난 절망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고, 실은 그래서 힘이 없었다.

  “못 봤어.”

  난 무심하게 말했다.

  “에이......... 연막 치는 거야?”

  그는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진짠데.........”

  난 풍선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공기가 빠지듯 말했다. 그는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리, 오늘 뭐 할까? 시험도 끝났고........ 또 피 터지는 방학을 보내기 전에.”

  “나......... 휴학 하려고.”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이긴 했으나 하필, 아니 다행히 마지막 학기를 남겨둔 이 시점에 난 문득 해결의 키처럼 떠오른 단어가 ‘휴학’이었다.

  “뭐? 뭔 소리야?”

  그는 놀라며 내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리며 물었다. 난 평정심을 억지로 되찾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휴학....... 진작 하려고 했었어. 아직 취업하고 싶은 회사도 없고 뭘 하고 싶은 건지 생각 좀 하려고........”

 

  난 그렇게 갑작스럽게 휴학을 결정했고 실행에 옮겼다. 엄마에겐 알리지 않았고 당분간 그럴 생각이었다. 용준이도 뭔가 석연찮아 하는 것 같았지만 내 결정을 존중해 주었다. 의외로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제부터 할 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떤 것보다 앞서 계획을 가로막는 건 ‘돈’이었다.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디에다 화를 내거나 하소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너른 세상을 살면서, 겨우 ‘돈’ 때문에 난 청춘의 한 때를 내 안의 나와 전쟁을 치르며 보내고 있었다. 이겨야 했다. 그 싸움이 주는 고통보다는 아마 이겨야한다는 강박이 밖으로 드러났을지 모르겠다. 들키지 않으려, 난 평소와 크게 다름이 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주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가 아닌 건 드러나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너무 혼자서만 그러는 거 아니야?”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난 휴학계를 냈고, 방학을 시작한 지 만 하루가 지나고 나서 난 용준이를 만났다. 그가 날 보자마자 내뱉은 첫 마디였다.

  “뭐가?”

  난 해맑게 대답했다.

  “방학 하자마자 휴학에다가,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연락 한 번 없었고......... 설마 날 그렇게 둔한 놈으로 본 건 아니겠지?”

  그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휴학은 원래 계획이었고 이제 뭘 할지 생각 좀 하느라고.........”

  내가 말했다.

  “휴......... 그래......... 뭐, 조금씩 널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게.”

  그는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말대로 날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을 자연스레 겪도록 두고 싶었다. 그게 내 못난 자존심이라도 할 수 없다.

  “뭐 먹고 싶어? 맛있는 거 사줄게. 나 오늘 알바 안가. 저녁때까지 실컷 놀아 줄게!”

  그는 말투를 바꾸고 내게 해맑게 말했다.

  “음....... 밥! 그냥 밥 먹고 싶은데? 집에서 먹는 그런 밥.”

  “응? 그냥 밥? 맨날 먹는 건데........?”

  내 대답에 크게 실망한 듯이 그는 말했다.

  “너, 그런 밥을 맨날 먹어?”

  “.............”

  내 질문에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아무 말 하지 않았다. 5초간의 침묵 끝에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내 손을 잡고 당기며 말했다.

  “그럼, 따라와!”

 

  그가 그렇게 날 데려간 곳은 어느 한정식 집이었다. 넓은 정원에 연못이 있고 기와집 몇 채가 정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무척 비싸 보이는 집이었다. 입구를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며 난 멈칫했다. 그는 흥분된 표정으로 날 다시 잡아끌었다. 우린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식당 안은 조용한 편이었다. 그 직원은 메뉴판을 건네주고 방을 나갔다.

  “야........ 여기 너무 비쌀 것 같은데........ 그냥 나가자.......”

  난 밖에서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메뉴판을 보고 있다가 내 말을 끊었다.

  “생각보다 안 비싸네. 우리 공장 주임님이 지난주에 여기서 상견례를 했는데, 꽤 괜찮다고 하더라고. 고급스럽고 푸짐하다고 해서 생각났지!”

  그는 주문 벨을 누르며 내게 말했다. 난 메뉴판을 확인했다. 정식이 사만 오천 원부터 십만 원까지 코스별로 적혀 있었다. 직원이 들어오자 그는 내 손에 들려 있던 메뉴판을 낚아채 주문을 했다.

  “저........ B코스에 갈비찜도 포함되어 있나요?”

  “네. 있습니다. A코스에서 육회랑 약선 보쌈이 추가됩니다.

  “그럼, B코스로 주세요!”

  그는 의연하게 주문을 마치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나를 보았다. 난 잠시 직원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뭐 하러! 그냥 A코스 먹어도 충분한데! 그것도 다 못 먹을 것 같던데........ 아무튼 네가 돈이 썩어나는구나!”

  난 그를 야단치듯 말했다.

  “괜찮아! 어쩌다 한 번이야. 방학도 했고 넌 휴학까지 했는데.......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우리가 이 정도도 못 먹어서야 되겠어? 앞으로 계속 열심히 살 거잖아, 안 그래?”

  그는 능청과 억울함이 섞인 투로 얘기했다.

  “휴....... 모르겠다. 남기지나 마. 배불러도 다 먹어! 남기기만 해봐!”

  난 못이기는 척 했지만 돈이 아깝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툴툴대는 나를 보며 웃기만 했다. 잠시 후,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조금 먹으려 하면 다음 코스요리, 또 다음 코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았다. 정말 다 먹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맛있어 보이고 비싸 보이는 거 먼저 먹어. 우리 한 두 시간 정도 걸려야겠다!”

  그는 내게 코치(?)까지 하며 신나게 먹었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나자 배가 터질 듯 불러왔다. 아직도 남아있는 음식이 즐비했다.

  “휴....... 난 더 이상 못 먹겠어.”

  “나도........”

  내가 포기하자 용준이도 몸을 뒤로 재끼며 말했다. 난 웃음이 나왔다. 그도 날 보며 웃었다. 둘이서 배를 매만지며 한참을 그렇게 웃었다. 우리는 그날 먹은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해 동네를 거닐었고 영화 관람에 커피 한 잔 까지 제대로 놀았다. 아르바이트 출근 시간이 될 때까지 배는 꺼지지 않았다. 우리는 세 정거장 전에 버스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아직 해가 중천이었고 더웠지만 기분은 괜찮았다. 그의 처방전이 효과가 있었다고 속으로 난 생각했다. 우리는 손깍지를 끼고 걷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도 계속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버스에서 내린 후로 그는 말이 없었다. 조용히 걷고 있다가 문득 깍지 낀 손이 축축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불편해?”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아, 아니........ 왜?”

  “손에서 땀이 왜 이렇게 나?”

  난 물었다. 그는 얼른 깍지 낀 손을 빼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아! 미안........ 원래는 안 그런데.........”

  그는 민망했는지 손을 옷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괜찮아........ 근데 정말......... 혹시 점시 먹은 거 체한 거 아냐? 갑자기.........”

  당황하는 그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아니라고 부정했다.

  “연희야.........”

  그는 다시 걸음을 떼며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응?”

  “우리........ 같이 살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고민 많이 했어. 너나 나나 시간도 아끼고 돈도 아끼고........ 서로 의지할 수도 있고........ 괜찮은 방법인 것 같은데....... 혹시나 네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뭐, 꼭 그러자는 건 아니고........ 방법 중 하나일 수 있으니까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꽤나 망설이다 뱉은 말이라는 게 그의 표정과 말투에 드러났다. 난 당황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난 계속 걸었다.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더욱 당황한 듯 보였다.

  “시.........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말했듯이 꼭 그러자는 건 아니야. 근데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쁠 것도 없는 것........”

  “정말? 정말 그럴까?”

  상황을 정리하려 하는 그에게 난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 그러니까 생각이라도 해 보라고.........”

  “넌 충분히 생각해 본 거야? 이런 저런 경우 다.........?”

  “응.”

  그는 비교적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나도 충분히 생각해 볼게.”

  난 갑자기 던져진 의외의 제안에 불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생각을 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생각을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기에 그저 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반응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래. 잘 생각해 봐. 넌 휴학까지 했는데 앞으로 계획도 세워야 하고........ 좀 더 안정적인 환경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는 곧 커피숍 앞에 다 다랬다. 잠시 대꾸 없이 걷고 있던 나를 말없이 그는 기다렸다.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난 그에게 말했다.

  “생각해 볼게. 너도 좀 더 생각해 봐.”

  “난 벌써........ 알았어. 나도 더 생각해 볼 테니까 생각 다 하면 말해줘. 너무 오래 걸리진 말고........”

  “오늘 재미있었어. 가.”

  난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전화할게!”

  그는 웃으며 내게 말하고 돌아섰다. 난 잠시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몇 걸음 걷다 날 향해 몸을 돌리더니, “얼른 들어가!” 라고 말한 후 뒤돌아 뛰어갔다. 난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에게 인사를 하고 탈의실로 향했다. 매니저는 바빠서 내 인사를 받지 못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거의 달리다시피 영덕동의 밤거리를 활보했다. 아침부터 땀을 흘리고 하루 종일 짐만 날라서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가벼워졌다. 처서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 낮에는 삼십 도를 웃도는 늦더위가 기승이었다. 그래서인지, 주말이어서인지 밤거리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우리는 손을 잡고 분위기가 좋아 보이는 음식점을 물색하고 다녔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영덕동은 자주 와보지 못한 곳이라 낯설었다. 그래도 그 낯섦이 싫지 않았다. 그저 새롭고 기대되는 분위기에 기분 또한 그랬다.

  작고 오래된 동네임에도 상점들과 사람들은 넘쳐났다. 우리는 상점들의 외관이 주는 느낌을 하나하나 표현해 가며 한참을 돌아다닌 후, 결국 집 근처에 있는 한 선술집에 들어갔다. 오래되어 보였지만 왠지 한자로 쓰여 있는 간판이 뭔가 있어 보였다. 너 다섯 개 정도의 계단을 내려가 빈티지한 느낌의 출입문을 여니 삐그덕 소리와 함께 무겁게 문이 열렸다. 약간의 쾌쾌한 지하 냄새와 싸리한 맥주 냄새가 코를 자극했고 무엇보다 술에 상기되어 시끌벅적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와 모습이 왠지 모를 행복감을 느끼게 했다. 난 그곳이 아주 맘에 들었다. 커다란 목소리로 맞이하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한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했다. 자그만 공간이었지만 공간을 잘 활용한 테이블 배치와 자리마다 정리되어 있는 기본 세팅, 추천 메뉴의 사진과 설명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저 쪽 자리가 더 맘에 드는데?”

  손가락으로 측면의 끝자리를 가리키며 난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난 이곳에 대한 만족감을 불평스런 멘트로 표현했다.

  “뭐....... 여기가 더 나아.”

  뒤를 돌아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고는 그가 말했다. 우리는 곧 메뉴판을 살피며 눈을 반짝거렸다.

  “우선 맥주하고........ 너 뭐 먹고 싶어? 배고프지?”

  “음......... 글쎄.........”

  메뉴를 고르고 있는 내게 그는 먼저 제안했다.

  “난 이 낙지. 넌?”

  “낙지 좋아해?”

  “응! 난 날 것일수록 좋아!”

  그는 입맛을 다셨다. 난 낙지가 별로였지만 입맛을 다시는 그의 표정이 귀여워 보였다. 와사비 낙지와 두툼하게 썰어 구워낸 소고기 스테이크를 안주로 주문했다. 매우 상방된 이미지의 두 요리였다. 우린 각자의 선택에 만족해하며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켰다.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맛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두려움 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그가 주문한 와사비 낙지가 미끈거리고 질기며 코를 쏘아대는 와사비향이 내 입맛엔 맞지 않았지만 그날의 안주로는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화장실을 대 여섯 번이나 다녀 올 정도로 맥주를 마셨고 그 날,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잘 기억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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