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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잘못
작성일 : 17-11-17 12:47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27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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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그들이 만났던 날

 

  낮에 보면, 어떻게 여기서 공연을 하지 싶을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다. 밤이 되면 사람들로 채워지고, 특히 공연이 있을 때 이곳은 그 어떤 곳보다 사랑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수연은 적어도 ‘버닝 러브’를 그렇게 생각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을 무렵, 그녀는 대학생이 된 이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형편이 넉넉한 정도는 아니었어도 여느 친구들처럼 등록금을 벌어야 하거나 학자금 대출이자를 갚느라 허둥지둥 하지 않아도 될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20년 전, 사고로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된 엄마와 지금껏 단 둘이 살고 있었다. 꽤나 현실적이고 냉철한 성격인 그녀의 엄마는 그녀를 출산 한 후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육아와 집안일에도 소홀할 수 없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노라고 그녀에게 늘 얘기하곤 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입사한 한 보험회사에서 그녀의 엄마는 20여년을 일해 오며 하나뿐인 딸의 교육에 부족함 없이 지원을 해왔다. 회사에서 공적을 인정받은 그녀의 엄마는 마침내 7년 전 지부장이 되었다. 모녀는 수연이 대학에 입학 할 때만을 기다렸다.

  남편을 잃고 난 후 그녀의 엄마는 오직 딸만을 위해 바치기로 한 자신의 젊음을 수연이 대학생이 되면 되찾겠노라 다짐했었다. 엄마의 열정에 수연은 책임감 있고 자립심 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녀는 엄마와의 약속대로 원하던 대학에 입학한 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신입생이었던 지지난 해 장학금을 받으며 학생으로서의 생활에 충실했다. 그녀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2학년이 되던 작년부터는 아르바이트와 사회봉사활동을 통에 여러 경험과 스펙을 쌓으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공부하는 시간을 피해 구하게 된 아르바이트가 ‘버닝 러브’였다. 등록금이나 생활비에 큰 보탬이 될 건 없었어도 그녀는 사회생활의 첫 단계로서 적당한 일자리라고 판단했다. 자취집까지 걸어가도 되는 정도의 거리인 것과 그 동네의 다른 여느 클럽과는 왠지 달라 보이는 분위기도 그녀의 구미를 당겼던 건 사실이었다.

  일 년 반의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한 번도 가 볼 일이 없었던 골목이었고 그 근방 클럽 중에선 가장 오래된 곳이라고 했다. 오래되었지만 무명에 가까웠던 클럽이었고 그 해 여름, 밴드 ‘버닝 러브’의 공연이 조금씩 입소문을 타면서 사람들이 발길이 잦아졌다. 그에 따라 그녀도 애초 계획과는 달리 일을 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방학을 보내게 되었고 개강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수연은 우연히 또 다른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녀가 ‘버닝 러브’에서 일하게 된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때만해도 그곳엔 손님이 많지 않았다. 밴드 ‘버닝 러브’의 멤버는 여자 셋이었고 여성밴드라는 것에 대한 선입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대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잘 모르는 곳이었기에 대부분 삼, 사십대의 남자 손님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가끔은 이십대로 보이는 젊은 층의 손님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들어오곤 했었지만 ‘버닝 러브’의 공연에 관심을 보이거나 진득하니 음악을 즐기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곤 다시 찾아오지도.

  수연은 영태를 이 때, 이곳에서 만났다. 공연이 없던 어느 평일이었는데, 곽사장과 수연은 바에서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 여섯 시도 채 안 된 시간에 두 명의 남자 손님이 가게에 들어왔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정도로 보이는 손님들은 이곳에 처음 와 본 것 같은 인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와 주변을 쭈뼛쭈뼛 살피더니 바에 와서 앉았다.

  “안녕하세요.”

  곽사장을 잠시 살피던 수연은 손님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오늘은 공연이 없나보네요? 부천에서 여기 공연 소문 듣고 왔는데.......”

  두 남자중 한 남자가 말했다. 짙은 초록색 셔츠에 면소재의 아이보리색 반바지, 새하얀 스니커즈에 파란색의 캡 모자를 뒤통수 쪽으로 한껏 재껴 쓴 차림새가 말끔해 보였지만 가까이 앉아 입을 여니 금세 풍겨오는 담배 냄새와 눈가 주름이 잔뜩 지는 얼굴이 반전을 주는 인상이었다.

  “공연은 주로 금요일이나 주말에 있습니다. 평일 공연은 때마다 달라서 주변에만 공지를 해요. 멀리서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바 끝에서 맥주 수량을 체크하고 있던 곽사장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한 남자가 말했다.

  “아........... 그럼 오늘은 간단히 맥주만 마시고 갈게요. 저희가 공연 보려고 일부러 찾아 왔거든요. 주말에 꼭 다시 와야겠네요.”

  그는 옆에 있는 친구보다는 좀 더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마르지 않은 체격에 동그랗고 하얀 얼굴에 씌워진 은테 안경은 심지어 지적인 인상을 주었다. 시원해 보이는 잔 체크 셔츠에 캐주얼 정장 느낌의 바지와 구두가 더욱 그랬다.

  “네. 그렇다면.......”

  곽사장이 대답했다. 그는 곧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어 두 남자 앞에 놓았다.

  “....... 맥주는 그냥 드릴게요. 주말에 꼭 공연 보러 오세요!” 라고 말하며 곽사장은 사람 좋게 웃었다.

  ‘첫 손님인데...........’ 곽사장의 행동에 수연은 조금 당황하기 했지만 곽사장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이를 보이며 인사를 하는 그들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두 남자가 서로를 쳐다보며 잠시 귓속말을 나누더니 맥주를 부딪쳤다. 수연은 왠지 그들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곽사장은 다시 바 끝 쪽으로 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수연도 바 정리를 하고 있었고 두 손님은 수연의 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이내 귓속말로 대화를 이어갔다.

  수연은 손님을 맞기 전 틀어놓았던 음악을 다시 리셋하는 척하며 잠시 꺼 버렸다. 의도적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귓속말 대화를 멈췄고 웃고 있던 표정도 굳어지며 수연의 눈치를 보았다. 수연은 다시 조용한 음악으로 바꾸고 볼륨을 조절했다.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그녀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싶었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려 노력했다. 다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맥주를 마시며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점점 수연의 귓가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씨X....... 인증 X됐어......., 레즈 밴드......., 조회수........ 환장한다....... 킥킥킥........”

  겨우 들리는 몇몇 단어들이었다. 그 뒤에 킥킥대는 두 남자의 웃음소리, 그 뒤에 스스로 목소리 크기를 조절하지 못하고 그 동그란 얼굴에 은테 안경의 남자가 말을 뱉었다.

  “야, 이씨........ 그럼 진짜 또 올 거야?”

  그의 말을 들은 순간 수연은 곽사장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 때,

 “저기요....... 죄송한데, 맥주 한 병씩만 더 마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멀리서 오느라 밥을 못 먹었더니.......”

 모자를 재껴 쓴 남자가 수연에게 물었다.

  “아니요! 안되는데요. 배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을 사드세요!”

  수연이 정색하며 대답했다.

  “예?.........뭐? 아이씨....... 뭐야? 싫으면 싫다고 할 것이지.......”

  동그란 얼굴에 은테 안경의 남자 역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곽사장은 그의 말을 듣고 다가왔다.

  “무슨 일이세요?”

  곽사장이 그에게 물었다.

  “아니....... 사장님이시죠? 이 여자....... 얘....... 얘 아르바이트에요?”

  그가 곽사장에게 물었다.

  “.............”

  그들의 물음에 곽사장은 아무 말 없이 수연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손님들에게 시선을 돌려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만........”

  “사장님, 아르바이트 제대로 써요! 얘가 손님한테 말을 막하네!”

  좀 더 말끔해 보였던 은테 안경이 더 말이 많았다. 수연은 흥분했다.

  “얘라니? 어디서 뭘 듣고 여기 와서 아는 척이야? 당신들!”

  “뭐? 당신들?!”

  당돌한 수연의 말에 발끈한 두 남자가 공격적으로 변하자 곽사장은 그들을 내보내기 위해 바 밖으로 나왔다. 그 때 ‘삐그덕’ 하고 출입문이 열렸고 이 날 두 번째 들어온 손님, 영태였다.

  이미 문 밖으로 새어나온 목소리를 듣고 안으로 들어간 영태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대뜸 “뭐야?!” 하고 호통을 쳤다. 흥분해 있던 두 남자도, 곽사장과 수연도 모두 놀라 영태를 쳐다보았다. 순간 영태는 심장이 터질 듯 뛰어 댔지만 눈빛이 흔들리지 않도록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소리쳤다.

  “무슨 일이야, 형?........ 니들 뭐야?!”

  성격과는 상반된 영태의 덩치가 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쓴 영태를 본 두 남자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사장님....... 그럼, 가볼게요....... 주....... 주말엔 시간이 없어서 모...못 오겠네요. 다음에 올게요.......”

  모자를 재껴 쓴 남자가 은테 안경의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들은 서둘러 가게를 나갔다. 자신을 피해 출입문을 향해 가는 두 남자를 끝까지 노려보았지만 영태는 조금 전보다 심장이 더 뛰었다. 두 남자가 사라지고 난 후의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영태는 말했다.

  “어....... 시....... 실례했습니다. 나....... 난처해 보이셔서........” 하며 다시 나갈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며 큰 덩치를 움찔움찔 거렸다.

  “푸하하하하하하”

  수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곧 곽사장도 큰 숨을 내쉬며 조용히 웃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영태에게 수연은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흐흐흐.......” 라고 말하며 참지 못한 웃음을 이어갔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영태는 어설픈 몸짓으로 안쪽으로 들어와 바에 앉았다. 곽사장은 얼른 맥주를 한 병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았다.

  “초면에 실례를 범했네요....... 이걸로 목 좀 축이세요.......”

  털털하고도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곽사장이 말했다. 그리고는 한두 발짝 뒷걸음을 가더니 다시 바 끝 쪽으로 걸어갔다. 민망한 건 영태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쥐어짜듯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수연은 조금 전 멈춰버렸던 음악을 다시 재생했다. ‘Ben Folds’의 ‘Fair’.

  “손님한테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인사를 했다.

  “아....... 아니, 아니에요.”

  영태가 답했다. 수연이 웃으며 건넨 인사에 영태의 얼굴은 더 붉어졌고 구렛나루 주변으로 땀줄기까지 흘러내렸다. 민망함에 맥주를 한 모금 들이 킨 영태는 눈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매, 맥주 맛있네요....... 아, 음악이 좋다는 소문....... 듣고 왔어요. 소...소문대로네요.”

  영태가 겨우 말했다.

  “이상한 소문 들으신 건 아니죠?”

  수연이 영태에게 물었다.

  “..........?”

  영태는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 그 사람들이 그랬거든요. ‘버러’에 소문 듣고 왔다고 해 놓고는 어디서 무슨 얘길 들은 건지....... 이상한 얘기를 쑥덕거리며 하더라고요....... 다른 목적으로 온 것 같아서 제가 가라고 했어요. 훗.”

  그녀가 설명했다.

  “아...............”

  영태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저도 사실 살짝 겁났었는데 그 때 오신 거예요. 훗....... 궁금해 하실까봐.......”

  그녀가 부연 설명을 했다.

  “앞으론 그냥 모른 척 해. 겁나는 상황 괜히 만들지 말고....... 그런 사람들 어차피 그냥 지나가는 비 같은 사람들이야. 다시 볼 일 없는 사람들....... 무시해.”

  수연의 얘기를 듣고는 바 끝에 있던 곽사장이 말했다.

  “사장님이 매번 그러시니까 안 되는 거예요. 비가 오면 우산이라도 써야지, 왜 맞고 있어요? 아무리 지나가는 비라도 쫄딱 맞으면 감기 걸리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난 하도 많이 맞아봐서 내성이 생겼지. 아주 튼튼하거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으로 곽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이들의 대화 덕분에 영태는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Ben Folds’의 음악이 끝날 때 즈음, 맥주 한 병을 모두 비운 그는 수연에게 한 병을 더 주문했고 곽사장과 수연이 영업 준비를 마쳤다. 이때부터 영태는 총 다섯 병의 맥주를 더 마시며 취기를 빌어 세 사람의 대화를 이어갔다.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 세 시간 반 동안.

 

  영태가 ‘버닝 러브’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곳을 찾은 건 사실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생산관리를 맡고 있기 때문에 젊은 직원들이 많은 환경 속에서 일을 했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주워들은 소문이었다. 음악도 좋고 작고 조용한,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보물 같은 곳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전날, 생산라인에 비상 상황이 생겨 새벽 3시에 갑작스레 출근을 해야 했다. 새벽부터 비상전화를 받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때 혜정은 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나가지마!............ 기다려봐!”

  혜정은 그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곧 몸을 일으켜 침대 옆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벨이 울리고 나더니 “웬일 이냐?” 하는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장인이었다.

  “아빠, 회사에 지금 전화 좀 해 주세요. 5라인에 문제가 생겼나 봐요. 자재과 박 대리가 발주 받은 거예요. 이 새벽에 제가 전화하면 좀 그렇잖아요........ 오과장한테 부탁하면 될 거 같은데.......”

  혜정이 말했다.

  “심과장한테 전화했든?”

  “.............”

  아버지의 물음에 혜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 참! 휴....... 알았다. 내일 일찍 나가서 확인하라 그래!”

  “죄송해요....... 낼 회사에서 봬요.”

  혜정이 말했다. 전화를 끊은 혜정은 휴대폰을 다시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양 손으로 얼굴을 한 번 감쌌다.

  “자. 걱정 말고.......”

  그녀가 영태에게 말했다.

  “내가 나가면 그만일 걸 왜.......”

  영태는 순간 욱했다.

  “그냥 자. 어제 열두시에 들어왔잖아! 잠은 자고 일해!”

  영태의 말을 툭 자르고 그녀는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잠이........ 오겠니........?”

  영태는 화를 억누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는 다시 누웠다. 혜정도 아무 말 없이 다시 누운 그를 잠시 바라보고는 자리에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영태는 그 때부터 동이 틀 때까지 잠을 설쳤다. 그리고 다시 날이 밝자마자 출근을 서둘렀다.

  “오빠!”

  허둥지둥 서두르는 영태를 혜정은 불러 세웠지만 벌겋게 충혈 된 눈과 밤새 푸석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는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 날 영태는 출근을 하자마자 간밤에 있었던 일을 점검하느라 바빴고 오과장의 날선 시선을 받았다. 오과장에게 있는 대로 깨진 박대리의 눈치까지 봐야 했다. 게다가 장인인 사장에게는 중간 책임자로서 방패 역할까지 해야 했다.

  모든 게 엉망인 하루였다. 뭐, 종종 있었던 일이긴 했으나 결혼 이후 최대한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해왔던 그에게는 결코 내성이 생길 수 있을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일이 적응이 되지 않고 거듭될수록 혼란만 가중되는 것은 혜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또한 반복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아무리 애써 봐도 늘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영태를 사랑했다. 그처럼 성실하고 우직한, 선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회사도 가정도 그렇게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저 그녀 자신이 물심양면 외조 한다면 아버지에게도 결국은 인정받게 되리라 굳게 믿었었다. 그 누구도 그녀의 사랑이, 생활이 늪에 빠지리라고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잠도 식사도 일도, 그 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반 쯤 정신을 빼놓고 영태는 여섯시가 되자마자 회사를 나와 버렸다. 그리고 휴대폰도 꺼 두었다. 생산라인 직원이 이야기해 주었던 기억을 열심히 떠올려 머릿속에 오직 지도만 그려 놓고는 홍대 앞 ‘버닝 러브’로 향한 것이었다.

 

 13. 일상이 된 너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잠시 헷갈렸다. 이제 좀 마음이 편해진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 건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찌됐건 난 한결 따뜻해진 날씨 덕에 아침에 좀 더 여유를 부릴 수가 있었다. 아니, 이것도 날씨 덕인건지 나의 의도인 건지조차 헷갈렸다. 그래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일곱 시 오 분, 골목을 틀어 편의점이 보이자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그의 트럭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난 편의점에 들어가 샌드위치 두 개와 뜨거운 커피 두 개를 샀다. 이른 아침이라 아직은 옅게 입김이 불어져 나왔다. 출입문 옆쪽에 있는 테라스에 놓인 테이블 위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올려놓았다. 그를 기다렸다. 미리 계획하지 않은 것이었다. 우유는 그가 오면 사기로 하고. 다시 5~6분쯤 기다렸을까 트럭이 다가왔다.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 바로 옆에 트럭은 정차했다. 그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바로 나를 보고는 먼저 목 인사를 했다.

  “어?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그가 내게 말했다.

  “아....... 어....... 네, 좀 일찍 왔어요.”

  난 대답했다.

  “네....... 잠시만요.”

  이가 드러나진 않았어도 양쪽 입 꼬리를 한껏 올려 그는 웃어보였다. 그리고 냉동고를 열어 우유박스를 나르기 시작했다.

  “뭐....... 좀 도와줄까요?”

  내가 묻자 그는 손 사레를 쳤다.

  “아니, 아니에요. 앉아계세요. 우유 갖다 드릴게요.” 하며 그는 박스를 들고 들어갔다.

  잠시 후 그가 우유 하나를 들고 나오려는데, “아, 그거! 바코드 찍어야 하는데? 저기 밖에 계신 분이 우유 값까지 미리 내고 가셨거든요.” 하며 편의점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출입문을 열어놓아서 직원의 말이 다 들렸지만 모른 척 했다.

  “오늘도 선물로 드리려고 했는데....... 공연 보러 오시라고요.......”

  그가 말했다.

  “어? 공연해요?”

  내가 물었다.

  “네. ‘버러’에서 다음 주 목, 금, 토 8시에요. 오실래요?”

  그가 내게 물었다. 난 대답대신 웃어 보였다.

  “음.......일 급하지 않으면 나랑 아침이나 먹을래요?”

  내가 샌드위치 봉지를 들어 보이자 이번엔 그가 대답대신 아까처럼 입 꼬리로 올리며 나를 마주하고 앉았다.

  “아침 먹을 시간도 없죠? 나도 그랬어요....... 근데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나이가 좀 드니까 오후 되면 몸이 깔아지고 피로가 두 세배로 와요.”

  내가 말했다.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그는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아! 천천히....... 할게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그도 웃었다.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묘한 기분도 들었다. 무대 위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와 이곳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의 그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고, 한 테이블에 마주하고 앉아 함께 아침을 먹고 있는 지금이 왠지 현실적이지 않았다.

  그 날, 난 끝까지 말을 놓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예정된 공연 얘기, 이번 앨범을 듣고 난 후의 감상평, 내가 하는 일과 회사가 바쁘다는 얘기 등을 약 이십여 분간 나누었고 평소보다 일찍 마주치는 날이면 그가 우유를 내게 주겠다는 것과 내가 아침 샌드위치를 사겠다는 약속까지 할 수 있었다.

 

  [다음 주 금, 토 시간돼?]

  [왜?]

  [공연 보러 가자. ‘버러’에]

  영태에게 문자를 보냈다. 공연 보러 가자는 물음에 두 시간이 지나서야 답이 왔다.

  [아....... 새끼....... 빠졌구만. 금 바쁘고 토요일.]

  남자 둘이서 밴드 공연을 보러 간다는 것이, 적어도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버닝 러브’에 가는 것을 거절할 리 없는 까닭이 적어도 영태에게는 확실했기 때문에 난 주저 없이 늘 그에게 제안했고 그는 늘 주저 없이 수락했다.

 

  어제는 금요일이었지만 월요일까지 끝내야 하는 일을 미리 해 놓느라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그에게 받은 CD를 틀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진 않아도 틈틈이 들었더니 플레이리스트가 머릿속에서 절로 돌아갔다. 가사도 제법 외워졌는지 난 계속 흥얼거렸다. 영태는 토요일임에도 오전에 회사에 일이 있다고 했다. 난 토스트에 우유로 아점을 먹으며 녀석에게 확인문자를 보냈다.

  [7시. 늦지 마.]

 

  역시 봄은 봄인지 홍대 거리엔 여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고 여기저기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와 플랜카드들이 걸려 있었다. 일찌감치 문을 연 가게들, 여유로워 보인다기 보다는 뭔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듯한 사람들,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그런 분위기를 조금 벗어난 골목에 ‘버닝 러브’는 있었다. 하지만 홍대 앞의 그 부산스러움에도 끄떡 않던 마음이 이 조용하고 작은 골목에 들어서니 부산스럽게 두근대기 시작했다. 문을 열자마자 왼쪽 구석 테이블 쪽을 먼저 확인했다. 역시나 영태 녀석이 앉아 있었다. 난 그에게 다가가 자리에 앉고 나서 그곳의 분위기를 살폈다. ‘Radiohead’의 ‘No Surprises’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약 십여 명의 관객들이 한 쪽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인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이었고 여자들이 좀 더 많아 보였다.

  “수연씨는 안 보이네?”

  난 영태에게 물었다.

  “바쁜가봐. 나도 아직 못 봤어. 아.......씨....... 여덟시라며? 왜 이렇게 일찍 오랬어?”

  “주말에 집에서 혼자 뭐해? 생각해서 나오랬더니.......”

  내가 말했다. 나의 대답에 괜히 해 본 소리라는 게 보여질까봐 녀석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넌 뭐야? 이제는 네가 나보다 더 단골 됐어. 뭐야? 내가 널 무엇에 빠지게 만든 거냐?”

  영태가 말했다.

  “빠지긴 뭐가....... 새끼....... 내가 너냐? 빠지긴....... 그냥, 심심해서 그러지, 뭐....... 여자 친구도 이제 없고, 딱히 주말에 할 일도 없고....... 여기 음악 좋잖아. 빠졌다면 음악에 빠진 거지 뭐........ 너 인마, 내 음악취향 알잖아.......?”

  녀석의 말에 난 비웃듯 큰 소리로 대답했다.

  “허....... 알았어. 자식, 오버하긴........ 그래, 뭐....... 네 음악취향. 알지, 내가. 그래, 어디에든 빠져야지. 그래, 실컷 즐겨라. 그래야 내 맘이 편하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침묵했다. 그러는 동안 관객들이 하나둘 입장을 서두르고 작은 공간이 거의 찼을 때쯤 공연은 시작되었다. 무대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켜지자 관객석에서 함성이 조금씩 터져 나왔고 무대 위 조명은 네 명의 ‘버닝 러브’ 멤버들을 한 사람씩 비추었다. 리더인 드럼 겸 보컬이 이번엔 멤버를 한 명씩 소개하고 첫 곡으로 부를 노래를 소개한 후 연주를 시작했다.

  관객석에서 바라볼 때 오른 쪽에 서 있던 그를 보았다. 그는 날 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명의 방향이 바뀌었다. 1~2초 정도의 순간이었지만 그 때부터 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첫 곡은 그의 보컬 파트가 없었던 곡이었다. 하지만 내 귀엔 코러스를 넣는 그의 목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음악에 집중했다.

 

  이 날의 공연은 최고였다. 앨범에 있는 곡들을 모두 불렀고 소리를 내거나 입을 움직여 따라 하진 않았어도 속으로 거의 모든 가사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가끔 눈을 감고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의식을 차렸을 땐 어김없이 나의 시선은 무대 오른쪽 그에게 향해 있었다.

  공연도 공연이지만 무엇보다 난 끝까지 멈추지 않았던 나의 두근거림으로 다시 혼란에 빠졌다. 공연이 끝난 후 영태 녀석은 매몰차게 가버렸다. 끝나고 소주 한잔 할까 했었는데 수연씨에게 온 전화를 받고 망설이는 그의 등을 내가 떠밀었다.

  집에 가는 전철을 탔다. 전동차 문 옆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았더니 좀 전의 상황이 다시 떠오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홍대에서 집까지 반 쯤 왔을 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그였다.

  [가셨어요?]

  안개가 걷히듯 혼란스러움이 순간 사라지고 다시 심장이 뛰었다. 난 잠시 뭔가 생각하려 했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직......]

  [어디세요?]

  여기서부터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려 애썼는데 그 ‘무언가’란 어디라고 둘러댈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곧 거짓말로 답을 보냈다.

  [근처에 있어요......] 라고 전송을 하자마자 난 황급히 다음 역에서 하차했다. 난 전속력으로 계단을 올랐고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어 댔다. 겨우 택시를 잡아타자 다시 문자 진동이 울렸다.

  [오늘 팀이 일찍 해산했어요. 가까이 계시면 인사나 드릴까 해서요.......]

  [아, 그래요? 그럼....... 내가 그 쪽으로 갈게요.]

  난 생각할 틈도 없었다. ‘버닝 러브’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번화가에 내려서 달렸다.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 상가 앞 벤치에 그가 앉아 있었다. 지나칠 뻔 했다. 그를 알아보고 멈춰 선 나를 보자 그는 옆에 세워 두었던 기타를 들춰 매며 벌떡 일어났다.

  “왜 그렇게 뛰어 오세요?”

  그가 물었다.

  “하....... 아....... 운동 삼아....... 휴.......”

  난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려 했다.

  “친구 분은 가셨어요?”

  내 주변을 잠시 살피던 그가 물었다. 난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그러자 그는 시선을 잠시 떨구더니 망설이듯 내게 얘기했다.

  “항상 공연에도 와 주시고, 아침에도 늘 반가워 해 주시고....... 그냥, 감사해서요. 오늘 공연도 끝났고, 멤버들도 피곤하다고 일찍들 가고요.......”

  “저녁 먹었어요?”

  주저리주저리 늘여 놓는 그의 핑계를 듣다가 난 웃음이 나올 뻔해서 먼저 질문을 던졌다.

  “아....... 아직........ 아, 제가 밥 사드릴게요!”

  그가 말했다.

  “아니에요. 공연 잘 관람한 건 난데, 내가 살게요!”

  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요, 제가 사드릴게요! 뭐 좋아하세요?”

  그는 아랑곳 않고 내게 물었다. 서로 저녁을 사겠다고 우리는 잠시 서서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그가 사기로 하고 난 메뉴를 고르기로 했다.

  “잘 가는 데가 있긴 한데....... 고기 좋아하죠?”

  내가 물었다.

  “그럼요!”

  그가 대답했다.

  “그럼, 다음번엔 내가 사는 걸로 하고........ 가요!”

  우리는 이렇게 합의를 보고 영태와 갔던 갈매기집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처음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진짜, 편하게 말하셔도 되는데.......”

  “흠....... 잘 안되지만, 흠....... 그래, 그러지 뭐.”

  그제야 어색함에 웃음이 삐져나왔다. 갈매기살 이인분에 소주 한 병을 비우고 그가 한 병을 더 주문했다.

  “형은, 술 잘 드시나 봐요?”

  그가 내게 물으며 내 앞에 놓인 빈 잔에 소주를 채웠다.

  “잘....... 은 아니고. 술 마실 일이 많다보니 익숙해진 거지 뭐. 술이 세진 않아.”

  난 그의 손에서 소주병을 얼른 낚아채 그의 잔을 채워 주었고 그는 얼른 두 손을 모아 잔을 받았다.

  “저는요....... 잘 못해요, 사실....... 지금도 취한 것 같아요. 후.......”

  그가 말했다. 그는 나를 향해 자신의 잔을 치켜들었다. 그가 내민 잔에 내 잔을 부딪쳤지만 그의 얘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아, 그럼 그만 마실까?”

  “괜찮아요. 지금보다 더 많이 마셔본 적도 있는데요. 기억도 다 나고 속도 안 쓰리고 주사도 딱히 없대요. 아직까진 괜찮아요....... 오히려 기분 좋은데요? 뭔가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도 들고. 하하.......”

  그는 살짝 상기되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난 걱정을 거두었다. 양 볼이 선홍빛을 띄며 조금은 흐릿해진 발음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말투와 목소리 때문에 나도 뭔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웬만큼 따라서 흥얼거려 지더라구, 노래가....... 어느 새. 공연 진짜 잘 봤어. 오늘.”

  난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아, 진짜요?”

  그는 나의 칭찬에 정말 아이처럼 좋아했다.

  “직접 쓴 곡이 많던데, 어디서 영감을 받는지 물어봐도 되나?”

  “하하....... 설마 안 되겠어요?”

  나의 질문에 그는 크게 웃었다. 난 멋쩍게 웃었다.

  “아름다움이요. 저는 아름다운 것에 미쳐 있거든요. 아름다운 건 세상에 얼마든지 있어요. 저는요, 길을 가다가도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나온 잡초를 보면 예뻐서 걸음을 멈춰요. 허름한 벽에 써 놓은 저질 낙서도, 우리 집 낡은 창문에 쳐져 있는 비에 젖은 거미줄도, 한 여름에 뛰어놀다 땟국물 줄줄 흐르는 어린 애들도 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게 그래요. 정말 세상 온갖 게 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 난 비로소 생을 다 할 것 같아요. 하하....... 너무 귀하고 아름다워서 사라질까봐 두렵고, 늘 붙잡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아이러니한 게요, 그 아름다운 것들은 고통의 역사를 지니고 있거든요. 옛날엔 안 그랬는데 겁이 많아졌어요. 그것들이 다시 그 잔인한 고통 속으로 사라질까봐, 그러니까 끊임없이 표현해 내려고 해요. 그래서 저에겐 창작의 고통은 없어도 창작하지 않는 고통이 존재하죠. 아름다움만 붙잡고 있다는 게 지금은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 고통마저 아름답게 느껴져요.”

  그가 말했다.

  “고통........”

  그의 대답을 듣고 있던 난 입에서 한 단어가 되새김질 되었다. 난 곧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 알아보게 된, 그의 왼쪽 눈을 짝짝이로 보이게 만드는 눈꺼풀의 작은 상처가 순간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형은 여행 많이 다녀 봤죠?”

  그가 물었다.

  “뭐....... 많이는 아니고. 몇 번.......”

  난 대답했다.

  “난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여행. 초등학교 때 소풍간 거 말고는....... 훗....... 제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거든요.”

  “그래? 어딘데?”

  “아일랜드요....... 혹시 가 보셨어요?”

  그가 물었다.

  “아니, 아직....... 거긴 왜 가고 싶은 거야?”

  난 그의 대답에 대한 이유가 궁금했다.

  “책이나 TV에서만 봤는데, 그곳이 그래요. 보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평화로운 분위기지만 알고 보면 반복되는 고통의 역사를 지닌 곳이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뭔가 상반된 이미지들이 가득해요. 고전과 현대, 빈과 부,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고 그것들이 서로 유대 되어 있는 느낌이에요. 무엇보다 음악과 맥주가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내주고 그 속에서 그 상반된 이미지들이 부질없이 떠다녀요. 풉....... 그냥 저만의 느낌이에요. 내 느낌이 어느 정도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그가 말했다.

  “그래? 네 말을 들으니까 나도 관심이 생기는데? 내 여행 리스트에 올려놓아야겠군.......”

  내가 말했다.

  “언젠가는 꼭 가보겠죠? 형이랑 같이 갈 수도 있을까요? 훗.......”

  그는 옆에 놓여있던 얼음물을 들이키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그는 다시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참........”

  나도 함께 웃었다.

 

 14. 너와 나의 거리

 

  시즌 공연을 끝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전에 내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겨우 공연에 집중하느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마구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다들 한 템포 쉬는 분위기였지만,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채 난 서둘러 말자 언니에게 다음 앨범과 공연계획에 대해 닦달했다. 다음 공연은 늦은 여름에 맞춰져 있었고 앨범은 예전에 이미 나의 요청에 의해 내년 초까지 무기한 연기된 상태였다. 다음 앨범에는 꼭 완성도 있는 자작곡을 싣고 싶다는 나의 포부에 말자 언니가 특별히 배려해 준 기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말자 언니는 이런 나를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다.

  공연 연습할 때에는 매일 연락하던 멤버들과의 연락도 조금씩 뜸해 지면서 난 말자 언니의 ‘버러’ 연습실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밤에는 곡을 쓰는데 집중했고 낮에는 말자 언니에게 매일 업데이트 되는 나의 계획을 얘기하곤 했다. 그러기를 3주가 지났다. 말자 언니는 참고 참았던 감정을 최대한 다스린 후 내게 얘기했다.

  “친구 하나가 녹음실에서 세션을 구하는데, 아르바이트 해 보지 않을래?”

  “네?”

  뜬금없는 언니의 제안에 난 놀랐다.

  “집중하려고 애쓰지 말고 분산시키라고! 지금 너 그래야겠어, 좀. 과부하야. 은수야....... 아무리 볕이 좋아도 땡볕에 오래 서 있으면 쓰러진다고! 그늘을 찾아. 그늘은 어디에나 있어. 찾아서 좀 쉬다 가.”

  언니가 내게 말했다.

  “언니....... 그늘이, 그늘이 있어요? 어디요? 보여야 말이죠. 눈앞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찾긴 뭘 찾아요? 그냥 눈을 떠도 깜깜한데, 뭘 찾아요.......?”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제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한낱 먼지 조각이 된 느낌이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에겐 처음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친구나 가족들에게조차 난 나를 드러내는 성격이 못 되었다. 표정이나 말, 작은 행동까지도 내 안에서만 자유로웠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세 살 터울의 친언니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잘 융합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답답한 성격이었던 나는 언젠가부터 부모님의 권역에서 벗어나 있었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그야말로 존재감 없는 학생, 반경 1미터 이내의 급우들에게 꼭 필요한 대화만이 가능했고 내게 먼저 말을 걸거나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은 없었다. 아마 담임선생님도 나를 잘 몰랐을 것이다. 선생님이라는 존재와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적어도 내겐 없으니까.

  난 고1때부터 새벽에 자전거로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감정의 굴곡조차 완만했던 내 사춘기 시절에 유일하게 날 설레게 했던 건, 시퍼런 하늘빛을 지닌 새벽의 공기와 그 냄새, 내 방과 바짝 붙어있는 뒷집 셋방에서 들려오는 베이스 기타소리가 전부였다.

  난 매일 아침 4시 반에서 5시쯤이면 집을 나섰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내겐 그 설렘들이 너무 소중했었다. 집을 나서면서 바라보는 시퍼런(계절에 따라 채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하늘과 뒷집에서 들려오는 베이스 기타 소리는 묘하게 잘 어울렸다.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 몇 달 후 난 베이스 기타를 구입했고 방과 후 집 근처 버스정류장 앞에 있는 오래된 음악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 여자 수강생은 단 두 명뿐이었는데 기타는 나뿐이었다. 난 혼자 배우고 연습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집에는 알리지 않았었기 때문에 난 내 기타를 학원에 늘 두고 매일 서너 시간씩 연습을 하다가 귀가하곤 했었다.

  난 늘 졸업을 기다렸다. 때마침 나의 간절함과 조금의 행운으로 ‘버닝 러브’를 찾게 된 것 같다. 이곳이 나의 운명이라 여겼고 그 믿음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말자 언니와 꽉 사장님이었기에 나의 표정과 말이, 행동으로써의 표현이 조금씩 가능해 졌을 것이다. 은복이의 까칠함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지게 하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이건이는 잘 다져놓은 들판에 불연 듯 날아든 새처럼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하지만 말자 언니나 은복이가 느끼는 변화와 내가 느끼는 그것은 달랐다. 나에게만 그랬다. 이 변화는, 들판에 찾아온 이방인이 어쩌면 나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할 만큼 내게 점점 감당하기 힘든 크기로 자라났다.

  그가 내게 말한 것은 없었다. 약속한 것도, 나눈 것도....... 없었다. 마른 땅에 단비처럼 그는 어려운 상황의 ‘버닝 러브’를 위해 열심이었고 나는 그와 적극적으로 곡 작업이며 연주며 녹음이며 늘 함께 했을 뿐이다. 우리는 손발이 잘 맞았고 그는 다정했다. 그렇게 조금씩 팀 활동이 활기를 띄는 게 즐거웠고, 그가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내가 그에게 했던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 퍼즐조각처럼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너, 참 좋아!” 하면서 난 그를 웃으며 바라보았고, “응, 나도.......” 하며 함께 웃었던 게 다였다. 곡 작업을 마무리하며 나눴던 짧은 사적 대화는 어느 소설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고 나는 다시 이 들판을 벗어난 예전의 내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난 사랑을 모른다. 그를 처음 보았던 그 때도, “참 좋아!”라고 아무렇지 않게 그에게 얘기해 주었던 그 때도 지금도, 난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이제와 보니, 말을 건 것도 손을 잡은 것도 약속을 한 것도 나였다. 그는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 나를 대했을 뿐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흩어진 퍼즐 조각들을 맞춰 나가다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되었고 그는 그저 거기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날 슬프게 했다. 난 왜 이리도 눈치가 없었을까.

 

  말자 언니의 걱정에도 난 맘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며 곡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예전처럼 닦달하진 않았어도 말자 언니와 은복이에게 가끔 확인을 부탁하고 조언을 구하는 정도로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이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작업실을 혼자만 사용하거나 내내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말자 언니의 생활공간이기도 했고 은복이와 이건이에게는 연습실이기도 했기에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꼭 얼굴을 보게 되지만 난 어느 때보다 과묵하고 사무적으로 그들을 대했다. 이런 나를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있으리란 것도 당연히 알고 있었고 나중에는 그들이 내 눈치를 보기도 하다가 급기야 폭발하기 일보직전임을 난 감지하기도 했다.

  말자 언니는 날 믿고 기다려 주는 눈치였다. 금방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은복이도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할 꺼리임을 아는 듯 했다. 의외의 반응은 이건이가 보여주었다.

  말자 언니가 사흘째 여행 중이어서 당분간 맘 편히 연습실을 쓰기로 했다. 내가 2주째 붙들고 씨름하던 곡을 녹음해 보기 위해 토요일이지만 아침 일찍 작업실을 찾았다. 작업실 열쇠를 넣고 돌리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이건이가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난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내가 그에게 말했다.

  “왔어? 너....... 기다렸어.”

  그가 내게 말했다.

  난 순간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혀 심장이 터질 듯 두근대기 시작했다. 그에게 들키지 않게끔 크게 들숨을 쉬었다 ‘후.........’ 하고 내뱉으며 태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음....... 그래? 잘 왔다. 저번에 쓰던 그 곡, 어제 완성했는데 네가 한번 봐줄래?”

  내가 말했다. 내 얼굴에서 어색한 미소를 읽었는지 그의 표정은 처연했다.

  “........미안해........”

  그 처연한 표정에 떨림이 느껴지면서 급기야 그가 뱉은 말이었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 난 더 이상 감정을 숨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 라는 말을 저렇게 힘들게 내뱉는 그의 마음을 알지도 모르지도 않는 이상한 상황에 난 처해 있었다.

  “뭐.......가?” 라고 물어놓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설움을 삼켰다.

  하지만 차오르는 눈물을 막아내지 못한 건 오히려 그였다. 눈물 한 줄기가 그의 왼쪽 뺨 위로 흐르자 애써 표정을 흩트리지 않고 그는 말했다.

  “내가 너의 마음을 알아서....... 내가 누구보다 네 마음을 잘 알아서....... 그게 너무 미안해.”

  그리고는 그의 표정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난 터질 것 같았던,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그것을 꾹 삼키고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가자 고개를 떨구는 그에게 난 어깨를 대 주었다.

  “괜찮아, 난.......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너도....... 괜찮을 거야.......”

  난 말했다. 거리를 느꼈던 것도 커지는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것도 나였다. 그는 내게 거리를 두지도 마음을 감추지 못할 것도 없었고 그저 이런 나를 알아보고 미안한 마음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목에 차였던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곧 나는 그를 꼭 안아주었고 내 품에서 그는 한동안 흐느꼈다. 나의 설움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지만 내 품의 그가 난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내게 주어진 숙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를 안고 있는 지금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만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난 그를 놓는 연습을 시작하기로 했다.

 

 15. 내 짠한 친구

 

  일주일이 넘도록 영태가 연락이 없었다. 주중엔 원래 그런 녀석이었지만 수연씨를 만난 이후로는 만나든 안 만나든 그가 나의 상황을 한 번씩 체크해 왔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만들어서 토요일까지 굳이 근무를 하고 습관처럼 허전함을 채워줄 나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그였다.

  지난 토요일 ‘버닝 러브’ 공연이 끝나고 웬일로 수연씨의 전화를 받고 뛰쳐나간 이후였다. 나도 이건이와 처음 술을 한 잔을 했던 그 다음 날, 내내 반 실신상태로 집에만 있어야 했기에 영태 녀석을 궁금해 할 겨를이 없었다. 수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난 영태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겼다. 그의 전화는 꺼져 있었다. 그때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목요일이던 다음 날 아침, 난 여느 때처럼 편의점에서 이건을 만났다. 그때처럼 늘 긴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마치 습관이 된 아침체조마냥 편해지고 나름의 활력이 되고 있었다. 그는 내가 고를 수 있도록 오늘 일자 우유를 직접 진열해 놓고는 빈 박스를 가지고 나왔다.

  “참, 수연이 누나.......라고 ....... ‘버러’ 아르바이트 누난데요, 곽 사장님께서 누나가 연락이 안 된다고....... 형 친구 분한테 물어본다고 하시던데....... 혹시 친구 분 연락되세요?”

  그가 내게 물었다.

  “어? 그래? 음....... 내가 연락해 볼게.”

  그를 보내고 난 바로 영태에게 전화를 했다.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처음이지만 출근시간이라서 연락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화는 꺼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퇴근 후 회사로 찾아가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난 출근을 서둘렀다. 난 종일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영태는 늘 퇴근이 늦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난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그의 회사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한 번 더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꺼진 상태였다.

  녀석의 결혼식 이후에 혜정씨는 두세 번 정도 보았다. 영태에겐 내가 유일한 절친 이었기에 나의 존재에 대해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난 주저 없이 그의 회사 로비에 있는 직원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그가 일하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안 본 새 살짝 야윈 듯 해 보이는 것이 나의 직감에 의한 착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를 알아본 녀석의 표정은 반가움도 놀람도 아닌 것임엔 틀림없었다.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난 그에게 나오라는 눈짓을 보내고 사무실을 나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전화는 왜 꺼놔서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투벅투벅 걸어 나오는 그를 향해 난 아이를 꾸짖듯 물었다.

  “그렇다고 뭘 여기까지 와? 내가 애냐? 새끼........”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애가 아니니까 그런 거잖아. 너 인마, 무슨 일 있는 거 맞지? 말해봐!”

  난 그에게 다그쳤다.

  “참........ 정리하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그가 말하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녀석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에 난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근처 순댓국밥집을 찾았다.

  “수연씨랑........ 문제 생긴 거야?”

  난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영태는 순댓국에 밥을 말아 한 술 뜨더니 입에 가져가 대려다 나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며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수연씨, 아르바이트도 안 나온다고 그러더라.......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물었다.

  “내 표정 읽고 짐작 하지 마. 나도 모르니까.......”

  그가 말했다.

  “짐작 안 해, 새꺄. 그러니까, 적어도 나한텐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나쁜 놈아!”

  난 다소 격앙된 말투로 그를 다그쳤지만 곧 후회했다. 그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수연이....... 어머니가 아셨어. 걔가 많이 힘든 상황이야.......”

  그가 어렵게 말했다.

  “휴....... 너는, 너는 인마? 그래서 넌 어떤 상황인데?”

  “장인어른이 이혼을 요구하셔. 혜정이는 거부하고 있고....... 참....... 나란 새끼....... 정말 개새끼 아니냐?”

  그는 한숨을 뱉으며 괜한 순댓국만 뒤적거렸다.

  “그게 뭐 하루 이틀이야? 결혼한 순간부터 그랬잖아, 늘! 영감탱이!”

  난 잠깐 흥분했다.

  “내가....... 그 노인네한테....... 혜정이한테....... 이제 와서 무슨 자격으로.......”

 영태는 고개를 떨구었다.

  “사장님! 저희 소주 한 병 주세요!”

  난 소주를 주문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이 가져다 준 소주를 받아 난 두 잔을 채웠다. 그가 술잔을 넘겼다. 나도 같이 잔을 넘기고 나서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밥부터 먹어, 인마!”

  난 그에게 말했다. 그제 서야 영태는 휘젓던 국밥을 한 입 떠먹었다. 그러고 나서 난 다시 그에게 잔을 부딪쳤고 그렇게 우리는 순대국밥을 안주로 소주 한 병을 말없이 비우고 있었다. 소주의 쓴 맛이 점점 목구멍을 찌르듯 넘어갔다. 녀석도 그랬는지 눈을 한 번 찡긋하더니 눈물을 짜냈다.

 

  고등학교 시절, 딱히 친구가 없었던 녀석이 한번은 항상 반 일등을 도맡아 하던 아이(집안도 성격도 좋고 재능도 뛰어나 늘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전교회장)를 재끼고 일등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며칠 후, 영태는 하굣길에 반 아이들 몇 명에게 집단 구타를 당한 적이 있다. 그 아이들은 대놓고 영태에게 성적을 알아서 관리할 것을 요구했고, 그 이후로도 수회 협박을 받았었다. 그 사실을 난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함께 분노해 줄 수는 있었지만 별 도움은 줄 수는 없었다. 그 때 난 동네 슈퍼마켓에서 소주 한 병을 몰래 사와 우리 집에서 녀석과 함께 나누어 마셨다. 그는 그날 처음 소주 맛을 보고 눈물을 흘렸었다. 오늘이 그때 이후 처음 보는 녀석의 눈물이었다.

 

 16. 널 이해한다는 것

 

  일주일전, 수연의 전화를 받고 영태가 달려갔던 날이었다. 두 사람은 평소 해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주말 데이트를 오랜만에 즐겼다. 그녀는 아르바이트가 끝난 직후라 피곤했지만 어쩌다 쉬는 일요일을 맞은 터라 마음이 도리어 들떠 있었다. 그건 영태도 마찬가지였다. 수연은 며칠 전, 이 날을 위해 심야영화티켓을 준비했고, 영태도 주말에 하게 될지 모를 외박을 대비해 혜정이게 미리 연막을 쳐 둔 상태였다.

  늦은 밤의 데이트였어도 둘은 짜릿한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반은 조느라 제대로 감상하진 못했어도 심야영화를 본 후 시원한 봄밤의 바람을 느끼며 강변을 거닐었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데이트를 마치고 영태는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그 때 그녀는 엄마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 십여 통을 확인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녀는 영태와 작별키스까지 나누고야 귀가했다.

  그날 아침, 쉬는 일요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수연은 웬일인지 일찍 눈이 떠졌다. 밖에서는 그녀의 엄마, 지애가 아침을 준비하는 달그락 소리가 들리고 있었고 시계를 확인하니 여덟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일어났네?”

  눈을 비비며 부스스한 모습으로 자신의 방을 나오는 수연에게 지애는 말했다.

  “뭐 화나는 일 있어? 무슨 밥 하는 소리가 잠을 다 깨워.”

  수연은 엄마에게 말했다.

  “밥이나 먹어!”

  지애는 말했다. 툴툴거리는 딸 앞에 방금 지은 밥을 한 그릇 툭 내려놓으며 그녀는 식탁에 마주 앉았다.

  “엄마, 오늘 집에 있을 거야? 나 오늘은 잠만 잘 건데.”

  수연이 말했다.

  “그건, 네 맘대로 하고....... 후....... 밥부터 먹자.”

  그녀는 수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무슨 급한 일 있어? 밥 먹고 어디 가?”

  수연은 엄마를 쳐다보며 물었다. 지애는 식사가 끝나고 나서 몇 시간 전 집 앞에서 목격했던 수연의 행동에 대해 물을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었지만 막상 수연의 태연한 행동과 말투를 보고 끝내 이야기를 꺼내고야 말았다.

  “남자 친구 있었니?”

  지애가 물었다. 갑자기 꺼낸 엄마의 질문에 수연은 국을 마시다 사례가 걸렸다.

  “켁켁켁....... 윽....... 응? 큭큭.......”

  “남자 친구냐고. 새벽에 집 앞에서 키스하던 사람.”

  지애는 여전히 수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켁켁....... 어떻게....... 어떻게 봤어?”

  옆에 있던 물병을 잡고 통째로 마시더니 수연이 되물었다.

  “어떻게 보긴....... 눈 뜨고 봤지.”

  그녀는 잠시 멈추었던 식사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딸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건 반길만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없더라도 늘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엄마에게 꼭 이야기 해 주는 딸이었기에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이 들었던 것 사실이었다. 그래서 먼저 묻기를 망설였다. 지애는 알고자 하는 걸 인내하고 기다리는 성격이 못 되었다.

  새벽에 잠이 깬 지애가 수연의 부재를 확인하고 전화를 했으나 수연은 받지 않았다. 지애는 불안한 마음에 그 때부터 집 앞에서 수연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침식사를 다 할 때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남자 친구 아니야?”

  지애가 물었다.

  “....... 뭐....... 뭘 봤는데?”

  수연은 말을 더듬었다.

  “뭐야? 남자 친구 아니야? 왜 대답을 못 해, 얘가?”

 지애는 손에 쥐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씹던 음식을 물을 마셔 급히 넘기고는 다시 물었다.

  “맞아....... 남자 친구....... 맞다고........”

  수연이 비로소 대답했다.

  “근데 왜 대답이 더뎌? 뭐 문제 있는 사람이야? 나이는 좀 있어 보이던데.”

 지애는 다시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연은 여태껏 엄마에게 한 번도 거짓말을 해 본적이 없었다. 뭔가를 속이고 둘러댈 만큼 소심한 성격도 아니었고 판단과 실행을 하는데 늘 흔들리지도 주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녀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왜 이혼남이라도 되니?”

  지애는 질문을 이어갔다.

  “...............”

  수연은 말없이 고개만 좌우로 저었다. 지애는 더 이상 묻기가 겁이 났다. 시선을 떨구고 있던 수연이 다시 고개를 들어 지애의 표정을 한 번 확인하고는 입을 뗐다.

  “결혼....... 했어....... 그 사람.”

  수연이 말했다. 수연의 대답에 지애는 조금 전까지 콩닥거렸던 심장이 툭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고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엄마의 표정을 읽은 수연이 다시 말을 꺼냈다.

  “어....... 근데, 좀....... 특별한 상황이야.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수연이 말했다.

  “엄마가 생각하는 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할 것 같은데? 특별한 상황? 넌 그 상황 엄마한테 설명할 수 있겠어? 엄마가 그걸 들을 수 있겠니? 엄마는....... 널, 누구보다 존중하는데 후....... 그래도 그건 아니지. 흠........ 내일부터 아르바이트 가지 않는 게 좋겠다. 일단, 그렇게 해!”

  이렇게 말하는 지애의 입가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먹다 만 밥그릇을 치우는 그녀의 손도 역시 그랬다. 그 모습을 보는 수연의 눈동자도 그랬다. 그녀의 심장도.

  적어도 수연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는 엄마의 지시나 명령에 의해 행동해 본 적이 없었다. 지애는 그 전까지 웬만하면 딸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 했다. 그 시간동안 그녀는 말과 지시가 아닌, 행동으로써 늘 딸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노력했다. 유독 영악했던 수연은 다행히도 지애의 의도대로 스스로를 잘 다지며 성장해 왔고 성인이 된 후 그 믿음이 서로에게 굳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두 모녀는 서로 그 무엇도 자신들의 믿음을 깨뜨릴 순 없을 거라고 굳게 믿어 왔다.

 

  늘 그렇듯, 인생에는 그런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있다. 무한대의 내 머릿속을 최대한 탐험하며 생각해 놓은 모든 가능성을 나를 둘러싼 사방에 펼쳐 놓아도, 또한 그것이 든든한 에어백이 되어 줄 거라 믿고 조심을 해도, 불쑥 내 영역을 침범하는 손님들. 그 어떤 손님이든 예측하려 해도 불가능 한 게, 결국은 내 밖의 영역이기 때문에 무한한 우주 같았던 내 자신도 부질없어지는 그런 순간이 우리에겐 꼭 있다.

  모두 아는 것이지만, 우린 때론 모른다. 아는데 모르는 것. 그 심술궂은 손님들로 인해 잘 정돈해 놓았던 삶이 엉망이 되곤 한다. 산다는 건, 정리와 정돈이 아니었다는 걸 이 때 깨닫게 된다. 산다는 건, 나의 ‘삶의 순간’이 잠시 엉망이 되었을 때 우린 비로소 ‘삶’이란 걸 조금 깨우치고 ‘일’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과정일 뿐이다. 죽더라고 끝나지 않는 깨달음의 과정일 뿐이다.

 

  수연은 아무 변명하지 않았다. 엄마의 낯선 모습에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딱히 변명할 만한 여지도 그녀에겐 없었다. 그 날 하루는 종일 멍해 있었다. 걱정이 되지도, 머릿속이 복잡하지도 않았고 오직 육체적 피로에만 집중이 되었다. 오후 내내 밀린 잠을 자고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눈을 뜬 그녀는 휴대폰에 남아있는 부재중 전화 두 통과 문자 하나를 확인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전화 줘.]

 영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녀는 곧 거실로 나갔다. 지애는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지애는 자고 일어난 딸을 한 번 쳐다보고는 몸을 돌려 말했다.

  “강요하고 싶은 건 없어. 너 상황 파악 잘 되는 아이잖니....... 네 맘도, 내 맘도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테고........ 얼마가 걸리든 간에 상황을 악화시키지만 마라. 단, 지금 당장은 엄말 위해서라도 일은 일단 쉬렴. 그러면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엄마한테 할 말이 있으면 그 이후에 해. 기다려 줄 테니까.”

  차분히 이야기하는 지애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듯 보였고 그것이 수연에게도 느껴졌기 때문에 엄마의 말이 더욱 가시처럼 따가웠다.

  “알겠어요.......”

  수연은 차분히 대답했다. 두 사람 모두에겐 맛없는 저녁식사였다. 한 번도 그래본 적 없는, 대화 없는 식탁위로 서로에 대한 걱정스런 맘이 공기가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엄마가 아셨어요. 솔직히 얘기했어요. 저, 생각이 많아질 것 같아요. 알바 그만둬요, 저....... 제가 다시 연락 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래 줄 수 있죠?]

  수연의 메시지를 받은 영태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수많은 상황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져서 어지러웠다.

 

 

  그 날 영태는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증상을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증상이 더해졌다. 오후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전화를 받지 않는 수연이 왠지 걱정되던 참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인내심을 발휘하여 담담히 받아들이려 애썼다. 집에서 보내는 오랜만의 일요일 오후였다.

  혜정은 영태가 아침이 다 되어서야 귀가한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 역시 예감이 좋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모른 척하려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편 수연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 영태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평소 같지 않은 영태의 모습에 인내심이 바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던 혜정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무슨 일 있어?”

  미동조차 없는 영태의 반응에 그녀의 인내심이 좀 더 바닥을 향했다.

  “장보러........ 갈 건데....... 같이 가줘!”

  그녀가 큰 숨을 쉬며 말했다. 그제 서야 그는 혜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있냐고, 물었었는데....... 아까!”

  그녀의 말투에 격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이때까지도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던 영태는 자신도 모르게 “후...........” 하고 큰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

  영태는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요일인데, 왜 갑자기....... 휴........ 왜 갑자기 돌부처처럼 앉아서 넋을 빼고 있는데? 이 나쁜 새끼야!”

  영태는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혜정은 꾹꾹 누르고 있던 감정이 북받쳤다. 굵은 눈물방울이 눈에 맺혀 뺨 위로 흐르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영태는 놀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쁜 새끼! 개자식! 이 미친 새끼!!”

  입에서 나오는 말은 겨우 욕이 전부였지만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혜정은 모든 설움을 토해냈다. 영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또 한 번 머리를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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