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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랑
작성일 : 17-11-17 12:55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2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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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낯선 그리움

 

  광주에 내려온 지도 내일이면 일주일이 된다. 얼마 전까지 야근을 하며 작업했던 도안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의견을 수렴한 후 우선 서울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넉넉잡아 사나흘이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클라이언트가 생각보다 깐깐한 사람이었다. 현장을 몇 번이나 더 확인하고 다시 회의하고를 엿새째 반복하고 있었다. 뭐, 깐깐한 게 나쁠 건 없었다. 차라리 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히 짚어가야만 겨우 신뢰를 쌓을 수가 있는 직업이긴 했다. 그것이 어떤 요소보다도 어떤 직업군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일을 거듭할수록 뼈저리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일했다. 둘째 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난 후 업체에서 마련해 준 회식을 빼고는 밥을 제대로 먹었던 기억이 없다. 생각해 보니 잠도 다섯 시간 이상 자 보질 못한 것 같다. 지난 닷새를 문득 떠올리니 급작스럽게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까지 수정한 도안 확인을 현지 동료에게 맡겼다.

  “일요일에 귀사하려고....... 본부장님이 어제 전화했더라. 상황 좀 제대로 보고 받자고. 우선 내일 올라갔다가 월요일에 회의 해보고 다시 내려올게.”

  “많이 피곤한가보네?”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가 얘기하자 동료가 물었다.

  “음....... 조금?”

  난 대답했다.

  “도 팀장도 나이 드나? 작년까지만 해도 펄펄 날아다니더니 올해는 다르네. 흠....... 하긴, 우리 나이도 그럴 때가 되긴 됐지.......”

  도안을 쥔 오른 손의 새끼손가락 바깥쪽엔 잔뜩 볼펜 똥이 묻고 머리는 떡이 지고 턱과 코밑에는 거뭇거뭇 수염이 자라나오느라 가관이 아닌 동료가 내게 말했다. 그의 모습을 한 번 훑은 후 나는 나의 턱과 코 밑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거칠거칠했다. 얼굴의 기름기도 느껴졌다. 시계를 보니 여섯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먼저 간다....... 숙소도 제 때 못 들어갔었네. 내일 아침에 나와서 보고하고, 난 바로 서울로 갈게.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고....... 수고!”

  꾀죄죄한 동료에게 난 먼저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숙소까지는 2~3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이지만 난 택시를 잡기로 했다. 주말이라서인지 택시도 안 보였다. 5분정도 기다렸을까, 서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난 걷기 시작했다.

  하지 즈음이어서 해가 중천이었다. 햇빛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지만 낮에 걸어 보는 게 얼마만인가 싶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이 손에 만져지자마자 진동 벨이 울려 깜짝 놀랐다. 문자 메시지였다.

  [힘들죠? 형. 저도 락 페스티벌 준비하느라 오늘도 연습하고 귀가하는 중이에요....... 아직 해가 중천이네요. 해 보면서 걷고 있는데, 피곤이 좀 풀리는 것 같아요. 형도 한 번 해 보세요! ㅎㅎ.......]

  그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해를 응시하며 걷기 시작했다. 정말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일요일 아침, 9시 45분.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안. 어제는 나름 잠을 좀 잤지만 여전히 잠이 간절했다. 서울까지는 약 4시간. 버스를 타자마자 자야겠다고 결심했는데 막상 좌석에 안착하고 버스가 출발하자 정신이 말똥해 졌다. 뜻밖의 상황에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얼 할까 고민하다 난 영태 녀석이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형님, 지금 광주에서 출발. 회사에 잠깐 보고만 하면 되니까 점심이나 먹자.]

  난 영태에게 메지지를 보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외로운 일요일을 보내고 있을 게 뻔했다. 5분쯤 뒤 답장이 왔다.

  [회사야. 언제 또 내려 가냐? 낼, 되면 그 때 보자.]

  일요일에 회사에 있는 걸 보니 나아진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메시지 창을 닫다가 어제 그가 보냈던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다시 어제 저녁의 상황이 떠오르면서 미소가 삐져나왔다.

  [오늘도 연습? 지금 서울행 버스 안이야. 1시 반쯤 도착 예정인데....... 같이 밥 먹어줄래?]

  [넵! 오시면 전화주세요!]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곧 답이 왔다. 그의 답을 확인하고 난 의자에 머리를 기댔다.

 

  눈을 떴다. 버스가 터미널에 진입하고 있었다. 순간처럼 느껴지는 꿀잠이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15분.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 택시를 잡아 회사로 향했고 빨랫감만으로 채워진 작은 캐리어를 회사에 우선 두기로 했다.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난 그에게 전화했다.

  “형, 어디에요?”

  전화를 받자마자 그가 물었다.

  “지금 회사에 도착했어.”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20분쯤 걸려요.”

  “그럴래?”

  난 본부장에게 간단히 상황보고를 했다. 내일 출근한 후 화요일에 다시 현장에 내려가기로 계획한 후 2시를 넘겨 회사를 나왔다.

  회사 앞 편의점. 왠지 꽤나 오랜만에 이곳에 온 느낌이 들었다. 공기는 그리 맑지 않았고 이제 제법 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 같은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시원한 음료로 목을 축이며 그를 기다리기 위해 편의점 앞까지 왔을 때 “형!”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내가 광주에 내려가기 전까지 만해도 늘 늘어뜨리고 다녔던 머리를 뒤로 묶고는 검은 캡 모자에 검은 반소매 티셔츠, 검은색 반바지, 늘 신고 다녔던 스니커즈와 마른 체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뒤로 둘러 맨 기타 케이스까지. 풍기는 이미지는 그대로지만 나의 공백을 입증해 주는 듯한 느낌이 뭔가 달라 보이는 그였다.

  “왜 이렇게 오랜만인 거 같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그가 말했다.

  “그러네, 나도. 겨우 일주일인데........”

  난 그를 반기며 답했다.

  “아....... 면도도 안 하셨네.......”

  그의 말에 조금 당황해서 난 나의 턱과 얼굴을 어루만졌다.

  “어....... 응. 지저분해 보이지?”

  “아뇨, 더 막 남자답고....... 음....... 터프해 보여요.”

  내 말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가 말하고는 웃어보였다.

  “여긴....... 자주 와도 잘 몰라요. 형은 잘 아실 테니까, 형이 정하세요. 뭐 먹을지.”

  내 얼굴에서 어색함을 느꼈는지 그가 먼저 내게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난 회사 건물 뒤쪽에 있는 점심식사 단골이었던 두루치기집이 생각났다.

  “음....... 그럼, 따라와.”

  건축회사와 디자인 관련회사가 많은 이 동네의 특성상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두루치기집은 영업 중이었고 손님들도 웬만큼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허름하지만 그래도 역사가 꽤 있는 집이라 맛은 기똥차! 사장님! 저희 두루치기 2인분 주세요!”

  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소주도 한 잔 할까요?”

  내가 주문을 하자 그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낮 시간이라 밥만 먹을 작정이었지만 그의 제안이 나쁘지 않게 들렸다.

  “후....... 사장님! 저희 소주도요!”

  난 다시 주문했다.

  밑반찬에 소주가 먼저 테이블에 깔리자 그가 얼른 소주병을 들고 두 잔을 채웠다. 그는 내 앞에 있는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치고는 동조할 새도 없이 첫 잔을 들이켰다.

  “크아....... 음....... 쓰네요, 역시.”

  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같이 마셔! 빈속일 텐데 좀 천천히.......”

  난 놀라 얼른 잔을 손에 들고 그에게 말했다.

  “배고파서요. 형이 밥 먹자고 해서 안 먹고 기다렸거든요.”

  그가 안주를 하나 집어 먹는 것을 보고 난 비어있는 그의 잔을 다시 채워주고 다시 잔을 치켜들었다. 이번엔 같이 잔을 부딪치고 그는 두 번째 잔을 난 첫 잔을 동시에 들이켰다. 전날까지 쌓였던 피로에 아침부터 굶었던 허기에, 소주가 목을 타고 위까지 도달하는 흐름이 아주 싸하게 느껴지면서 묘한 쾌감이 들었다.

  “크....... 써요, 써. 마셔도, 마셔도 쓴데....... 흠, 맛있어요. 계속 마시게 돼요. 후후.......”

  그는 또 인상을 쓰고 웃으며 말했다.

  “하하....... 못 마신다더니, 술꾼처럼 얘기하네?”

  난 속으로 그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일 속에서만 늘 접했던 두루치기집에서 후덥지근한 초여름 대낮에, 아주 사적(?)인 새로운 내 친구와 빈속에 들이키는 소주의 맛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맛보는 새로운 맛이었다. 신비로웠다.

 

  허기에 그와 나는 두루치기가 나오자마자 단숨에 해치웠다. 소주도 이미 두 병이나 놓여져 있었다. 밥을 먹는 동안은 몰랐었는데 첫 잔에 느껴졌던 취기가 그대로였다. 시계를 보니 겨우 오후 3시 반이었고, 이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은 좀 붉어진 듯 보였으나 땀도 나지 않은 깨끗한 모습이었다. 내 얼굴의 상태도 추측해 보았다. 거뭇거뭇한 수염에 취기로 인해 붉어진 피부 빛, 더운 데서 매운 음식을 먹었으니 땀까지 뒤범벅되어 엉망이 되어 있으리라 짐작했다.

  “형, 오늘 좀 새롭네요. 되게 내추럴해요. 후후.......”

  그가 내 생각을 읽은 듯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 그래, 좀........”

  그가 내 얼굴에 손을 가져와 내 왼쪽 이마 위에서 흐르던 땀을 닦았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내 땀을 닦은 손을 다시 술잔으로 가져가 얼른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여전히 낮이었고 늦은 식사중인 직장인 손님들이 몇 있었다. 그 손님들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난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날 보고 있다가 내 눈 길이 닿자 얼른 시선을 떨구었다.

  “형........... 보고 싶었어요. 하아....... 겨우 일주일인데.......”

  여전히 고개를 떨군 채 그는 뜻밖의 말을 내게 하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그의 쓴 웃음도 살짝 보였다.

  “........ 응?”

  “보고 싶었다고요, 제가. 형이.......”

  그가 말하는 순간, 이번엔 지나가던 사장님과 내 눈이 마주쳤다.

  “아....... 그래? 자식....... 뭘 그렇게까지....... 난 전혀 아닌데?”

  난 뭔가 당황스러워서 그의 말을 농담처럼 받아쳤다.

  “어..........”

  그리고 어떻게 있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아니에요?”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번엔 내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를 갑자기 쳐다볼 수가 없었다. 난 그의 시선뿐만이 아니라 이 가게 안의 몇 안 되는 손님들의 시선까지 의식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시선만 피하고 있는 내게 그가 다시 물었다.

  “형은 아니라고요? 아....... 정말....... 알겠어요. 근데, 실은 나는 그런데....... 저도 형은 혹시나....... 아니면 어쩌나....... 그냥....... 말려고 했는데.......”

  그가 몹시 말을 더듬거렸다. 그는 힘들게 이야기를 끝내려다 내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말했다.

  “미안해요, 형....... 음....... 이제, 갈까요? 아니, 저 먼저 갈게요.”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는 그 앞에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는 일어나서도 잠시 머뭇거리더니, “점심 잘 먹었어요.......” 하고 걸어 나갔다. 그는 조금 비틀거렸다.

  그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갑자기 실어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질 않았다. 아무 몸짓도 할 수 없었고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득 채워져 있던 소주잔을 비웠다. 건너편에 놓여있는 그의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난 처음 경험해 보는 낮술에 제대로 취한 모양이었다. 그가 떠난 점심식사 자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더니 쨍하고 햇볕이 회색 건물들 틈새로 나를 쏘아댔다. 더운 듯 따스했고, 따스한 듯 더웠다. 다시 뒤를 돌아 식당 안 출입문 맞은편에 걸려 있던 커다란 벽시계를 확인했다. 3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난 휴대폰 시계를 또 한 번 확인했다.

  2012년 6월 13일 오후 3시 43분.

 

  알람 소리가 꿈속에서 배경음악이 되어 주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잠이 깨고 나서야 그것이 알림인지 알게 되었다. 8시였다. 9시 30분 회의에 참석했다가 내일 다시 광주로 내려갈 준비를 해야 했다.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나의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일을 마치고 나서야 난 찌르는 듯한 두통을 알아챘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며 상체를 일으키자 이번에는 침대 옆 테이블에 맥주 캔 세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어제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게 시작했다.

  그와 그렇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내리 쬐는 해를 바라보며 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빈 맥주 캔 옆에 세븐 일레븐 비닐봉지가 널려 있는 걸 보니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온 것 같았지만 자세한 정황이 떠오르진 않았다. 기억을 헤쳐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이 두통의 원인은 맥주 세 캔임엔 틀림없었다. 어제 점심땐, 그렇게 무리한 게 아닌데도 취한 걸 보니 내가 피곤하긴 했었나보다....... 생각했다.

  깨지는 듯한 두통에 양손으로 관자노리를 세게 눌렀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생각했다.

  어제 그와 점심을 함께 했었던 그 두루치기집, 그곳에 있던 손님들, 사장님, 소주를 시원하게 들이키던 그의 모습, 그의 표정과 이야기들, 내가 했던 행동과 말들. 뒤돌아 가던 그의 뒷모습과 편의점 앞에서 만났을 때 ‘형!’ 하고 내게 다가오던 그의 모습들이 막 뒤섞여 떠오르더니, ‘보고 싶었어요.......’ 하고 내게 말하던, 그의 모자 아래 보이던 얼굴에 내 기억의 레이더는 멈춰졌다. 잠시 시간이동을 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얼굴에 한기가 느껴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온 몸의 기운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난 다시 누워 심호흡을 하려 애썼다.

  수차례 심호흡을 하고나니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잠에서 깬지 5분이 지났음을 확인하고 마침내 침대에서 나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러고 나서 다시 어제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이번엔 의도적으로 자세히 기억하려고 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이 아파왔다. 확신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유를 몰라, 난 애써 눈물을 삼켰으나 밀려오는 슬픔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침 뉴스에서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장마에 돌입한다고 했다. 하지만 구름이 낀 대체로 맑은 날씨였다. 그래도 출장준비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더니 온 몸이 끈적끈적해지는 것이 본격적인 여름임엔 틀림없다.

  일요일 오후, 그렇게 가버린 후 그는 연락이 없었다. 조금은 궁금했지만 나도 연락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전되진 않았다. 그 날의, 그의 말과 표정은 불쑥불쑥 내 머릿속을 맴돌다 가곤 했다. 어제 퇴근하면서 가지고 왔던 빨랫감을 빨아서 널어놓고는 새 옷가지들을 챙겨 다시 광주로 가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오직 일을 위해 문득 떠오르는 잡념들을 애써 지우며 광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20. 너에게, 나에게

 

  [형님, 광주에서 출발. 회사에 잠깐 보고만 하고 나올게. 점심이나 먹자.]

  영태는 강호의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른 손에 들려져서 타고 있던 담배를 입에 가져와 크게 한 모금 빨았다. 재가 떨어지면서 타들어간 담배는 곧 짧다란 꽁초가 되었고 영태는 엄지와 검지로 담배를 쥐고 있던 손가락을 바꾼 후 마지막 한 모금을 더 빨았다. 그리고 옥상 한 켠에 위치한 화단에 버리고는 발로 흙을 덮어 밟아 버렸다.

  [회사야. 언제 내려가는데? 내일 괜찮으면 그 때 보자.]

  영태는 뜨거워진 6월의 햇살로부터 무방비로 노출된 회사 옥상에서, 춘추용 작업복 안으로 땀을 흘려 내며 불지도 않는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강호의 문자 메시지에 답을 보내고는 옥상을 내려왔다.

  부서가 달라서 거의 마주칠 일은 없지만 영태는 될 수 있으면 자신이 주로 일하는 현장 옥상 이외의 장소는 피했다. 회사 식당에도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식사하러 가기 때문에 식당 아주머니들의 눈총을 있는 대로 받고 있었다.

 

  [회사 앞 카페야. 끝나고 이쪽으로 와.]

  다음 날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을 때쯤 강호로부터 다시 문자가 왔다. 그와의 약속을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망설였던 건지 모르겠다. 퇴근시간이 삼십 여분쯤 남았지만 영태는 강호의 연락을 받자마자 작업복을 벗어 던지고 서둘러 회사를 나왔다.

  회사 앞 카페에 도착했을 때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던 강호는 영태를 먼저 반겼다.

  “자식, 넌 왜 몰골이 그 모양이야? 수염은 뭐고.......”

  강호는 아이를 나무라듯 영태에게 말했다.

  “네 몰골은 어떻고....... 새꺄.”

  자리에 앉으며 영태는 말했다.

  “어? 사우나 다녀오는 길인데? 방금 면도도 하고 왔구만.......”

  강호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사우나를 다녀오면 뭐하냐? 물에 빠진 거 건져놓은 것처럼 팅팅 부어 갖고는....... 새끼! 어제 술 마셨냐?”

  영태는 전날의 피로가 채 씻겨 내려가지 않은 강호의 상태를 알아보고 말했다.

  “후우......... 좀.......”

  멋쩍은 듯 표정을 지으며 강호가 인정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소주나 한 잔 하려고 했는데, 새끼....... 나 먹는 거 구경이나 해!”

  하며 영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잔 정도는 할 수 있어.”

  강호는 영태를 따라 나서며 말했다.

  “됐어, 인마. 넌 돈이나 내!”

 

  영태가 앞장서서 들어간 곳은 해장국 집이었다.

  “저녁을 무슨 해장국을 먹냐?”

  강호는 영태에게 물었지만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며 주문을 했다.

  “사장님! 저희 뼈 큰 거 두 개하고 소주 한 병 주세요. 잔은 하나만 주시고요....... 아, 우거지랑 콩나물 좀 듬뿍 넣어 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영태의 모습에 강호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뭘 쪼개, 인마?”

  영태가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너나 나나....... 오늘 첫 끼 먹는 거지? 웃기잖아........”

  강호의 말에 영태는 살짝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사장님이 가져다 준 밑반찬과 소주를 받아들며, “감사합니다. 흠!”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강호는 얼른 그가 받아든 소주를 낚아채어 그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부었다. 영태는 기다렸다는 듯 소주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었다.

  “빈속이야, 인마!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그러냐? 천천히 마셔!”

  강호는 어린 아이 나무라듯 영태에게 쏘아 붙였다.

  “흐흐흐....... 근데 넌 왜 그 꼴이냐? 사우나가 아니라 사바나 갔다 온 거 같아.”

  술잔을 내려놓고, 강호의 잔소리에 반찬으로 나온 깍두기 한 조각을 집어 먹고는 영태가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대신에 강호도 웃음으로 받아쳤다.

  오랜만에 만나 해장국 집에서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도 아직 하지 않은 채 껄껄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세요? 두 분 다. 오늘 하루 종일 일하면서 웃는 손님들 처음 봐요.”

  우거지가 듬뿍 올라가 있는 해장국 두 사발을 가져다주시며 사장님께서 끼어드셨다.

  “어, 정말요?”

  강호가 사장님에게 놀라며 물었다.

  “아, 오늘 월요일이잖어. 월요일에는 웃는 사람 보기 힘들어요. 하긴, 월요일에 해장국 먹는 사람도 드물긴 허지....... 허허.”

  영태와 강호는 해장국집 사장님 덕분에 한 번 더 웃을 수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푸짐한 해장국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무슨 일이야?”

  마지막 해장국 국물을 들이킨 영태가 비어 있던 자신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강호에게 물었다.

  “응? 뭐가?”

  뜬금 없었던 영태의 질문에 강호는 되물었다.

  “나, 너무 띄엄띄엄 보지 마라. 내가 눈칫밥 몇 년인데....... 네 낯짝에 다 써 있어, 인마.”

  영태가 말했다.

  “난 또....... 술 먹고 좀 부은 거 갖고 도사인 척 하기는....... 새끼!”

  강호가 말했다.

  “네가 일이 바쁜 와중에 나 없이 그렇게 술을 퍼 마실 놈이야? 이 자식, 너무하네....... 지랑 나랑 몇 년인데 아닌 척은........ 티 팍팍 나는구만!”

  영태의 말에 강호는 뜨끔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다시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 질문은 내가 너한테 해야 하는 것 같은데....... 넌 인마, 수염도 안 깎고 산적처럼 하고 있는 이유나 말해봐!”

  강호의 질문에 영태는 “산적?” 하며 인상을 썼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소주를 반잔만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혜정씨....... 아니.......”

  강호는 순간 영태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고는 말을 이어갔다.

  “수연씨는 아직 못 본거야?”

  강호의 물음에 영태는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어느 정도의 상황이 파악될 것 같았지만 강호는 그가 어떤 심정일지는 읽어낼 수 없었다.

  “내가 뭘 할 수 있겠냐........ 병신같이 눈치만 볼 줄 알았지. 이 병신이 욕심까지 냈더니 그게 참 여러 사람 힘들게 한다....... 그냥 눈치나 보고 사는 게 내 주제에 맞는 건데....... 아니, 눈치라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내 욕심이었던 것 같다. 빌어먹을 피해의식....... 뭐, 이런 생각이 든다. 나만 아니었어도 다들 저렇게 힘들게 애쓸 일은 없었겠지, 뭐.......”

  영태의 자학모드. 강호는 생각했다. 고교시절 이후로는 본 적 없었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친구의 모습이었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얘기했잖아. 이런 상황쯤 예상 못한 것도 아닐 테고, 네가 벌인 상황 해결 못할 너도 아니잖아. 너도 잘 알면서,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말해 버리는 거 내가 되게 싫어했던 거 잊었냐?”

  강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학창시절, 영태가 남다른 환경에 속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들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늘 신경 쓰던 친구 녀석이 가끔씩 자학모드로 변할 때면 강호는 늘 그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험한 말이 서로에게 오가고, 전투적 상황으로까지 번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막다른 상황이 도래하면 늘 지는 건, 강호였다. 못나디 못난 영태는 자신을 향했던 공격 방향을 강호에게로 틀면 강호는 이상하게도 곧 흥분이 가라앉았고, 이렇게 그가 먼저 숙이게 되면 영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감정이 사그라들곤 했다.

 

  그는 강호의 격앙된 말투에 고개를 떨구었다. 큰 덩치가 고개를 숙이자 강호는 오랜만에 전투력이 스물 스물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야! 이 미친놈아! 또 인생 다 산거야? 네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모르겠냐? 쪽팔리지도 않아? 네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똑바로 봐. 아는 길만 가라는 법 없어. 생판 모르는 길에 와 있다고 그만 갈 거야? 어떤 길을 어떻게 가게 될지 알고 가는 사람 있냐고! 너도 말했었잖아. 그래서 ‘지금’이 제일 중요한 거라고! 근데, 그런 네가 지금 이렇게....... 휴......... 뭐? 피해의식? 그래, 피해의식에 쩔었다고 쳐! 계속 이렇게 쩔어 있을 거야?”

  강호는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걸 깨달았다. 주위를 문득 둘러보니, 몇몇 손님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이 새끼야, 나 땜에 지금 수연이랑 걔 엄마랑....... 또 장인어른, 혜정이....... 어떤 상황인지 알기나 해? 거기다 우리 엄마랑 동생....... 내 가족도 얼마나.......... 새끼....... 넌, 넌 내가 아니니까, 말은 쉽지!”

  영태도 흥분했다. 그는 가족 이야기에 울컥했지만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울분을 삼키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함께 웃어 주시던 사장님과 강호의 눈이 마주쳤다. 사장님은 아무 말 안 하시고 카운터에 계시다가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강호는 심호흡을 하고 애써 목소리를 낮추어 진짜 산적같이 변해버린 친구 녀석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인마, 네가 그러고 있으면 수연씨랑 혜정씨....... 네 가족들이 덜 힘드냐? 네가 그렇게 ‘나 죽일 놈이다!’ 라는 걸 보여주면 좀 나은 거야? 진짜 병신 같다, 너. 그래 인마! 나도 그렇게 봐 줄게. 네가 그러고 싶으면 꼴리는 대로 그러고 있던가! 그래, 인마. 너 나쁜 놈 맞다, 죽일 놈 맞어!”

  강호는 목소리를 낮추려 했지만 결국 다시 높아졌다. 강호의 호통에 영태는 아무 말 못 하고 주위만 살피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강호가 아무리 화를 내도, 그의 기를 꺾는 건 늘 영태였다. 고개를 숙이는 영태의 모습에 이번엔 주체할 수 없는 화가 치밀어 강호는 다시 말했다.

  “적어도....... 오늘 너 이런 모습, 나한테 보여준 걸로 끝내라. 그리고 나한테도 마지막인 걸로! 술이나 더 쳐 마시고 가라!”

  강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사장님에게 “소주 한 병만 더 주시고요....... 죄송합니다.” 하고 해장국 집을 나섰다.

  “걱정 말고 가세요!”

  사장님은 미안해하는 강호를 보고 웃어 보이셨다. 강호는 문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 영태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고개 숙인 산적의 모습이었다.

 

 21. 우린 왜 결혼했을까

 

  하룻저녁을 그럭저럭 때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영태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강호가 시켜놓은 소주를 힘들게 다 마신 그는 친구로부터 들었던 충고를 떠올리는 대신에 당장 어디서 시간을 때워야 할지를 고민했다. 술에 취해 고민하는 일조차 수월치 못했다. 그는 다시 회사로 향했다. 그가 일하는 생산관리부서 옆 동에 서너평 정도의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가끔 직원들이 드나들긴 하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얼른 몸을 눕히고 싶은 생각뿐이었던 그는 3인용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소파에 눕자마자 조금 전까지 쏟아지던 피로와 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달아났다. 대자로 뻗었던 몸을 오른쪽 측면으로 틀어 움츠렸다. 어느새 취기도 사라졌다.

  그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강호가 쏘아붙였던 말들을 떠올렸고, 고등학교 시절 가끔 그렇게 다투었던 두 사람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 다음에 떠오른 생각은 그의 아내에 대한 것이었다. 영태는 자신이 아내의 동선을 피해 다니며 회사 휴게실에서 쪽잠을 자고 있을 그 때, 혜정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예측할 수가 없었다. 혜정을 떠올리니 곧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그 다음엔 수연을 생각해 보았다. 그녀 역시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차오르는 그리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금씩 구체적인 상황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러고는 다시 강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소주잔을 쥔 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땀 냄새와 담배냄새가 베인 쾌쾌한 휴게실 소파에 쪼그리고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그가 결혼했을 때, 그리고 몇 년 후 수연을 만나기 시작했을 때를 떠올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때. 어떤 어려움과도 맞설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때의 기분을 다시 상기해 보려 했다. 에너지를 쏟아 보아도 가능한 일은 아니었지만 영태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더 많이 흐르는 땀에 눈물마저 흐르고 있었다. 설움을 감내하며 예상치 못했던 그 날 밤을, 그는 그렇게 때우고 있었다.

 

  언제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퇴근 후 집으로 온 것이.

  퇴근 시간이 채 되기 전에 집에 도착했다. 혜정은 아직 퇴근 전이었다. 영태는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견딜 수 없었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더니 더욱 그랬다. 먼저 옷을 벗어 세탁기를 돌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씻어도, 씻어도 계속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바디워시 한 통을 다 쓸 것만 같았다. 혹시 욕실에 남아 있을 자신의 체취를 없애려고 욕실 청소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또 땀이 났다. 샤워를 하고 또 하고를 몇 번 반복했다.

  그가 그렇게 씻고 나와 돌려놓았던 빨래를 마무리하기 위해 세탁실로 들어갔을 때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놀란 듯 보였다. 영태는 집어 들었던 빨래를 잠시 내려놓고 거실로 나와 아내를 맞이했다.

  “이제 와........?”

  “어....... 응........ 이 시간에 집엘 다 오고....... 어쩐 일이야?”

  혜정은 당황했다기 보다는 뭔가 불안해 보였다. 결혼 후 거의 본 적 없는 남편의 모습이었다. 이런 그녀의 심경을 읽은 것인지 흔들리는 혜정의 눈동자를 보자 영태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야.......”

  영태는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은........ 할 얘기가 있어. 회사에선 좀 그렇고........”

  영태가 말을 더듬자 혜정은 서둘러 말을 꺼냈다.

  “밥은? 저녁....... 먹었어?”

  “아, 아니........ 아직........”

  “금방 할게. 조금만 기다려. 빨래하고 있었던 거 아냐? 하고 있어. 얼른 준비할게. 나도 배고프다.”

  그녀의 말투와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곧 부엌으로 향했고 영태는 다시 세탁실로 향했다. 혜정은 식사 준비를 서둘렀고 영태는 간간히 그녀의 식사 준비 상황을 확인해 가며 빨래를 널었다.

  삼십 분쯤 흘렀을 때 혜정은 영태를 불렀다.

  “밥 먹어.”

  빨래 널기를 이미 한참 전에 끝냈지만 여전히 세탁실에 있었던 영태는 혜정의 목소리가 들리자 얼른 주방으로 갔다.

  “아침에 다 해 놨던 거라 차리기만 하면 됐는데, 그래도 밥하고 찌개는 따뜻해야 하잖아....... 얼른 먹자.”

  혜정은 영태를 바라보진 않았다. 하지만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으며 비교적 상냥하게 얘기했다. 아침에 해 놓았던 거라 하더라도 꽤 푸짐한 저녁상이었다.

  “어....... 언제 이렇게 했어? 회사일도 바쁠 텐데.......”

  영태는 자신의 앞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보며 말했다.

  “집에 있을 때 했지. 당신도 언제 들어올지 모르고........”

  내내 시선을 떨구고 괜히 음식들만 바라보고 있던 영태는 그제야 혜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영태의 표정과 급하게 끓여낸 된장찌개를 번갈아 보며 얘기하던 혜정은 영태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말했다.

  “먹어, 얼른.”

  그리고 그녀는 먼저 식사를 시작했다. 혜정이 먹는 걸 확인하고 영태는 비로소 식사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각자 이렇게 함께 하는 식사가 얼마만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둘은 별 말없이 저녁식사를 했다. 영태는 “좀....... 더 먹어도 돼?” 라는 말 외에는 하지 않았고 그녀도 “어!” 라는 대답 이외엔 말이 없었다. 영태는 밥 두 공기에 찌개와 반찬들을 거의 먹어치웠다. 서로의 속도를 맞춰가며 식사를 끝낸 후 그들은 식탁을 정리했다.

  “커피....... 마실까? 내가 할게!” 영태가 말했다.

  “그래.” 혜정은 대답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두 잔의 커피가 놓여 진 식탁에 다시 마주 앉았다.

  “향 좋다....... 잘 내렸네.”

  커피향을 맡으며 한 모금 마신 다음 그녀가 말했다.

  “혜정아....... 저기....... 우리........”

  “심영태, 우리....... 그만 살자!”

  혜정은 양 손으로 커피 잔을 움켜쥐고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혜, 혜정아........”

  말 할 타이밍을 뺏겨버린 영태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뭐....... 어차피 지금도 상황은 별다를 거 없잖아. 이렇게 한 집에서 불편하게 사느니 각자 편하게 살자. 적어도 지금보단 편할 거 아냐”

  혜정은 여전히 담담한 말투였다.

  “하아.........”

  영태는 다시 시선을 떨구었다.

  “부탁인데, 절대 미안하다거나 죄책감 같은 거 갖지 마. 그렇게 웅크리지도 마. 네가 정말 나쁜 놈인 건 맞는데....... 그 전에, 넌 널 너무 몰라. 나도 널 모르겠지만 어쩌면 네가 더 널 모르는 것 같아. 넌 그래서 나빠. 당신은 그게 얼마나 잘못된 건지 알아야 해. 그리고 난 더 이상 당신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야. 우리,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기 전에 주제파악부터 좀 하자. 알겠니? 우린 둘 다 함량미달이라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헤어짐의 이유야.”

  그녀는 또박또박 천천히 얘기했다.

  “.......... 어른들껜....... 내가 말씀드릴게........”

  영태는 조용히 말했다.

  “아니, 같이 말씀드려. 우리 아빠랑 당신 어머님한테 각각 말씀드려야 하니까....... 나랑 시간만 맞춰 줘. 그리고 집 문제랑 상의도 해야 하니까 계획 있으면 말하고. 뭐....... 어차피 그것 말고는 정리할 거 없으니까.......”

  다시 혜정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그....... 그래.......”

  영태가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 생각은 없어? 할 얘기 있다고 했던 거.......”

  혜정이 물었다.

  “나? 후......... 내가 무슨........ 무슨 생각이 있겠니.”

  조용히 혜정의 말을 듣고 있던 영태는 자신의 커피 잔만 내려다보며 말했다.

  “휴우............”

  혜정은 쥐고 있던 잔을 들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겠니? 뭔가 생각했던 걸 얘기하려고 오늘 온 건 맞는데, 생각은 마무리도 안 되고........ 네가 그렇게 나한테 말하는데 내가 무슨....... 너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집에 와서는........ 사실 이렇게 네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염치없이.”

  영태는 쥐고만 있던 잔에 커피를 마지지 못하고 만지작대며 얘기했다.

  “그럼........ 나중에 생각 다 하면 그 때 말해. 나중에라도.......”

  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잔속에 남아 식어버린 커피를 한 번에 마셔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가지고 나와 작은 방에다 가져다 놓았다.

  “정리 끝날 때까진 괜히 밖에서 전전하지 말고 잠은 들어와서 자.”

  영태는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혜정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머릿속이 무언가 복잡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생각은 없었다. 그도 곧 혜정이 이부자리를 가져다 놓은 작은 방으로 향했다. 새로 빨아 바싹 말려놓은 이불과 베개에서는 섬유유연제 향이 폴폴 났고, 며칠 만에 묵은 땀내를 모두 씻어내어서인지 이불에 닿는 감촉이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낯설 정도의 향기로운 냄새와 부드러운 그 감촉이 사라질까 두려울 만큼 소중하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먼저 침실로 향한 혜정은 방문을 닫자마자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숨을 죽이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로 영태의 움직임을 추측하며 누워 있다가 영태가 작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죽였던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창 밖에서 들려올 법한 그 흔한 자동차 소리 하나 들러오지 않는 깊은 고요함 속에 그녀는 있었다. 소리 없이 그녀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내 표정이 일그러질 만큼 눈물이 흘러 베개를 적셨지만 그녀는 끝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결혼생활은 이제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 후 기대했던 행복은 3년 전 그 날 이미 소진해 버린 소모품처럼 느껴졌다. 끝내 설득당하지 않았던 그녀의 아버지의 끝없는 회유와 질책에 대해서도 역시 원망할 만한 핑계거리가 이젠 없어졌다.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시간’뿐이며,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는 것이 두렵게도 느껴지다가 다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신을 차렸다가도 밀려오는 초라함과 허탈감에 그녀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 아침에 부은 눈을 영태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세수를 하고 다시 울고를 반복했다.

 

 22. 우정을 나눌 때

 

  휴가철 전후로는 호황을 누리는 음악계이지만 장마가 기승을 부릴 때 이곳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뜨거운 여름을 만끽하기 위한 크고 작은 공연들이 준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작되기 전, 움츠린 개구리마냥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기류가 이곳에 흘렀다.

  ‘버닝 러브’ 역시 락 페스티벌 준비를 하고 있다. 갑자기 빠진 은복이의 자리를 메꾸지 못한 채 연주에 대한 고민만 늘어가는 상황이었다.

  “단골들한테 좀 물어봤는데....... 대학교 때 밴드 활동을 좀 했었대. 되게 착한 것 같던데....... 취준생이라는데 하던 아르바이트를 지난주에 그만둬서 요즘에 좀 여유가 있나봐. 더군다나 7, 8월엔 회사들도 조용할 때고....... 세션이라니까 관심을 좀 보이더라. 물론 여자아이고. 어때?”

  곽 사장은 연습하는 시간보다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아 보이는 말자에게 물었다.

  “됐어....... 그냥 건반 없이 해 보려고....... 은수도 그러길 원하고 건이도 해보겠다고 하는데 뭘.......”

  말자가 말했다.

  “그래? 근데, 뭘 그렇게 걱정해?”

  곽사장이 물었다.

  “후....... 내가 그렇게 보여?”

  아니라는 듯 코웃음으로 대답하는 말자에게 곽 사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휴........ 뭔 비가 이렇게 지겹게 오냐........ 작작 좀 오지.”

  말자는 화제를 바꾸었다.

  “장마잖아. 손님 없는 거 보면 몰라? 이렇게 썰렁해도 가게 습도 유지하느라 겨울보다 지출은 더 많아. 내가 일 년 중 제일 밥 먹기 힘들 때가 바로 지금, 장마철이거든!”

  곽 사장은 비교적 태연하게 선반들을 닦으며 말했다.

  “흠....... 그래. 손님도 없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뭘 그렇게 씻고 닦고 앉았냐? 이리 와서 술이나 마셔. 아! 그....... 저기, 그 때 언제 단골손님이 줬다던 그 양주....... 설마 그거 혼자 깐 건 아니겠지?

  말자는 뭔가 생각났는지 곽 사장에게 물었다.

  “뭐....... 뭔 양주?”

  곽 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모른다는 듯 되물었다.

  “이 씨....... 어디서 모른 척이야? 언젠가 훤칠하고 말끔한 손님이 해외출장 다녀오면서 선물로 사다줬다던! 꼼수 부리지 말고 얼른 내 와! 오늘이 날인 것 같다.”

  말자가 말했다.

  “아이 씨....... 기억력도 좋아, 하여튼. 아, 대낮에 무슨 술이야? 손님 오면 어쩌라고?”

  곽 사장은 상황을 모면하고 양주를 지키려 나름 애썼지만 말자에게 한 번 알려진 이상 벌어지는 상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장대비가 오는데 무슨 손님이 있겠어? 온다 해도 안 받으면 되지. 얼른 가지고 와 앉어!”

  말자의 단호함에 곽 사장은 곧 포기했다.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무언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커다란 나무상자를 들고 나왔다. 한 손으론 언더락 잔 두 개를 집어다가 말자가 앉아있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스 볼도 준비했다.

  “아이 씨....... 아까워!”

  말자를 마주하고 앉으면서 그는 못내 아쉬움을 한 번 더 표현했다.

  “쫌생이 자식.......”

  말자는 환한 미소로 잔에 얼음을 채웠다. 이어서 곽 사장이 가져온 나무상자를 열자, ‘맥칼랜 1947’이 위엄을 뽐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위스키 병을 보자 곽 사장은 다시 한 번 머뭇거렸다.

  “야!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다. 미안해. 난 도저히 못 마시겠어.......”

  곽 사장이 소심하게 말했다.

  “이 새끼가.......? 아끼면 똥밖에 더 돼?”

  말자는 버럭 화를 냈다.

  “아, 그래도 이 비싼 걸 막걸리 마시듯 아무 때나 딸 순 없잖아.......”

  “그럼, 언제 딸래? 뭐, 네가 결혼이라도 할 거야? 아님, 죽을 날 기다렸다가 죽기 직전에 마시려고?”

  “그....... 그건 아니지만. 음....... 뭐 ‘버러’가 어느 날 갑자기 큰 성공을 거두는 날이 올 수도 있고........”

  “‘버러’가 크게 성공하면 그 땐 내가 이거 열 병 사줄게, 됐지?”

  말자의 말에 곽 사장은 더 이상 생각해 낼 핑계거리가 없었다. 곧 말자는 위스키를 개봉했다. 곽 사장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말자는 ‘맥칼랜 1947’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얼음을 채워 둔 잔에 천천히 따르고 나서 향을 맡았다.

  “음........ 뭔가 다르긴 한 것 같은데....... 크하........ 마오타이 같은 한 방은 없네. 뭐....... 그래도 비싼 술 먹는 기분은 좀 다르긴 하다. 좋다! 흐흐.......”

  이번엔 한 모금을 제대로 마시고 또 한 모금을 마신 말자는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리고 곽 사장의 잔을 채워 주었다.

  “크으....... 아까워서 맛도 못 느끼겠다, 난.”

  곽 사장도 표정이 일그러졌다.

  “멍청아, 그러니까 맘 편히 마셔! 그래야 맛도 나고 기분도 나지. 으이구, 답답해가지고........”

  말자는 이렇게 말하며 곽 사장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곽 사장은 아주 조금씩 술을 넘기고 있었지만 말자가 두 번째 잔을 따르는 걸 목격한 후로는 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어? 오늘 영업 안 하나요?”

  삐걱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아, 죄송합니다. 오늘 내부....... 뭐냐....... 청소 때문에 휴업이에요. 다음에 오세요. 죄송합니다.......”

  말자는 살짝 꼬인 혀로 발음하며 손님에게 말했다.

  “야! 손님을 왜 네 맘대로 내쫓아?”

  곽 사장의 발음도 마찬가지였다.

  “야 인마. 혀는 꼬여가지고....... 영업하게? 음주 영업? 으이구....... 비싼 술까지 땄는데? 거기다가 커플이잖아, 손님이. 크크........”

  말자는 조금 흐느적대며 말했다.

  “에잇, 못된 할망구 같으니라구! 왜, 커플이라 배라도 아픈 거야?”

  곽 사장이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배가 아파? 참나, 그럴 리가.......”

  말자는 소리 내어 웃으면서 말했다.

  “왜? 난 가끔, 어쩌다 가끔 그럴 때 있는데.......”

 곽 사장이 멕칼랜을 자신의 잔과 말자의 잔에 차례로 따르며 말했다. 잔을 채우고 술병을 내려놓으니 이미 병에 남은 술이 반도 채 되지 않았다.

  “넌....... 참....... 생긴 건 꼭 망나니처럼 생겨가지고 맘은 여려요. 넌 그게 문제야. 아직도 넌, 걔를 못 잊은 거야. 모르겠냐? 다 아는데 너만 몰라, 너만!”

  말자는 그가 따라놓은 잔을 받아 입에 갖다 댔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하....... 반박 불가....... 부끄럽네, 그게 벌써 몇 년 전인데....... 내가 좀 문제가 많긴 해, 그치?”

  곽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못난 놈.......”

  쓴 웃음을 보이며 힘없이 잔을 만지작대는 그에게 말자는 이렇게 말하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뭔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야 인마! 이거, 이거....... 이 양주 말야. 이거 너한테 선물했다던 그 단골....... 요즘도 오냐? 그 사람....... 아무래도 수상하지 않아?”

  “음........ 가끔? 뭐가?”

  곽 사장이 물었다.

  “훤칠하고 댄디하게 생겼다며? 야, 생각을 해봐. 그런 사람이, 누가 봐도 여자들이 줄을 설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망나니 같은 클럽 주인한테 이 비싼 걸 왜 선물하겠어, 안 그래? 응? 좀, 좀....... 잘 좀 해봐!”

  말자는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뭐? 설마....... 잘하긴 뭘 잘해봐? 네 말 맞다나 망나니 같은 늙다리한데 무슨.......!”

  곽 사장이 정색하며 대꾸하자 말자는 더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외모가 아니라, 네 성격이 망나니면 이런 얘기 꺼내지도 않아. 한 대 툭 치면 울 거 같은 여리디 여린 마음으로 혼자 살게? 좋다는 사람 있을 때 잡아야지. 우리가 이런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잔말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 네가 못하겠으면 내가 해 줄게!”

  말자는 진지했다.

  “참 나.........!”

  언제 취했었는지 사뭇 또렷해진 말자의 말투에 곽 사장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대꾸를 망설이는 게 자신의 이성인 건지, 술기운인 건지도 그는 헷갈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조금 전에 마시지 못한 잔을 말자는 한 입에 털어 넣고는 ‘탁’하고 내려놓았다.

  “무슨 생각하니, 너? 내 말이 맞다는 것만 알아둬.......”

  “그러는 너는? 너는 인마?”

  침묵을 깨고 곽 사장이 말자에게 물었다.

  “나? 난 뭐....... 난 너랑 달라. 난, 적어도 외롭지는 않거든. 과거에 매이지도 않고 미래가 불안하지도 않아. 난 딱 지금이 좋거든. 만족스러워. 행복해.”

  말자는 태연하게 술잔에 얼음을 채우며 대답했다.

  “행복이라........ 진심이냐?”

  자신의 잔에 얼음을 채우고 곽 사장의 잔에도 얼음을 넣어주고 있는 말자의 표정을 응시하며 그는 다시 물었다.

  “당연하지! 후....... 못 믿겠냐? 난 혼자가 아니잖아. 우리 애들....... 속 썩이던 기타, 건이 오고 올해는 좀 편해지나 싶다가 은수, 은복이........ 차례로 속을 좀 썩이긴 했지만 난 그래도 걔들이 있어서 좋아. 식구잖어. 그리고 우리는 음악을 하잖어! 어려움이 좀 있긴 해도 원하는 거 한다는 게 어디냐? 너도 나 알잖아, 고통에 무딘 거. 음악이랑 사람은 자고로 약 같은 존재인거야. 물론 병을 주는 뭐, 바이러스 같은 존재일 때도 있지만, 적어도 난 면역력이 남다르거든....... 뭐 아팠다 괜찮아졌다, 그렇게 사는 게 사는 거 아니겠냐? 그래, 그럼 그게 어디서 끝나느냐가 문제라고 하겠지? 설사 고통에서 내 인생이 멈춘다 해도 난, 지나 온 길이 후회되지 않는다면 그건 고통이 아니라고 생각해. 적어도 난 그럴 자신이 있다는 거고........ 왜? 더 이상 욕심이 없으니까. 지금이 진짜 좋으니까! 하하....... 너도 좋고, 이 술도 좋고........크아!”

  녹은 얼음에 살짝 남은 위스키가 희석된 물(?)을 마시며 말자는 말했다.

  “부럽다, 인마.”

  진지한 표정으로 말자의 말을 듣고 있던 곽 사장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빈 두 잔에 멕칼랜을 가득 부었다. 그러고 나니 병에는 술이 한 잔 분량도 채 남지 않았다.

  “야! 이것 봐. 우리 이거 거의 다 마셨어. 와! 다 마실 생각은 아니었는데........ 아까워서 어떡하냐, 이거....... 미안하다, 야. 푸우..........”

  말자의 혀가 갑자기 더 꼬여 들어갔다.

  “아끼면 뭐해? 아깝긴 뭐가? 마시라고 있는 술, 그냥 모셔놓고 보느니 마시면 이렇게 좋은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친구랑 마시는 게 최고의 가치 아니겠어? 하하.”

  곽 사장도 혀가 꼬였다.

  “그....... 그건 아닌데.......”

  말자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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