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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버닝러브
작가 : 에이슈
작품등록일 : 2017.11.17

사랑에 관한 것. 사랑은 세상 모든 일이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랑이든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을 잘 모르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인연은 랜덤이지만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삶의 가치를 이야기 한다. 삶이 험하고 각박할수록 사랑을 더 많이 이야기하고 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상
작성일 : 17-11-17 12:44     조회 : 243     추천 : 0     분량 : 12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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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나의 구세주

 

  “재수 없다! 너! 그냥 한 번 웃어주면 어디가 덧 나냐? 복덩이인줄 알고 괜히 잘해줬어. 너 땜에 다시 쪽박 찰지도 몰라, 우리!”

  은복이의 툴툴거리는 소릴 듣고서야 이건이는 비죽 웃어 보였다.

  “그래! 이 멍충아! 그렇게 웃으라고! 휴.......... 됐다, 됐어. 앞으로 내 앞에서 웃지 마! 알겠어? 웃기만 해봐, 아주!”

  은복이가 이건이에게 말했다.

  “야, 적당히 해! 쟤가 웃기 싫어서 안 웃겠어? 이 멍충아! 멍충이는 너야, 이 미친년아. 네 잔소리 땜에 건이도 나간다고 하면 너도 딸려 쫓겨나는 줄만 알어!”

  말자언니가 은복이에게 말했다. 기타가 합류하고 나서 ‘버닝러브’는 손님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나름 보기 드문 여성밴드라는 몇몇 전문가들의 평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남자 멤버의 합류로 성황이라니.(예전부터 남자관객은 어차피 찾아보기 힘들었다.)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건이의 성실함과 천재성은 우리의 심통을 조금씩 잠재워 주었다. 다만 은복이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사실 우리는 이건이가 우리와 꾸준히 함께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기타를 구할 때마다 늘 그랬다. 여성멤버를 찾기란 하늘에 별따기였고 (멤버 구하는 일 자체도 그랬지만.......) 모집공고를 보고 찾아오는 남자들은 우리가 여자임을 확인하는 순간 되돌아 가기일쑤였다. 어쩌다 새 멤버가 계속 나오는가 싶으면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말자언니와 험한 말이 오가다가 결국엔 그만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이는 달랐다. 어렵게(?) 구했지만 쉽게(?) 합류했고 의외로 쉽게 흡수됐다. 그래도 이렇게 있어줄 줄은 몰랐다. 이렇게 잘 해줄 줄도 몰랐고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이런 존재가 되어줄 줄은 미처 몰랐다.

 

  “아....... 오늘은 피곤하다........ 원래 공연이 잘 되면 피곤하지 않은데 오늘은 왜 그러지?” 내가 말했다.

  “바보야, 네 시간을 쉬지 않고 했는데 당연히 피곤하지. 그래도 오늘이 피곤해야 내일이 개운하지 않겠어?”

  이건이가 내게 말했다. 이상하게 머리도 아프고 힘이 빠져서 그의 가슴에 살짝 기댔더니 그가 나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손이 무척 차가웠다. 조금 전까지 열정적으로 기타를 연주하던 그 손이 왜 그리 차가웠는지 깜짝 놀라 그의 가슴에서 머리를 떼어 냈다.

  “내 손이 좀 차갑지? 네 머리는 뜨겁거든. 이 곰아....... 그러니까 그냥 있어.”

  그가 말했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내 볼을 감싸고 자신의 가슴에 내 머리를 다시 가져다 댔다.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확인해 보진 못했지만 오늘 오전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이었다고 했다.

  “아....... 졸라 추워!”

  연습실의 회색 벽이 먼지 섞여 내리는 눈의 색과 같았다. 추운 느낌의 철문 옆에는 예전 초등학교 때 교실에 걸려 있던 것과 똑같은 큰 벽시계가 걸려 있고 그 시계는 오후 3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니....... 저기.......언니........ 인간적으로 제대로 된 난방기는 하나 놓아야 하지 않아요? 요즘 우리 그 정도는 되잖아.......이게....... 이게 무슨 쌍팔년도도 아니고.......!”

  연통을 연결한 방식의 등유난로 위에 물이 담긴 포트를 올려놓는 말자 언니에게 은복이는 어깨에 내린 눈을 털며 말했다.

  “꽉한테 말해....... 난 되지, 그 정도. 그래도 이 가겐 내 게 아니거든.”

  단호하게 말자 언니가 말하자, 살짝 민망해 하던 은복이는 다시 신경질적인 모드로 돌변했다.

  “뭐야! 얘넨 아직 안 왔어요? 뭐야, 진짜....... 제일 일찍 올 것처럼 젤 먼저 가더니만....... 아무튼 연애하는 것들은 도움이 안 돼! 이거 정신상태 다시 장착해야 되는 거 아녜요?”

  말자 언니는 또 다시 툭툭거리는 은복이를 한 번 힐끗 보고는 머그컵 세 개를 가져와 방금 데운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러자 꽁꽁 언 은복이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은 커피향이 차갑고 습한 연습실에 퍼졌다.

  “미친년아, 넌 네가 타 쳐 마셔. 네가 네 시도 되기 전에 올 줄 내가 알았겠니?”

  말자 언니는 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자신의 방이 있는 문 옆 계단으로 향했다.

  나는 은복이가 연습실에 들어서는 소리에 잠이 깼다. 말자 언니의 침대 위였다. 뜨끈하게 전기담요가 깔려져 있는. 무겁고 두툼한 이불이 날 덮고 있었고 이마 위엔 이미 식어버린 물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무언가 긁적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건이가 옆에서 뭔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은복이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이건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받고 웃어 보였다.

  “어?”

  그가 내 이마 위 수건을 걷어내고 자기의 손을 갖다 대었다.

  “복이 땜에 깼구나. 괜찮은 거야?”

  말자언니가 들어오며 물었다. 커피향이 방 한 가득 퍼졌다. 기분 좋은 향이었다.

  “어? 누나....... 얘 얼굴이 차가워졌어요. 정상인거예요?”

  말자 언니와 이건이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웃음이 나와 소리 내어 웃었다. 갑자기 너무 우스웠다. 난 이불 속에서 양손을 꺼내어 배를 움켜잡고 마구 웃어댔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자꾸 날 미친년처럼 웃게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어서 가게는 평소보다 바빴다. 공연 횟수도 늘리고 신생 밴드들의 무대도 올렸다. 가게도 무대도 워낙 작아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수는 한계가 있지만 내가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다른 밴드들과 콜라보도 해 보았다. 물론 크리스마스 특별 공연이어서 우리 곡들을 맘껏 홍보할 순 없었지만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다.

 

  ‘버닝 러브’의 노래는 주로 말자 언니가 만들었다. 나 또한 예전부터 끄적거리고 있는 곡들이 있긴 했지만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진 못하고 있었다. 말자 언니의 곡들은 뭐랄까, 그녀의 겉모습에서 풍기는 느낌과는 달랐다. 어릴 적 첫 선물로 받은, 오랫동안 변함없이 품에 안고 다니는 인형 같은 느낌이었다. 낡고 때론 너무 오래된 그것이 섬뜩하게도 느껴지지만 내 모든 경험을 함께 겪어온 눈물겨운 친구 같은. 아무도 몰라주었던 내 속을 알아주는 것 같은 말자 언니의 곡들이 난 좋았다.

  2년 전에 발표한 ‘내 방’이라는 곡은 내가 직접 가사를 썼다. 학창 시절,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 때문에 혼란스러워 했던 경험을 표현한 내용이었는데, 말자 언니가 그 글을 맘에 들어 했다. 임팩트도 없고 높낮이 없이 조용하지만 쉼 없이 흘러가는 그녀의 멜로디와 제법 잘 맞았다. 이건이도 이 곡을 좋아했다.

  이건이가 합류한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제 오래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이건이는 정말 천재 같았다(이것 또한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이건이가 들어 왔을 때 이미 그는 직접 만든 곡들을 수곡 가지고 있었다. 첫 만남 때 연주했던 곡도 그랬다. 우리가 놀랐던 건, 말자 언니가 지니고 있는 정서와 뭔가 통한다는 것이었다. 작은 보트를 타고 너른 강을 흐르는 것 같이 그리 잔잔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혼자만의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겪은 많은 경험들이 그의 가사 속에 녹아 있었다. 예상치 못한 감정들을 그 잔잔함 속에 때론 무서울 정도로 담담하게 표현해 냈다.

  말자 언니도 이건이도 그런 천재들이다. 적어도 내겐. 너무 부러워서 사랑스러울 만큼.

 

  감기 때문에 며칠 고생했다. 그래도 이건이와 말자 언니 덕분에 나름 나쁘지 않은 연말을 보냈다. 말자 언니와 은복이는 단 며칠이라도 휴식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건이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 조금 몸이 풀린 느낌이었다. 이건이는 바쁜 와중에 새로 만든 곡이 하나 있다고 말자 언니를 설득했다. 당연히, 연초부터 잡음이 흘러 나왔다.

  “야! 너 이젠 아주 짱 먹으려고 한다! 리더가 쉬자는데 네가 뭔데 되네, 안 되네야?”

  역시나 은복이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속과 달리 늘 투덜대기만 하는 그녀이지만(난 그 속을 잘 알고 있다) 이건이와 내가 가까워지고 나서는 조금 달라진 듯 했다. 그가 하는 말엔 유독 날을 세웠다. 그래도 그는 늘 노여움 없이 그녀를 설득하려 애썼다. 말만 가시 같지, 결국 따라 오고 마는 은복이는 조금씩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있는 듯 보였다.

  “복아, 내가 이번에 쓴 곡인데....... 들어 볼래?”

  이건이가 잔뜩 짜증난 은복이에게 말했다. 그녀는 뭔가 대꾸하려다 타이밍을 놓쳤다. 이내 그의 기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건이는 말 대신 자기의 노래로 협상을 타결했다. 우리는 1월 셋째 주에 공연을 잡았다. 홍보와 연습을 동시에 하려면 어쩌면 연말보다 더 바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조금도 게의 치 않았다. 아니, 끼니도 제 때 먹지 못하고 잠도 많이 못 자는데다 은복이의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계속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난 이 모든 것이 재미있고 신나기만 했다.

 

 5. 나의 새로운 일상

 

  한 달이나 자리를 비웠던 탓에 일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정신도 없이 밤낮도 없이 일에 몰두해야만 했다. 더구나 연말이라 접대하는 일까지 몸이 열 개, 정신이 스무 개라도 부족했다. 이 상황이 못난 나에게 신이 주는 벌인지 상인지 알 수 없었다. 상황이 일단락되고 한숨을 돌려보니 상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날 꽤나 귀찮게 했던 영태 녀석에게도 연락이 뜸해졌을 무렵이었다. 몇 달 만에 한가한 주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시간이 왜 그리 당혹스러웠는지 모르겠다. 무얼 해야 할지 몰랐던 난, 우선 영태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녀석이 저질러 놓은 일의 심각성을 이제야 다시 기억해 내기도 했고.

  “새끼....... 지구상에서 제일 바쁜 새끼.......”

  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뭐하냐? 주말이라 일은 안 할 테고....... 아!”

  내가 말했다.

  “뭘 ‘아!’야....... 인마. 나와!”

  영태가 말했다. 눈치 하난 귀신같은 놈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뭘 할까....... 이 녀석을 만나서....... 예전 같으면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아도 열일 제쳐 두고 둘이 술을 퍼 마시거나 학교 친구들을 몇 불러내어 내기 축구 하는 것이 다였는데 갑자기 주어진 시간에 뭘 할까 망설여졌다. 영태가 위기에 놓여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나는? 나는 이제 괜찮은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에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주말, 그것도 대낮에 사람들 북적대는 거리에 나와 보았다. 영태 녀석과 만나기로 한 고기 집에 들어갔다. 큰 길에는 젊은이들로 가득 차 활기가 넘쳐났고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여기저기 숯불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라 가게들마다 손님은 별로 없었고 술 궤짝을 나르거나 청소를 하고 숯불을 피우는 점주들과 간혹 한 두 팀의 손님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코를 찌르는 숯불 냄새를 맡고 나서야 난 내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 왔다.

  영태가 구석자리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난 그의 비어있는 잔을 채우며 자리에 앉았다.

  “같이 마셔!”

  내가 말했다. 녀석은 소주병을 가로채며 내 앞에 놓인 잔을 채웠다. 급히 건배를 하고 뭐라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바쁘게 젓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녀석도 배가 고팠었던 모양이었다. 우린 서로 말 없이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가브리살 2인분을 먹어 치웠다.

  “집에서 밥도 안 챙겨 먹냐?”

  내가 말했다.

  “이모! 여기 1인분 더요! ........ 너도 안 먹잖어?”

  영태가 고기를 씹으며 말했다.

  “난 집에서 잠만 자잖아. 그리고 난 혼자 살지만, 넌 인마....... 결혼하면 뭐 집에 밥도 있고 반찬도 있고, 뭐 그래야하는 거 아니냐? 둘이 같이 밥도 먹고.......”

 난 슬쩍 녀석의 눈치를 보았다. 영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비어 있던 내 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부러운 새끼......... 그나저나 인제 고기도 씹는다, 네가? 여행가기 전까지만 해도 밥도 못 쳐 먹고 잠도 못 자고....... 아주 폐인이 따로 없더니만.......”

  그 때 녀석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네에!” 하고 전화를 받는 녀석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친구랑 밥....... 어........ 그래, 끝나고 전화해. 데리러 갈게........ 괜찮아, 그냥 반주 한잔이야. 괜찮으니까 전화해!”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난 마침 녀석의 빈 잔에 술을 부으려던 참이었다.

  “야야야야.......그만, 그만!”

  녀석이 술잔을 치워 버려서 테이블에 흘려버렸다.

  “아! 새끼....... 뭐야? 진짜 갈라고? 이 새끼 미쳤네.”

  내가 말했다.

  “너....... 나 알지? 내 맘이 어떤지, 예전엔 어땠는지. 후.......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순리에 맡기려고....... 혜정이도 알아.”

  녀석이 말했다.

  “뭐? 혜정씨가 안다고?”

  난 놀라 말했다.

  “아는 것 같아. 그런 것 같아. 처음엔 눈앞이 깜깜하고 불안하고....... 그랬는데 혜정이가 눈치 챈 걸 안 다음부터는 오히려 편해지더라. 혜정이도 내색 안 하고....... 어차피 장인어른도 혜정이도....... 알잖아, 너도. 그 집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영태는 내가 따라 놓은 잔을 내 잔에 갖다 부딪치고는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영태 녀석은 고등학교 때부터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중3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여동생, 셋이서 생활을 꾸려야 했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영태의 어머니는 안 하시던 일을 하셔야 했고 그와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모두 마칠 때까지 무척 고생하셨다. 그 탓에 그의 어머니는 관절염이 심해져 일을 그만두셨다. 그리고 녀석은 대학을 포기하고 취직을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안 해본 일 없이 성실히 일만 했던 녀석은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군대를 갔고 그 동안 그의 동생이 녀석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 컴퓨터 관련 기기의 부품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지금의 아내인 혜정씨를 만났다. 그녀는 그 회사 사장의 둘째 딸이었다.

  밤낮없이 일만 하던 영태는 그 때까지도 연애 한번 해 보지 못한 순둥이였는데, 그런 그에게 혜정씨는 관심을 주기 시작했고 그 당시 그는 그녀의 맘을 눈치 챘음에도 바보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난 그런 그를 무척 나무라곤 했다. 그러고 몇 년을 그냥 보내다가 결국엔 답답한 그 녀석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먼저 영태에게 고백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비로소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일 년 정도가 흐르고 혜정씨가 결혼을 결심했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영태와의 결혼을 몹시 반대했다고 한다. 학력, 집안 배경, 박력 없는 녀석의 성격 등을 이유로 들며 두 사람을 다그치는 바람에 그들은 꽤 힘든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둘째 딸의 고집을 끝내 꺾진 못했지만 영태의 장인은 그 둘을 아직도 부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난 그저 기뻐했다. 상상도 못했던 친구의 결혼 소식이었고 어머니와 동생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던 그의 인생을 안타깝게 여겼었기 때문에.

  그는 혜정씨와 연애할 때에도 그랬다. 한 번도 여자를 만나보지 못했던 녀석이 연애를 한다고 했을 때 난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과의 시간도 양보하고 누구보다 두 사람의 연애를 응원했다. 하지만 정작 영태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친구들에게 조차 조언을 얻을 줄 모르는 녀석에게 우리는 짓궂게, 때로는 진지하게 코칭을 해주곤 했다. 결혼을 앞두었을 때는 장인인 사장의 만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심각하게 걱정하기도 했다.

  결국 영태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도 안정된 생활을 시작해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그는 승진도 하게 되었고 일에 더욱 집중하며, 여전히 난 그가 그렇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줄만 알았다. 아무래도 결혼 전보다는 연락이 뜸했으니까, 나도 그 녀석도 서로가 그렇게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다.

  내가 연희와 만나고 있을 때 녀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던 것일까. 그도 자신이 혼돈스러운 결혼생활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있는 동안, 아니 그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동안 내게 도움을 청하려 망설였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영태의 표정을 보면서 들었다.

 

  “가자!”

  내가 잔을 내려놓자, 영태가 말했다.

  “어디?”

  난 물었다.

  “수연이 일하는데. 지난번에 갔던........”

  그가 말했다.

  “어!?”

  난 왜 놀랐을까. 내가 잠시 생각을 멈추고 있는 동안 녀석은 벌떡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곧 정신이 돌아온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거기, 어땠어? 분위기 좋지? 음악도 좋고....... 대략 네 취향인 것 같아서. 원래 골목도 좀 후미지고 사람들도 뜸하고 그랬다는데 얼마 전부터 핫 해진 데야. 아, 그러고 보니....... 수연이 때문인가? 흐흐흐.”

  녀석은 약간 취한 것 같았다. 또 음흉하게 웃었다. 나도 소주를 급하게 마셔서인지 취기가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미친 놈! 운전하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그에게 난 놀라 물었다.

  “음......... 난 이제 착해질 거야. 바르게 살아야 해!”

 영태는 아이처럼 말했다. 나는 말없이 녀석을 따라 시끄러운 홍대 골목을 걸어가며 그 날의 기분을 떠올렸다. 여행을 다녀왔었고 공기는 비에 젖어 있었고 지하의 쾌쾌했던 냄새, 빗줄기 같은 조명 빛 아래 흩날리던 먼지들. 그 공기로 전해지던 기타 연주 소리. 그 연주에 얹어진 목소리가 갑자기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금 어슴푸레 해진 저녁 무렵이 되었고 나는 또다시 내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취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버닝 러브’. 다시 이곳에 왔다. 나는 아직 가시지 않은 술기운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입구부터 음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주말이기 때문인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구석에 있는 긴 테이블만 빼고는 그 좁은 공간이 사람들로 매워져 있었다. 밴드 공연도 이미 진행 중이었다. 수연씨는 바쁜지 보이지 않았다.

  “여기 공연 소문났어. 오늘은 제대로 감상하자.”

  영태가 말하며 공연티켓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수연씨 보러 온 거 아녔어?”

  내가 물었다.

  “바쁜데 방해만 돼. 얘기 안했어. 오늘은 그냥 공연 보러....... 이런 기회 없어. 그냥 조용히 즐기자.”

  영태가 말했다. 녀석의 목적이 온전히 공연에만 있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의 계획이 꽤 나쁘진 않았다. 조금 전까지 측은하게 느껴졌던 그가 멋있어 보였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섯시 삼십분을 넘기고 있었다. ‘버닝 러브’의 공연 시간은 7시. 앞 순서의 밴드 공연이 끝나고 다시 희미하게 음악이 깔렸다. 사람들은 분주해 보였다. 입구 쪽엔 관객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저녁으로 마셨던 소주의 기운이 사라졌을 때쯤, ‘버닝 러브’가 무대 세팅을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여기저기서 조금씩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곳을 또 올 거라고, 공연을 보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마치 준비했던 것처럼, 기다렸던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모두 무대 쪽으로 이동했고 영태와 나는 무대 왼쪽 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곧 암전되었고 무대를 비추는 하얀 조명과 함께 드럼 비트가 시작되었다.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규칙적이지만 툭툭 떨어지는 드럼비트에 튀어나오지 않고 얹어지는 세컨드 기타, 거기에 빗물에 젖어들 듯 보컬이 입혀졌다. 온통 까만 배경 속에 하얀 조명을 받은 보컬리스트의 얼굴은 마치 흑백 사진처럼 그 윤곽만이 드러났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의 눈도 감겼다. 잠시 후 눈을 떴을 때 문득 영태를 쳐다보았다. 그도 눈을 감고 있었다.

 

  공백을 채웠던 산더미 같은 일은 채웠다고 해서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늦은 저녁이라도 챙겨 먹을 수 있는 정도인 것은 다행이었지만 예전처럼 취미니, 운동이니, 시간을 나눌 형편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밤이 길어져 가능하면 일찍 귀가하려 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하는 것이 러시아워를 피할 수 있어 효율적이었다.

  “뚜루루 뚜뚜 따라따라라.........”

  비발디의 ‘사계’가 악마의 멜로디처럼 들렸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좀 더 자!’라고 누군가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지만 난 무겁게 날 누르고 있는 이불을 힘껏 재끼고 알람을 껐다. 출근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당긴 것이 이내 후회되는 순간이지만 밀려오는 짜증을 스스로에게 쏟아 붓고 씻고 나면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깨어나 있었다.

  집을 나서는 시간은 7시를 넘지 않게끔 했다. 집을 나섰다. 하늘은 아직 보랏빛이었고 심호흡을 하니 입김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뿜어져 나왔다. 맑고 추웠다. 그것이 꽤 괜찮았다. 전철역을 향해 걸음을 떼니 기분이 점점 맑아졌다.

  이른 아침임에도 지하철 안은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래도 역이 복잡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회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도. 전철역을 나오면 회사까지는 도보로 약 사오 분. 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회사 앞 모퉁이에 있는 편의점에 들렀다. 아침에 새로 들어온 듯 보이는 샌드위치 하나와 작은 사이즈의 우유 하나를 골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피곤에 절어 보이는 남자 직원이 바코드를 찍기 위해 우유를 집어 들었다.

  “아! 잠깐요. 이거! 이걸로 찍으세요.”

  ‘딸랑’ 하는 출입문 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오며 말했다. 그는 양손으로 우유 박스 두 개를 겹쳐 들고 있었다. 밖을 보니 ‘00우유’라고 쓰여 있는 트럭이 시동이 걸린 채 서 있었다. 우유회사 직원으로 보이는 청년은 우유 박스를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이백 미리죠? 이걸로요!”

  피곤에 쩐 편의점 직원은 아무 말 없이 그가 건네는 우유를 다시 받아들고 바코드를 찍었다. 우유회사 직원은 처음에 계산하려던 우유를 집어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공 구시 이십분........ 이건 수거합니다!” 하고 돌아서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쳤다.

  ‘아! 누구.......지? 어디서 봤지......?’ 하며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그가 나를 보고 말했다.

  “.....................?”

  난 여전히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이신가 봐요........ 맛있게 드세요.......”

  그는 엷은 미소로 말했다. 그리고 다시 우유 상자를 들고 냉장고가 있는 쪽으로 가버렸다. 난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갑자기 그에게 미안했다. 난 계속 그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내려 애쓰며 계산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왔다. 회사를 향해 약 열 걸음쯤 떼었을 때 생각났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조명 빛을 받고 서 있던, 그 얼굴의 윤곽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 드럼 비트와 기타의 멜로디도 떠올랐다.

  ‘아...............!’ 나도 모르게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탄식했다. 잠시 서서 뒤를 돌아 편의점 안을 다시 들여다보려 했지만 이미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 있었다. 할 수 없이 회사로 향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 차가운 아침 공기와 아직 완벽하게 밝아지지 않은 하늘빛이 마치 다른 세상의 것들 같았다.

  그 날도 난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하루가 왠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여느 때보다 그리 피곤하지도, 지치치도 않았고 한동안 날 괴롭혔던 잡생각들도 그리 들지 않았다. 힘들 거라고 예기했던 내 새로운 생활 패턴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뚜루루 뚜뚜 따라따라라.........”

  비발디의 ‘사계’는 여전했다. 역시 알람 멜로디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의 트라우마다. 손을 더듬거려 시계를 끄고 몸을 일으켰다. 새 생활의 둘째 날이고 화요일이다. 침대 옆 커튼을 열어 재끼고 하늘을 보았다. 아직 깜깜했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금방 눈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민망했을까..........? 그런데 거긴 왜....... 아르바이트인가?.......... 날 아나?’

  멍하니 흐린 하늘을 보다가 문득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깨닫고 커튼을 닫고 욕실로 향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시각이었다. 서대문역을 빠져 나왔을 때가 일곱 시 이십분. 난 회사 앞 모퉁이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 출입문 옆쪽으로 ‘00우유’라고 쓰여 있는 트럭이 오늘도 시동이 켜진 채로 주차되어 있었다. 트럭의 냉장고 문이 열려 있는 걸 확인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어? 안녕하세요......”

  오늘도 그 청년이 먼저 내게 인사했다.

  “아....... 네........ 아, 어젠 미안해요.”

  내가 말했다.

  “뭘요......? 아, 당연히 그러시죠....... 이거!”

  그는 들고 있던 우유 상자에서 우유 하나를 빼어 내게 건넸다.

  “방금 가져온 오늘 거예요........ 그럼.”

  내가 우유를 건네받자 그는 꾸벅 인사를 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난 닫히려는 문을 순발력 있게 잡아 열고는 말했다.

  “고마워요!”

  그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 그가 준 우유와 샌드위치를 계산하고 나오며 다시 생각했다. 내일은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지.......

 

  난 내일 아침의 상황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야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고 다음 날 아침, 망할 비발디에 맞춰 눈을 뜨지 못했다. 아침 식사도 그냥 걸러 버렸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무거운 수요일을 보냈다. 나는 망가진 컨디션을 리셋하려 애썼다. 피곤한 김에 마구잡이로 일만 했다.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려고. 나의 새로운 생활을 단 며칠 만에 망가뜨릴 순 없으니까.

  다음 날인 목요일, 비발디는 또 나를 깨웠다. 다시 순차적으로 아침 일정이 진행되었다. 아침 식사를 위해 또 다시 편의점으로 향했다. ‘00우유’트럭이 여전히 그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내리는 것을 보고 난 달려갔다. 그런데 그가 아니었다.

  ‘어? 왜...........’

  나는 하얀 입김을 또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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