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재회
작성일 : 17-11-17 13:02     조회 : 245     추천 : 0     분량 : 19119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28.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산다는 것

 

  일주일에 세 번, 매일 아침 그를 만나는 일은 늘 설레었다. 난 신선한 우유를 사고 가끔 여유가 있을 때마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그와 함께 하기도 했다. 그는 공연이 있을 때마다 내게 알려주었지만 회사 때문에 매번 가지는 못했다.

  그 날도 우린 편의점에서 만나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팀장님, 뭐하세요?”

  난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 세홍씨....... 뭐하긴........”

  사무실 후배가 어느 샌가 내 뒤에 서 있었다. 난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우유와 샌드위치를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매일 일찍 나오시더니, 여기서 식사하시는 거였구나.”

  후배는 날 마주하고 있던 이건을 힐끔 보며 말했다.

  “아, 고마워. 잘 마실게.”

  난 얼른 이건에게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세홍씨, 다 샀어? 가자, 그럼........ 수고해요!”

  난 후배의 등을 떠밀며 편의점을 나왔다. 뒤돌아보니 이건은 그대로 서 있었다. 뒤통수가 뜨끔했지만 회사로 향하며 후배와 일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옆에 있음으로 다시 난 평화를 찾은 듯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게 느껴지지도, 회사일이 마냥 피곤하게만 느껴지지도 않았다. 일주일에 세 번의 아침은 물론이고 매일 잠들기 전에도 그는 어떤 식으로든 지친 나를 위로해 주려고 했다. 밥 때를 챙기는 말과 잘 자라는 뻔한 말들이었지만. 때론 말 대신 음악을 선곡해 보내 주기도 했다. 그의 세심함은 늘 나를 뉘우치게 했다. 꼭 단조로운 일상의 활기가 되어 주는 것보다는 거울 볼 새도 없는 내게 거울을 들이대 주는 듯한 느낌이랄까. 남들은 볼 수 있지만 정작 나만 못 보는 나를 보게 해주는, 그는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9월이 되자,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던 영태에게서 전화가 왔다. 난 지난번 일로 잠시 광주를 내려가는 길이었다.

  “어디야?”

  영태는 내게 대짜고자 물었다.

  “일 땜에 광주 내려가는 길이야. 서울 왔어?”

  “광주? 어! 잘 됐네. 나 장성에 있어. 광주에서 가까워. 너 있는데 어딘데? 내가 갈게.”

  영태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 어....... 거기가....... 백마산이라고, 그 근천데........ 언제 오려고?”

  “지금 가면, 음....... 한 시간쯤 걸릴 것 같은데?”

  “음....... 그럼 시내에서 보자. 현장 갔다가 가면 지금부터 서너 시간쯤 걸려.”

  “알았다. 기다릴게!”

  녀석과의 통화를 마치고 약 십여 분 후 광주 터미널에 도착했다. 영태도 나도 서로 반가웠기 때문일까, 꼭 오랜만에 그를 만나서가 아니라 그와의 만남이 왠지 기대 되었다. 현장 일을 마치고 충정로로 향했다. 7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좀 기다렸겠네.”

  녀석을 보자마자 내가 말했다.

  “아냐, 천천히 왔어....... 그나저나 서울이 아닌 데서 보는 건 두 번째다. 그거 생각하고 있었어. 고1 여름방학 때, 둘이 일탈이랍시고 무전으로 가평에 갔다가 거의 노숙하고 거지꼴 돼서 왔던 거 기억 나냐? 하하.”

  영태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네. 그런 적이 있었네.”

  영태가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을 꺼내자 난 그 날 일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충정로의 오래된 갈매기집을 용케도 찾아 나를 기다리면서 홀로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있었다. 그는 잔에 소주를 채웠다. 우리는 건배를 나누고 첫잔을 원샷했다. 시원하고 달큰한 맛이 났다.

  “하늘은, 날았어?”

  내가 물었다. 녀석을 가만 보니 조금 야위어 보이기도 했고 피부도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처음엔 패러글라이딩으로 시작했지........ 처음엔 그냥 서울을 벗어나고 싶어서였는데....... 갇혀 있는 기분이었거든. 나고 자란 곳이어서 몰랐을 뿐이지, 어쩐지 답답해서 보니까 내가 있는 곳이 딱 새장 같더라고. 그래서 확 스친 생각이, 날아야겠다는 거!”

  녀석은 날개 짓까지 해가며 얘기했다.

  “평소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닌 거야. 패러글라이딩을 해 보니까. 욕심이랄까, 욕망 같은 게 막 솟구치더라고. 그래서 경비행기를 탔지! 내가 맘은 약해도 기계엔 강하잖아. 후.......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이제는 눈 감고도 탄다....... 강호야....... 내가 지금 파일럿이 된다면 다들 비웃을까?”

  그는 신이 나서 얘기하다가 말끝을 흐리며 내게 물었다.

  “파일럿? 음........”

  내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눈동자는 흔들렸지만 난 잠시 생각했다.

  “내가 널 비웃지 않는 한, 아무도 널 그렇게 보지는 못할걸? 새끼....... 파일럿이 뭔데? 네가 좋으면, 하겠다고 하면 하는 거지, 뭐. 파일럿 할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못하게 말릴 사람도 없는데. 소심한 놈.......”

  난 어린 아이 나무라듯 그에게 말했다.

  “하....... 그래서 내가 오늘 너한테 온 거야. 자식아!”

  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우리는 다시 잔을 부딪쳤고 또 원샷을 했다.

  “넌? 넌, 인마....... 나도 없는데 잘 지내는 거야? 가만 보면, 혈색이 좀 좋아진 것 같기도 한데.......”

  영태는 내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사실 난 망설임 없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모두 얘기하겠노라고 오면서 다짐했었다. 굳이 녀석이 묻지도, 눈치 채지도 못하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었다.

  “요즘은 지낼 만 해. 살 만해. 힘들지도 피곤하지도 외롭지도 않아.”

  난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러자 영태는 팔짱을 끼더니 벽에 몸을 기대고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려 했다.

  “묻지 않네? 어떤 여잔지.......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그리고 또 술잔을 비웠다.

  “................”

  영태도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

  “자식, 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 그래. 좋다........ 꿈같다! 꿈같은데 현실인 거....... 뭐든 처음엔 그런 거겠지 싶었는데, 그래서 혼란스럽고 무지 망설여지고 그랬는데, 휴........ 나도 모르겠어. 좋으니까, 좋아. 그냥.......”

  난 내게 집중하고 있는 친구의 눈치를 조금은 살폈지만 어느새 내 입가엔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미친 놈....... 미쳤구나, 아주.”

  영태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난 놀라 그를 보았다.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이다, 자식아! 뭘 그렇게 놀라?”

  난 잠시 멍하다가 갑자기 지난 기억이 스쳤다. 영태가 처음 내게 수연씨를 소개했을 때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난 웃었다.

  “웃음이 나오냐? 으이구....... 어쩌려고 그러냐....... 이런 말은 하지 않을게. 나도 사실 설마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그냥 말 줄 알았어. 그 때, 설마 하고 있을 때만 해도 속으로 별 생각을 다했다, 나. ‘진짜 저 자식이 미쳤구나.‘, ’빨리 제정신이 돌아와야 할 텐데.‘........ 사실 좀 걱정했었어.”

  영태가 말했다.

  “그런데?”

  내가 물었다.

  “내가 네 친구이긴 하지만 널 그렇게 판단할 자격은 없잖아. 나도 그랬듯이. 물이 아래로 흐르겠다는데 막을 이윤 없지. 흘러서 고이면 썩는 거고, 계속 흐르다 보면 강이 되고 바다가 되기도 하는데. 난 고인물이 되었지만....... 사랑이잖아. 그 따뜻함 때문에 생겨나는 물을 어떻게 막을 거며, 어떻게 흐르지 못하게 하겠어. 휴....... 그래도 걱정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생겨난 맘, 그냥 흐르게 둬야지.”

  녀석은 이렇게 말하고는 ‘크.......’하고 소주를 넘겼다.

  “강호야.”

  영태가 날 불렀다. 그의 차분한 말투에 난 왠지 긴장이 되었다.

  “우리........ 잘 살자. 행복하게. 무얼 하든, 어디서 누구와 있든. 눈치 보지 말고. 불편한 건 좀 벗어 던질 줄도 좀 알고, 편하면 좀 욕심도 부려보고. 좀 그렇게....... 행복해 지자고. 아프면 아파하더라도 미련하게 참지도 말고, 그리우면, 만나진 못하더라도 그립다 말하면서....... 강호야.”

  이렇게 말하는 영태는 떠나기 전보다 확실히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해 보였다. 녀석은 아픈 것이었다. 그립다 말하고 있었다. 불편함을 벗었지만 욕심 앞에서 망설이며 행복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지난 행동에 대한 후회도 아니었다. 우리를 둘러쌌던 어쩔 수 없는 환경에 대한 불만도, 어쨌든 하게 된 내 선택에 대한 원망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에 의해 우리는 진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변화한 것일 거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감정을 제어하고 다스리는 데만 썼던 것 같다. 문제는 그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동안 얼마나 우리의 감정에 충실했나, 또는 소중하게 여겼나 하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게 했더라도 그 사실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하는지 깨닫는 과정 중에 영태와 난 있었던 것이다.

  영태는 우선 서울로 올라가 정리를 할 거라고 했다. 혜정씨와 살던 집을 처분하고 어머니에게도 말씀드리고 나서 거처를 정하겠다고 했다. 정리가 끝나면 다시 지방으로 가서 파일럿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할 거라 했다.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준비를 시작하게 되면 당분간 서울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29. 행복해지자

 

  영태가 떠난 지 다시 한 달 쯤 되었다. 햇볕은 아직 따스했지만 피부에 닿는 공기는 메말라 있었다. 출근길과 퇴근길의 공기도 이젠 달랐다. 변치 않을 듯해도 변하고, 그대로인 듯 보여도 생겨나거나 사라졌다.

  ‘버닝 러브’는 정규 2집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얼마 전 홍대 언더그라운드 레이블을 소개하는 한 TV 프로그램에 ‘버닝 러브’가 소개되었다. 이건이는 수줍음이 너무 많은 나머지 끝까지 방송 출연을 고사하려 했다고 한다. 결국 주변의 여론에 떠밀려 나가게 되었는데, 그 때 나도 그 여론에 동조했었다. ‘버닝 러브’의 곡들과 그들의 연주 실력이 한정된 곳에서만 보여 지기엔 아깝다는 판단이었고 음악팬으로서 좋은 곡들이 널리 들려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폭발적이기 까진 아니었어도 방송을 탄 이후로 여기저기 입소문이 돌아 홍대와 그 권역을 벗어난 이곳저곳에서 그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최근 광주 출장을 갔을 때 광주 터미널 근처에서도 그들의 노래가 들려왔다. 또 며칠 전에는 라디오에서 그의 목소리도 들었다. 신기했다. 좋은 반면 그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조금 줄었다는 것이 조금 맘에 걸리긴 했다. 두 번째 정규앨범 준비와 동시에 크고 작은 공연과 간혹 방송 스케줄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우유 회사일도 쉬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자주 연락했다.

  내가 회사에 있을 때 가끔 문자메시지를 통해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보고하거나 내 끼니를 챙겨 묻곤 했다. 늦게 퇴근 해 집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는 전화를 걸어 목소릴 들려주었다.

  내 생활은 별다를 게 없었다. 아침마다 그가 주던 신선한 우유가 아닌 우유나 커피로 아침을 때운다는 것 말고는 일은 늘 바빴고, 어쩌다 여유 있는 주말이 되면 영태를 만나 술 한 잔 하거나 이건을 만나거나 하는 대신 예전처럼 집에서 그냥 쉬는 일이 전부였다.

  이건은 이런 내 생활을 마치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챙겼다. 짬이 날 때마다 내가 먼저 그를 그리워하기 전에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얼마 전 추석연휴동안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간 난 일박이일 부모님을 뵙고 왔고 이후로 쭉 회사에 있었다. 삼사년 전부터 명절 때 집에 다녀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기도 했고 휴무와 관계없이 잔업이 남아있기도 했다. 그리고 명절이 지나자마자 그는 내게 공연소식을 알려왔다.

  “집엔 잘 다녀오셨어요?”

  우린 오랜만에 만났다. 그가 집으로 찾아왔다. 전화나 메시지로만 지내다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응.......”

  난 대답했다.

  “형 부모님들은....... 어떤 분들이세요?”

  그가 물었다.

  “우리 부모님? 음....... 그냥 평범하셔. 두 분 다 60대 초반이시니까....... 뭐, 그 나이대에 맞는 그냥 그런 사고, 생활방식........ 왜?”

  나는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그냥요. 그냥 궁금해서요. 어떤 분들인지.......”

  난 그에게 커피를 가져다주고는 마주 앉았다.

  “다음 주부터 언제까지라고 했지?”

  난 그에게 물었다.

  “뭐가........ 아, 공연. 다음 주부터 2주간이요. 금, 토만 4회 공연이에요. ‘버닝 러브’ 내부공사 때문에 대관한 거예요. 올 거죠?”

  그가 내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었다.

  “응, 물론이지. 지난번 광주 일....... 개관 행사가 있긴 한데, 잘 피해 볼게.”

  내가 대답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어서인지 잠시 어색했다.

  “그럼, 광주 일은 다 마무리 된 거예요?”

  그가 물었다.

  “그렇지.......”

  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기겠네요. 뭐 늘 바쁘지만, 형은.......”

  “나보다 네가 더 바쁘지. 요즘은. 난 지금도 여유 많아. 칼 퇴근 할 때도 있고, 주말도 곧잘 쉬고....... 너야말로 공연에, 방송에, 곡도 쓰고....... 정신없는 것 같은데? 아, 저번에 곽 사장님이 그러시던데, 팬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내가 말했다.

  “‘버러’에 오셨었어요? 근데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요? 저, 방송은 어쩌다 몇 번이고 공연이나 리허설 아니면 연습실에 쭉 있는데........”

  그가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 너 없는 시간이었어. 잠깐 들러서 맥주 한 잔 하고 바로 왔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난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데 그 때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던 이유를 순간 나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형, 커피 맛있네요. 딱 내 스타일이에요. 향이........ 꼭 형 같아요.”

  그가 말했다. 그는 수줍어했고 그의 말에 나도 쑥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는 잔을 내려놓고는 갑자기 내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난 순간 눈을 감았다. 놀라기도 했지만 난 잠시 그의 숨결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입술을 열어 더 깊게 내게 다가오려 했다. 난 그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떼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잠시 그가 멈춰 있다가 천천히 앉았다. 또 한 번의 침묵이 흘렀다.

  “미안........ 내가 조금 있다 나갈 일이 있어서....... 내일은........ 바빠? 내일 같이 저녁이라도 먹을까?”

  난 급하게 말했다. 그는 얼어 있었다. 아무 대꾸 없이 앉아 있다가 쓰고 있던 모자의 캡을 눌러 다시 썼다.

  “응? 어때? 맛있는 거 먹자, 우리.”

  난 다시 그에게 물었다.

  “내일....... 그래요. 이것만 마시고 일어날게요.”

  그는 말했다.

  “아냐, 천천히 마셔도 돼.”

  “아뇨, 저도 가봐야 돼요. 형 볼일 봐요. 내일........ 봐요, 그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는 그의 손을 난 잡았다.

  “내일....... 보자, 전화할게.”

  그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씩 한 번 웃고는 문을 나섰다. 그가 나간 현관문을 난 한참 바라보았다. 뭔가 잘못된 기분에 사로잡혔다. 조금 전 닿았던 그의 입술의 온도와 숨결을 떠올렸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조금 전, 당황한 듯한 그의 표정과 문을 나서기 전 지었던 그의 미소를 떠올리자 뭔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를 대했던 나의 행동이 부끄러웠다. 불연 듯 무슨 낯으로 내일 그를 만나야 할지가 걱정되었다.

  ‘내가 그렇지, 뭐........’

  얼마만인지,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있는 자신을 나는 또 느끼고 있었다.

 

  그 날 밤, 밤새 자책했다. 그가 그렇게 가버린 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내 마음이 자괴감에 머무르자, 그 때부터 자리를 잡고 터를 넓히기 시작했다. 별 일 아니라고 넘겨버리려고도 했다. 오늘 그를 만나 아무 일 없듯 밥을 먹고 평소 하던 이야기들을 나누면 되겠지....... 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아침을 맞았지만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요일 오후를 맞았다. 저녁을 먹자고 제안한 건 나였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는 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 망설여졌다. 어제의 상황이 자꾸만 떠올라 난 계속해서 헛되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오후 4시가 넘었다.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애먼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난 전화를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그에게 말하려고 했다. ‘만나서 술을 마셔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미안해요. 연습이 잡혔어요. 나중에 밥 먹어요.]

  순간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이 나왔다. 안도감인지 불안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타들어가던 마음은 잦아들었지만 다시 한 번 한숨이 나왔다.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았다. 두근거렸다가 또 다시 부끄러웠고 불안했다. 그리고 자책했다.

  예전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다를 거라고 믿었었다. 내 자신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었고. 힘겹게 걸어온 험난한 그 길이 너무도 허무하게 끝나 버리는 느낌이었다. 앞길은 평탄하리라 믿었던 기대도 허상이었다. 이렇게 끝난 것인지, 난 다시 걸어 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30. 다시 ‘버닝러브‘

 

  ‘버닝 러브’를 시작하고 늘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최근 몇 달 간은 그 몇 년의 시간을 모두 한 번에 보낸 느낌이었다. 은복이의 빈자리를 지나치게 의식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그냥 두고 싶었다. 채우고 싶지 않은 은복이의 자리였지만 그럴수록 빈자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말자언니는 내게 말했다.

  “복이의 자리를 지키는 게 누굴 위한 걸까? 복이가 언젠가 돌아오건 돌아오지 않건, 그런 기대가 우리에게 있다면 걔가 그렇게 떠났을까? 일말의 기대마저 버리고 가야했던 복이를 생각해. 너, 그러는 거 이기적이고 어리석어 보여. 난 언제든 기회가 되면 빈자릴 채울 거야. 어떤 식으로든. 우린 그렇게 해야 하고 내가, 건이가 ‘버러’를 위해 여기 있듯 너도 그렇게 해야 해! 그럴 맘 없으면....... 너도 떠나도 좋아!”

  말자 언니의 말은 단호했다. 꽤나 언니다운 말이었지만 당시의 나에겐 ‘너도 떠나도 좋아!’라는 말만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충격이었다. 내가 은복이의 탈퇴를 받아들이지 못했듯 말이다. 언니의 그 한 마디 말은 며칠간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시간이 지난 후엔 그녀가 했던 말들이 다시 전체 재생되었다.

  난 그렇게 7월에 있었던 락 페스티벌을 소화했다. 페스티벌이 끝난 후 난 말자 언니와 이건이에게 3인조를 제안했다. 은복이의 빈자리를 직접 메꾸기로 한 것이다. 언니는 나를 못미더워했지만 그녀와 이건이에게 편곡을 배우기로 했고, 지금까지 난 열심히 그 계획을 수행해 오고 있다.

 

  다시 정규 2집 준비에 바빠졌다. 공연은 줄었지만, 우연히 하게 되었던 방송 때문에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일 년 전 까지만 해도 꿈으로만 꾸던 일이었다. ‘버닝 러브’의 음악이 길거리에서 들리고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가 우리의 곡을 듣고 있는 걸 발견하는 일. 그래서 더욱 새 앨범 작업에 신경이 쓰였다. 그 때부터였다. 은복이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이건이와 나는 밤 12시를 넘기면서 새 곡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받지 않으려다 받은 휴대폰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야! 은수! 너 웬일이야? ‘버러’가 TV에 나오다니! 하하.........”

  석 달 만에 듣는 은복이의 목소리와 말투는 여전했다.

  “하하하.........”

  난 대답대신 그녀와 함께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웃긴 뭘 웃어? 너 되게 못생기게 나와. 말자 언니는....... 크크....... 장난 아니고....... 야, 그나마 건이가 봐 줄만 하다. 걘 TV로 봐도 비실거리는 구나!”

  은복이가 말했다.

  “그걸 지금 본 거야? 2주나 지난 건데....... 왜 연락이 없나 했어!”

  내가 말했다.

  “이 언니가 좀 바쁘거든. 넌 상상도 못할 거다!”

  은복이가 말했다. 옆을 보니 듣고 있던 이건이가 웃고 있었다. 난 얼른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넌, 넌 어떻게 지내? 회사는 잘 다녀?”

  내가 물었다.

  “어. 적어도 ‘버러’만큼은 바쁠 걸? 미안........ 한 번 찾아 간다는 게 시간을 못 냈어. 말자 언니랑 건이도 여전하지?”

  “여전하지 못해. 누나 요즘 이빨 빠진 호랑이야. 요즘은 은수가 꽉 잡고 있지. 방송에 나간 것도 은수 덕이고.......”

  안부를 묻는 은복이에게 이번엔 이건이가 대답했다.

  “진짜? 말도 안 돼....... 상상이 안 돼. 하하하........ 시간 내서 꼭 확인하러 가 봐야겠는데?”

  “아니야, 그 정도까진. 얘가 오버하는 거야!”

  허공에 손사래를 치며 난 말했다.

  “맞아. 너도 아니고 말자 누나도 아니고, 은수가 공연관람 왔던 방송국 PD들한테 직접 홍보하면서 ‘버러’를 어필한 거야.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면 나도 안 믿었을 걸?”

  “그게 그렇게 까지 못 믿을 만한 일이냐?”

  이건이의 말에 난 부끄러워서 말했다.

  “야야, 그만 해라. 우리 은수 또 얼굴 벌개 지는 거 보인다. 훕, 너네 둘도 여전하구나........”

  은복이가 말했다. 이건이와 나는 잠시 마주 보았다.

  “다음 달 공연 때 올래? 정규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새로운 곡도 들려주고 싶고.......”

  “그래, 가도록 해 볼게. 되게 궁금하네, 3인조 ‘버러’....... 또 연락할게. 공연 준비 잘 해라!”

  나의 제안에 은복이는 이렇게 말했지만 말투에 아쉬움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나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이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31. 당신은 그러면 안 되잖아

 

  개관식 참석차 광주에 다녀왔다. 난 여전히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2주 동안 우린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가기로 했던 공연에도 난 가지 못했다. 나의 일상이 다시 한 번 변화하는 시점이었다.

 

  10월 18일. 그는 ‘버닝 러브’의 공연을 무사히 마쳤을 것이다. 하루 종일 그에 대한 온갖 추측뿐이었지만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으려고 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부족한 탓이라 여겨버리고 멈추려 했다.

  [잠깐 볼 수 있어요? 잠깐만....... 보고 싶은데.]

  그에게서 문자가 온 건 오후 5시경이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내내 불안하고 두려웠다. 불안과 두려움의 이유는 나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잠깐 보자는 그의 말에 난 허겁지겁 서둘러 집을 나섰다. 그를 마주하고 무슨 말을 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초조한 발걸음으로 둔치를 향해 내려갔다. 일요일 저녁이라서인지 바람은 싸늘했고 뒤쪽으로는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으며 강물은 잔잔했다. 평소에는 운동이나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이 잘 모이는 곳이지만, 바람을 쏘이러 온 듯 보이는 노인 몇 분과 개를 산책시키는 장년의 부부만이 눈에 띄었다. 둔치를 내려오며 주변을 살피다가 그를 발견했다. 강가에 놓인 기타 케이스, 그 옆에 그는 앉아 있었다. 난 조용히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공연........ 못 갔어. 미안.......”

  난 두근거렸고 조심스럽게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그는 앞만 바라보며 말했다.

  “후....... 제가 기다렸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

  그의 물음에 난 말문이 막혔다.

  “기다렸어요....... 그래도 오실 줄 알았거든요. 알고 있으니까, 언제 어디서 내가 공연을 하는지....... 온다고 했으니까 오겠지.......”

  “........ 미안........”

  그는 말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 한마디였다. 내가 너무 초라하고 바보같이 느껴졌다.

  “왜인지는 안 물을게요. 형도 모를 테니까....... 그래도....... 그래도 그러면 안 되잖아....... 다른 사람은 다 그래도 형은........ 당신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제야 난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느끼고는 뺨에 흐르던 눈물을 훔쳤다.

  “당신한테 바란 건 아무 것도 없었어. 당신이 착각한 거야....... 아, 아닌가? 내가 착각한 건가......... 그런가보네, 참........ 이제야 알겠네, 오늘 보니까........”

  그는 설움을 억누르며 말했다. 난 여전히 아무 말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난 고개를 숙였고 그는 이런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울고 있었다. 말은 나오지 않고 변명도 핑계도 아닌 짜디짠 눈물이 눈에 고이기 시작했다. 나를 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벙어리가 된 나는 얼른 그의 손목을 잡았다. 놓을 수도 없었고, 뭐라 말 할 수도 없어서 그저 고개만 떨군 채 있었다.

  “앞으론 그렇게 고개 숙이고 울지 마요. 겨우 미안하다는 말밖에 못하면서!”

  손을 뿌리친 건 그였다. 내 손을 풀어 놓고 그는 기타를 짊어지고 가버렸다. 난 그의 뒷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난 그를 끝내 보지 못하고 그 뒷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잡았던 그의 손목의 체온만이 내게 남아 있었다. 그는 아니, 나는 그렇게 그를 놓쳤다.

 

 32. 내가 우리에게 하지 못한 한 가지

 

  맑은 하늘과 공기에서 겨울이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로수에 드문드문 걸려 있던 무채색 잎들도 거의 사라졌다. 하품을 하니 하얗게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이렇게 추운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밤을 샌 건 아니지만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 지난밤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느라 애먹었다. 그 덕에 피곤은 오히려 더했다.

  ‘버닝 러브’가 5년 만에 여는 첫 단독 콘서트, 최초 결성 이후론 15년 만이다. 집을 나와 공연장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눈꺼풀이 무거웠는데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니 떨림과 설렘에 발길을 떼기도 힘들었다. 현실감이 느껴졌다가 또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전 9시부터 리허설을 시작했다. 첫 공연이라서인지 말자 언니와 이건이도 평소와는 달라 보였다. 긴장했던 것일까, 우린 대화도 없었고 표정은 모두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장 같은 분위기로도 우린 소통이 가능했다.

  오래도록 준비해왔던 정규 2집을 이번 공연에서 소개한 후 발매를 시작한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그동안 단단하기만 했던 내 의지와 자신감은 힘없이 흐물거렸다. 왜 그랬을까. 꿈에서나 가능했던 믿을 수 없는 이 순간에 내가 약해질 거라고는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지금 여기 서 있는 게 나인가....... 저들은, 내가 알던 말자 언니와 이건이가 맞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버닝 러브‘는 어떤 팀일까.......’

 

  과연 온정신은 아니었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그 느낌은 그대로였다. 조금 전까지의 상황이 정말 꿈같았다. 작은 공연들은 수없이 해왔지만, 큰 무대에서는 관객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모두 우리를 위해 있어준 사람들이지만 내 눈앞엔 아무도 없었다. 벅찬 감정과 함께 허무함이 밀려왔다.

  “정신 차려! 네가 무얼 기대했건, 그 이상도 그 아하도 아니야. 우리가 뭘 기대했건 딱 그만큼 인거야. 어차피 한 곳만 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은 아니잖아. 우리. 목적도 목표도 없었다고. 그냥 순간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으면 터트려! 아끼지 말고.......”

  말자 언니는 정신을 놓고 있는 나와 이건이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언니의 목소리도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그럼, 언니는 오늘 심장 터트렸어요? 정신이 차려 지던가요?”

  난 말자 언니를 보며 말했다.

  “응,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내 심장에선 우주 대폭발이 일어났지, 멍청이들.......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거야. 제 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면 되겠어? 그래서 다시 찾아올 평온을 만끽할 수 있겠냐고!”

  언니는 조금 흥분하며 말했다. 난 이건이를 보았다. 얼어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수천 명의 관객 앞에 서 있던 우리는 ‘버닝 러브’였고, 지금 이 낡은 연습실에 남아있는 세 사람도 ‘버닝 러브’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웃었지만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똑똑똑’

  그 때, 우리 셋의 웃음소리를 뚫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웃음을 멈추고 일제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 역시, 여기 있었네.”

  은복이가 서 있었다. 난 순간 낯선 사람으로 착각했다. 약 5초간의 정적이 흐른 다음 은복이가 말을 했다. 불량스러운 회색 뻗침 머리도, 푸석하고 깨 많던 얼굴도, 트레이드마크였던 후드 티셔츠와 계절을 넘나들던 반바지에 양말, 운동화도 아니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청바지에 단화, 포근하게 상체를 감싼 아이보리색 니트에 목에 두른 양모 목도리, 갖춰지진 않았지만 뽀얗게 정리한 메이크업과 검은 중장발의 머리카락. 망설이는 듯한 말투마저 낯설지만 분명 은복이가 맞았다.

  “미친년.......”

  말자언니가 그녀에게 말했다. 은복이가 문을 닫고 들어오면서 씩 웃었다. 난 그런 은복이에게 다가가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야........ 뭐야.......”

  은복이는 내 머리를 감쌌다.

  “미친년도 전염이 되나보다, 참.......”

  말자 언니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해.......”

  은복이가 나를 떼어내며 말했다. 난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보고 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금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이런, 미친년!”

  말자언니는 나를 향해 말했다.

  “못 알아봤어, 넌 줄....... 혹시, 오늘 공연 왔던 거야?”

  이건이가 은복이에게 말했다.

  “멋있더라. 너무 멋있어서 이렇게 보는 게 다 떨린다, 야.......”

  은복이는 쑥스럽게 웃으며 이건이의 말에 대꾸했다.

  “야! 미리 연락을 하지! 보러 온다고. 그랬으면....... 더 잘했을 텐데.”

  난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지난번엔 연락 못해서 미안해.”

  “오오....... 네가 미안하다는 말도 할 줄 아네, 이제? 하하하.”

  은복이가 내게 한 말에 말자 언니는 놀라며 말했다.

  “멋있더라, 정말 멋있었어. 너무 잘했어. 대박이었어.......”

  내친 김에 은복이는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양손의 엄지를 치켜 올리며 말하는 은복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보였다. 잠시 흐른 정적이 어색했다. 말자 언니는 구석으로 가더니 음악을 틀었다. 10초 후쯤, ‘연인’이 플레이되기 시작했다. 말자 언니와 나, 은복이가 만나 처음 만들어졌던 곡이다.

  “하하하, 언니 완전 주책이야.”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복이는 쑥스러움에 손뼉을 치며 웃어재꼈다. 그녀가 어색해 하자 이건이는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렸다. 곧 나와 은복이도 합류했다. 말자 언니는 오디오가 있는 그 구석에 기대어 우리를 지켜보았다. ‘연인’은 지금 들어도 풋풋하다 못해 촌스러움이 느껴지는 곡이다. 가사도 리듬도 귀엽고 따뜻했던 ‘버닝 러브’의 몇 안 되는 분위기의 곡이다.

 

  큰 공연 후, ‘버닝 러브’에는 잠깐의 평온이 찾아왔다. 앨범이 발매되었고 우리는 그 반응을 확인하는 똥줄 타는 일을 하는 대신 잠시 각자 사적인 시간을 갖기로 했다. 말자 언니는 욕심은 금물이라 강조했다. 아무리 그래도 앨범을 내놓고 방관할 순 없는 일이었다. 난 나름 노력했지만 시간의 간격을 두고 앨범 판매량과 음원 수요 등을 확인했다.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었어도 실망스럽지 않은 정도의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좀 더 솔직 말하자면, 공연 전이었으면 만족스러웠을 테지만 그 이후의 반응이라고 하기엔 살짝 실망스러움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뭐, 이 바닥의 생리를 몰랐던 게 아니었으니 크게 연연하진 않기로 했다. 말자 언니와 이건이도 그랬을 거라 예상했다.

 

 33. 곽사장의 버닝 러브

 

  ‘버닝 러브’ 공연의 열기는 그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그 열기와 감동을 고스란히 맘에 담고 잠시 이곳을 떠나 있는 멤버들과는 다르게 곽 사장은 식은 냄비 속 외롭게 남은 조개껍질 신세였다. 그에게 고요와 고독은 친구가 되기도 했으나 부쩍 날씨가 추워진 몇 일간은 그렇지 못했다.

  꼭 첫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은 회색 하늘이었다. 썰렁하리라 예상했던 탓이었을까, 가게로 들어서니 차가움보다는 뭔가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곽 사장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차디찬 두 손을 비비며 혼잣말을 했다. 가게 안의 난방을 먼저 켜 놓은 후 그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바 안으로 들어갔다. 음악을 켰다. 이장희의 ‘그 애와 나랑은’. 손님을 기다리지 않는 선곡이었다. 군데군데 가사를 따라 부르며 그는, 바 안의 구석구석을 닦고 기물들과 술을 정리했다. ‘한 잔의 추억’, ‘잊혀진 사람’, ‘편지’....... 그가 선곡해 놓은 이장희의 곡들이 차례로 흘러나왔다.

 

  “음악 좋네요.”

  곽 사장이 오래되어 잘 쓰지 않는 잔들을 정리하며 음악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그는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목소리가 겹쳐졌다.

  “........ 아, 어서 오세요.”

  그는 급히 몸을 돌렸다. 훤칠하고 말끔한 차림의 손님은 곽 사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제가 오랜만에 왔죠? 한동안 좀 바빴어요....... 사장님은 여전하시네요.”

  “아, 네.......”

  그의 인사에 곽 사장은 멋쩍게 웃었다.

  “어........ 날씨도 꾸물거리는데....... 맥주 한 잔 하고 가려고요, 괜찮죠?”

  그는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요. 얼마든지요.”

  곽 사장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차가운 맥주를 꺼내어 그의 앞에 놓았다.

  “괜찮으시면, 사장님도 같이 하시죠? 오늘은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은데.”

  그는 금세 분위기를 눈치 챘다. 곽 사장은 잠시 고민하는 척 했지만 곧 맥주 하나를 더 꺼내어 들고 말했다.

  “지난번 선물로 주신 양주, 좋아하는 친구랑 잘 마셨어요. 이건 답례로 제가 대접할게요.”

  “아....... 선물로 드린 걸 잘 드셨다니 제가 기분 좋네요. 네, 그럼 잘 마실게요!”

  두 사람은 건배를 나누고 맥주를 마셨다.

  “좋아하는 음악인가요? 이장희....... 맞죠?”

  가게로 들어선 그를 확인하자마자 곽 사장은 볼륨을 줄였지만 여전히 이장희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 네. 평소엔 제 취향대로만 선곡할 순 없거든요. 보통 이곳에 오는 손님들의 연령대와 취향을 고려하죠. 말씀하신 대로 오늘은 좋아하는 곡 맘껏 들어도 되는 날 같아서요.”

  곽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좋아해요. 오래전 곡들이라 잘은 모르지만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나 ‘한 잔의 추억’같은 유명한 곡들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으니까요.”

  “어, 정말요?”

  그의 반응이 곽 사장은 반가웠다.

  “듣고 싶은 음악 있으면 말씀하세요. 오늘은 그래도 되는 날이니까.”

  두 사람은 그동안 많은 대화를 나눠 보지는 못했지만 제법 말이 잘 통했다. 서로의 취향을 이야기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해가며 그들은 처음으로 술자리를 함께 했다.

  “아, 잠깐 화장실 좀........”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곽 사장은 생각했다. 뜻하지 않게 느껴보는 새로운 기분이었다. 다채롭지 못한 자신의 삶에 나름 만족하며 살고 있는 그였지만 잔잔한 일상에 불쑥 찾아 온 반가운 손님처럼 그는 그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눈 와요, 밖에! 첫 눈이에요!”

  자리를 비웠던 그가 들어오며 말했다.

  “그래요? 아직 11월인데........ 때 이른 첫 눈이네요.”

  그는 몸을 웅크리면서도 아이처럼 기뻐했고, 곽 사장은 11월의 첫 눈이 신기했지만 담담히 반응했다.

  “괜찮으시겠어요? 더 드셔도.......”

  곽 사장이 그에게 물었다. 그는 흥분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곽 사장은 맥주 두 병을 더 가져왔다. 두 사람은 다시 건배를 나누었다.

  “사장님.......”

  그가 넌지시 불렀다.

  “..........?”

  곽 사장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며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 눈짓으로 대꾸했다.

  “제가, 여기 몇 번쯤 왔나요?

  “음..........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까진 자주 오셨었죠.”

  곽 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오늘이 열 번째예요.”

  “아, 그런가요? 와, 정말 기념할 만한 날이네요. 첫 눈까지 와 주고.......”

  곽 사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요. 앞으로 자주 와야겠다고....... 여기가 아주 맘에 들었었거든요. 음악도 분위기도 다 좋았지만 굳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고요.......”

  그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제가 쇼핑몰 유통 일을 하고 있어서 밤 시간에 주로 일해요. 이런 곳에서 여유롭게 술을 마시는 일도,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제겐 쉽지 않은 일이에요........ 그럼에도 여기는 꼭 다시 오고 싶었죠. 이곳에 오는 날짜와 횟수를 기억해 가면서....... 제가 양주를 선물해 드렸던 그 날도 기억해요. 6월 17일이었죠.”

  그가 말했다. 얼굴에 약간의 홍기를 띠었고 말투는 차분했다. 그리고 온화한 표정으로 말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곽 사장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랬군요.......”

  곽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도 얼마 전에 계획해 놓았던 날이긴 하지만....... 뭘 기대하고 온 건 아니에요. 고민하실 필욘 없어요. 무언가를 원하는 간절함보단 저도 배려가 우선이라는 건 잘 아니까요.”

  그의 말투는 믿음직스러웠다.

  “그렇군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어쩌면 다행이네요....... 얼마 전 누군가에게 내가 겁쟁이라고 말한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 손님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금 알겠어요. 겁쟁이가 아니라 비겁쟁이였다는 걸....... 무언가를 원하는 간절함 때문에 겁쟁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하려 했었나 봐요, 제가. 그건 비겁한 거죠. 배려가 우선이라는 말씀이 절 깨닫게 하네요....... 전....... 겁을 내서가 아니라, 비겁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미 저에겐 배려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그것들이 우선인 것 같아요.”

  곽 사장은 말했다.

  “후후........ 그래도 기분은 괜찮네요. 사장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시라니.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 중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었거든요. 다들 자기 욕심이 우선이었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쩌면 저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계실 텐데, 제가 모르면 안 되죠. 그럼, 전 사장님을 우선 배려해 드린 거고....... 그래도, 여긴 계속 올 겁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버닝 러브, 딱 제 마음이 그렇거든요. 다 태울 때까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훗....... 죄송하다거나 감사하다고 제가 말씀 드려도 될까요? 선물도, 마음도 다 그렇네요, 받기만 하고.......”

  “음....... 전 감사만 받고 싶은데요. 왜냐면....... 제가 감사하니까, 사장님한테....... 어차피 난 또 여기 올 거고.”

  “얼마든지요. 어쨌든 ‘버닝 러브’는....... 좋은 거죠.”

  그의 말에 곽 사장은 웃으며 맥주를 치켜들었다. 두 사람은 건배를 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0 여행 2017 / 11 / 17 253 0 11481   
9 재회 2017 / 11 / 17 246 0 19119   
8 흐름 2017 / 11 / 17 238 0 18516   
7 기억 2017 / 11 / 17 228 0 20112   
6 사랑 2017 / 11 / 17 247 0 22436   
5 혼란 2017 / 11 / 17 252 0 21160   
4 잘못 2017 / 11 / 17 238 0 27453   
3 변화 2017 / 11 / 17 242 0 16343   
2 일상 2017 / 11 / 17 241 0 12675   
1 처음 2017 / 11 / 17 438 0 12346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고잉홈
에이슈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