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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변화
작성일 : 17-11-17 12:46     조회 : 244     추천 : 0     분량 : 16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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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난 네게 반하지 않았어

 

  우리는 겨울에는 버스킹을 하지 않는다. 다들 그랬겠지만 겨울은 우리에게 특히 시린 계절이다. 2회짜리 공연이었지만 연초에 계획했던 공연치고는 반응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서 우린 좀 더 큰 무대를 물색하면서 정규앨범을 준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앨범 준비는 이건이와 말자 언니가 맡았고 대관은 나와 은복이가 맡기로 했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계획이었고 처음으로 작은 무대를 벗어난다는 기대에 모두 열심이었다.

  1월의 날씨는 우릴 도와주지 않았다. 연일 계속되는 한파와 폭설에 공연할 무대를 찾는 일은 고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은복이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너무 설레발 아니야? 아니, 요즘 같은 때에 누가 공연을 해! 미친 거지!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생각을 좀 다시 해보죠? 우리?”

  은복이는 나름 눈치를 보았다.

  “그래.”

  말자 언니가 바로 대답했다. 우린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이 나도 그녀의 대답이 반가운 건 사실이었다. 스스로 조금씩 헤이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찜찜함도 있지만 말자 언니는 정규앨범 작업에 몰두하자고 다시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저....... 저기.......”

  뭔가 머뭇거리던 이건이가 입을 뗐다.

  “다음 앨범에 넣을까하고 만들어 둔 곡이 몇 개 있는데요....... 공연이 아니더라도 제가 버스킹을 해서 반응을 좀 보고 싶은데........ 누나.”

  “헐........ 지랄 똥을 싼다!”

  은복이가 궁시렁댔다.

  “그래? 혼자서?”

  말자 언니가 이건이에게 물었다.

  “네.......” 그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그건 네가 알아서 해. 그것도 계획의 일부가 될 수 있으니까. 난 작업할 녹음실 알아본다. 수복, 너네는?”

  말자 언니가 나와 은복이에게 물었다. 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녹음실, 내가 알아볼게요. 예전에 같이 연습했던 애들한테 부탁하면 될 거야.”

  은복이가 먼저 대답하자 세 사람은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어....... 저는....... 그냥 건이랑.......”

  의도한 대답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맘에 없는(혹은 맘에 두었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난, 버스킹을 해 본 적이 없다. 세 사람은 모두 말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을 뱉어 놓고는 난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이건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말이야, 건아....... 나.......”

  “훗! 귀여워!”

  이건이에게 말을 꺼내려 하자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난 내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옷 따뜻하게 입고 나와! 추울 거야. 누나한테 앰프랑 악기는 얘기해 놨고 스토브도 준비했으니까 넌 몸만 오면 돼.”

  이건이가 내게 말했다.

 

  추웠지만 다행히 날씨는 맑았다. 이건이는 깡마른 몸에 커다란 덕다운 점퍼를 무릎 아래까지 감싸고 두툼한 비니를 눌러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그는 내게 야릇한 미소를 보냈다. 희멀건 그의 얼굴이 왜 그리 예쁜지, 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난 고개만 끄덕였다. 이것저것 장비들을 체크하고 들어 옮기는 그를 보며 몇 시간 뒤 거리에 서서 연주를 하고 있을 나를 상상해 보았다. 내 모습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고 그의 모습만 상상되었다.

  홍대에서도 사람들이 가장 북적거리는 거리 중 한 곳. 평소에도 곧 잘 버스킹 공연이 있는 곳이지만 요즘엔 그렇지 않았다. 바람도 없이 무겁게 내려않은 차가운 공기는 겨우 노출된 내 양 볼의 감각을 금세 앗아갔다. 나름 단단히 무장을 했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공연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이건이는 장비를 하나씩 세팅했고 나는 그를 도왔다.

  그는 먼저 배터리에 기타 앰프와 스토브를 연결했다. 하나뿐인 스토브를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내게 담요도 건넸다.

  “다리에 얹어. 앉아 있다 보면 하체가 춥거든.”

  그가 말했다.

  “고마워.”

  난 대답했다. 추위와 긴장감에 몸이 떨렸다. 기타 조율을 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담담해 보였다. 그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자, 시작할까?”

  그는 스토브를 내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당겼다. 난 온 힘을 다해 의식을 내려놓으려 애쓰며 그가 리드하는 연주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건이도 곧 노래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천천히 나도 그의 노래에 기대기 시작했다.

  첫 곡을 마쳤을 때, 우리 앞에 서 있는 몇몇 관객들이 보였고, 두 번째, 세 번째 곡을 부를 때까지 느끼지 못한 양 볼의 감각이 네 번째 곡을 마친 후 관객들의 박수를 받고 나서야 살아났다.

 

  ‘그것 봐! 무리라고 생각했어!’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 안 했다. 난 약국에서 사온 몸살 약을 그에게 건넸다. 버스킹을 했던 다음 날부터 기침을 하더니 아침부터 그의 이마에 열이 느껴졌다.

  “뭐라고 했어, 방금? 쌤통이라고?”

  약을 받아들며 그가 말했다.

  “응?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가 말했다.

  “후후....... 네 얼굴에 다 써 있어. 걱정 마. 몸 혹사하면서까지 미련 떠는 멍청이는 아니야.” 그가 말했다. 그는 늘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곤 했다. 그의 행동들에, 갈수록 내 머릿속은 그로 채워져 가는데 그는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옆에 있으려 해도 다가가지지 않게 그가 있는 자리는 너무 넓었다.

 

 7. 안녕! 좋은 아침!

 

  “아! 오늘 거....... 그걸로 계산할까요?”

  오늘은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주말동안 잠만 잤더니 월요일 아침엔 조금 더 서두를 수 있었다.

  “어?”

  그가 뒤를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찍 이시네요?”

  그가 말했다. 난 그냥 미소로 대답했다.

  “아! 여기요!”

  그가 내게 우유를 건네주었다. 난 받아든 우유를 계산대로 가져가 샌드위치와 함께 계산을 하고 돌아섰다.

  “맛이 달라요. 아세요?”

  그가 날 보며 말했다.

  “........?”

  난 대답대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거랑, 며칠 지난 우유랑은 맛이 달라요. 훨씬 고소하고 진해요.”

  “아....... 그래요? 몰랐네요. 맨날 아무 생각 없이 마셔서....... 오늘은 맛을 느껴 볼게요. 고마워요.”

  나의 어설픈 인사에 고개를 꾸벅 하고는 우유 상자를 들고 그는 창고 쪽으로 향했다. 난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편의점을 나왔다. 난 잠시 서 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쪽 진열대에서 난 물건을 고르는 척 서성거렸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깨닫는 데에 5초정도 걸린 것 같았다. 다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저기....... 안 바쁘시면 다음 달에 저희 공연하는데 오실래요? 친구 분이랑.......”

  문을 열려는 순간 그가 뒤에서 다가오며 말했다. 나지막이 내게 얘기하는 그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난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 ‘버닝러브’?”

  쑥스럽게 웃으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네....... 아르바이트 하나 보네요....... 아, 여기 매일 오시진 않는 거 같아서....... 전 회사가 저기예요.”

  난 손가락으로 회사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네.......”

  그는 고개를 돌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그럼....... 또 뵙겠네요.”

  그리고 이번엔 하얀 이를 보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8. 우리들의 일상

 

 칼 퇴근까진 기대할 수 없지만 퇴근길 복잡함을 피할 수 있어서 나쁘진 않았다. 지하철에서도 출입문 옆 기둥을 겨우 사수할 수 있었다. 월요일치곤 괜찮았다.

  의외로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순간은 집에 들어가면서 부터이다. 옷을 벗어 던지는 그 순간부터. 소파에 턱 주저 않으면 큰 한숨이 나온다. 난 잠시 눈을 감고 피로를 풀어 보려 했다. 문득 영태가 궁금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어서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새끼....... 전활 안 받냐?”

  난 야속해 하듯 그에게 말했다.

  “어, 주차 중이었어.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그냥....... 너 어떤가 해서.”

  “미친 놈....... 뜬금없긴.......”

  괜시리 궁금했던 녀석의 목소리는 아무렇지 않게 들렸지만 왠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흠....... 바쁘냐? 아, 바쁘겠지.......”

  “새끼....... 할 일 없음 나와. 술이나 한 잔 하게!”

  “월요일에 무슨 술은....... 너, 요즘 수연씨....... 잘 만나고 있냐?”

  난 조금 망설이다가 수연씨 얘기를 꺼냈다.

  “음....... 그럼. 내가 무슨 낙으로 살겠어. 걔 아니면 숨도 못 쉬겠다....... 씨.......”

  그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녀석이 걱정되었지만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너보단 낫거든? 쓸데없이 내 걱정 같은 거 하지 말고 너나 좀 잘해....... 너 새꺄, 나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어? 누가 널 챙겨 주냐고.......?”

  녀석이 내 심경을 읽었는지 마치 형처럼 말했다.

  “칫.......”

  난 비웃었다. 그래도 그의 말에 수긍했다.

  “....... 금요일 날 보자. ‘버러’에서.”

  “버러?”

  난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버닝러브’! 새꺄. 수연이 일하는데. 가보고도 모르냐....... 어차피 주말엔 수연이 못 만나. 걔가 주말에 일하니까. 원래 평일에만 보거든.”

  “하루도 안 보면 안 된다는 거지? 아....... 이 소름끼치는 새끼!”

  난 전화를 끊고 씻기 위해 옷을 벗었다. 욕실로 들어갔고 샤워기 물을 맞을 때까지 잠시 동안 무의식 상태였다. 아직 데워지지 않은 물이 내 머리위에 차갑게 떨어지는 그 순간 깨달았다. 깜짝 놀라 수도꼭지를 왼쪽으로 재끼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맞았다. 물의 온도가 아니라, 내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 열이 점점 높아져 내 정신까지 지배하는 듯 했다. 의식 없이도 행할 수 있는 내 일상들이 마치 꿈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뿌연 김으로 가득 찬 욕실이 알몸의 나를 싣고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가고 있는 것 같았다. 월요일의 무거운 기분과 익숙한 피로가 그날은 그렇게 풀렸다.

 

  아침부터 내내 흐리고 공기도 뿌옜다. 하지만 기분이 다운되진 않았다. 2월 날씨치고는 꽤 포근했다. 금요일 잔업을 피하기 위해 주중에는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보다 아침 시작이 조금씩 늦어져서 편의점에서 그를 마주친 날은 화요일 한 번 뿐이었다. 그것도 그가 일을 마치고 트럭에 올라타는 모습만 멀리서 보았을 뿐이다. 오늘도 아침식사를 위해 편의점에 들렀지만 ‘00우유’트럭의 운전자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도 난 우유회사 직원이 가져온 오늘 자 우유를 골라 샀다. 역시 신선하고 고소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 ‘딩동’ 하고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칼 퇴근함. 회사 앞으로 간다!]

  영태의 문자였다. 녀석의 회사와 우리 회사는 차로 약 10분 거리이다. 퇴근 시간에 차가 막힐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6시 20분까지는 녀석이 도착한다. 금요일은 의무적으로 바쁜 날이지만 난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한숨을 돌린 후 손목시계를 보니 분침이 정확히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리를 마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후 야근하는 동료에게 인사했다.

  “데이트라도 있어?”

  남과장이 물었다.

  “데이트는 무슨.......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난 남과장에게 말했다. 피식 웃는 남과장의 표정이 왠지 신경 쓰였지만 난 무시하고 회사를 나섰다. 영태는 칼 같은 타이밍으로 회사 정문 앞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쯧쯧....... 불쌍한 놈!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에 겨우 나 보려고 그렇게 뛰어 나오다니.......”

  녀석의 차를 발견하고 달려가 조수석 문을 열자 녀석은 혀를 차며 내게 말했다.

  “아, 새끼. 말을 꼭....... 그래, 고맙다. 안 그래도 연희 만나던 시간이 맨날 비어서 심심했다. 그래, 큰 도움 돼!”

  안전벨트를 매며 내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여행이 효과가 있긴 있구나. 네가 네 입으로 연희 얘기가 나오고.......”

  녀석이 말했다.

  “.........?”

  난 그를 쳐다보았다. 영태의 말에 문득 몰랐던 걸 깨달았다. 그녀가 떠난 후 난 내 자신을 비롯해 누구든 그녀 얘기를 입에 올리는 것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그랬던 나를 잘 아는 영태도 내게 한 번도 그녀에 대한 질문을 한 적이 없었고 힘들어 하는 내게 위로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 때 난 회사와 부모님께만 알리고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불금은 불금인가보다. 날씨마저 포근해서였을까, 이제 막 어둠이 내린 거리에 젊은이들의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학생들과 연인들이 오가는 가운데 영태 녀석과 내가 걷고 있었다. 난 녀석을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녀석이 말했다.

  “누가 뭐래? 나, 밥 안 먹었는데.......”

  내가 말했다.

  “술이나 먹어, 새꺄........”

  그가 매몰차게 말했다.

  “아이 씨....... 이기적인 놈!”

  난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멀리서 흐릿하게 쿵쾅대는 비트가 들려왔다. 조금씩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버닝러브’ 앞에 이르렀다. 영태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묻어났다. 문을 여니 작은 홀을 어림잡아 이십 여명의 관객들이 채우고 있었고 ‘Electric President‘의 ’Monsters’가 흐르고 있었다. 무대 뒤쪽에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커다란 음악소리를 뚫고 수연씨가 나를 향해 인사하며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난 얼른 인사 하고는 영태를 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화색을 넘어 매우 평온하고 온화한 표정이었다.

  “오빠, 맥주 가지고 올게요.”

  그녀가 말하자 영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조용히 공연만 보고 갈게. 끝나면 전화해.”

  영태의 말에 그녀도 고개를 끄덕이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가 잠시 후 맥주를 가지고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늘 ‘버러’ 신곡 소개한대요. 요즘 엄청 핫한 거 아시죠? 잘 들어보세요! 곧 앨범도 나오니까. 그럼 공연 재미있게 보세요!”

  그녀는 웃으며 말하고 다시 사라졌다. 그 날 난, 수연씨를 처음으로 눈여겨 본 것 같다. 염색하지 않은 단발머리를 대충 뒤로 묶었지만 깔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누가 봐도 대학생처럼 보이는 진하지 않은 화장에 우아해 보이는 검은 색 앙고라 목폴라 티셔츠에 청바지, 목걸이와 팔찌 같은 장신구로 살짝 포인트를 준 차림새가 좋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좋은 사람이야........ 나한텐 과분하지만, 나를 정말 잘 이해해줘.”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보던 녀석이 내게 말했다.

  어느 새 관객이 조금 더 늘어 있었다. ‘Electric President’의 음악이 멈추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곧 무대가 암전되고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관객들의 환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70 퍼센트는 여성관객으로 보였다. 우리 둘은 소수에 속했지만 남자들의 환호성도 적잖이 섞여 들렸다.

  곧 무대 위 조명이 켜지고 심벌 소리와 함께 ‘버닝 러브’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의 스포트라이트가 그의 얼굴에 떨어지는 순간 관객들의 함성이 모아졌고 그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긴 앞머리는 왼쪽 눈을 거의 가린 상태였지만 야윈 얼굴의 윤곽이 조명으로 드러났다. 블랙계열의 의상에 블랙 기타, 무대는 온통 흑백이었다. 머리 위 조명이 그의 눈에 깊은 그림자를 만들고 움직이는 입술 또한 흑백의 입체감을 띄었다. 눈을 감고 있는 듯 보였으나 알 순 없었다.

  예전 그 날, 처음 들었던 곡이었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고 무대를 응시했다. 노래하고 있는 그를 응시했다. 잠시 그 날의 기분이 되살아나는 듯 했지만 나는 곧 편의점에서 마주쳤던 그를 떠올렸다. 우유를 건네며 내게 말을 걸던 그를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다시 무대 위 그에게 집중했다가를 반복했다. 갑자기 미치도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내 과거를 떠올렸었고 여행을 떠올렸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가슴 한켠이 뜨겁게 아렸었다. 그렇다면 정작 이 노래를 만든 그는, 지금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겨우 내가 알고 있는 무대 밖에서의 그의 모습은 진짜 그의 어떤 일부일까. 난 끊임없이 속으로 질문을 하며 무대 위 그를 응시했다.

  첫 곡 무대가 끝났지만 나의 질문들은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채워갔다. 바로 뒤이어 두 번째 곡이 시작되었고 관객들의 함성이 좀 더 커졌다. 두 번째 곡은 빠른 템포의 락 장르였다. 그가 격렬하게 기타를 연주했다. 사람들은 그 리듬에 맞춰 손을 뻗어 호응했고 내 머리는 여전히 복잡했다. 흑백의 무대가 음악의 색깔과 어우러졌다.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 나의 질문들은 걷잡을 수 없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고 그 모두를 집어 삼키는 듯한 그의 목소리와 그의 몸짓이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난 공연이 끝나고 난 후의 내 자신이 걱정되었다.

  ‘버닝 러브’의 비트와 멜로디,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이 작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뇌리에 박힌 그 감성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영태는 곱창을 구우며 내내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늦은 저녁식사를 할 겸 단골 대포 집에서 곱창구이에 소주 한잔 기울이고 있지만 녀석의 잔은 아직 한 번도 비워지지 않았다. 이런 친구 녀석과 함께 있는 것이 힘겹게 느껴질 법도 하나 난 상관하지 않았다. 덕분에 소주 한 병을 혼자 다 마셔버렸다.

  “괜찮냐?”

  지나가는 대포집 이모를 부르려는 나를 제지하며 그가 물었다.

  “괜찮겠냐?........ 이모! 이거 하나 더요!”

  빈 소주병을 집어 들고 굳이 지나가려는 이모를 불러 세워 한 병 더 주문했다.

  “나도 데려다 줘!”

  난 그에게 말했다.

  “아이........ 이따가 같이 마셔! 기껏 공연 보여줬더니 혼자서 마시고....... 뭐야?”

  영태가 내게 말했다. 그 때 이모가 소주를 가져다주었고 영태는 그걸 받아들고 내 잔을 채웠다. 그리고 녀석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기울이던 술병을 얼른 내려놓고는 전화를 받았다.

  “끝났어?....... 어....... 아....... 그래? 오늘 성공했나보네....... 그럼, 집에 들어가서 전화해. 나 안자니까 늦더라고 꼭....... 그래.......”

  오늘 공연 때문에 손님이 많았던 데다가 공연 뒤풀이까지 해야 해서 늦게 마칠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라는 수연씨의 말을 녀석은 내게 전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 단숨에 한 잔을 넘기고는 내게 말했다.

  “너네 집으로 가자. 가서 제대로 먹자!”

  그는 곱창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난 소주 한 병을 다 마셨지만 그리 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거나 다 먹고 가던지....... 넌, 인마! 집엔 안 가냐? 오늘 금요일이야. 집에나 가. 자식아.”

  내가 말했다. 하지만 영태는 내 말을 들은 척 하지 않고 계산서를 집어 들고 일어났다. 난 먹다가 급히 옷을 집어 들었다.

  “야! 아....... 이 새끼.......”

  그를 따라 일어서니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졌는데 밖으로 나가 찬바람을 맞으니 개운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열시 반을 넘고 있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사 온 캔 맥주를 꺼내어 녀석에게 건네고 우린 나란히 소파에 드러눕듯 앉았다. 시계를 확인한 후 난 영태에게 다시 물었다.

  “원래 이러냐?....... 혜정씨....... 너 안 기다려?”

  “자식.......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 봐봐. 전화가 오나, 안 오나.”

  영태가 말했다. ‘무슨 일이지?’ 하는 걱정보다 이렇게 말하는 녀석이 난 왜 외로워 보였을까.

  “궁금하고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후....... 나도 몰라. 정말이야. 너도 알잖아....... 난 내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도 모르겠어. 지금 생각하면 너무 바보 같았어. 아니, 이기적이었지. 혜정이한테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혜정인 나를 용서하면 안 되잖아. 죄책감 때문에 미치겠는데....... 수연이 아니면 숨을 못 쉬겠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내가 원망스러워 죽겠다, 나도!”

  맥주 한 캔을 원샷 하듯 들이키고 난 후 그는 말을 꺼냈다. 녀석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난 맥주를 하나 더 꺼내어 그에게 주고는 내 것을 한 모금 마셨다.

 “그냥....... 잘 살고 싶은 마음밖엔 없었는데....... 엄마랑 동생도....... 근데 엄마랑 동생을 오히려 힘들게 하고 있는 것 같아.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내가 한심해 보이지?”

  그가 말했다.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기에 무어라 말해 주기가 조심스러웠다.

  “너도 어쩔 수 없었잖아. 지금도 그런 거고....... 넌 항상 최선을 다 했어.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난 말했다. 녀석은 한숨을 지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한 손으로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영태는 고2 2학기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하는 대신에 음료수를 만드는 공장에서 새벽까지 일을 했고 몇 시간 자지 못하고 등교하기를 반복하는 생활을 했었다. 공부가 뒤쳐질까, 쉬는 날에도 늘 공부하는데 시간을 보내느라 친한 친구들도 없었다. 녀석의 성격이 180도 바뀌었던 게 그 때부터였을 거다.

  난 어쩌다 녀석이 주말에 쉬게 되면 우리 집에 불러서 함께 공부해 주는 그런 친구였다. 공을 차거나 영화를 보는 일, 친구들과 라면 끓여 먹으며 여자얘기에 열을 올리는 일도 그에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고 한 곳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연씨를 만나면서 참 오랜만에 보게 되는 녀석의 표정과 말투, 행동들이 내게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정말 오랜만에 내 집에서 널브러져 맥주를 마시며 내게 조용히 얘기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에 그 때 그 푸르렀던 청년의 쓸쓸한 얼굴이 겹쳐졌다.

  우리는 대화를 그리 많이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모두 열 두 개의 캔 맥주를 마셨고 그 날, 무척이나 외로웠던 것 같았다.

 

 9. 좋은 아침이에요.

 

  아직은 춥지만 해가 제법 길어져 출근시간이 그리 을씨년스럽지는 않았다. 겨울의 어두운 아침은 늘 그랬다. 하루의 출발을 어둠에서 시작하면 내가 마치 몽유병 환자라도 된 느낌이 들곤 했다. 몸은 깨어 있으나 정신이 아직 깨지 않은 상태로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것 같았다. 오후가 돼서야 정신이 들고나면 꽤 불쾌하게 느껴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밝은 아침은 내게 긍정의 에너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난 회사 앞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고 ‘00우유’ 트럭도 같은 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난 발길을 재촉하여 그가 차에서 내리는 타이밍에 맞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네요!”

  난 반가웠다.

  “안녕하세요....... 잠깐만요!”

  그는 아침 같은 미소로 내 인사에 답하고 냉장고에서 우유 박스들을 겹쳐 꺼냈다. 난 얼른 편의점 출입문을 열어 그가 박스를 옮기는 일을 도왔다.

  “고맙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는 곧 박스를 내려놓고 우유 하나를 꺼내어 내게 주었다.

  “오늘은 감사의 표시에요!”

  그가 말했다. 난 어리둥절 우유를 받았다.

  “공연, 오셨었죠? 친구 분이랑....... 와주셔서 감사해요.” 하며 수줍게 그가 웃었다.

  “아, 네....... 잘 먹을게요....... 아, 신곡 정말 좋았어요!”

  내가 말했다. 그는 아까보다 좀 더 수줍게 웃었다.

  “어....... 앨범은 나온 거예요? 꼭 사서 듣고 싶은데.......”

  내가 말했다.

  “네, 이틀 전에....... 첫 정규라 많이 찍진 않았어요....... 제가 다음에 하나 드릴게요. 그럼.......”

  그는 목 인사를 하고는 우유 박스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저 분 우유, 제가 드린 거니까 계산 안 하셔도 돼요.”

  그는 카운터 직원에게 얘기한 후 창고로 향했다. 난 그가 준 우유를 들고 샌드위치만을 계산 한 후 편의점을 나왔다.

 

 10. 봄바람이 너무 차가워

 

  봄바람이 벌써 부는 것 같았다. 오전 11시를 넘겨서야 눈을 떴다. 햇살 때문에 창문을 열었더니 내 방보다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이 따뜻한 기운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늘 그랬던 것처럼 차가워야 할 공기가 이젠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러면 안 되는 일이 그렇게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밤새 시달렸던 꿈이 아직 덜 깬 것이리라 여겨 버렸다.

  늦은 오전이어서, 늘 하루의 시작이었던 이건이에게 전화하는 일을 오늘은 하지 못했다. 한겨울 찬 공기가 사라진 며칠 전부터 그랬다. 난 한심하게도 오늘도 이렇게 날씨 탓만 하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같은 마음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버닝러브’에 합류한 후 이건이는, 첫 인상과는 달리 붙임성 있게 팀에 적응했고 스스로 편해지려고, 또 우리를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다. 그 모습이 난 좋았다. 반면 혼자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쓸쓸한 느낌이 그에 대한 나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에게 먼저 좋다고 말할 때도 난 망설임이 없었다. 그에게로 향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또렷했기 때문에. 난 그렇게 너무 쉽게 시작했었나 보다. 그 때 그 마음이 다 인줄 알았는데 나조차 몰랐던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멀리서 바라보았을 땐 이미 확신이 들었고 그렇게 다가갔지만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허상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대로 있었을 뿐, 다가간 건 나였다. 이제 와서 우주처럼 커져버린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러웠다. 뺨을 스치는 이 봄바람이 원망스러웠다.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앨범 작업도 마무리했다는 안도감에 난 느린 오전을 집에서 보냈다. 오후 2시가 다 되어서야 ‘버닝 러브’로 향했다. 가게엔 아무도 없었다. 말자 언니의 작업실도 비어 있었다. 말자 언니와 은복이는 그럴 수 있지만 이건이가 없는 것은 이상했다. 잠시 오늘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잡념에 사로잡힐 뻔 했다. 난 곧 정신을 가다듬고 건반을 세팅했다.

  얼마 전 써 놓은 가사에 곡을 입히는 작업 중이다. 이건이에게만 보여 주었던 가사인데 이번엔 꼭 좋은 곡으로 탄생시켜 앨범에 싣고 싶었다.

  문 밖에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어 건반 연주를 멈추어 보았다. 말자 언니와 은복이의 목소리 뒤에 이건이의 웃음소리도 섞여 들려왔다. 곧 세 사람은 작업실로 들어왔다.

  “아이씨....... 깜짝이야!”

  앞장서 들어온 은복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왔네?” 라고 말하는 말자 언니마저도 놀란 눈치였다. 반면 이건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게 손을 흔들었다.

  “셋이 어디 다녀와요?”

  내가 물었다.

  “아니. 요 앞에서 만났어. 난 꽉네 다녀오는 거고.......”

  말자 언니가 침착하게 말했다.

  “안 나올 것처럼 말하더니....... 왜 나왔어?”

  은복이가 곧 평정을 찾고 내게 물었다.

  “그냥....... 날씨가 좋잖아.......”

  내가 말했다.

  “네 얼굴은 구린데? 왜, 오늘 무슨 일 있어?........ 그러고 보니 너 요즘 좀 그래.”

  “내가 뭘!”

  은복이의 말에 왜 그런지 짜증이 나서 쏘아 붙였다. 나의 신경질적인 반응에 세 사람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난 세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창피해서 어설프게 표정을 풀고 밖으로 나왔다. 출입문을 나와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반쯤 올라왔을 때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은수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이건이가 아닌, 말자 언니였다.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말자 언니는 곧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미안해요....... 아, 근데 진짜 별 일 없어요. 그냥 피곤이 안 풀려서....... 작업도 잘 안 풀리고.......”

  내가 말했다.

  “안 풀리면, 쉬어. 안 풀리는 걸 붙잡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원래 뭐든 맘대로 되지 않아....... 내 맘도 맘대로 안 되는데 남의 맘이 맘대로 되겠니....... 몰랐던 것을 아는 일은 엄청난 일이야.......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안 풀리면, 그냥 좀 쉬라고.”

  말자 언니는 내게 말했다. 언니의 얘기를 듣고 난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되는 것도 같았다. 그 상태로 난 완전히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초봄의 오후 햇살이 무척이나 맑아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고 오전에 맞았던 것 보다 좀 더 데워진 공기가 나를 감쌌다. 젠장, 시원한 느낌의 옅은 바람마저 날 따라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었는데 우연히 고개를 들었더니 골목 옆 담장 아래 가로수로 서 있는 산수유나무에 노랗게 꽃이 피고 있었다.

  ‘망할!’

  완벽한 초봄의 오후, 이 사랑스러운 것들이 나를 울게 했다. 난 그렇게 이 날의 날씨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봄의 풍경을 망치고 있었다.

 

  “곡 좋더라. 늦더라도 완성되면 꼭 먼저 들려줘!”

  이건이가 내가 녹음해 놓은 곡의 초반부를 들어본 모양이었다.

  “휴....... 언제 끝날지 몰라. 너무 기대하지 마.”

  내가 말했다.

  그를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대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았다. 사실 예전처럼 그렇게 그를 대해도 될지 잘 모르겠다. 내 마음은 이미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고 그의 맘은 나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말이다. 말자 언니의 말이 가시가 되어 날 쑤셔댔지만 날 누구보다 잘 아는 언니가 이유 없이 뱉은 얘기는 아닐 것이다. 난 여유를 되찾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고 일분일초도 쉴 틈 없이 그에게 묻는 상상을 하지만 말자 언니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온전히 나의 몫이니까 내가 그러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요즘....... 무슨 일 있어? 곡 작업 말고.......”

  이건이가 내게 물었다. 난 사실 놀랬다. 그가 이런 날 신경 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한 편으로는 너무 때늦은 물음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

  난 대답대신 그를 살며시 바라보았다. 그는 급히 내 눈을 피했다. 그가 모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저 나만의 느낌이라고 하기엔 그의 물음이, 내 시선을 피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게 정말 궁금하니?’, ‘내가 무슨 대답을 해주길 바라니?’, ‘그래, 난 무슨 일이 있는데, 너는 아무 일 없는 거야?’, ‘너, 처음부터 그랬던 거니?’.......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 말 않고 있기가 굳이 민망해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말이 “아니.” 한 마디였다.

  “그래.......?”

  씁쓸한 듯 나지막이 대답하는 그의 얼굴이 어두웠다. 나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러고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간적으로 조금 여유로워졌을 뿐,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니까. 여전히 그는 내 일을 도와주었고 함께 밥도 먹어주고, 밤늦게 귀가 할 땐 집에 바래다주기도 했으며, 밴드 홍보작업이나 곡 작업에도 여전히 열심이었다. 그런 그를 그냥 그대로 지켜봐야 하는 것은 마치 나의 의무처럼 되어버렸고 난 그러려고 애썼지만 이젠 그 시간마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같은 방향으로 뻗어가고 있는 두 평행선처럼 어리석고 답답하게 말이다.

 

 11. 선물

 

  오늘도 어김없이 난 편의점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편의점 앞에 세워져 있는 ‘00우유’ 트럭을 향하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가 멀리서도 보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내 발길이 트럭까지 다가가기도 전에 그가 운전석에서 내리면서 내게 먼저 인사했다. 난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그는 곧 차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CD였다.

  “이거.......”

  그가 정말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난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연 때 못 들어보셨던 것도 많을 거예요. 평가해 주셔도 돼요.”

  그가 말했다.

  “아....... 고마워요....... 직접 사고 싶었는데.......”

  난 미안해하듯 말했다.

  “제가 드린다고 했잖아요. ‘11월’이라는 곡이 타이틀이에요. 제가 만든 거고....... ‘내 방’이라는 곡도 더블 타이틀인데, 가사를 잘 들어보세요. 저희 리더 누나랑 베이스 친구가 만든 거예요! 물론 다 좋지만 취향이 있으실 테니까.”

  손가락으로 리스트를 짚어가며 짧은 소개를 하는 그는 수줍은 듯 얘기했다. 그래도 말투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난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굳이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출퇴근 할 때마다 들을게요.”

  내가 말했다.

  “그럼....... 출근하세요. 훗, 저는 벌써 일이 끝났거든요. 가 볼게요!” 하며 그는 차에 올랐다. 난 그에게 뭔가 말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아! 음....... 고마워서 그러는데, 언제든 보답하고 싶어요.” 난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어 그에게 주며 말했다. 차에 오르려던 그는 내 명함을 받아들고는 말했다.

  “성함도 이제 알았네요. 저는 김이건이에요. 그냥 건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아....... 말 편하게 하셔도 되고요.......”

  그는 또 수줍은 표정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곧 차를 돌려 가는 그를 바라보며 그제 서야 난 웃었다. 그에게 받은 CD를 가방 안에 넣고 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샌드위치 하나와 우유 하나. 지겨울 법도 한 아침 식사를 계산하려 카운터 알바생에게 내밀었다.

  “‘00우유’ 직원이 이걸로 드리라는데요?”

  알바생은 오늘자 우유를 가지고 와 바코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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